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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1993] 1948년 4․3 항쟁, 봉기와 학살의 전모

by 淸風明月 2015.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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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3 항쟁, 봉기와 학살의 전모

 

 

김 창 후(제주4․3 연구소 연구원)

 

 

1. 들어가는 말

 

최근 들어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4․3항쟁에 대한 논의도 더불어 활발해지고 있다. 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당시의 경험자나 운동가들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침묵의 세월이 긴만큼 각자의 입장에 따라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양상도 아울러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4․3항쟁은 미군정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안고 있던 총체적 모순이 제주도라는 지역공간에서 집약적으로 터져 나온 사건이다. 전쟁지역이 아닌 일개의 지역공간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온 것도 세계사에 그 유래가 없으며, 40여 년 동안 그 진상이 철저히 은폐되고 외곡되어져 온 것도 그 전례를 찿기가 힘들다. 주지하다시피 4․3항쟁은 우리 조국이 분단의 질곡 속으로 숨가쁘게 치닫던 1948년 4월 3일 자주와 민족의 통일독립을 지향하며 분연히 일어섰던 민중들의 항쟁이다. 제주도의 민족운동 세력과 민중이 미군정에 온몸으로 맞서 봉기했던 것이다.

그럼 남한 인구의 1%에 불과한 변방의 섬 제주에서 민중이 거대한 미군정과 맞서 싸워야만 했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진행 과정과 결과는 어떠 했고,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이 모든 것을 다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필자가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증언들과 발굴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당시 상황을 재검토해보려고 한다. 특히 해방정국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던 당시 민중들의 열망이 과연 무엇이었고, 그 열망을 어떻게 달성하려 했으며, 민중의 열망이 소수 친일파와 단정세력들을 비호하며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했던 미군정에 의해 어떻게 좌절당하고 쓰러져 갔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2.일제하 제주도의 민족해방운동

 

옛부터 제주도는 ‘땅은 척박하고 민중은 가난한’ 변방이었다.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 그대로 민중의 처지는 말보다도 못했고, 중앙정부의 온갖 착취의 대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주민중은 어떠한 중앙정부의 착취에도 외세의 침탈에도 전통적으로 부단히 저항하여 왔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하에서도 이어졌다.일제가 식민지 경제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조사사업(1912~1918)의 결과,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주로 일본으로 살 곳을 찿아 고향땅을 등지고 흘러들어 갔다. 제주도의 상황도 타 지역과 비슷해서, 1922년 12월 15일부터 제주-오사카 간 직항로가 개설되자 많은 도민들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기록에는 1934년 오사카 거주 제주인의 수가 5만 45명(남: 29,365명, 여:20,688명)이라고 나와 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4(당시 제주도 총 세대수 47,466호, 1세대당 1.1명 출가)에 육박하는 수치였다.

이렇게 일본으로 유출된 도민들은 민족차별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불결하고 비좁은 주거공간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여성들은 방직공장, 남성들은 고무공장, 유리공장, 공사장의 일용 노동자 등으로 처절한 삶을 이어나갔다. 1930년대에 일본에 건너가서 해방될 때까지 살았던 북촌의 한 할머니는 당시의 고된 생활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부모님을 비롯하여 열댓 식구가 오사카 동성구에 자리를 잡았어. 그때 동성구 안에는 북촌사람들이 꽤 모여 살았고, 북촌사람 상대로만 하숙을 치는 분도 계셨지. 시아버지는 덕영 가라스(유리)공장에 다니고, 남편은 메리야스 짜는 공장, 시누이는 고무공장을 다녔어. 어린 시동생들은 학교를 다니고, 시어머니는 떡도 쪄서 팔고, 탁배기도 만들어서 팔고, 쉬는 사람이 없어. 열 식구가 넘는 살림을 나 혼자 살자니 너무 고됐지. 내 남편은 그때 사회주의자였는데, 당시 일본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아서 겉으로 봐도 구별이 됐어. ‘오루바꾸(올백) 머리’를 하고 다녔거든.

 

그러나 이러한 지옥 같은 생활 속에서도 이들은 피땀 흘려 번 돈을 고향으로 송금하였다. 그 액수도 1926년~1933년까지 8개년 간 총 730여만 엔이나 송금되어 도내 경제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이는 연평균 1백만 엔으로 매년 1인 당 40엔 꼴이며, 이 40엔은 미숙련노동자 2개월 분의 임금으로 한 달 평균 3.3엔을 송금한 셈이다). 또한 이들은 당시 오사카 지방에서 달아오르던 노동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을 하기도 하고, 직간접으로 노동운동을 경험하기도 하며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일정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민족해방운동과 일제의 패망

 

제주도의 반제민족해방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조천 미밋동산(현 만세동산)에서 주민 5~600 명이 모여 태극기를 동산마루에 꽂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문민정책으로 이 시기에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유림세력들은 1925년 무렵부터 상당수가 면장 등으로 급격히 개량화되어 갔다.그러자 무정부주의운동이 일제의 개량화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20년대 후반에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정부주의운동 역시 민족해방운동으로의 가능성과 일본 급진세력과의 결합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를 우려한 일제는 급진적 아나키즘운동으로 몰아 탄압함으로써 1929년 5월의 ‘우리계’ 사건으로 그 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후부터는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이 운동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운동이 주로 소년운동․인테리운동에 국한되고 있음을 비판하고,노농대중을 기반으로 한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 운동은 당시 일본 오사카에서 제주도에 보낸 문건인 「제주농민요구투쟁동맹」이라는 테제에 기초하고 있었다. 테제는 소년운동․인테리운동을 지양하고, 노농대중을 흡수하여 그들을 주체로 하는 운동을 벌일 것과, 일본에서의 귀환 노동자와 빈농을 주체로 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 어민(잠녀 포함) 등 기층민중에 기반한 운동조직을 일으켜 세울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청년 운동가들은 1930년 3월에 ‘혁우동맹’을 결성하고, 1931년 5월에는 강창보를 책임자로 하는 ‘조선공산당 제주위원회(조공 제주도야체이카)’를 결성하여 제주도 전지역의 해방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 조공 제주위의 결성과 더불어 제주인들-특히 기층민중-의 반제투쟁은 격화되기 시작했다. 1931년 4월에 중면(현재 서귀포시) 농민들은 ‘납세불납동맹’을 조직하여 세금 납부와 뽕나무 묘목 강제 배포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고, 1931년 11월 7일에는 제주시 산지축항공사장 노동자 40여 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1932년 세화리 ‘잠녀항쟁’은 당시 가장 격렬했던 반제투쟁의 하나였다.“맨살로 물에 드는 사람들이 무서울 게 있느냐” 라는 잠녀들의 넋두리처럼 잠녀사회는 다른 어느 계층보다 결속력이 높다. 이렇게 강한 결속력과 연대의식이 1932년 ‘잠녀항쟁’으로 나타났다.1932년 1월 7일, 잠녀조합원 30여 명은, “모든 물건은 입찰경매하고, 일제와 결탁한 악덕상인을 즉각 처벌할 것” 등을 요구하며 제주읍 삼도리에 위치한 어업조합 본부로 돌입해 들어갔다. 같은 날, 하도리 잠녀 약 3백 명은 세화장터에서, 이어 1월 12일에는 세화, 종달, 연평, 오조, 시흥에서 모인 잠녀 1천여 명이 세화장터에서 당시 해녀조합장을 겸임하고 있던 도사(島司: 현 도지사와 같은 위치) 일행을 둘러싸고 일대시위를 벌였다. 그후 일제의 전도적인 대검거에 항의하여 1월 24일에는 구좌읍의 잠녀 500여 명이, 26일에는 연평리(우도) 잠녀 8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잠녀항쟁에는 혁우동맹이란 비밀결사와 조공제주도야체이카가 관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야학활동이나 소비조합활동 등을 통하여 잠녀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잠녀항쟁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있었다. 항쟁 결과, 일제는 부춘화, 김옥련 등 잠녀 대표는 물론, 이들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김한정, 신재홍, 오대진, 이익우, 한원택, 채재오, 김시곤 등 수많은 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이것이 소위 ‘1932년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이다. 그후에도 혁명적농민조합건설운동 등 반제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은 줄곧 타올랐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으로 모든 운동이 지하화하고 말았다.

한편 일제는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초부터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아 관동군 등의 정예병력 약 7만을 주둔시켰다. 더불어 강제징용․징병․학병 등으로 끌려가고 남은 노약자와 여성들을 강제동원하여 온갖 군사시설을 구축했다. 나이가 어려서 징병을 면한 한 할아버지는 당시 모슬포 비행장과 주변의 군사시설을 만들기 위해 강제로 끌려가서 일했던 당시를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가 그때 열 일곱살이라. 17살부터 55살 난 노인까지 무조건 1년에 두번이나 세번씩, 석달에 한번씩은 가서 일허고 석달은 집에서 쉬엉 또 가고. 굴 팔 때 석달간은 집에도 못와. 함바집을 지어서 거기서 살았어. 합바집을 길게 지엉 집 하나에 백명 정도씩 막 담아 놔. 그런 함바집이 여러개 있었어. 거기서 비행장에 가서 일하는 사람, 굴 파레 가는 사람, 목수일허레 가는 사람, 전부 갈려서 다 보내지. 일본놈들은 전부 십장질 허고. 허리라도 펼려고 일어서면 잡아다가 무조건 막 갈겨부는거라. 죽으나 사나 곡괭이질만 해야지. 게난 그 굴이 몬딱 손으로 곡갱이질허영 파낸거라.

 

이런 식으로 일제는 징용․징병에서 제외된 노약자들을 동원하여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모슬포비행장을 확충하고, 격납고를 만들고, 전략적 가치가 있는 오름이나 해안가에 굴을 파서 무기를 비축했다. 이러한 시설들 때문에 일제가 항복을 조금만 늦게 했더라면 제주도는 미군기의 폭격에 쑥밭이 되었을 것이다. 해방을 한두 달 앞두고 한림항, 산지항 등의 폭격에 많은 인명 및 재산 손실을 가져온 것은 결국 일제의 군사시설 때문이었다.

 

3. 해방과 혼란 그리고 민중의 열망

 

해방과 더불어 찿아온 제주도의 혼란상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의 긴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중은 일제가 남겨 놓은 버거운 청산과제들을 안고 해방을 맞이했다. 혹독한 시련속에서 해방의 실질적 내용성, 즉 일제식민지 잔재를 일소하여(친일파 처단, 토지제도의 개혁 등) 자주적 독립국가를 수립하고 식민지 경제구조를 변혁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9월 8일 한국에 진주한 조선주둔 미군사령관 하지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여, 미국은 남한의 점령국이며 곧 미군정이 실시됨을 분명히 했다. 결국 우리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었기에 ‘8․15는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라고 단언하는 한 운동가의 표현대로 미군정의 실시는 그 후 해방정국에서의 혹독한 시련을 예비하고 있었다.

해방 후 제주도는 타 지역과 대체적으로 그 정치상황은 동일했다. 그러나 타 지역에서 시급했던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한 반봉건 식민지 잔재의 청산 문제보다는 인구가 급증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실업문제, 생필품 부족으로 인한 일본에서의 밀수와 그에 결탁한 모리배 문제, 곡물수집 문제 등이 주 현안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면 먼저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도 혼란으로 치닫게 되는 해방정국의 상황부터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제주도는 소작비율이 9%(1946년 기준: 자작 71%, 자작 겸 소작 20%)에 불과할 정도로 낮았다. 그러나 소작농이 전국에서 가장 적다는 이 통계가 농민들이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옛부터 제주도는 토질이 척박하여 생산성이 낮았던 관계로 자작농이라 하여도 타 지역의 소작농에 비하여 나을 것이 없었다. 따라서 제주도에서는 지주제가 타 지역과 같이 발달할 수가 없어 내부의 계급대립도 그리 심한 편이 아니었다.

둘째, 일본에 노동품을 팔러 갔던 사람들과 징용이나 징병 등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해방이 되면서 대거 유입되어 해방 직후 6만여 명이라는 인구가 늘어났다. 이러한 노동 인구의 대거 귀환과 인구 급증으로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귀환자들은 맥아더 사령부의 명령으로 귀국시 일정한 액수(1,000원) 이상의 물품이나 재산 소유가 금지되어 일본에서 힘들여 번 돈을 압수당하고 빈털털이로 귀국하였다. 이들의 귀환으로 일본에서 보내오던 송금도 끊기게 되자 제주도의 경제사정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해방되었을 때 제주도에는 일제에 의해 운영되던 주정공장, 제약회사, 양말공장, 축산물 및 수산물 가공공장, 소라나 전복의 껍데기로 단추 등을 만들던 패구공장 등 가동 공장수가 72개에 불과하여, 이들은 일자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공장 중 1946년 현재 가동률은 55%인 32개소에 불과했고, 1946년 11월 현재 실업자수는 15세 이상 인구의 15.3%인 2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와 더불어 해방정국의 혼란상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미군정 통치의 문제점에도 있었다. 미군정은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도 일제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친일파, 부일협력자들을 다시 채용하여 반민족적인 행정기구를 수립하였다. 일제하에서 도농회 주사로 부역했던 김문희를 도사(島司)로, 조선총독부 판사 및 검사였던 최원순을 제주지방법원장에 각각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순사부장 출신으로 민족해방운동가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섰던 박형규나 김창희는 1945년 말과 1946년 초에 제주도 경찰서장(당시는 전남 제8관구 경찰청 산하 제22구 경찰서)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일제말기에 제주도에 주재했던 총독부경찰은 모두 101명이었는데, 이들 중 한국사람은 51명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경찰 간부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통치는 친일파를 처단하여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 잡으리라 기대했던 많은 민중의 불만을 야기했다.

