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혹은 1906년 생) 6월 14일 미국 뉴욕에서 출생했다. 그녀가 사진에 대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코넬 대학(Cornell Univ)에서 공부하는 동안이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후에 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에서 클라렌스 화이트(Clarence H. White)에게 사진 과정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이 때 그녀는 건축관련 사진에 특별한 흥미를 느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박물관의 파충류 콜렉터로 근무할 예정이었으나 그녀의 사진적인 감각을 아까워 한 동창의 권유로 건축전문 사진가가 될 결심을 하고 클리블랜드에 스튜디오를 개설했다. 버크 화이트에게 포토저널리스트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1929년 버크 화이트는 헨리 루스(Henry Luce)가 창간한 <포춘(Fortune)>지에 새롭게 합류하면서 이 잡지의 전속 사진가 겸 편집차장이 된다. 1930년에는 소련의 제1차 5개년 계획을 촬영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다. <포춘>지에 연재된 그녀의 소련의 산업 현장 사진들은 산업 사진을 다룬 이 분야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호평을 받았고, 그 결과물을 따로 엮어 『러시아 견문(Eyes on Russia)』을 1931년 출판하였다.
마가렛 버크 화이트에게는 '세계 최초의, 여성 최초의' 란 수식어가 많이 따라 붙는다. 그녀는 외국인으로는 세계최초로 소련 산업 단지를 촬영했고, 미국 기자로는 유일하게 독일의 소련 침공 장면을 촬영했고, 여성 최초로 미공군 종군사진가가 되었으며 실제 폭격현장을 함께 하며 사진을 촬영했다. 위 사진은 1943년 그녀 스스로 촬영한 셀프 포트레이트이다. 자신만만한 표정이 돋보인다.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그녀는 정치학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33년에는 <포춘>지를 그만두고 후일 그녀의 남편이 될 진보적인 소설가 어스킨 콜드웰(Erskine Caldwell)과 함께 뉴욕에 스튜디오를 열고 미국 남부의 가난한 소작인들을 카메라에 담아 『당신은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You Have Seen Their Faces)』를 출판했다.
마가렛 버크 화이트, 라이프의 창간 멤버
1936년 헨리 루스가 창간한 <라이프(Life)>는 포토 저널리즘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만한 것이었다. 1930년대가 사진의 황금기라고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라이프>를 비롯한 사진에 크게 의존하는 잡지들의 잇따른 창간에 힘입은 바 크다. 일명 '그래프 저널리즘(Graph Journalism)'이라고도 불렸던 이때의 잡지들은 <라이프>의 창간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사실 이런 형태의 저널리즘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전과 때를 맞우어 일어난 것이다. 1897년 미국의 스테픈 헨리 호간은 하프톤의 제판술을 개발하였고, 이런 제판술의 발전은 인쇄 매체에서 활자와 함께 본격적인 사진을 인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읽고 보고자 하는 대중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헨리 루스는 유럽에서 이런 잡지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미국에서도 이런 잡지를 만들 생각을 굳히게 된다. <라이프>의 창간 이전 1928년을 전후해 독일에서는 <베를리너 일루스트리에르테 자이퉁(Berliner Illustrierte Zeitng)>이라는 사진 전문 주간지가 발간되었고, 이 잡지를 통해 최초의 스타사진가라고 할 수 있는 에리히 잘로먼(Erich Salomon)같은 이들이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사진을 중심으로 한 화보 잡지 <뷰(Vu)>가 발간되었고, 이 잡지에서는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esz)같은 이들이 활동했다. 「라이프」는 1936년 11월 23일에 창간호를 발표했다.