또한 미군정은 1945년 미곡에 관한 법령(일반고시 제1호)을 통하여 미곡의 자유판매제도를 도입하였다. 그것은 일제하에서 철저히 중앙통제로 일관해왔던 미곡관리체제를 충분한 검토없이 한꺼번에 자유시장체제에 노출시킨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부르스 커밍스는 “자유시장체제의 도입으로 미군정은 남한경제체제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막대한 농업잉여를 추출해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으며 그 대신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기아, 그리고 전반적인 경제적 침체현상을 유발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제주도에는 1946년에 이어 1947년에도 주식이던 보리 농사가 대흉년(1944년 맥류 생산고: 268,133석, 1946년: 맥류 생산고 83,785석)이 연속되었다. 또한 1946년 여름에는 호열자까지 발생하여 369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지 않아도 곤궁하던 농촌 살림에 흉작으로 식량난까지 겹치게 되어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칡뿌리와 해산물을 캐다가 연명하는 농민들도 다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런 농민들의 어려움은 아랑곳없이 일제시대의 ‘공출’에서 이름만 ‘성출(誠出)’로 바꿔 반강제적인 곡물수집정책을 단행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 대일교역도 불법화되고 생필품 부족 현상까지 겹치자, 도내 곳곳에서는 귀환자도 실어나르고 물품도 반입하기 위하여 20~30톤의 소형어선들이 일본으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물품반입 행위를 단속하는 경찰 중에는 적발했을 때 법적으로 처리하기 보다는 모리배와 결탁하여 제 잇속을 채우는데 급급한 이들이 많았다. 나중에는 이런 모리행각에 미군정 관리와 경찰의 고위간부, 서북청년단(이하 서청) 등 사설 우익단체들까지도 끼어들어 민중들의 대대적인 불만을 샀다. 제주대학의 교수였던 양상익의 『한라산의 메아리』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온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수많은 도민의 재산을 밀수품으로 규정하여 몰수하였으며 수십년간 피땀흘려 모은 재산을 왜놈의 갖은 방해를 무릅쓰고 실어오면 세관․경찰서 등 무수한 관청을 거쳐 나오는 동안에 벌써 손에 남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사설단체원들은 가택수색을 빙자하여 귀중품을 탈취하고 금품을 강요하며 불법구타․폭행을 끊임없이 자행해 왔다.

 

고위관리들의 모리행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47년 1월에 발생한 소위 ‘복시환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는 제주감찰청장 신우균과 제주도 미군정청의 제2인자인 군정경찰 책임자 패드릿치 대위도 관여되어 있었는데, 그 여파로 공모에 가담했던 신우균은 파면되었고 제주 미군정장관은 교체되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결성

 

제주도는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변혁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가능성을 갖고 있던 지역이었다. 일제하에서의 반제민족해방운동의 경험은 해방후 제주도의 민족운동에 풍부한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제주민중들이 일정한 사회의식을 갖추게 된 데는 도민들의 신망을 받는 풍부한 운동가들이 있었던 데 기인하고, 여러 조직운동을 했던 이들의 경험은 해방정국에서 제주도 변혁운동의 질적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되었다.

일제하에서 민족해방 투쟁을 주도하며 민중의 신망을 받았던 민족운동세력은 민중의 개혁 열기에 힘입어 1945년 9월 10일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도건준은 중앙의 방침에 따라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9월 22일 ‘제주도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 하부조직인 읍․면 인민위도 속속 결성되어, 제주도의 1읍 11개 면에 모두 인민위가 조직되었다. 도인민위 간부들은 거의 모두가 민족해방운동에 앞장 섰던 항일운동가들이었다. 그러나 각 읍․면 인민위는 소문난 친일파만 배제되었을 뿐, 웬만한 지역유지들은 모두가 참여하는 좌우연합의 준행정조직이었다.

또한 9월 말부터 그 해 말까지는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를 비롯하여, 부녀자, 교육자, 농민, 노동자, 학병 출신 등으로 구성된 건준청년동맹(위원장 문재진, 1945년 12월에는 ‘청년동맹’으로 바뀜), 부녀회, 교육자혁우동맹, 농민위원회, 노동조합, 문화협회(학병동맹이 주도) 등 각종 진보적인 대중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아래로부터 민중의 전폭적인 호응 속에 결성된 인민위는 미드(E. Grant Meade, 전남 미군정 요원)의 표현대로,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 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한림리에 거주하는 한 할머니의 증언에는 당시 인민위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에 대한 제주민중들의 기대와 신뢰감이 짙게 표현되어 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좌니 우니 하는 말들이 없었어요. 제주도에서는 대중들이 한번 틀렸다고 생각하면 금방 소문이 퍼져서 그 사람의 존재가치가 어려울 정도로 되어 버리는 지역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대중들이 옳다고 신임하게 되면 그의 사상성 여하를 떠나서 대중은 절대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죠. 제주도에서 인민위원회가 대중을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도자들이 독립투사였다는 곧 민족주의자들이라는 신뢰감 때문이었어요.

 

인민위는 사실상 1947년 3․1시위운동까지는 미군정과 별다른 대립없이 제주도 전역을 지배했다. 타지역과는 달리 제주도인민위가 이렇게 오래 지속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제하 민족해방 운동가와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마을의 유지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좌우연합적 조직으로 매우 온건했고, 민중으로부터도 신망을 얻어 장기간 미군정과 충돌하지 않아 조직을 보위하게 되었다.

둘째, 지주 대 소작농 간의 대립도 상대적으로 적었고, 귀속 재산도 적어 미군정과의 직접적인 대립이 많지 않았다. 결국 반봉건 혁명에의 요구가 타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낮아서 미군정의 직접적인 탄압을 일찍부터 받지 않았다.

셋째, 미군의 진주시기가 타 지역보다도 늦었다. 제주지역의 통치 기능을 담당할 제59군정 중대는 11월 15일에야 진주했다. 그동안 제주도인민위는 너무 힘이 강해져 있어서 미군정도 일정 기간 인민위와 공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여러 증언에서도 나타난다. 1946년 초에 구좌면 세화 지서의 주임으로 발령받았던 한 경찰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무렵에는 순경들이 주민들에게 큰소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왜정시대 군복을 입고 현지에 부임해 보니 옛날 주재소 건물에는 인민위원회 간판이 걸려 있었다. 할 수 없이 한쪽에 지서 간판을 세웠다. 한동안 같은 건물에 인민위와 지서 간판이 나란히 공존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발령 통지서를 받을 때, 당시 김창희 경찰서장이 명함에 문도배 인민위원장에게 전하라면서 소개장을 써 주었다. 내가 지서주임으로 부임하니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문위원장에게 전했으며 한동안 그와 가깝게 지냈다. 인민위 주최의 모임이 있을 때에도 지서 순경들이 참석하기도 했는데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또 대정읍에 거주하는 노인 형제(형은 일제 말기 대정읍 모슬봉에 설치된 레이다 기지에서 해안 감시대장을 했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형) 해방 당시에는 옳은 일이라는 생각에서 전부가 ‘건준’이나, ‘인민위’로 들어갔소. 이것을 정식 우리 정부라 생각했고, 합법정부라고 생각했지. 우리같이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인민위에 들여주지 않았소. 건준에는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 구장, 경방단장들은 못 들어갔소. ‘썩은 뿌리는 찍어버려야지 이런 사람들은 안된다’며…… (동생) 인민위야 전적으로 호응을 받았지. 내가 리치안대장을 했으니까, 어떤 사람이 어떻고 하는 것은 잘 아는데 모든 사람들이 호응했어……

 

이러한 민중의 호응 속에 인민위는 마을 행정 업무를 비롯하여, 치안업무 및 적산 관리업무 외에 각종 학예, 문화, 보건 등 공익사업까지 관장했다. 또한 인민위는 산하에 소비조합을 두어 공산품,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제시에 고등교육 기관으로는 농업학교 하나밖에 없던 제주도에 해방이 되자 제주제일중학원(오현중 전신)을 비롯하여 1947년 말까지 중등학교 10개교, 초등학교 44개교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도민들의 교육열에 힘입어 인민위도 자주교육 운동을 통한 사상과 신문화의 보급에 주력하게 되었다.

대정면 인민위는 대정중학원을 설립하였고, 그외 각 면․리 인민위에서도 국민학교, 강습소 혹은 야학을 개설하여 교사와 학생, 민중을 연결하는 공간이 되도록 하였다. 커밍스는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진보 성향이 높다는 전제 아래 남한 각 도의 교육 수준을 조사하였는데, 1947년 2월 현재 15세 이상의 남자로 국민학교 이상을 졸업한 사람들의 비율은 제주도가 35.7%로 전국 1위로 나타났음을 밝히고 있다.

 

미군의 진주 및 도(道)제의 실시

 

남한의 군정업무는 1945년 9월 12일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형식상으로는 전남에 미 6사단 병력이 진주하며 군정이 실시되는 10월 27일, 실제적으로는 미 6사단 20연대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에 진주한 11월 10일에야 시작되었다. 이들은 제주도에 진주하고는 일제시대의 도청 건물에 군정청을 설치하고, 군정장관에 스타우드 소령, 법무관에 존슨 대위(후임에 팻트리치 대위), 정보관에 실크 중위, 공보관에 라크우드 대위, 재산관리관에 마틴 대위(후임에 캐리 대위)를 임명하여 군정 업무를 시작하였다.

초기 미군정이 제주도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사항은 치안유지와 적산관리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7년 초반까지도 우익 조직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인민위와 일정 부분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미군정은 인민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의 통치기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미군정은 치안문제에 대해서는 인민위 산하의 치안대(혹은 보안대)와 일정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 8월 1일자로 제주도를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에서 분리하여 도제(道制)를 실시했다. 그리고 초대 도지사로 1946년 2월부터 도사를 맡아오던 박경훈을 임명하였다.

종래의 연구는 이 도제의 실시가 우익 인사들의 건의를 미군정이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듯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미군정이 민족운동세력들에 대해 공세를 취하던 시점이어서, 도제의 실시는 미군정의 다분히 계산된 정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존 메릴(현재 미국무성 정보조사국에서 근무하고 있음)은 「제주도의 반란」이란 논문에서 이 문제를 “……군정당국은 모든 일을 서울과 직접 연결하여 처리하려면 제주도(島)를 도(道)로 승격시키는 일이 편리했다. ……군정당국과 인민위 사이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가 도(道)로 승격되면서부터였다”라고 파악하고 있으며, 박명림도 「제주도 4․3 민중항쟁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제주도를 도(道)로 승격시킴으로써 (당시에 좌익민족운동 세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세에 놓였던) 도내의 물리력을 군 수준에서 도 수준에 맞게끔 법적․제도적으로 확대강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좌익 견제를 위한 명백히 정치적인 것이었다”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미군정은 도제 실시와 더불어 우익 세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한편, 제주경찰서를 제주감찰청(청장 김대봉. 그 후 1947년 3월에는 제주경찰 감찰청으로, 1948년 11월에는 제주도경찰국으로 개칭됨)으로 승격시키고, 1946년 12월 4일에는 제주감찰청 내에 제주경찰서를 제1구경찰서(서장 강동효)로, 서귀포 지서를 제2구경찰서(서장 유기병)로 승격시키고, 경찰력도 200명으로 늘려 해방 직후보다 두 배가 되게 하였다. 또한 1946년 11월 16일에는 모슬포에 향토연대인 조선경비대 제9연대(연대장 장창국 부위)를 창설하였다. 9연대는 1947년 3월 제주에서 사병 1기생 40명을 모집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여덟 차례의 모병을 통해 병력을 증원, 4․3항쟁 직전에는 1개 대대 규모인 900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미군정의 물리력 강화로 인하여 민족운동세력과 민중은 미군정과 대립하기 시작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특히 1945년 말부터 타지역에서는 미군정과 한민당 등 우익세력들과 좌익민족운동 세력들이 격렬하게 맞서게 되는 신탁통치 논쟁 문제도 제주도에서는 그리 큰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인민위는 1946년 경북지방을 중심으로 미군정과 격렬하게 맞섰던 ‘10월 인민항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6년 가을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선거’에는 참여하였다. 당시 이 선거는 ‘미군정 연장 음모’, ‘남조선 단정수립 기도’라는 이유로 중앙에서는 전면적으로 거부하였으나, 제주도에서는 구좌면 인민위원장 문도배와 조천면 인민위 문예부장 김시탁이 당선되었다. 이렇게 중앙의 방침과 배치된 결정이 내려지게 된 데 대하여 당시 대정면 인민위에서 활동했던 이운방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0월 인민항쟁 당시 제주도민은 호열자와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어서 이를 외면한 무조건적인 투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입법위원 선거는 철저하게 반대하고 거부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지. 그러나 선거에 참여한 것은 이 기회를 역이용하여 우익을 진출하지 못하게 하고 선거를 무효화함과 동시에 우리의 힘을 과시하는 일대 데몬스트레이션을 전개하기 위한거야.

 

이러한 사실은 제주도의 인민위가 상대적으로 온건하면서도 대중적 지지도가 그만큼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제주도 민족운동세력들은 중앙의 민족운동세력과 일정 부분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제주도의 민족운동세력은 1947년 초까지도 미군정과는 별다른 대립을 하지 않고 조직을 보위해 나갈 수 있었다. 이는 타지역이 그 시기까지 인민위를 포함한 거의 모든 대중조직들이 파괴되거나 지하화 되어가는 사례와 견주어 볼 때 시사하는 점이 많다.

 

4. 3․1시위운동과 미군정의 대응

 

민전의 결성

 

1947년에 접어들자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는 한반도 내에 친미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한반도 문제를 UN에 이관시킴으로써 단정 수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미국의 기본방침은 자신의 국익과 관련하여 소련의 남하를 막는 것이며, 남한에 친소적 정권의 수립을 배제하는 데에 있었다. 이것은 미드의 표현대로 “한국에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길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남한 전체의 민족운동세력은 초반에 광범위한 민중적 지지를 획득했던 건준--인공체제가 붕괴되고, 통일전선체인 민전을 거쳐 1946년 12월에는 급진적인 남로당을 결성하며 힘이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제주도에서도 여러 단체들이 속속 개편․결성되었는데 1월 12일에 제주도민주청년동맹(위원장, 김택수)이, 1월 25일에는 제주도부녀동맹(위원장, 김이환)이, 2월 23일에는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의장단, 안세훈, 이일선, 현경호)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들 조직 모두가 중앙 조직 결성 거의 1년 후인 1947년 1, 2월에야 결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선 민전 결성식 상황을 보면, 민족운동세력은 도지사 박경훈의 축사를 받으며 새로이 조직을 결성하고, 소위 악질들도 반성하면 민전에 포용할 수 있다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까지도 이들 민족운동세력이 강력했다는 사실은 각 읍면의 민청 결성에 지서장이 참가하여 축사를 한 것이나 “동네 청년들은 민청 모임 등에 참석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사람들이 증언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는 제주도 민족운동세력에게 유리하게 형성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이 시점에서 새로이 조직들을 결성하고 개편한 이유일 것이다. 전국적으로 시시각각 조여오는 미군정의 탄압에 제주도 운동가들은 강력한 통일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3․1시위운동

 

2월에 접어들자 민족운동세력과 각 단체, 민중은 본격적인 3․1절 기념식을 준비해 나갔다. 2월 17일에는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원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석하여 ‘3․1투쟁기념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또 2월 24일에는 각 학교 대표자회의가 열려 3․1투쟁기념 준비위원회와 협조하여 ‘학교별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해방후 처음으로 갖는 3․1절 기념행사를 각 읍면별로 동시에 치르기로 하고 대대적인 준비를 해나갔다.

한편 미군정은 3․1절 기념행사를 앞두고, 행사는 가급적 제한하되 가두시위 행렬은 금한다는 명령과 함께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이런 가운데 미군정은 제주도에 2월 23일 충남․북 응원경찰 100명을 증파했다. 이들은 ‘작년 10월폭동 진압시 동료들이 좌익분자에 의해 죽는 것을 겪은’, 시위행렬에 대하여는 언제나 발포할 가능성이 잠재해 있던 경찰대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이들의 증파는 타지역과 달리 민족운동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제주도의 상항을 이 시점에서 완전히 뒤엎겠다는 미군정의 강력한 의지가 짙게 배어 있는 조치였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3․1절 기념행사를 앞두고 좌우파 간에, 혹은 미군정과 민족운동세력 간에 충돌 위기가 높아지면서 전국적으로 전 경찰력이 비상경계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 만큼 경찰병력이 남아 돌아가서 제주도에 응원병력을 증파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1일은 제주도의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날이며, 다음해 4․3항쟁으로 이어지는 분수령이 되는 날이었다. 제주읍에서는 단체별로, 마을별로 속속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주북교에만도 3만 명이 모였다. 이 날 각 면 기념식에도 몇천 명씩 모여, 제주도의 개벽이래 최대의 인파가 모여 기념식을 가졌다. 주요 슬로건은 “삼상회의 결정 즉시 실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3․1정신으로 통일독립 전취하자!” 등의 상대적으로 온건한 것이었다. 기념식이 끝나고나자 이들은 관덕정 광장을 향해 시위에 돌입했다. 관덕정의 제주감찰청 앞에는 응원경찰과 미군들이 포진하고 있었고(제주도에서만 미군이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시위 진압에 직접 나섰다), 그 자리에서 발포사건이 발생하였다. 발포는 시위행렬이 다 지나가고 난 후여서 시위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날의 희생자는 관덕정 광장에서의 사상자를 도립병원으로 옮기는 사람들을 병원 앞에서 다시 경찰이 발포하여 부상당한 사람까지 합하면 사망이 6명이고, 중상이 8명이었다. 이들은 검안 결과 1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등에 총을 맞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피습 소문은 당시 한림면에 살던 한 아낙네의 귀에도 들어갔다. 80세가 넘은 장씨 할머니는 그때의 억울함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 관덕정 피습상황도(그림)

 

그 소식을 들으니까 너무나 억울하대요. 시국이 변동되니 국민들에게 총을 들이대고. 이제야 사람 죽는 일이 쉽게 일어나고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거든요. 그 소식을 들으니 너무 억울해요. 그때는 우리가 일본놈한테 쫒겨다니다가 해방이 되었으니 이젠 잘 살아질 것만 같았죠. 그런데 아무 죄없는 우리 국민들에게 총을 발사한 거예요. 아-- 이제는 이렇게 무식한 미국 군인들이 와서 국민을 죽이는가 해서 그때 국민소란이 일어났어요. 이제는 이렇게 살 수 없다 해가지고 총파업이 일어난 거예요. 제주도 전체가 단체로 해서…… 이것도 일종의 혁명이지요.

 

3․10 관민 총파업

 

이 발포사건은 곧 도 전역에 걸쳐 미군정 및 경찰에 대한 항의로 이어졌다. 미군정은 3월 1일자로 야간통금을 실시하고, 3․1투쟁기념 준비위원회 간부들의 검거를 시작했다. 이에 제주민중과 민족운동세력은 ‘제주읍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삐라를 부착하여 미군정과 경찰의 만행을 폭로하며, 희생자 구호금 모집에 돌입했다. 그리고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발로 제주민중과 민족운동 세력들은 일제히 ‘3․10총파업’으로 맞섰다.

3월 10일 제주도청은 ‘제주도청 3․1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제주도 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에게 보내는 6개항의 요구조건을 결정하고 “이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제주도청 청원 1백 40여명은 사무를 중지한다”는 파업결의를 했다.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민주경찰 완전확립을 위하여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 발포 책임자 및 발포경찰을 즉시 처벌할 것

․ 경찰수뇌부는 인책사임할 것

․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지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 3․1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 일본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지양할 것

 

도청의 파업에 이어 모든 관공서는 물론 은행, 회사, 학교, 교통,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단체 직원이 파업에 들어갔고, 심지어는 마을의 구멍가게도, 경찰들까지도(나중 파업가담 및 직무태만 혐의로 66명의 경찰이 파면됨) 파업에 동참했다. 3월 11일, 강인수 제주도 감찰청장은 사태가 악화되어가자 도립병원 앞의 발포는 ‘유감’이라고 하여 일부의 발포만을 사과했다. 3월 8일 하지사령부의 카스티어 대령을 반장으로 한 주조선미군정(USAMGIK)과 주조선미육군사령부(USAFIK)의 합동조사반이 파견되어 3․1발포사건의 현장을 검증하고, 3․1기념행사를 주도한 집행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총파업이 단행되자 그 원인과 배경을 조사했다. 그러나 이 조사반은 일체의 공식적인 진상발표는 않고, 13일 귀임했다. 이어 3월 14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내려와서 진상을 조사함과 동시에 3월 18일까지 무차별로 총파업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권력의 횡포에 항의하여 도지사 박경훈은 3월 14일에 사표를 제출했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을 깨뜨리기 위하여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했다. 그리고 3월 15일부터 파업주모자 검거라는 명목으로 민전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여 4월 10일까지 500명을 검속했다. 검속된 자들은 미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 즉 무허가 집회 및 무허가 시위 참여 혐의로 5월 말까지 재판이 진행되어 328명이 실형 언도를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거나, 기소유예 등으로 풀려났다. 조병옥은 총파업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3월 19일에는 소위 진상 발표를 겸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 내용에는 몇 가지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다.

‘첫째, 관덕정의 발포는 정당방위이고, 도립병원 앞의 발포는 발포경찰의 ‘무사려한’ 행위로 인정되며 둘째, 이 일련의 사건은 남조선에 있는 몇 개의 정치․사회 단체들이 정치이념을 공통히 하는 북조선 세력과 통모제휴하여 미군정을 전복하고 사회적 혼란을 유치하여 자기 세력을 부식하려는 전체적 운동의 부분적 지방적 현상으로 당도에 노출한 것이다’는 요지의 발표였다. 이어 ‘이런 폭동을 일으킬 우려는 2월 초순이래의 정보에 의하여 확인되었고, 경무당국은 2월 하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응원대를 파견한 일이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일련의 사건을 보는 미군정과 조병옥의 경사된 시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시위를 관람하던 군중들의 등을 쏜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항변은 차치하고, 북조선 세력과의 통모로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 ‘담화문’은 미군정과 단정세력이 갖고 있던 선입관, 즉 ‘제주도는 빨갱이 섬’, ‘작은 모스크바’ 식의 경사된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하지사령부 합동조사반은 3․1시위운동 때의 발포사건 및 3․10총파업에 대하여 모든 진상을 조사했음에도 이들은 일체의 공식적인 진상 발표를 하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좌익정당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발포로 반감이 고조된 도민 감정을 남노당에서 대중선동하여 증폭시키고 있다’는 식의 언급만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판단해보건대 우리는 3․1시위운동을 기점으로 한 미군정의 제주 상황에 대한 장악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제주민중과 민족운동세력과의 결합을 저지하면서 이 상황을 좌․우 대립으로 몰고가려 했던 당시 미군정의 고도의 전략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군정의 의도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인다. 3․1시위운동을 전후하여 총 421명의 응원경찰을 증파하여 이들이 완전히 철수하는 5월 초순경까지 민족운동세력은 체포되거나 검거를 피해 도피하는 등,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3․1시위운동이 마무리되어가자 도군정장관을 비롯한 고위관리들을 극우파 인물들로 교채하기 시작했다. 3월 31일에는 제주경찰감찰청장에 김영배를 임명하고, 4월 2일에는 도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을 강성 인물로 알려진 베로스 중령으로 교체했으며, 또한 4월 10일자로 강경진압에 불만을 품고 사표를 낸 박경훈 도지사의 후임에 극우보수파인 유해진을 임명하는 등 극우 진영의 총강화로 이어진다. 특히 유해진은 부임하면서 서북청년단원(이하 서청) 7명을 개인 경호원으로 대동하고 들어왔다. 이는 그 후 제주도에 서청이 계속 투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이 온갖 횡포로 민중의 불만이 크게 증폭되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계속되는 미군정의 탄압

 

미군정은 고위관료들을 극우파 인물들로 교체하는 한편, 관공리와 교육계에 대한 숙청 작업에 착수하여 총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을 파직시켰다. 또한 제주도에 주둔했던 응원경찰이 철수하게 되자 새로이 타지역에서 제주도에 근무할 경찰 245명(이들은 주로 철도경찰 출신이었음)을 모집하여 제주도에 배치시켰다. 이로써 4월 말경에는 제주도의 경찰병력은 5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일제말기의 100여 명에 비하면 다섯 배나 늘어난 숫자였다.

이 무렵 미군정은 서청을 제주도에 증파하기 시작했다. 서청은 해방 후 월남한 이북출신 청년들이 1946년 11월 30일에 결성한 단체로 빨갱이사냥을 명분으로 무차별 테러를 자행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의 활동상은 서북청년단의 제2대 단장이었던 문봉제 자신의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피비린내 나는 살상, 바로 그 연속이 서청의 역사였다.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이고 알 리 없는 서청대원들로서는 국민회 지부에서 찍은 집이 바로 습격의 대상이었다. 늘 품고 다니는 다듬이방망이와 몽둥이로 사람은 물론 세간살이까지 무조건 박살냈다. 심한 경우에는 그의 식구들에게도 무차별 몽둥이 세래를 가했다.

 

이들은 종종 군정경찰과 사전에 모의하고 테러를 했으며 미군정과 이승만, 그리고 조병옥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보수가 없었다. 미군정은 이들에게 1947년 하반기부터 법에도 없는 경찰보조기능을 부여하면서도 “생활은 현지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는 바람에 이들의 민폐는 클 수밖에 없었다. 서청 제주도지부(위원장 장동춘, 부위원장 박병준)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47년 11월 2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들은 그전에 많이 들어와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고 있었다. 공산당을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백색테러가 난무하여 도민들에게 이들은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서청! 하면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는” 유행어가 퍼지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존 메릴은 「제주도의 반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1시위운동 이후) 이런 갑작스러운 외부세력의 증강으로 이미 침체에 빠져 있던 제주의 경제는 새로 온 경찰과 우익청년단을 부양하게 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경찰의 봉급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뇌물을 받아 이를 보충해야 했다. 서청단원들은 정규봉급이 아예 없었으며 완전히 빈손으로 살아가야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공공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제주도의 상황은 치안이 악화될수록 이 두 그룹에게 뇌물수수, 공갈, 보호 명목의 갈취와 강도단과 유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해 주었다. 테러와 보복테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경찰과 우익들은 반항하는 섬주민들에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잔인하게 대했다.” 이들의 이러한 만행은 4․3항쟁이 일어나게 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 할j머니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하며 증언했다.

 

순 엿장수나 하던 것들이지. ……성명 쓸 때 오얏리(李)를 두이(二)자로 쓸 정도니까. ……우리가 김녕에 있을 때도 국민학교에 주둔해 있으멍, 맨날 소 하나 말 하나 잡아당...쇠고기 삶으라, 뭐허라 시키는디. ……조금만 뭣하면 잡아다 때리고. 산목숨으로 우리가 다녔수과? 징그럽고 억울허영, 그놈들 종노릇하는 걸 생각허믄 모여 앉앙 우리끼리 막 울기도 허고. ……조금 뭐 허민 총대가리로 가락가락 박아불고. 조금 잘못허민 죽여불켄 허고……

 

미군정은 3월 중순경부터 제주도에 미군 CIC(방첩대) 사무실을 개설했다. 이들은 비밀정보원을 두어 정보를 수집하고 상황을 분석하는 한편, 직접적으로 정치상황에 관여하기도 했다. CIC는 1947년 하반기까지도 활동이 미미했던 우익청년단체를 활성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실을 「G-2보고서(1947.10.24)」에서 “……제주도에서는 최근 대동청년단이 당원확보운동과 관련, 테러에 관계해 왔다. CIC는 제주에서의 (테러행위) 중단과 모든 우익청년단체의 통합을 자신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제주에는 광복청년회(1947년 2월 4일 결성)와 독립촉성청년연맹 등 우익청년단체가 있었다. 1947년 9월에 이르자 전국적으로 모든 우익청년단체들은 ‘대동청년단’으로 통합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제주도에서도 이들 통합작업은 물론 테러활동에 CIC가 많은 관여를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어떻든 이렇게 미군정은 제주도의 정치 상황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미군정은 1947년 5월 16일 행정명령 제2호로 진보적 청년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이하 민청)을 불법단체로 지목하고 해산명령을 내렸다. 제주도민청이 그해 1월 17일 결성된 이래 각 읍면 민청이 속속 결성되어, 각종 강습회, 독서회, 야학, 음악회, 웅변대회 등을 열며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민청도 미군정의 해산명령을 받게 되자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더이상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자 1947년 6월 6일 중앙에서는 민청을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이하 민애청)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제주도의 민청도 같은 위기에 처하고 미군정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소위 ‘종달리 6․6사건’이 이 때 발생했다. 당시 제주도 거의 모든 마을들은 3․1시위운동 이후 응원경찰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툭하면 지서로 끌려가게 되자 마을의 모든 집회는 지서에 신고되지 않고 비밀리에 열리고 있었다.

구좌읍 종달리에서는 6월 6일에 당면한 민청조직 개편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에 대한 정세보고를 겸해서 마을 민청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이 집회를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참가자들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민청원들과 경찰간에 몸싸움이 벌어지자, 경찰은 이를 빌미로 71명을 수배하고, 그중 43명을 검거하였다. 검거된 청년들은 무수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 사건후 종달리는 경찰의 주목을 받는 마을이 되어 청년들은 도외로 피신하거나 산야에 숨어사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종달리 6․6사건은 3․1시위운동 이래 경찰이 당한 첫 폭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제 군정경찰과 민중, 혹은 우익과 좌익의 대결이 직접적인 폭력의 교환과 보복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했다.