<라이프>는 뉴욕의 타임(Time)사에서 발간된 것으로 타임사는 <라이프>가 발행되기 전에 이미 뉴스 전문잡지인 <타임(Time)>을 1923년 3월부터 발행하였고, 경제 전문지인 <포춘(Fortune)>을 1930년에 발행한 경험이 있었다. 루스와 그의 동료들은 유럽에서 모험적인 포토저널리즘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포맷의 사진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이 새로운 잡지 <라이프>는 "생활을 보기 위하여, 세계를 보기 위하여, 그리고 큰 사건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의 얼굴과 득의만면한 사람의 행동을 보기 위하여, 진기한 것, 기계라든지 군대, 군중, 정글, 달의 표면을 보기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 낸 그림, 탑 그리고 발견을 보기 위하여,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물, 벽의 반대쪽이나 방 안에 숨겨져 있는 것, 가까이 접근하면 위험한 것,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많은 어린이들을 보기 위하여, 손으로 만져보기 위하여, 보고 놀라기 위하여, 보고 지식을 얻기 위하여"라는 슬로건을 통해 보고, 놀라고, 보고, 배운다, 또 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창업자인 헨리 루스가 창간호에 밝힌 이 말은 당시의 새로운 사진기술과 미디어 상황에서 사진가가 처한 행위와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라이프>는 창간호를 장식할 사진으로 당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미국 몬타나주 포트맥 부근에 건설 중인 거대한 인공댐 사진으로 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표현해 줄 사진작가로 마가렛 버크 화이트를 정했다. 그녀는 <포츈>지를 위해 일할 때도 주로 산업 사진을 촬영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위한 가장 적합한 사진가라고 편집자들은 생각했다. 그녀는 건설 중에 있는 댐을 촬영하였고, 댐의 이면에 있는 한 편의 웅장한 산업 드라마를 포착하였다. 그녀는 댐 건설 현장의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도 촬영해 한 편의 인간 드라마를 기록했다. 버크 화이트는 편집자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마을 사람들의 허술한 오두막집들, 거칠어진 얼굴들, 선술집에서의 토요일 댄스 파티 등 자칫 딱딱하게 보이기 십상인 댐 건설 현장을 사람이 사는 곳으로 표현해냈고, 그것은 <라이프>의 스타일이 되었다.
라이프의 창간호 표지는 웅장한 모습의 포트맥 댐 사진으로 장식되었고 버크 화이트의 포토 스토리는 뉴딜 정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진들로 9페이지에 걸쳐 주의깊게 편집되었다. 이 포토 스토리는 라이프 잡지의 특성을 부각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포토저널리즘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다. 제1면에는 제왕절개로 탄생한 아기의 사진을 싣고 <라이프는 시작되었다>라고 제목을 뽑았다. 헨리 루스는 처음 잡지를 창간하면서 스스로도 그토록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그러나 <라이프> 창간호는 초판 38만 부가 하루만에 모두 동날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당시 관례로 보아서는 획기적인 창간호 47만 부를 발행했다. 이후 <라이프>는 제2호는 41만 5천부, 제3부는 46만부, 제8호에 이르러서는 창간호의 두 배에 이르는 76만부에 육박하는 발행부수를 기록하였다.
<라이프>의 창간과 함께 했던 사진가들은 마가렛 버크 화이트를 비롯해서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 맥보이, 스택폴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마가렛 버크 화이트는 1950년대 병으로 물러날 때까지 포토 저널리즘의 퍼스트 레이디로 불렸다. 포토 저널리즘의 성공은 당시 미국에 포토 저널리즘 잡지의 창간 붐을 일으켜 한 달에 수천 종의 잡지가 발간되는 등 포토 저널리즘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유명했던 <라이프>와 <루크>는 마가렛 버크 화이트를 비롯해서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 유진 스미드(Eugene Smith). 레오나드 맥콤(Leonard McCombe), 아더 로드스타인 (Arthur Rothstein), 풀 후스코(Paul Fusco), 스탠리 트레티치(Stanley Tretich) 등과 같은 유명 프리랜서 사진가들을 고용했고, 이들은 지면을 통해 사진사에 길이 기록될만한 작업들을 만들어 냈다. 그 중에서도 마가렛 버크 화이트는 미국의 포토 저널리즘이 만들어 낸 최초의 스타였다.
포토저널리즘의 영광 아래 소외되는 사진가들
유럽에서 먼저 시작된 포토 저널리즘의 역사는 미국으로 옮겨와 본격적인 꽃을 피우게 된다. <라이프>의 성공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거대한 위기의 순간을 렌즈에 담아 일반 대중에게 공개했다는데 있었다. 당시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미국 월가의 주가폭락과 때맞추어 점증하는 유럽에서의 전쟁 위기는 일반 대중에게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많은 고민 거리들을 던져주었고, 정보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한편 그 당시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를 통해 전세계의 뉴스를 듣게 되었다. 이것은 일반 대중들에게 세계에 대한 관심과 읽고 듣는 것 말고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불러 일으켰다. 이때 발전된 인쇄술에 힘입어 창간된 여러 사진 잡지들, 그 중에서도 <라이프>는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사진을 통해 대중에게 알린다는 포부로 창간한 잡지로서 대단한 인기를 불러모았던 것이다.