 

팽배해진 민중들의 불만

 

미군정은 1947년 8월부터 민족운동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파괴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제2차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이미 미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안을 확정한 뒤였기 때문에 미소공위 진행과 관계없이 미군정은 민족운동세력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특히 이 시점에서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은 명확해졌다. “한국은 미소가 직접 대결하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한국은 영향력과 힘을 행사하기 위한 동서간의 투쟁과 아시아에 있어서의 미국의 능력을 시험하는, 세계를 한 눈에 보여주는 상징이었고,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은 이제 미국의 군사적 안보 차원”으로 인식되었다.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미국은 민족운동세력에 대한 총공세를 억제시켜왔던 마지막 저해요인이 제거되었음을 확신했다.

제주도에서도 8월에 접어들자 미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착수했다. 도지사를 사임했다가 7월에 제주 민전 의장으로 추대된 박경훈씨를 비롯한 민전 간부 30여 명을 구속하였다. 또한 경찰과 우익청년단, 서청은 빨갱이 색출을 명분으로 전 도를 순회하며 도민들을 테러(소위 ‘순회테러’)하고 금품을 갈취했다. 특히 서청은 제주도를 ‘작은 모스코바’로 규정하고, ‘빨갱이를 분쇄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표’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젊다는 것이 죄’가 되어 마을 청년들은 이리저리 피해다녀야 했다. 이때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도외로, 혹은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한라산의 동굴 등에 은신처를 마련해야 했다. 「G-2보고서(47.8.8)」에 보이듯이 이때 산으로 올라간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최초의 제주도 빨치산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반미투쟁의 성격이 들어있는 삐라가 살포되기 시작했다. 삐라에는 “조선을 조선인으로부터 빼앗아 제멋대로 하려는 미군을 몰아내자. 무기를 가지고 민중을 탄압하는 경찰을 타도하자. 조선민족의 흡혈귀, 우익추종자를 저주하자” 등의 구호가 실려 있었다. 제주도 민중은 이 시점에서 타도대상을 미국․경찰․우익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왜 제주도 민중들은 미소공위가 결렬되지도, 남로당 중앙이 본격적인 반미투쟁으로 전환하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 반미투쟁을 선언한 것일까. 그것은 제주도가 3․1시위운동 이래 짧은 시간에 미군정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은 가뜩이나 흉년에 시달리는 민중을 더욱 괴롭혔고, 서청 등 우익테러단의 만행은 그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고갔던 것이다. 특히 하곡수집과정에서 1947년 8월 안덕면 동광리에서 발생한 하곡수집 독려 공무원 폭행사건은 민중의 불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이 사건을 목격했던 한 주민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당시에는 보리공출, 면화공출을 했는데, 집집마다 몇 할 씩 내라고 했어. 그때 사상이 좀 있는 마을 젊은 사람들은 이 공출을 막아야 된다고 했지. 해방되니 사람들은 공출이고 뭐고 없을 줄로 알았거든. 해방되어서도 (일제와 마찬가지로) 면서기들이 공출하라고 오니까 마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 공출하라고 면서기들이 왔을 때 젊은 사람들이 토의해서 그 면서기들을 때려 잡아 버렸어.

 

이처럼 이 시기 민중의 투쟁은 주로 생존권 투쟁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는 전단에 적혀 있던 “살인마 경찰에게 1일 5홉씩 분배되고, 테러리스트 광복청년단의 배를 채우는 강제적인 미곡수집을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반대하자”라는 글귀에서도 확인된다.

1947년 가을에 접어들자 남로당 제주도당은 한라산에 거점을 두고 군사부를 설치하여 방어적이고 제한적인 공격을 준비해나갔다. 지도부도 군사경험이 있는 젊은 사람들이 일제 때부터 반제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명망가들을 대체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대대적인 모병이 있었는데,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 입대한 사람들 중에는 남로당 세포들도 많았다. 정보원의 제보에 의한 CIC의 한 보고(47.12.13)는 “제주도의 일반여론이 경찰에 정의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모든 조직을 동원하여 제주도 내 치안관계기관을 공격할 정도”라고 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으로 보아 제주도의 민중은 이미 1947년 12월 중순에 자위적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4. 항쟁의 불꽃은 오르고

 

항쟁에의 기로

 

제주도 민중은 미군정과의 대립상황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 1948년 새해를 맞이했다. 그 긴장은 1월 22일 미 CIC와 군정경찰이 조천면에서 열리고 있던 남로당 회합장을 덥쳐 모두 106명을 검거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이 당시의 상황이 『G-2보고서(48.2.6)』에는 “1월 22일 폭동지령 유인물(2월 중순과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라는)이 발견된 조천의 남로당지부 불법회합과 관련해 1백6명의 좌익주의자들이 체포됐을 뿐더러 1월 26일까지 좌익분자 115명이 추가로 붙잡혔다. ……그날 이른 아침(새벽 3시) 경찰이 습격했을 때 몇몇 남로당 간부가 탈출한 것으로 보여지며, 등사기와 많은 양의 문서가 압수되었다. ……총 221명의 연행자 중 63명은 경찰의 심문을 받고 풀려났다. 그 방면자는 남로당원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즈음 남로당 제주도당에서는 도․읍․면 간부들이 모두 참석하여 4․3항쟁 결행 문제로 신촌 등지를 오가면서 심각한 논의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정보가 새어 무장항쟁을 결의한 문서가 압수되고 많은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검거된 사람 중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 안세훈을 비롯하여, 김유환, 김은환, 김용관, 이좌구, 이덕구, 김양근, 김대진 등 지도급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조몽구와 김달삼 등만 겨우 빠져나갔다. 그런데 위 보고서에서 특이한 것은 남로당원 63명이 곧 풀려났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때까지도 남로당은 비합법정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을 체포할 때는 당원이어서가 아니라 미군정 포고령 위반--불법집회, 폭동모의 가담 등--으로 검속했다.

한편 소련의 불참한 유엔총회에서는 UN조선임시위원단 설치와 한반도에서의 총선거안을 결정했다. 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도착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북한지역에는 소련의 입북 거부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미국과 이승만 등 단정세력들의 강력한 입김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안에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단선․단정의 결정에는 이승만과 김성수가 이끄는 한민당만이 찬성을 했을 뿐, 김구와 김규식이 이끄는 우파와 중도파 정당에서는 조선을 영구히 분단화시킨다며 맹렬히 반대했다. 특히 남로당과 민전에서는 이 결정에 즈음하여 단선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전국적 차원의 2․7구국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제주도에서도 남로당 지도부가 대거 검거되어 있는 가운데 2월 8일부터 11일까지 3일 동안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2월 8일에는 성산면 신양리와 오조리에서 시위가 벌어져 경찰과 충돌했고, 9일에는 안덕면 사계리에서 경찰 납치사건이 벌어져 경찰 2명이 청년들에게 구타당했다. 또한 10일에는 한경면 고산리에서 청년 3백여 명이 지서를 습격했고, 이밖에도 조천, 하도, 대정, 삼양, 화북 등지에서 시위하고 삐라를 살포했다. 제주경찰은 2․7사건으로 제주에서는 방화 1건, 시위 19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그후 다시 도 전체에 걸쳐 검거바람이 불어닥쳤다. 쫓기다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취조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미 제주경찰의 수뇌부는 타지역에서 들어온 경찰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일선 지서․파출소에서도 제주도 출신 경찰들은 이들에 의하여 변변한 발언 한 번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서청 등의 횡포까지 겹쳐 일단 경찰에 연행된 자는 초죽음이 되었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작년 3․1시위운동 이후 이리저리 쫓기던 청년들은 대거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 3월에 들어 지서에 연행된 자의 연속적인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조천에서는 3월 4일에 연행되었던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이 이틀 후에는 혹독한 고문으로 숨졌고,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 연행되었던 대정읍 영락리 출신 양은하가 경찰의 구타로 숨졌다. 또한 한림읍 금릉리에서는 박행구라는 청년이 서청에게 붙잡혀 곤봉 등으로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는 총살되었다. 당시 김용철과 같이 학교를 다녔던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47년이 되난 선생들을 막 잡아가. 어떤 선생은 수업허는 중에, 다른 선생은 밤중에 잡아가부는거라. 우린 멋도 모르고 학교에 가보믄, 선생이 있어사 수업을 헐거 아니? 그때부터 학생들은 책보를 들고 지서로 줄줄이 몰려가는거라. ‘우리 선생님 내놓으라고’. 돌멩이도 던지곡 했주. 그럴 때 학생회장허든 김용철이가 학교에서 잡혀간 죽은거라. 요즘말로 고문치사 당헌거주. 3일 동안을 전학생허고 리민이 모연 용철이를 묻고난 다음부터는 모든 학생들이 과격해진거라. 가만히 있다가는 안되겠다고. 우리도 맞아죽을 거 아니냐고……

 

이때 경찰은 조천지서사건에 대하여 검시의사를 협박하여 허위진단서를 끊으려다가 민중의 지탄을 받았다. 그후 관련 경관들에게는 실형이 내려졌다. 아뭏든 이 일련의 사건은 제주 민중에게 ‘가만히 있다가는 나도 맞아죽을 거 아니냐’는 공포감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미군정과 경찰․서청 등 우익청년단에 대한 불만이 부풀대로 부풀게 하였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2월 11일의 시위 사건 후 민중의 불만이 팽배해진 것과는 달리 별다른 사건없이 비교적 조용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남로당 지도부가 대거 체포되어 있었고, 항쟁 결행을 알려주는 많은 문건들이 미군정에 압수되어 사전에 비밀이 폭로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곧 3월이 되자 1월 22일 체포되었던 남로당 지도부 중 석방 되지 않았던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풀려났다. 5․10선거를 앞두고 미군정에서 정치범에 대한 특사령을 발동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시 항쟁 결행을 논의하고 4월 3일에 봉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럼 여기서 4․3항쟁이 어떠한 논의과정을 거쳐 어떠한 인물들의 주도 속에 결정된 것일까 하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해명되지 않는 문제를 잠시 살펴보자.

우선 ‘남로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서’라는 설은 거의 근거 없는 것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평가하고 있으므로 일단 논외로 치기로 하자. 제주도의 남로당 지도부는 1947년 말부터 일제하 사회주의 노선의 장년층 운동가에서 보다 젊고 군사경험이 많은 인물들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운동가들은 곧 당에 군사부를 두고 경찰에 쫓겨 입산한 청년들로 자위대를 편성하여, 한림읍의 샛별오름 등지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다. 또한 남로당 지도부는 1948년 1월을 전후하여 소위 ‘신촌회담’ 등을 통해 항쟁결행 문제를 수차에 걸쳐 논의한 바 있었다. 이 회담에서는 정세를 낙관하여 무장항쟁을 결행하자는 ‘무장항쟁결행파(이하 항쟁파)’와, 무장항쟁 결행은 시기상조이며 지역 역량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반대하는 ‘무장항쟁유보파(이하 유보파)’의 두 부류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항쟁파는 미군정의 탄압으로 봉기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솟구치고 있는 만큼 제주도에서의 무장봉기는 일종의 기폭제가 되고, 곧 남한 민중에게 강력한 자극제로 작용하여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게 할 것이라고 정세를 낙관했다. 이러한 현실인식에 근거를 두고 항쟁파는, 5․10단선을 감시하러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내한해 있는 만큼 미국은 국제여론을 감안하여 진압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며, 국방경비대 9연대도 중립을 지킬 것이고, 제주 민중은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쌓일대로 쌓여서 무장항쟁을 적극 지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당의 주도권을 이미 잡고 있던 항쟁파는 조직이 이미 드러난 만큼 지하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광범위한 대중투쟁과 제한된 무장투쟁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항쟁파는 3월 30일부터 5․10단선을 위한 선거인등록이 시작되므로 유보파와의 타협을 거쳐 4월 3일로 무장항쟁 결행일을 결정했다. 이때 유보파들도 선거인등록 저지는 곧 단선 저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조국의 통일독립을 쟁취하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데에는 의의가 없었다. 어쨌든 단선 저지의 명분은 민중에게도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도민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해야 하는 봉기의 결정이 과연 그 시점에서 옳은 판단이었을까. 의문은 끝이 없다. 지금은 봉기의 결정을 내린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아무것도 발굴된 것이 없다. 단지 당시 봉기결정에 반발하여 일본으로 떠났던 사람들 중 지금 생존해 있는 몇몇 분이 항쟁파들은 그릇된 정세판단으로 수만 명의 도민의 목숨을 미군정의 총구 앞에 내몬 과격모험주의자들이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단순히 ‘과격모험’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뚜렷한 근거를 가진 견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몇가지 정황을 검토하여 보면 다른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 4월 3일 봉기일의 공격대상은 경찰․서청․우익청년단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이후 토벌대의 무차별 유혈진압에도 무장대의 공격 대상은 주로 그들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듯이 항쟁지도부는 마을자위대 등을 총동원하여 미군정에 전면적인 타격을 가한다고 했으면서도, 모순되게 제한적이며 방어적인 공격으로 일관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항쟁지도부는 이러한 공격으로 상황의 주도권을 잡고 미군정과 타협하여 사태 해결을 보자는 의도로 항쟁을 시작하지는 않았을까.

어쨌든 위와 같은 의문점들은 추후 더 많은 자료발굴과 증언을 통해 정확히 규명되기를 기대하며, 마지막으로 4․3항쟁을 결행한 배경과 원인을 종합하고 넘어가자. 제주민중들은 해방정국에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적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대열에 적극 참여했다. 민족운동세력과 결합하여 인민위를 결성하고 각 마을의 행정 등을 담당하는 한편, 교육운동과 각종 부문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개혁의 열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3․1시위운동 이후 민중들의 열망에는 아랑곳없이 미군정과 경찰․서청 등이 무자비한 탄압만 계속하자, 1947년 말경에는 민중들이 경찰 등 치안관계 기관에 정의가 서지 않으면 이들 기관을 공격해야한다고 할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또한 항쟁지도부는 계속되는 탄압과 검거 속에 단선을 통한 단독정부 건설이 현실로 다가오자 민중들과 연계하여 미군정에 적극 대항할 필요성을 느껴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항쟁지도부는 미군정의 강력한 탄압에 맞서는 반미․반경․반서청의 소극적 저항과 ‘선거인 등록 저지=단선 저지=통일’이라는 적극적 저항을 결합하는 항쟁의 결행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항쟁의 발발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한라산 자락의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무장항쟁의 불꽃은 피어올랐다. 이날 민중자위대(무장 500명, 비무장 1,000명)는 도내 24개 지서 가운데서 제1구 경찰서 관내 화북, 삼양, 조천, 세화, 외도, 신엄, 애월, 한림지서와 제2구 경찰서 관내 남원, 성산포, 대정지서 등 11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또한 경찰, 서청 숙소와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간부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 <4월 3일 피습 상황도>

: G-2 「주간정보요약」, No.134(1948.4.2~1948.4.9)

 

이날 인근의 수산봉․고내봉․파군봉에 봉화가 오르면서 100명은 족히 되는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가장 피해가 컸던 구엄마을(애월지서 중엄파견소 관할)의 상황을 살펴보자.

 

무장대는 3시간 가량 마을에 머물렀다. 길가마다 가득찬 이들 무리는 ‘당신네 양민들은 나오지 마시오. 나오면 괜히 살상되니까 피해봅니다’ 고 외치며 지목된 우익인사 집을 찾아다니며 살인하고 방화했다. 피습을 당한 구엄마을은 당시 몇 되지 않는 우익 색채가 강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일제때부터 구장을 지낸 문영백을 중심으로 독청국민회와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어 있었다. ……무장대는 4~5개 조로 나뉘어 우익인사들의 집을 공격했다...결국 이날 습격으로 구엄마을에서는 우익가족 5명이 숨지고, 1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 경관 1명이 중상을 입었고, 무장대 2명이 사살되었다.

 

이날 무장대의 습격으로 인한 전체의 피해 상황을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은 다음과 같이 조사했다.

 

도내 24개 지서 중 11개 지서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음.

화북 -- 경찰 사망 1명, 일반인 사망 2명, 지서 전소

중엄 -- 경찰 부상 1명, 일반인사 사망 5명, 부상 10여명, 무장대 사망 2명,

민가 방화 4채

외도 -- 경찰 사망 1명

함덕 -- 경찰 행방불명 2명

남원 -- 경찰 사망 1명, 일반인 사망 1명 부상 2명

한림 -- 경찰 사망 1명 부상 2명, 일반인 부상 6명, 무장대 생포 1명

세화 -- 경찰 부상 2명

조천 -- 경찰 부상 2명, 무장대 사망 1명

대정 -- 경찰 부상 1명

모슬포 -- 일반인 부상 1명, 가옥파괴 1채

계 : 경찰 사망 4명, 부상 8명, 행불 2명

일반인 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 사망 3명, 생포 1명

 

한편 무장대는 기습공격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호소문과 많은 삐라를 살포했다. 하나는 경찰들에게, 다른 하나는 민중들을 향한 것이었다.

 

호소문

친애하는 경찰관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있는 경찰원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의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매족노들을 꺼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뿌리를 놈들에게로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형제들에게 총뿌리를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들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시민․동포들에게!

경애하는 부모형제들이여!

‘4․3’ 오늘 당신의 아들․딸․동생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종국의 숭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를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이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삐라

미군은 즉시 철퇴하라!

망국적 단독선거를 절대 반대한다!

투옥중인 애국자를 무조건 즉각 석방하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은 즉시 돌아가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응원경찰대와 테러집단은 즉시 철수하라!

조선 통일독립 만세!

 

이 호소문을 보면 우리는 4․3항쟁의 성격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첫째, 민중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한 민중생존권 차원의 ‘민중항쟁’이며, 둘째,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조국의 통일독립을 가져오기 위한 ‘통일운동’이고, 셋째, 반미 구국의 ‘민족해방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4월 3일의 무장대의 공격을 자세히 살펴보자. 무장대의 주요 공격 표적은 경찰지서와 함께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청년 단체의 인물과 숙소였다. 무장대의 무장 수준도 카빈총 몇 정과 일본군이 쓰다 버린 99식 소총과 칼, 죽창, 철창 등 원시적 무기였다. 그래서 그날의 피해도 10월 인민항쟁이나 2․7 구국투쟁의 수준을 크게 넘지 않았다. 그러나 봉화를 올리고, 입산자들에게 식량 등을 보급하고, 삐라를 뿌리는 일은 각 마을 자위대들이 총동원되어 담당했다. 또한 항쟁지도부에서는 국방경비대 제9연대도 항쟁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와 같은 사실은 항쟁 당시 대정면당 무장대의 중대장을 지냈던 김모씨(현 76세)의 증언에 나타난다.

 

4월 3일 밤 우리는 대정골(현 대정읍 보성리)에서 보초를 섰는데, 난데없이 서문쪽으로 짐차가 온단 말이여. 이건 보니까 다 빈찬데 한대가 아니라 열두대나 되어. 운전수와 조수만 타고...그 사람은 우리 김두옥 선생(항쟁시 남로당 대정면당책)을 찾는거라. ……그러면 여기 잠깐 계시라 하고, 명함만 갖고 내가 갔단 말이야. ……인사를 주고 받는데 둘은 즐겁게 웃는거라. ……그날밤 김두옥이 ‘오늘밤 4․3사건이 일어나니 모든걸 준비허라’고 해. ……그 차가 간후에도 우리는 보초를 서고 있었어. 그런데 한시간이 채 못되어 모슬포더레 간 차가 또 돌아오는거라. ……그때 김두옥이 막 눈물을 흘리는거라. 나는 왜 저렇게 눈물을 흘리나. 이건 분명 좋지 못한거라. 그 사람은 차를 끌고 가버렸지. 그러니 김두옥 선생이 나를 앉으라고 해. 그러면서 ‘오늘밤 9연대가 봉기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이 차를 몰고 온 것이다’하고 얘기허는거라. 그런데 9연대 책임자(문상길 중위를 말함)가 허는 말이 ‘나는 중앙당 지시를 받고 여기 책임자로 온 사람이다. 그러니 나는 중앙당의 지시를 받아야지 (제주)도당의 지시는 받을 수 없다. 그것도 몇 사람이면 모른다. 전 군인들은 봉기할 수 없다’고 해서 응허지 않았다는거라.

 

위 증언을 보면, 항쟁지도부에서는 9연대도 항쟁에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중앙당의 지시가 없다고 해서 문상길 중위가 응하지 않는 바람에 4월 3일 당일에 9연대 군인들을 동원시키는 데는 실패했다는 말이다. 항쟁지도부에서 9연대를 항쟁 초기부터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9연대가 최소한 중립을 지키며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최초의 판단은 옳았다. 이러한 사실은 4․3항쟁이 발발한 후에도 미군정이 적극 개입하여 토벌에 참여할 때까지 9연대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과, 토벌에 참여한 후에도 많은 군인들이 탈영하여 입산하기까지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쨌든 무장대의 초기 공격은 성공적이었다. 도내의 행정과 치안도 상당 부분 마비될 정도였다. 그러나 무장대의 4월 11일까지의 공격 대상은 경찰․우익청년단원들로 살상도 많지 않았다.

제주도 남로당은 4월 15일에 도당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는 4․3항쟁 발발 이후 일련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당중앙에 보고하고, 당내 견해차를 해소하며, 단선저지를 위한 민중과의 연대 강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또한 본격적인 유격전에 대비하여 군사부 조직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군사부는 기존 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열렬한 혁명정신과 전투경험을 지닌 사람들을 선발하여 ‘인민유격대’를 편성하였다. 그 편제는 다음과 같다.

 

1연대 : 조천, 제주, 구좌

2연대 : 애월, 한림, 대정, 안덕, 중문

3연대 : 서귀, 남원, 표선

예비지대 : 특공대대 (정찰업무와 부대간의 업무를 조정)

특경대대 (경찰․서청 등의 동정을 파악하고 각 유격대 지대를 연결)

정치소조원 (각 유격대 지대의 사상교육을 담당)

자위대 (유격대와 외곽조직 및 각 마을과의 연결)

 

위에서 보듯이 각 읍․면의 유격대는 권역별로 묶인 3개의 연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실제의 활동은 독자적으로 했던듯 하다. 다시 김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 증언을 듣다 보면 유격대의 새로운 편제 직후에도 면당 차원에서는 특공대대와 특경대대의 구별은 거이 없었던 듯 하다. 또 김씨는 자신의 부대를 유격대라 부르기보다는 특경대로 불렀다.

 

▲ 입산 후(4․3 직후 입산했음) 각 면당별로 따로 활동했습니까?

- 각 면당별로 했지.

▲ 할아버님은 유격대를 특경대라고 하시는데, 특경대는 소속이 어떻게 됩니까?

- 면당에 소속되어 면당의 지시를 받지.

▲ 군사행동을 나갈때는 당의 지시를 받아서 나갑니까?

- 기관(당을 지칭)의 지시를 받아야지.

▲ 그럼 당 책임자가 모든 결정을 내린다는 말입니까?

- 꼭 그런건 아니라. 당책은 ‘캐’라고 하여 제일 높은 사람이고, 그 다음에 조직부책인 ‘오르그’가 있지. 또 그 다음으로 자위부책(무장유격대책을 지칭)이 있는데, 이 세사람이 ‘투위’(투쟁위원회)가 되어, 투위에서 결정을 내리지.

▲ 할아버님은 자신이 중대장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중대장이 자위부책이 되는 겁니까?

- 아니라. 도당에서 정치지도원(정치소조원)을 파견하는데, 그 사람이 자위부책이 되는 거지. 말하자면 난 중대장이고 자위부책은 대대장격이지.

▲ 특경대의 편제는 어떻게 되어 있었습니까? 소대로 또 나눕니까?

- 그렇지. 아마 3개 소대가 있었지. 또 한 소대에는 3개 분대가 있는데, 분대원은 3명에서 4명 정도고 소대장이라고 하면 한 12명 정도 거느리지.

 

어쨌든 이러한 투쟁조직 개편은 당 조직을 유격전 체제로 바꾸면서 당과 유격대 그리고 민중의 연대를 강화시켜 투쟁역량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조천중학원에 다니다 경찰에 쫓겨 입산하게 된 강모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는 입산 후 당 선전부에 배속되어 일하게 되었는데, 그의 증언에는 대중투쟁의 정도와 민중과의 연대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나타나 있다.

 

▲ 산에 올라가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산에 가니까, 난 선전부에 배치된 거라. 등사기로 삐라도 만들고. 당시는 나같이 쫓기던 학생들이 많이 올라가 있었지. 간부들에게 교육도 많이 받았는데, 이름도 몰라. 그 사람들이야 다 가명을 쓰고 했어. 우리는 주로 삐라만 작성하고 만들고 했는디, 하루는 밤에 선전활동을 나가게 된거라. 나는 조천에는 못가고 신촌이나 함덕, 북촌쪽으로 갔주. 마이크로 골목골목 다니면서,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여러분의 자위대 자식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도와주십시오’라고, 뭐 이런 식으로 선전을 허면서 다니는거라. 그러고나면, 뒷날 그 동네는 난리가 나지. 그 사람들 잡아들이지 않았다고 경찰에서 나와서는 다 밟아버리는 거지.

▲ 동네사람들은 뒷날 그 고통을 당할줄 알면서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 어떻게 신고를 허여. 다 자기네 아들 딸인디. 그때사 오히려 경찰이 잡으러 오면, ‘어디 가서 숨으라’고 오히려 숨겨줬지. 요즘허고는 반대라.

 

이들 선전부원과 마을자위대에서 이 시기에 뿌린 삐라의 내용은 「G-2 보고서」를 참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사임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경찰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민이여 단결하라!

․자주적 통일조선을 수립하기 위해 이승만과 김구를 처단하자!

 

삐라 내용은 주로 경찰타도와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하자는 내용이 주였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단정에는 반대하고 있던 김구도 처벌대상에 올라있음은 특이한 일이었다. 이런 대중선전과 더불어 유격대의 공격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4월 하순에 들어서면 경찰지서․서청의 숙소 등으로 이어지던 습격이 선거사무를 담당하는 면사무소․선거사무소로 확대되었다. 「G-2 보고서」를 참고하여 4월 중순에서 말까지 이루어진 유격대의 주요 습격을 살펴보자.

 

4월 15일 : 모슬포 습격

4월 17일 : 조천리 남서쪽(선흘리)에서 대청단원 3명 피살

4월 19일 : 제주읍 전화선․전주가 절단됨.

신촌리투표소가 슴격당해 선거인명부 소실됨

4월 21일 : 동일리, 북촌리 선거사무소 습격

4월 24일 : 제주공항에 착륙하던 미군 C-47기 저격받음

미군정청 내 PX건물 공격

4월 30일 : 대정읍 신평리에서 선거위원 1명 피살

 

이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단정세력과 통일운동세력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히 인명피해도 늘었는데, 4월 중 전국에서의 사망자는 154명(경찰 15명, 좌익 62명, 우익청년단․양민 77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유격대의 공세가 미군정의 강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성공한 편이었는데, 타지역과 비교할 때 인명피해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이 기간 제주도에서의 총사망자는 60명(경찰 8명, 우익․우익가족 27명, 좌익 25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이듯이 이제까지의 관변자료에서 유격대가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희생자도 양측이 동일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시기의 상황은 전국적으로 동일한 것이지 제주도에서만 폭동이 일어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미군정의 대응

 

미군정은 4․3항쟁이 발발하자,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주민들에게는 통행증제를 실시하여 통행을 제한했다. 또한 각 도로부터 차출한 1,700명의 경찰을 증파하여 3․1시위운동 이후 강화되어 있던 경찰력을 늘리고, 4월 10일에는 부산에 주둔해 있던 제5연대 제2대대(대대장:오일균 소령)를 파견했다. 미군정은 이에 더하여 제주도민들에게는 악몽의 대상인 서북청년단의 숫자를 급증시켰는데, 4․3항쟁 기간 서청의 숫자는 정확하지 않으나 800~1,200명 정도였던 것 같다. 이렇게 미군정은 항쟁의 원인과 배경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과장된 인식하에 무차별 진압만을 계획했다. 당시 진압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브라운 대령도 “사건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본관의 계획대로 된다면 사건의 평정은 2주일이면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미군정은 호언했던 2주일 내 진압 가능성이 어려워지자, 4월 27일 제9연대를 진압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한편 제9연대는 항쟁 초기부터 “서청과 경찰이 도민들에게 자행한 온갖 횡포와 불법행위가 도민의 감정을 격분시켜 급기야 극한의 도민폭동으로 전개되었다”며 일체 진압에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중령은 그의 유고 󰡔4․3의 진실󰡕에서 경찰의 토벌작전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4월 말경, 도군정장관 멘스필드 중령의 권유로 자신은 유격대측과 회담에 나서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김익렬이 협상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날, 서울에서 급히 내려온 미군 CIC장교가 자신은 미군정장관 딘장군의 정치고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김익렬의 의견을 물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한 그는 국제정세와 한국장래 문제 등을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제주도폭동이 빠른 시일내에 진압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한국의 독립에도 유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초토화작전’이라고 강조하고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김익렬은 초토화작전을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온갖 회유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가 또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얼마가 필요하냐고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것이었다. 요점은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고 10만 달러를 챙겨 미국으로 도망가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초토화작전이란 과연 무엇인가. 제주도에서 이 작전이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실시되기는 1948년 10월 이후의 일이지만, 이미 4월 말에 이 작전이 검토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4․3항쟁으로 제주도민 수만 명이 죽게 된 이유도 이 작전에 있었다.