<라이프>의 성공에 힘입은 포토 저널리즘의 성공은 유럽을 비롯한 미국에서 잇따라 <루크(Look)>와 같은 사진 중심의 잡지들이 창간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 때의 잡지들은 대개 편집자와 사진 기자간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고, 그 테마를 결정하고 어떤 유형의 사진을 찍을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편집자가 의도 한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잡지를 만드는 편집자의 의도는 물론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으나 이 와중에 사진가의 의논 없이 편집자 독단으로 결정되는 것이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작품의 선택과 레이아웃, 그리고 캡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편집자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이런 방식의 작업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진가는 소외되기 일쑤였고, 이에 반발한 유진 스미드와 같은 사진가들은 <라이프>를 그만두기도 했다. 이런 방식의 사진 유통 구조에 반발한 사진가들이 모여 자신들의 독창성을 인정받고자 창립한 단체가 현재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매그넘(Magnum)이었다.
인종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에 저항한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생애
마가렛 버크 화이트는 뉴욕 브롱크스에서 인쇄 디자이너 겸 기술자였던 조셉 화이트(Joseph White)와 출판업에 종사하던 미니 버크 화이트(Minnie Bourke White) 사이에서 출생하여 뉴저지 바운드 브룩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부모가 종사하는 직업의 탓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어려서부터 배움에 대한 욕심이 컸던 것 같다. 버크 화이트는 코넬,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해서 여러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녀가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포춘>과 <라이프>지 등에서 일하게 되며 명성을 쌓게 된 것은 앞에서 기술한 대로이다.
세계경제대공황을 거치면서 버크 화이트는 사회적 불평등과 인종차별 등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정치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그녀의 관심이 최초로 표출된 것은 1937년 버크 화이트와 베스트셀러 작가인 어스킨 콜드웰은 『당신은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를 발표하면서 였다.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던 콜드웰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인물로 콜드웰과의 만남은 그녀에게 사회적 인식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미국 남부 지역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었다.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Carl Mydans)는 이렇게 회고했다.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사회적 인식은 뚜렷하고 명백한 것이었다. 당시 잡지의 거의 모든 편집자들은 그녀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현실 참여를 통해 문제들을 인식하게 되었다."
버크 화이트는 다른 좌파 예술가들, 스튜어트 데이비스(Stuart Davis), 록웰 켄트(Rockwell Kent), 윌리엄 그로퍼(William Gropper) 등과 함께 미국 예술가 협회(American Artists' Congress)를 결성해,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기금을 마련하거나 미국내 흑인 예술가들에 대한 차별 대우에 대한 항의, 유럽에서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버크 화이트는 또한 일용직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 활동과 공산당 전선 기구의 멤버로 일했으며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미국인 연맹'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1939년 어스킨 콜드웰(Erskine Caldwell)과 결혼한 버크 화이트는 외국인 저널리스트로는 유일하게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당시 그곳에 있었고, 독일군의 모스크바 최초 공습 광경과 스탈린을 촬영하는 등 특종을 기록하며 명성을 더욱 높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버크 화이트와 콜드웰 부부는 미국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더욱 주목하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버크 화이트는 <라이프>와 미 공군을 위한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그녀는 여성 저널리스트로서는 최초로 미 공군의 폭격기에 탑승하여 폭격작전에 동행하였고, 이탈리아 전선의 악명높은 카시노 전투도 종군했다. 버크 화이트가 취재를 위해 북 아프리카로 항해하는 동안 그녀가 탄 배는 어뢰의 공격을 받기도 했고, 유럽을 해방시키는 미군 부대들과 함께 부켄발트(Buchenwald) 집단수용소를 취재했다. 전후 그녀의 인종 차별과 편견에 대한 관심은 간디의 비폭력 운동과 인도·파키스탄 분리 과정에서의 난민, 남아프리카의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증언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이런 정치적인 활동들에 대해서 미 연방수사국(FBI)는 1930년대부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 맥카시(Joe McCarthy) 당시 상원의원이 이끄는 반미활동조사위의 타깃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위원회가 아무리 그녀를 힐문한다 할지라도 좌우를 막론한 그녀의 독재에 대한 반대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찬 증언을 취소시킬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 취재는 그녀로 하여금 가장 훌륭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위원회의 집요한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산촌의 한 숙소에서 그날의 작업들을 정리하던 중 뇌염에 걸렸던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 일으켜 파킨슨씨병을 앓게 되었다. 그녀는 1959년과 1961년에 두 차례의 뇌 절개수술을 받는 등 병마와 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1971년 미국의 코네티컷에서 사망한다. 포토 저널리즘의 화려한 꽃 한 송이, 퍼스트 레이디는 포토 저널리즘의 쇠락과 때를 같이했다.