그럼 김익렬의 유고에서 초토화작전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는 부분을 보자.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지나․만주 등지에서 적의 유격군을 토벌할 때 행한 작전으로 그 잔인성에서 특히 악명이 높다. ……만일 유격대가 부락에 침입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은닉하거나 비밀히 지원하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부락 전주민은 물론 가족까지 깡그리 죽이고 가옥과 가재를 소각하여 전부락을 문자 그대로 초토화하는 작전을 썼다. 이 작전은 근대전에서 국제법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비전투원 학살의 죄목으로 이 작전을 명령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규정, 처벌을 받게 된다.”

 

4․28 평화회담과 오라리 방화사건

 

미군정의 허가를 얻은 제9연대장 김익렬은 전권을 위임받고 유격대의 김달삼에게 회담을 제의했다. 양측이 회담에 임하게 된 이면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미군정측으로서는 조기진압이 실패로 돌아가고, 5월 10일의 총선거는 다가오고 있어서 무언가 사태 해결을 도모해야 했다. 유격대측으로서도 토벌군은 계속 증파되는데, 이제까지 입은 손실은 물론 도민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또한 회담에 임하지 않았을 때는 경비대까지 적으로 돌려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 명확했으므로 이쯤에서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회담을 맺는 편이 났다고 보았다.

회담은 4월 28일 대정읍 구억리 구억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유격대측은 김달삼이 대표로 참석했고, 9연대에서는 이윤락 중위를 대동한 김익렬 중령이 참석했다. 회담에서 김익렬은 ① 전투행위 즉각 중지 ② 무장해제 ③ 범법자 명단 제출의 세가지를 요구했고, 김달삼은 ① 단선․단정 수립 반대 ② 제주도민만으로 행정과 경찰 업무를 수행하고 반역적인 악질 경찰과 서청을 추방한다 ③ 제주도민의 경찰이 편성될 때까지 군대가 치안을 맡고 지금의 경찰은 해체한다 ④ 의거 참가자를 전원 불문에 붙이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한다는 네 가지 항의 요구를 했다.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비록 김달삼이 요구했던 “단선․단정 수립 반대”의 조항은 김익렬이 “국방경비대가 다룰 수 있는 조항이 아니다”며 반대하여 합의조항에서는 빠졌지만, 합의 내용에는 양측이 대체로 만족했다. 이때 합의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김익렬이 요구했던 ①,②에 대해서는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인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약속위반의 배신 행위로 본다. 무장해제는 점진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로 합의했다. 또한 김달삼이 요구했던 ②,③항에 대해서는 개편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하며, 양측이 제의했던 범법자(혹은 의거자) 문제는 항쟁지도부가 책임을 진다는 선에서 합의되었다.

차츰 전투행위가 중지되어 갔다. 귀순자들도 많아져 갔다. 처음 내려오는 귀순자들은 노인이나 아이들로 이들은 무기를 사용해 본 적도 없었겠지만, 오랜만에 제주도에 평화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경비대측에서는 늘어나는 귀순자에 대비하여 수용소의 천막을 늘리고, 노인 등 일부는 간단히 조사한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화평의 날도 며칠 가지 않았다. 5월 1일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제주읍의 오라리를 습격, 방화하는 소위 ‘5․1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했고, 이틀 뒤인 3일에는 귀순자 200~300명이 드루스 대위 인솔하에 미군 2명과 9연대 군인 9명과 함께 오라리를 거쳐 제주비행장에 있는 임시수용소로 호송되고 있었는데, 돌연 경찰 50여 명이 중기관총과 카빈총을 난사하며 이들을 공격해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두 사건은 평화회담이 깨어지는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이 사건은 과연 미군정과 경찰측이 주장하듯 무장대측에서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경찰측이 조작을 한 것인가. 여기에 대한 사실 규명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두 사건의 피해 자체는 얼마 안되는 사소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때 평화회담만 성사되었으면 그후 제주민중들이 무차별 살상되는 불행을 미리 막을 수 있었겠기 때문이다. 󰡔제민일보󰡕의 4․3특별취재반은 이 사건의 진상을 1989년에 정확히 밝혀낸 바 있다. 여기서는 이 조사 내용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상을 살펴보자.

4월 29일에 미군정장관 딘장군이 비밀리에 제주도에 왔다. 그가 온 목적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날 있었던 회담과 관계가 있는 듯 싶다. 당시 미군정은 딘 장관이 제주도에 오는 광경과 방문 당시의 제주도 상황을 필름에 담아 ‘제주도의 메이데이(Mayday On Cheju-do)’라는 무성기록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오라리 방화사건을 담은 부분 중에는, 불타는 마을을 배경으로 ‘당혹스런 표정의 젊은 여인’이 경찰에게 무어라고 설명하는 문제의 장면이 나온다. 이 모습을 존 메릴은 「제주도 반란」이란 논문에서 “어떻게 하여 자신의 마을이 게릴라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는지를 설명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영화는 이 장면에 이어 게릴라들에게 살해된 시신들을 잠깐 보여주고, 관을 짜고 있는 장의사의 모습이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틀림없는 무장대의 소행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날 마을에 방화한 사람들은 서청과 대청단원 30여 명이었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문제의 여인도 완전한 가공인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제민일보󰡕 팀이, 방화한 인물들이 누구였나하는 것과, 문제의 여인의 사진을 확대하여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오라리의 노인들에게 보이며 누구인가 확인한 결과 밝혀졌다. 또한 5월 3일의 습격사건도 현장에서 체포된 한 사람이 자신들은 경찰상부의 명령으로 습격을 감행했고, 자신들의 신분은 경찰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럼 이 사건은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러한 조작을 하게 된 것일까. 나는 미군정과 경찰 양측 모두가 이 조작극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경찰은 4․28 평화회담 합의사항에서 볼 수 있듯이 회담이 성공하여 제주도에 평화가 올 경우에는 경찰은 경비대의 뒷전에 서게 되고, 그들의 영향력은 경비대에 밀려 현저히 약해질 입장이었다. 또한 미군정도 딘 장관이 내도 후 갑자기 강경토벌작전으로 돌아선 면에서 보거나 미CIC 장교가 김익렬에게 초토화작전을 쓰도록 회유한 점을 보면 평화회담 성사보다는 강경토벌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이 일련의 사건들은 미군정의 두 얼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가 되고 있다.

제주도에는 이 두 사건으로 평화회담이 깨어지자 다시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단선을 나흘 앞둔 5월 6일,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의 고위급 관계자들이 대거 첨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9연대장 김익렬과 경무부장 조병옥 간에 치고박는 몸싸움이 벌어지고, 다음날 9연대장은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고 말았다. 이제는 강경진압의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9연대장에서 해임되어 제주도를 떠난 김익렬은 자신의 유고 말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주도 4․3사건에 대하여 사심없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나는 이 글을 썼다. ……나의 소감을 정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조병옥씨나 박진경 대령과 같은 군인은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태어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익렬이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두 인물, 그들이 제주도에서 한 역할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5․10 단독선거의 파탄

 

5․10단선이 임박해지자 전국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독촉 세력, 그리고 김성수 중심의 한민당 단정세력들은 남한 주민들을 선거에 참여시키고자 무력 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단선은 조국의 영구한 분단을 의미한다며 민족통일세력은 단선을 적극 거부하고 나섰고, 민중들도 이에 동조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군정은 전국의 선거인 등록은 유권자의 91.7%에 이르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자발적으로 선거인 등록을 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 주민들을 대상으로 행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91%가 강압적으로 등록했고, 단지 9%만이 자발적으로 등록했다고 밝혔다.

5월 10일, 남한 전역에서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무장경관이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총선이 실시되었다. 전국 평균투표율은 90.82%에 이르는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단선을 밀고 나갔던 이승만의 독촉계는 국회 총의석 200석 가운데 55석을 차지하는데 그치고, 오히려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했다. 단선을 감시하던 유엔 감시단도 총선의 정당성에 의심이 간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표들 중에는 금번 선거의 결과가 조선문제의 해결에 공헌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대표도 있으며, 그들이 설사 이러한 의심을 갖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남조선에서의 선거를 전국적으로 인정하길 원치 않는다”고 발표한 것이다.

한편 이 무렵의 제주도 상황은 남한 민중들이 얼마나 이번 단선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총체적이면서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제주도의 유격대는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인 읍․면사무소, 향사 등을 집중공격하고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하는 한편, 선거인 명부를 탈취했다. 또한 삐라를 산포하여 선거관계자들에게 사표를 종용하고, 민중들에게는 투표거부를 요구했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 유격대는 중문, 표선, 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조천면 14개 투표소가 파괴되어 기능이 정지되었고, 선거관계 공무원 50%가 사표를 내거나 사무를 보지 않아 65개 지역의 투표소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나흘 동안 유격대의 집중공세에도 인명피해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유격대측이 21명이 사망하여, 경찰 1명, 우익 선거관계자가 7명이 사망한 것에 비하면 유격대측의 사망자가 더 많았다.

단선을 거부한 것은 유격대만이 아니었다. 제주민중들도 적극 단선을 거부하고 나섰다. 많은 주민들이 투표 전날인 5월 9일 이불과 간단한 식량을 짊어지고 산으로 갔다. 경찰과 서청 등의 무력적인 투표 강요 행위를 피하기 위해서 일시 마을을 떠나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증언을 통하여 살펴보자.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얘야, 아무래도 산이 이길 것 같다. 백성들이 저렇게 올라온 것을 보아라” 하셨지요. 먹을 것 장만하고 아기구덕 등에 지고 산에 오른 사람을 보면 마을에는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요. 그때는 다 산이 이긴다고만 했지요. 산에 선거 반대해서 간 사람은 조금도 마음이 다르지 않았어요. 그후 시국이 변하니까 사람들 마음이 거꾸로 돌았죠.(한림읍 장씨 할머니)

 

▲ 사태 직후 5․10선거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이 마을(조천면 곱은달 마을)은 어땠습니까?

- 사태가 난 얼마 없었을 때인데, 어디서 왔는진 모르지만 선거하라고 함을 싣고 왔어. 왜냐하면 선거 안 할려고 해변 사람들이 전부 이 동네 올라와 있었지. 선거반대라고. 선거 안 헌다고.

▲ 해변마을이라면 신촌, 조천, 함덕, 북촌 사람들이 전부 투표 안 하려고 여기까지 도망왔다는 겁니까?

- 다 올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때도 보면 투표허지 못허게 주장허는 사람들이 있어. 다 산쪽 사람들이지. 이제 생각하면 북선 쪽이라.

 

이러한 상황에서 치러진 제주도의 선거는 완전한 실패였다. 3개 선거구 중 남제주군 선거구만 간신히 치러져 무소속의 오용국이 당선되고,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는 투표율이 모자라 무효화 되었다. 당시 선거가 무효화 된 북제주군 2개 선거구의 투표 현황을 살펴보자.

 

북제주군

갑구

을구

선거등록인 수

27,560명

20,917명

투표인 수

11,912명(43%)

9,724명(46.5%)

총 투표구 수

73개소

61개소

투표 실시 투표구 수

31개소(42%)

32개소(52%)

투표 미실시 투표구 수

42개소

29개소

각 후보자별 득표 상황

양귀진 3,647표

김시학 3,479표

김충희 2,147표

문대우 1,693표

양병직 3,474표

박장희 3,190표

김덕준 691표

 

제주도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율이 모자란 북제주군 2개 지역의 선거 무효화를 딘 군정장관에게 건의했다. 이에 딘 장관도 어쩔 수 없이 이 건의를 받아들여 북제주군 2개 지역의 선거 무효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6월에도 재선거를 실시할 수 없었다. 이미 선거관계 공무원의 많은 수가 사직하거나 직무를 포기한 상태였고, 선거인 명부도 절반 이상이 탈취당했거나 불에 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마침내 미군정은 6월 10일 제주 지역의 재선거를 무기 연기하기에 이르렀다.

제주민중들의 단선거부는 항쟁의 일정 부분이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입장으로서는 자신의 점령지 내에 단선을 거부한 지역이 있었다는 것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심으려는 점령정책 자체가 거부된 엄청난 실패를 의미했다. 이는 곧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제주민중에게 무차별 대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군경토벌대의 토벌 강화

 

미군정은 강경토벌작전을 시작하기 위해 5월 15일에 제11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그리하여 기존에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9연대와 제5연대의 병력과 합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고 박진경을 연대장으로 선임했다. 조병옥도 담화를 발표하여 ‘강경진압 방침’을 분명히 하고, 경찰특수부대를 파견하는 한편 서청단원을 계속 증파했다.

서북청년단의 제2대 단장이었던 문봉제는 한 인터뷰(󰡔북한󰡕 89년 4월호)에서 “조병옥박사가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4․3사건이 나자마자 저를 불러 제주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경찰전투대를 편성한다고 5백명을 보내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그런데 이 서청의 증파에는 미군정도 관계하고 있었다. 「G-2보고서(48.10.1)」에는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 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진압의 주도권은 경비대로 넘어갔다. 5월 12일, 마침내 경비대의 대토벌작전이 시작됐다. 박진경은 각 마을과 산악을 수색하여 폭도 색출․빨갱이 색출로도 모자라 폭도․폭도가족․빨갱이 내통자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그럼 이 시기의 토벌 상황을 「G-2보고서」를 참고하여 살펴보자.

 

5월 12일 : 한 마을을 습격하여 토굴과 천막속에 살고 있는 193명 체포

다른 마을에서도 창을 들고 토벌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주민 25명

체포

5월 16일 :오등리와 오라리를 습격하여 169명을 체포하고, 1명 사살

5월 14일~21일 : 교래리와 송당리 사이에서 200명을 체포하고, 7명 사살

5월 23일 : 432명 체포

5월 25일 : 폭도 색출을 위해 제주읍내 전가옥 수색

5월 말~6월 초 : 한라산을 서에서 동으로 일소하는 작전을 전개하여 596명 체포

 

박진경의 토벌작전은 일단 성공했다. 5월 27일까지 포로수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6,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벌대의 입장에서 정작 토벌되어야 할 무장대는 토벌을 피해 이리저리 숨어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김모씨의 증언에도 나타난다.

 

▲ 5․10단선이 끝나고 나자 토벌이 심해지지 않았습니까?

- 토벌해도, 우리가 여기 있다면 저만츰 왔다가 가버렸지. 우리 있는 데까지는 안왔지.

▲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토벌작전이 실시되었습니까?

- 소개헐 때(48년 11월 중순경 초토화작전이 실시될 시기)까지도 경찰 토벌대는 안왔지. 그런데 대토벌이라고 해서 연합(군경연합 작전)해서는 몇 번 와났어. 연합작전으로는 왔지만 별도로는 안왔어.

▲ 연합작전으로 왔을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상대하여 싸웠습니까?

- 싸워 물리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숨어야지. 우리가 대항허지 않으면 토벌을 열흘 할 것을 닷새만 해서 끝날 수 있고…… 우리가 계속 대항허면 열흘이고 보름이고 토벌을 할테니, 피하자고…… 우리가 피하지 않으면 피해가 크다고 하여 대항을 안했지.

 

위의 증언에서 보듯 대토벌이 있을 때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유격대는 대적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그럼 박진경의 토벌 작전에서 포로로 잡힌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바로 일반민중들이었다. 이는 항쟁 초기에 미군정에서 유격대 숫자를 1,500명 정도로 추산했던 사실을 상기해 보더라도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누구였나 하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한편 박진경은 대토벌작전을 전개하기에 앞서 유격대의 투항과 귀순을 요구했다. 이에 김달삼은 수차에 걸쳐 협상을 제의했다. 자신들의 입장으로서는 경비대를 적으로 돌렸을 경우에 오게 될 엄청난 파국을 예상하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하고자 했던 것이다. 박진경의 투항 요구에 유격대측은 삐라로 대답했다.

 

친애하는 장병제형이여! 제형의 민족적 양심과 정의에 불타는 올바른 행동을 우리는 믿는다. 만일 친애하는 장병들이 왜 우리들이 총대를 메지않으면 안되었던가 그 원인을 몰각한다면…… 우리는 정의의 이름 앞에 백만군이 오더라도 싸울 것이다.

……친애하는 제형들이여!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다음에 우리들의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노라.

一. 무장경관대의 즉시 해산

一. 사설 테러단체의 해산과 처벌

一. 도지사 유해진을 즉시 파면하라

一. UN조선위원단 철거

一. 미소양군 즉시 철퇴

一. 단정 반대

一. 남북통일정부 수립 절대 추진

 

박진경은 거듭된 유격대측의 회담 요구에도 투항만을 요구하며 대토벌에 나섰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박진경의 토벌작전은 결론적으로 보면 실패작이었다. 우선 경비대 내부에서조차 이러한 강경토벌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또한 일반민중 사이에서도 이제까지와는 달리 경비대를 적대시하게 되었고, 유격대측도 더이상의 평화적 회담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장기전 태세에 들어갔던 것이다.

결국 박진경과 최경록으로 이어지는 무차별 대토벌작전은 제주섬에 드리운 먹구름을 걷어가기는커녕, 온 섬을 유혈로 물들이는 전초였던 것이다. 강경진압에 대한 반발은 5월 말에 접어들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5월 21일 새벽 4시, 9연대에서는 중대장의 인솔 아래 병사 41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기와 장비, 그리고 5,600발의 탄약을 소지하고 주둔지를 빠져나가 그날로 대정지서를 공격하여 경찰 3명을 사살하기도 했으나 이들 중 20명은 다음날 대정에서 체포되었다. 병사들의 탈출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10여 명씩, 혹은 몇 명씩 병사들의 주둔지 탈출은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의 하나를 김모씨의 증언으로 들어보자.

 

서림(대정읍 일과리)에 주둔허고 있던 군인 13명이 귀순헌 일이 있었어. 이 13명 중에 반동이 한 사람 있었지. 12명이 산을 지지헌 사름들이라. 한 놈이 반동이라. 개인적으로 산에 올라오겠다고 자꾸 연락이 왔어. ……개인 개인은 올라오지 말라. 집단으로 한 번에 올라오라. 올라올 적에는 반동을 숙청해서 올라오라. 반동을 숙청헐랴니까 반동이 눈치를 챘는지 도망가버렸어. 도망가버리니까, 13명이 살던 도구나 식량을 몽땅 그 주변에 있는 자위대를 통해 짊어지우고 올라와버렸단 말이야. 그러니까 대토벌이 벌어져버렸어. 군경이 합동해 가지고…… 미군도 합동해 가지고 왔어.

 

그러나 무차별 진압에 대한 반발은 더 심각한 형태로 나타났다. 6월 18일, 박진경은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하자 시내요정에서 축하연을 벌였다. 그는 술을 마시고 새벽에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가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범인으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배경용, 신상우 4명은 체포되어 “군대의 생명인 규율을 문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총살 집행장에서의 문상길의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고 조덕송은 󰡔민주일보(48.9.25)󰡕에 쓰고 있다. “스물세 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라건대 미국인의 지배 아래, 미국인의 지휘 아래 민족을 학살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않기를 문상길은 바라며 갑니다.” 박진경의 뒤를 이은 최경록도 무차별 토벌을 감행했다. 이에 많은 민간단체들이 무차별 토벌보다 민심수습을 통한 평화적 사태 해결을 요구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쟁의 성격 변화

 

6월 말에 접어들자 쌍방간에 교전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강상태는 8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소강상태의 근본 이유는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정부는 7월 12일 이형근 참모총장의 담화문으로 “제주도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격대는 군경토벌대의 대토벌을 피해가면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토벌을 일시 중단한 이유는 반대세력이 더이상 남한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전세계에 알리고, 8월 15일에 있을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유격대측으로서는 대한민국 정부 출범과 더불어 있게 될 미군철수에 지연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또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8․25지하선거’에 총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당시 남로당 중앙은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서게 됨에 따라 단선저지의 통일운동에서 남한정부 반대, 북한정부 지지로 투쟁의 목표를 바꿀 수밖에 없었고, 인공 수립을 위한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선거는 남한의 각 시․군에서 5~7명의 ‘해주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할 대표를 선출한 다음, 그들이 모인 인민대회에서 8월 25일에 있을 최고인민회의에 보낼 360명의 남한지역 대의원들을 뽑는 이중선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선거를 위한 투표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주로 밤에 선거관계자가 연판장을 들고 다니며 서명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남로당 제주도당도 이러한 당중앙의 결정에 따라 3개 선거구에서 선거를 실시하였다. 유격대와 마을자위대는 ‘민주부락’(유격대를 지지하는 세력이 강한 마을들로, 주로 중산간 마을이었다. 조천면, 대정면, 한림면의 중산간 마을들이 이에 속했다)을 비롯한 여러 마을을 찾아다니며 연판장에 서명을 받았다. 이 지하선거는 시간의 촉박하다는 것과 지도부의 과대목표 달성에 치중한 나머지 자발적인 지지에 의하기보다는 강제성을 띠었기 때문에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지하선거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면서도 협조적이었다.

 

7, 8월 경인데, 보리를 수확하여 한창 보리방아를 찧을 때였지. 정미소에 일이 잔뜩 밀려서 밤을 새우면서 보리를 찧곤 하였는데, 새벽 서너 시쯤에 산에서 사람들이 내려와서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어. 그래서 이름은 가명으로 올리고 손도장을 찍어주었지. (한림읍, 이모 할아버지)

 

이 선거가 끝나자 대표로 뽑힌 사람들은 8월 초 해주로 떠났다. 이때 떠난 사람들은 김달삼, 강규찬, 안세훈,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 등 6명으로 항쟁의 실질적 지도자들이었다.

봉기세력이 북한지지로 돌아서고 항쟁지도부가 해주로 떠나게 됨으로써 항쟁의 성격도 변하게 되었다.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일어섰던 항쟁이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 성격에도 변화가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항쟁지도부가 해주로 떠난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들의 해주로의 탈출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남한정부로 하여금 이제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저항은 북한정부와 연계 속에 이루어지는 정부전복 음모로 몰아칠 수 있는 명분만을 더해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에 대한 대탄압의 빌미만 더해준 것이다. 한편 민중들은 항쟁지도부가 해주로 떠나 항쟁의 승리가 불투명해지고, 항쟁 목표가 변하게 되자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렇다고 생존의 근거지를 잃고 산야를 헤매던 민중들이 쉽게 하산할 수도 없었다. 폭도라거나 그 가족으로 몰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민중들은 항쟁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생존의 길을 모색하여야 하는 공포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토벌대의 유혈적 진압과 여순 사건

 

긴 장마가 끝났자 짧았던 소강상태도 깨어졌다. 8월 14일 밤 유격대는 한라산 부근 고지에서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고, 50여 개의 오름의 정상에서는 봉화가 올랐다. 공격신호였다. 그 동안 유격대는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고 사령관도 김달삼에서 조천중학원 교사였던 이덕구로 바뀌어 있었다. 또한 토벌대에 쫓겨서 혹은 입산권유를 받고 산에 올라온 사람들로 인원을 보충하여 숫자도 많이 늘었다. 무기도 많이 보충되어 있었다. 유격대는 무기를 주로 9연대에서 입수하거나 지서나 토벌대의 보급차량을 기습하여 보충했다. 여기서 9연대에서 무기를 입수했던 당시의 상황을 김모씨를 통하여 들어보자.

 

대정면 (유격대) 병력은 늘었다, 줄었다 허지. 9연대에서 무기도 올라오고 실탄도 올라오는데, 이런 무기들이 올라와가면, 이 무기를 산으로 올리자고 하면 사람이 불어나는거라. ……조천 사람인데 중요헌 연락을 가지고 대정면에 자주 오는 사람이 있었어. 그런데 이 사람은 오면 우리 있는데 잠깐 들렸다가 9연대에 가는거라. 그 사람은 9연대에 갔다가 올라올 때는 총 몇 정은 꼭 가지고 오지.

 

유격대는 조수리, 협재리 등을 공격하여 지서장 1명을 포함한 경찰 2명을 사살하고, 청년단원을 납치해갔다. 미군과 정부에서는 토벌대 병력을 늘리는 한편, 8월 25일에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는 ‘최대의 토벌이 있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9월에 들어서자 유격대는 지서 공격, 봉화 투쟁 등을 전개하며 경찰과 청년단원들을 살해했다. 이에 토벌대는 중문면에서 유격대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주민 45명을 체포했다. 또한 경찰 3명이 13세 소년을 무수히 난타하며 고문․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월 1일에는 수개 조의 유격대가 도내 일곱 군데 지서를 공격, 방화하고 경찰 7명, 청년단원 3명을 살해했다. 유격대는 이러한 산발적인 공격과 더불어 각종 삐라를 살포하고 인공기를 배포하는 등의 선전공세도 강화했다.

10월 8일 도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어 11일에는 제주도 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가 설치되었다. 17일에는 9연대장 명의로, “10월 20일 이후 전도 해안선에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알리는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10월 19일에는 ‘제주도 출동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의 14연대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이 ‘여순봉기’는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이 “공산주의자들은 여순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제주도 사태를 남한 각지에 전개시키려 하고 있다”고 국회에서 발언하게 했을 만큼 미국과 정부관리들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느끼게 했다. 이는 곧 피비린내나는 진압작전이 있을 것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10월 24일에는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의 명의로 정부에 선전포고하며, 다음과 같이 군경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원들이여!

총뿌리를 잘 살피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의 피,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뿌리란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과 총탄을 허비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쫓겨 내기 위하여!

매국노 리 승만 악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뿌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찌산들과 함께 싸우자!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 인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10월 말까지는 유격대가 공세를 강화하여 지서를 습격하고, 토벌대와 교전을 벌이는 등 아직도 전투역량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중산간마을은 모두 불에 타고

 

대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경비대는 해안을 봉쇄하고 유격대와 주민을 분리시킨다는 명분으로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중산간 마을 거의 모두를 불살라버리고,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소개시켰다. 그리고 주민들을 동원시켜 해안마을 곳곳에 성을 쌓아 소위 집단마을․전략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1월부터 시작된 소진․소개전략은 피비린내나는 학살극의 시작이었다.

군경은 무장대와 중산간마을 주민과의 연계를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중산간마을을 불지르고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이주시키는 소개작전을 전개한다. 또 소개 -- 방화 -- 처형으로 이어지는 소위 ‘민간인 대량살륙작전(a program of mass slaughter among civilians, 「G-2보고서」, 1949.4.1)’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피해는 물론 제주도의 169개 마을 중 130개 마을이 불탔다. 이때부터 다음해 봄까지가 가장 많은 주민들이 학살된 시기이다. 그럼 「G-2보고서」를 참고하여 10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있었던 대토벌작전의 상황을 살펴보자.

 

10월 29일 : 애월면 고성리 135명

11월 3일 : 제주시 6명

11월 5일 : 중문 경찰 2명, 경비대 1명, 유격대 50명

11월 10일 : 월랑봉 유격대 21명

토평 유격대 25명

11월 11일 : 신양리 유격대 80명

조천 경찰 1명

11월 13일 : 행원리 유격대 115명

행원리 부근 유격대 4명

오등리 유격대 4명

11월 18일 : 북촌리 경비대 2명

11월 19일 : 모슬포 유격대 3명

11월 21일 : 월평리 유격대 15명

모슬포 유격대 88명

11월 23일 : 선흘리 유격대 15명

11월 24일 : 노형리 유격대 79명

11월 28일 : 남원, 위미리 유격대 30명, 민간인 50명, 경찰 부상 3명

12월 3일~6일 : 유격대 105명

12월 14일 : 유격대 105명

12월 18일 : 유격대 130명

 

위의 보고서 내용을 종합해보면, 10월 29일부터 12월 18일까지 50일 동안 유격대 1,032명, 민간인 50명이 사살되고, 경비대 3명, 경찰 3명이 사망하고 경찰 3명이 부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토벌대측이 하루 평균 유격대 21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문제는 이 기간 유격대와 토벌대 간의 사망자 비율이 150:1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아무리 유격대가 무기가 빈약하고, 역량이 약화되어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직접적인 교전에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을까. 아니다. 유격대는 실탄이 항상 부족해서 총 한 발도 헛되이 쏘지 않았다. 다시 김모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우리는 숨었다가 한 사람이 세 명, 네 명 쏘는 것은 문제가 아니거든. ……산사람들은 헛발을 안 쏘아. 나는 어느 놈을 쏘운다고 하면 틀림없어. 대개 번호를 붙이지. 일렬로 행동을 해서 경찰이 들어올 때 말이여. 너는 1번 쏘아라, 너는 2번 쏘아라 하면 이건 실수없어.