포토 저널리즘의 전성기는 사실 라디오의 전성기와 그 맥을 같이한다. 속보성에서는 라디오를 따라갈 수 없었지만 음성에 의존하는 라디오의 속보성은 포토 저널리즘의 보조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또 다른 영상매체인 TV의 등장은 지금까지 포토 저널리즘이 담당했던 영상의 전달이라는 우위까지 일거에 점령해버렸다. 결국 <라이프>는 마가렛 버크 화이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72년 재정상의 이유로 자진 폐간하고 만다. 이후 <라이프>는 1978년 월간지로 변신하여 복간되었으나 이전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본토에 대한 단 한 차례의 공격도 받은 적 없는 미국의 국민들에게 <라이프>는 유럽 혹은 태평양에서의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파시스트 전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미국으로 하여금 참전에 대한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작품세계
마가렛 버크 화이트는 포토 저널리즘의 퍼스트 레이디라는 후세의 평가처럼 저널리즘의 정신에 입각한 작품들을 남겼다. 또한 그녀가 애초에 관심을 가졌던 건축 사진과 나중에 특히 두각을 나타냈던 산업 사진 분야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버크 화이트의 작품들을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그녀의 작품들이 기반하고 있는 투철한 휴머니즘의 정신과 20세기 산업사회라는 문명에 대한 그녀의 날카로운 사회적 인식 때문이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폭격기 승무원들과 함께 적국 상공을 비행하며 종군기자로 활동했고, 실제 전선에서 수없이 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저널리스트의 본분에 충실했다. 결국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파킨슨씨병도 한국 전쟁 당시 얻은 뇌염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녀의 건축 사진들은 장엄하며 한편으론 위태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조지워싱턴 다리를 촬영한 사진들은 넋을 빼놓을 만큼 아름답다. 반면에 같은 산업 현장을 담은 사진들에서는 문명비판적인 요소들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이미지로 꿰뚫고 있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적확한 이해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때로는 극단적인 하이 앵글 혹은 로우 앵글을 통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산업 현장이나 혹은 도시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그녀가 현대문명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전후 세 차례에 걸쳐 방문한 인도에서 물레 틀 앞에 정좌하고 앉아 글을 읽고 있는 간디의 모습을 담은 사진에서는 '위대한 인격' 마하트마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 간디의 성자로서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버크 화이트는 일생에 걸쳐 급성장해가는 미국 사회의 팽배해가는 사회적 불평등, 인종 차별주의를 고발하는 활동을 해왔으며 급기야는 매카시즘의 광기에 휩싸인 미국 사회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혹자는 버크 화이트의 작품들을 페미니즘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려고 들기도 한다.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경우 여성으로서 최초라는 여러 기록들을 남기고 있지만 한나 아렌트가 그러했듯이 버크 화이트 역시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버크 화이트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심리적 요인에 의한 차별보다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도전에 좀더 민감했으며,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적 과제들에 좀 더 민감했다. 그래서 혹자는 버크 화이트를 "자신의 여성성을 마초적인 상을 통해 극복, 혹은 지우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버크 화이트의 작품들이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으로 귀결되는 문제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고 주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여성적 주제와 스타일, 방법을 규정하고 그에 맞춰 여성주의, 페미니즘의 기준으로 작품을 보려하는 것도 여성, 여성성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고 선입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주된 관심사는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과 역사·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의 환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마가렛 버크 화이트는 1951년 전미 최고의 여성으로 선정되었고(이것은 미모를 기준으로 선발되는 미인 대회가 아니다.),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그 이름을 새겨두고 있다.
My life and career was not an accident. - Margaret Bourke-White -
< 약 력 >
1904 (1906): 미국 뉴욕 브롱크스에서 부친인 조셉 화이트와 모친 미니 버크 화이트 사이에서 출생
1906-1921: 뉴저지 바운드 브룩에서 성장
1921-1922: 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 클라렌스 화이트로부터 사진을 배움. 부친 사망으로 사진을 찍어 팔며 학비를 조달.
1922-1923: 미시간 대학에서 스콜라십
1924: 에버렛 채프만(Everett Chapman)과 결혼
1924-1925: 인디애나 웨스트 라파예트로 이사, 퍼듀 대학(Purdue University)에서 학업
1925-1926: 남편과 이혼하고 클리블랜드로 이사
1926-1927: 코넬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인 사진가로 활동
1927: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그녀의 첫번째 스튜디오 개설
1928: 오티스 철강공장 촬영(Otis Steel Mill)
1929: 헨리 루스의 <포춘>지에서 일하기 시작하다.
1930: 소련과 독일 여행,(소련 산업 단지를 촬영한 첫번째 외국인 사진가), 귀국 <러시아 견문>집필
1931: 다시 소련을 여행하며 소련 산업 단지에 대한 최초의 외국인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1936: <라이프> 잡지의 창간에 참여함.
1937: <라이프>를 위한 전속 사진가로 활동.
1938: 체코와 헝가리 등 동유럽을 에스킨 콜드웰과 방문하여 수데텐란드의 광물 채취 작업과 다뉴브 북부 지역을 취재
1939: 콜드웰과 결혼
1939-1940: <라이프>를 위해 런던의 전쟁상황을 취재하고 곧이어 루마니아, 터키, 시리아, 이집트 등을 여행.
1940: 남편 콜드웰과 미국을 여행하며 집필과 촬영, F.B.I. 버크 화이트를 조사하기 시작.
1941: 콜드웰과 함께 중국, 소련 등을 여행, 미국 사진가 중 유일하게 독일의 소련 공격을 촬영함.
1942: 소련에서 강연 여행을 마치고 『러시아 전쟁(Shooting the Russian War)』을 집필. 귀국하여 여성 최초로 미 공군 종군사진가로 근무하게 됨, 콜드웰과 이혼. B-17 폭격기에 동승하여 영국으로 감. 11월-북아프리카의 군사작전 촬영.
1943: 1월 여성 최초로 공군과 함께 폭격에 동행하여 촬영,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이탈리아 전선을 촬영.
1943-1944: 가을부터 이탈리아 네이플과 카시노(Naples and Cassino) 전선 촬영, 44년 봄에는 <그들은 그곳을 퍼플 허트 밸리라고 불렀다(They called it Purple Heart Valley>를 집필. 같은 해 가을 다시 이탈리아를 방문.
1945: 3월부터 10월까지 패튼 군단과 함께 독일내 작전에 동참
1945-1946: <조국이여 안녕(Dear Fatherland, Rest Quietly)> 집필
1946-1948: 인도 여행.
1949-1950: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주의 정책 취재
1951: 전략공군사령부 촬영, 웨스트브룩 페글러, 버크 화이트에 반대하는 반공산당 캠페인을 전개.
1951: 6월 미시간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수여
1952-1953: 한국전쟁 종군
1953: 파킨슨씨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함.
1955: 자서전 집필 시작
1959: 파킨슨씨병의 악화를 막기 위한 오른쪽 두개골 절개수술
1961: 파킨슨씨병의 악화를 막기 위한 왼쪽 두개골 절개수술
1969: <라이프>지로부터 공식 은퇴
1971: 8월 27일 마가렛 버크 화이트 코네티컷 다리엔에서 사망
< 참고 도서 >
사진예술개론/ 한정식/ 열화당미술선서52/1998 - 이 책에서 저자는 <라이프>지의 등장을 다큐멘터리 사진이 꽃피운 최초의 화려한 꽃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다른 작가들 소개 편에도 이미 말하고 있지만 사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도판과 개념들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는 좋은 책이다.
20세기 사진사 / 이토 도시하루/ 이병용/ 현대미학사/ 1998 - 현대 일본에서 사진 전반에 걸쳐 해박한 평론 활동 및 다양한 저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이토 도시하루는 '포토 저널리즘'과 <라이프>의 창간 시대를 3장 <디자인되는 상>이라는 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20세기 사진사를 다양한 테마를 가지고 종횡무진하고 있는 책이다.
대표작으로 보는 세계 사진가들의 사진사상/ 임응식/ 해뜸/ 1999 - 우리 사진계를 대표하는 원로 사진가이자 교육자인 임응식 선생이 세계 사진가들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짤막하게 요약해놓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직접 만난 마가렛 버크 화이트의 인상과 그녀에게서 배울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 사진기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국사진사에 있어서 '한국전쟁' 시기는 더글라스 던컨 등 많은 포토 저널리스트들의 취재 과정에서 우리의 사진사에 다큐멘터리 사진이 만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상식 밖의 예술사/ 정윤/ 새길/ 1996 - 예술사에 접근하고자 하는 입문자에게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정말 뜻밖에 헨리 루스와 <라이프>의 성공 바탕에 깔려 있는 미국 자본주의의 한 풍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라이프>의 성공 바탕에는 '광고'라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재정지원과 미국 보수주의에 대한 소극적 지지, 진보주의에 대한 적극적 지지라는 <라이프>의 이념적 성향이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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