 

그럼 이같은 유격대의 사망 비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토벌대는 마을주민들을 집단학살하고 그들을 유격대로 분류해 놓았던 것이다. 애월면 산간마을이었던 원동은 토벌대에 의하여 마을이 불태워지고 주민들은 집단학살당하여 지금은 폐촌이 되어버렸다. 당시 학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장병기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이 시기 토벌의 실상을 살펴보자.

 

(11월 13일) 한 12시나 1시쯤에 군인들이 와서는 ‘왜 여기 앉아 있느냐. 남편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살아야지’ 하길래 나가보니 군인들이 사방으로 포위하고 주막번데기(지명)에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여 앉아 있습디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가슴이 울렁울렁하니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습디다. 얼마를 앉아 있는데 군인들이 ‘남편들 밥이나 해서 갖다 먹이라’고 해서 보내주길래, 집에 왔어요. 밥은 가져가도 먹지도 못할 것 같아 고구마 찐 것이 있어서 가져다 주니까 안 먹겠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엔 어디로 데려갈듯 허더니 여자는 여자들끼리 남자는 남자들끼리 앉혀놓고는 총으로 와작착와작착 쏘아대니…… 난 그때 총뿌리가 겨드랑이로 기어들어가서 젖가슴으로 나왔어요. 나중에 깨어나보니 애기를 안은 채 사람들이 죽은 가운데 드러누워 있습디다. 죽은 사람들 흘린 피로 등어리가 다 붙어버리고 죽은 사람들 위로 기름을 부어 불을 탁 붙여버렸으니 와닥탁와닥탁 소리나면서 타. 시체가 니것 내것을 구분 못했어요.

 

이때 원동은 15가호 60여 명이 사는 조용한 산골마을이었다. 그날 다른 마을에서 잡혀온 사람들과 그 시각에 우연히 마을 앞을 지나던 사람들까지 합쳐 50~60여 명이 학살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시 어린이와 노인 등 30여 명뿐이었다. 이 원동학살은 「G-보고서」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G-2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않은 대량 주민학살은 이외에도 많다. 12월 12일에는 표선면 토산리에서 18세 이상 40세까지의 주민 157명이 표선백사장(현 표선민속촌 자리)에서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집단학살되었다. 또 이웃마을인 가시리에서는 12월 22일에 67명이 학살되었다.

12월 29일 제9연대는 제2연대로 교체되었다. 이 제2연대는 주한임시고문단(PMAG)-정부수립 후에도 미국은 주한미군고문사절단을 두고, 한국군의 작전․조직․훈련 등에 대한 지휘권을 계속 갖고 있었다-에 의해 특별히 선정된 부대로, 여순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부대였다. 제2연대는 1949년 1월 4일 육해공군 합동작전으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해군함정은 함포사격을 가하고, 공군의 L-5 비행기는 공중폭탄 공격을 했다. 이 합동작전의 결과, “해안에서 한라산에 이르는 4Km 이내의 부락은 대부분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초토화되어 주민들은 토벌을 피해” 입산하여 추운 겨울을 산에서 보내야 했다. 이렇게 쫓겨 산으로 올라간 주민들은 유격대원이 되기도 하였다. 한림읍 금악리에 살던 김집중씨가 그런 사람이었다.

 

가을경이었지. 마을이 불타버리고 갈 데가 없어 홍연수씨를 따라서 입산하게 되었어. 소개하러 올라온 군인들이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광경을 숨어서 봤어. 그날 산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따라서 샛별오름, 다래오름을 넘어 일본군이 파놓은 굴이 있는 데까지 가보니까 산부대들이 거기 주둔해 있더군. 그 다래오름굴에는 특경대라는 산부대들 100여 명이 주둔해 있고, 그외에 입산한 마을사람들(늙은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 수십 명이 같이 기거하고 있었지. 거기서 다시 산부대를 따라 다래오름에서 더 위로 올라간 돌오름 위까지 올라갔지. 거긴 이미 돌을 쌓아 나무를 엮어서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만들어 놨더군. 난 거기서 주로 살았어.

먹는 것은 밑에서 보급해온 보리쌀, 좁쌀, 메밀 등을 배급타서 먹었지. 당시는 면별로 산부대나 특경대들이 따로 조직되어 보급투쟁도 자기네 면별로 관할구역에서 보급해오고, 사는 것도 따로 살고 행동도 따로 했어. 입산한 사람들 중에는 금악사람들이 특히 많았지. 때문에 금악사람들이 토벌대들한테 많이 보복을 당해서 100여 명이 넘게 죽었지.

나는 주로 빗개(보초)서는 일을 했어. 밤에는 오름 꼭대기에 봉홧불을 올리고, 낮에는 대나무에 흰색 바탕에 글씨가 쓰인 기를 달아 빗개를 섰어. 특경대들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몸이 재빠르고 건강한 사람들이 했지. 주로 밤에만 보급을 나가거나 습격을 갔기 때문에 그들이 나가는 모습은 잘 알 수 없었어. 당시 무장력은 보잘 것 없었는데, 한림면 특경대가 99식총 4~5자루 정도였고, 다른 면 무장대들은 죽창이 유일한 무기여서 ‘총이 15자루만 있으면 군인이고 경찰이고 다 이길 수 있겠다’고 아쉬워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나중에 9연대 군인들이 6명 정도 합세했어.

토벌군인들이 나중엔 우리가 있는 발이매오름까지 올라오기 시작했어. 특경대장이 특별히 쇠고기를 모든 산부대들에게 나누어주어서 한창 잘 먹고 있을 때인데, 갑자기 팡팡하는 토벌군들이 쏘는 총소리가 들리고 산군이 맞대응하는 총소리가 드르륵 빵 드르륵 빵 하는 소리가 났어. 토벌군 2~300명이 시커멓게 올라오고 있는거야. 복병을 서던 산군이 쏜 총에 군인 하나가 맞아서 죽었지. 군인들이 몰려오자 모두 숨으라고 해서 다들 흩어져 숨었어. 군인들이 아무데나 막 수류탄을 쏘아대는 척 하다가 죽은 동료 시체를 가지고 그냥 내려갔어.

 

이 겨울 대토벌 시기에는 유격대도 산으로 이동해 있었다. 중산간마을이 소개되기 전까지는 마을을 조금 벗어난 수풀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보급도 마을자위대들이 수시로 가져다주어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중산간마을이 모두 불에 타고, 보급도 끊기자 유격대는 자체적으로 보급투쟁까지 나서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토벌대는 많은 유격대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위 증언에서 보듯 유격대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고 있어 이 시기까지도 근거지를 공격당해 유격대원들이 많이 사살된 것은 아니었다. 사살된 유격대원의 거의 전부가 사실은 주민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토벌대의 무차별 양민학살이 진행되는 가운데 1949년 1월 17일 항쟁 전기간 중 단위마을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해된 ‘북촌리 대학살사건’이 일어난다.

 

세화리 주둔 군인 2명이 함덕리로 오다 유격대의 기습으로 죽었지. 군인들은 급했던지 2명의 전사자를 내버린 채 본부로 가버렸어. 얼마후 중위가 인솔하는 2개 소대(제2연대 3대대 7중대)가 북촌리로 들어왔어. 마을사람들을 교정으로 모이라고 해. 곧바로 무차별사살을 시작했어. 1차 2차 3차 4차째 100여 명을 다시 학살하려는 찰나, ‘중지!’하고 외치며 대대장이 탄 차가 들이닥쳤지. 대대장은 남은 사람들은 함덕으로 오라고 하고는 군대는 철수해서 가버렸어.

남은 마을사람들은 넋이나간 채 대대장의 말대로 함덕으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토의를 했어. 그리하여 일부는 산으로, 일부는 다음날 함덕으로 가기로 하였지. 그러나 이튿날 함덕 군부대로 간 사람들은 빨갱이 가족이라고 100여 명 되는 사람들 대부분이 처형당했어.

 

홍순식씨는 이야기를 맺으며 이틀 동안에 북촌리 300여 가호에서 600명이 학살되었고, 특히 살아남은 남자는 4명쯤밖에 안되었다고 처연하게 덧붙였다.

미국과 정부는 1949년 3월 2일에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를 설치하고, 최후의 소탕작전을 펼쳤다. 이 시기에 제주도를 방문한 국무총리 이범석은 제주도의 비극은 미군정에 의해 채택된 무력진압 방침에 큰 책임이 있다고 과오를 시인하면서, 앞으로는 선무공작을 병행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3월 25일까지 귀순기간을 두었다. 이 선무공작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하산자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이들에 의해 유격대의 진지․무장력․규모 등이 알려지면서 토벌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유격대는 대규모 토벌계획이 알려지면서 많은 논란 속에 유격대를 해체한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G-2보고서」 1949년 4월 1일자의 「4․3종합 보고서」라는 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사로잡힌 한 게릴라 지도자는 그의 동료들의 현재 정책은 군대가 철수할 때까지 활동을 유보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때가 되면 공격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 했다.” 이 말을 김모씨의 증언을 통하여 보충하여보자.

 

▲ 대토벌 때는 어느 정도 병력이 올라왔습니까?

- 그때야말로 군인․경찰이 마을에 없을 때였어. 대토벌이 언제 올라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면, 북군 관내 연락원인데 태역장오리를 통해 가지고 연락을 가게 됐어. 그 연락원이 가다보니까 태역장오리에 비행기가 떨어져 있어. 그 연락원은 대담하게 거기 가서 보니까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서류들이 있단 말이여. 그러니까 지도 딱 그리고, 거점이 어디어디 있다 표시허고, 토벌은 몇 개월이다, 장기토벌. 그러니까 그때 도당에서 정세를 잘못 파악한 것인지 모르지만 거를 보니까 간부들이 각 면당간부들을 불러 가지고. 사소헌 내용이라야 대항을 허지, 대항해봐도 우리 피해가 클거다. 대항허지 말고 몸만 피허라고.

▲ 계속 싸우자는 주장도 있었겠네요?

- 싸우지 말고 피하자 이거지. 그때 주장은. 그때 도당 간부들과 면당 간부들은 모여 가지고 대항해선 안된다, 피해야 한다. 그러면 무장은 최고 간부들만 몇백 정되는 무장을 다 거두어 가지고, 간부들만 무기를 비장했다고. 다른 사람은 무장을 해제시키고, 면당별로 가서 피하라고 다 보냈어.

 

유격대원들은 각 면당별로 2~3명씩 혹은 3~4명씩 짝지어 무작정 토벌을 피해다니게 되었다. 이젠 깊은 산은 토벌대상지역에 해당되었으므로 오히려 마을 쪽으로 내려와서 숨었다. 이런 도피과정에서 제2대 인민군 사령관이었던 이덕구도 6월 9일 살해되고 말았다. 그해 가을 무렵 유격대는 다시 산으로 모였지만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각 면별로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조직체계를 단일화하여 통합시켰지만, 재기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미 봄에 “각자 능력껏 토벌기간 동안 도피생활을 한다”고 결정했을 때 유격대는 생명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미국과 정부에서는 3월 25일까지 귀순기간을 설정해놓았으면서도, 그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대토벌작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정부가 유엔한국위원단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이 기간(1949.3.12~4.12) 동안에 토벌대는 폭도 2,345명, 민간인 1,60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하고 있다. 이리하여 만 1년 만에 사실상 항쟁의 불꽃은 스러지고 말았다. 그 후 정부에서는 1949년 5월 5일에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를 해체하고 소규모의 부대만 주둔시켰다. 5월 10일에는 1년간 연기되었던 국회의원 선거도 치러 단선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잔류 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하여 1953년까지 무지개부대 등을 투입하며 토벌작전을 계속하여, 1957년 마지막 유격대원 오원권을 체포하면서 제주도에는 더이상의 빨치산은 없다고 선언했다.

항쟁의 결과는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로 귀결되었다. 그럼 항쟁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인명이 살해되었을까. 이 문제는 지극히 규명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여기서는 여러 주장들을 종합해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우선 최대 8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주장이 여럿 있다. 그외에 7만 명 이상이라든지 6만 명 혹은 5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고, 3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G-2보고서(1949.4.1)」에는 1만 5천여 명으로 나와 있는데, 사망자의 80%가 군경토벌대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는 북촌리나 토산리 등의 대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1949년 4월 1일 이후의 상황은 집계되어 있지 않다. 아무튼 평균 5만 명으로 보더라도 당시 제주도 인구에 비례해볼 때 6명에 한 명꼴로, 한 가구에 한 명씩은 살해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6. 맺는 말

 

항쟁은 끝났다. 항쟁의 땅 제주도는 그 후 생명이 없는 섬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통일조국을 갈망했던 제주민중의 이상은 지워지고, 지워진 자욱 위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전선으로의 반강제적 투입, 국가보안법의 제정과 연좌제가 덧칠해져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제주인들의 숨통을 죄고 있다. “난 병신이어서 지금까지 살아있수다”하는 촌로들의 자조섞인 말 속에 짙게 배어있는 역사와 시대에 대한 혐오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럼 4.3항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착취와 침탈이 없는 사회를 이루려 했던 민중의 간절한 바램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인민위를 중심으로 한 치안유지, 적산관리, 행정기능의 수행은 아래로부터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방향을 바로잡아나가고, 민의를 올바로 수렴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항쟁을 통해 민중은 민족자주와 통일독립을 열망했다. 해방 후 통일독립의 이상을 철저히 말살해버렸을 때, 민중들은 제국주의의 지배를 극복하고 통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대만에서도 1947년 2․28대학살이 있었다. 이 학살사건은 장개석 국민당정부가 중국 본토에서 패퇴하여 대만에 자리를 잡으면서, 대만 원주민을 대량학살한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사건을 은폐해왔던 대만정부도 최근에는 민주화운동세력의 요구에 밀려 진상을 조사하고 희생자에게 보상을 약속한 바 있다. 45년 만에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도 항쟁 이후 도민들 모두는 심각한 피해의식 때문에 발언하기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분위기에 싸여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4․3항쟁은 40년 세월 동안 귓소문이나 관변자료 등으로만 전해지다가 19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비로소 논의와 연구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4․3항쟁에 대한 연구가 최근 들어 매우 활발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도 실체를 분명히 밝히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정리하면서 그 점을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진상을 올바로 규명하려면 앞으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마을단위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를 조사한다든가 묻혀 있는 자료를 발굴해내고 증언을 채록한다든가 하는 다각적인 자료수집활동은 물론 많은 연구자들의 깊이있는 분석․평가작업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4․3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작업은 희생자의 억울함을 신원하고, 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해꼬지하는 일이 없이 한데 어울려 대동화합의 장을 열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하는 데 이 글이 도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필자는 그런 날이 언젠가 오리라고 믿는다.

 

 

 

『역사비평』1993 봄호(계간 20호), 1993. 2, 역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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