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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Understanding International Conflicts - Chapter 5 -

by 淸風明月 2023.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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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standing international conflicts; An Introduction to Theory and History

 

 

Chapter 5

 

The Cold War

 

20세기 전반부에 있었던 야만적인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졌던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20세기 후반부의 테마는 냉전이었다. 냉전의 놀라운 현상은 제 3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이 강한 패권국이 되었다. 이 둘 사이에 분쟁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결국 전쟁은 국지전에 한정되었고 1989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독일의 통일으로 냉전은 종식되었다.

냉전은 국가의 외교정책에서 두 가지 선택의 역동성을 보여 주는데, 억지와 봉쇄이다. 억지는 두려움을 일으켜 어떤 행동을 그만두게 하는 하는 것으로서 냉전시대에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통이 깊다. 봉쇄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추구하기 위해 소련의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미국의 일련의 정책을 의미한다.

 

냉전의 원인에 대해 3가지 학파가 있다.

첫째, 전통주의 학파이다. 냉전의 원인에 있어 스탈린과 소련이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을 때 소련은 공격적이었고 팽창적이었다. 미국의 외교는 수세였다고 주장한다.

둘째, 수정주의 학파이다. 냉전은 소련의 팽창정책보다는 미국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미국인 전후 강력해지고 소련에게는 없는 핵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휠씬 약했기 때문에 진정한 양극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셋째, 탈수정주의 학파이다. 개디스는 미소 양쪽 누구의 책임도 없다고 주장했다. 전후 힘의 진공에 휘말려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상황구도로 주장을 전개한다.

 

루스벨트의 외교정책은 1930년대 보호주의 피하고 자유무역체제를 원했다. 더불어 오랜 역사를 가진 고립주의적 경향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세상을 그의 방식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가 미국의 국내정치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은 루스벨트의 실수이다. 그에 반해 스탈린은 단기적으로 국내적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전후 전력약화를 러시아의 민족주의에 더 많이 호소했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약간의 경제적 지원을 원했다. 더불어 동유럽에서의 이득을 유지함과 동시에 국내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까지 미국과 소련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긴장의 근본원인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이 소련에서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강하게 협상을 하고 미국이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스탈린의 실용주의에 전술적으로 호소하고 협상하려는 의지를 보였더라면 냉전이 그처럼 첨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냉전의 시작은 필연적이라는 수사보다는 높은 개연성을 의미한다는 탈수정주의자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환경은 유엔의 작동을 방해했고,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제한했으며, 국제체제의 과정이 적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적인 측면인데 과장과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냉전이 시작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냉전에서 미국과 소련의 목표는 구별된다. 소련은 현상유지보다 혁명적 국가로서 팽창주의 선호했고 실질적인 목표나 영토와 같은 소유물을 원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미국은 무형의 목표 또는 국제정치의 일반적 환경을 수립하는 상황적 목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팽창적인 면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구별된다. 첫째, 스탈린은 히틀러보다 호전적이지 않았고 모험적이지 않고 조심스럽고 기회주의적이었다.

 

미국의 목표는 냉전 동안 소련을 봉쇄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이 발생한다. 목표와 수단이 바로 그것이다. 목표에 있어서는 소련을 봉쇄하는 것인지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수단에 있어서도 조그만 힘의 증가에도 봉쇄해야 하는지 세력균형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을 때, 제어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이런 와중에 유고의 독자주의와 한국전쟁은 미국의 목표를 분명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공산주의 노선에서 소련과 결별한 유고의 티토정부를 지원하고 한국전쟁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략보고서인 NSC-68이 맞았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베트남전 참가는 외교정책상에 씻을 수 없는 실수 중에 하나였다.

 

냉전에 餘論에 있어서 결정적 계기는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이었다. 전후 사건까지 냉전의 첨예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핵실험금지조약과 비확산조약을 도출하면서 국제화해 무드 ‘데탕트’를 이끌어냈다.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참가해서 치욕적으로 패배를 경험하면서 미국의 여론은 냉전의 개입에 환멸을 느끼게 만들었다. 소련도 또한 아프카니스탄 전쟁에 패배함으로써 국력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런 데탕트는 1978년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대는 또 다시 적대감이 재개되었다. 이것은 50년대와는 다른 것이다. 그 이유는 전쟁은 불가능했고 핵의 사용은 금지되었으며 무기에 대한 토론과 핵의 제한을 계속한다는 것이 바로 그 규칙이기 때문에 50년대와는 구별된다.

냉전의 시작은 미국과 소련에 의한 유럽의 분할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지만 냉전의 종식도 유럽의 분할이 끝난 시점인 1989년으로 기록할 수 있다. 냉전이 종식된 원인은 미국의 약 40년간에 걸친 강력한 봉쇄정책, 폴 케네디가 주장하는 ‘제국적 과대팽창’으로 국내적인 힘을 소진했기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의 군사력 강화 때문에 소련을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냉전 종결의 가장 중요한 촉발원인은 고르바초프이라는 개인에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개혁과 개방을 하면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전략을 사용했다. 그리고 ‘신사고’라고 부르는 외교정책은 냉전의 종식에 일조했다. 안보를 제공하기 위해 서로 협동함으로써 안보딜레마를 탈출한다는 것이고 팽창정책에 대한 수정에 있다. 중간 원인 면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적 아이디어와 제국적 과대팽창에 있다.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전시효과는 소련에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경제의 1/4정도를 군사력같은 비효율적인 분야에 투여함으로써 제국적 과대팽창을 추구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마지막 근본원인 측면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쇠퇴와 소련 경제의 실패에 있다. 소련은 군사기술 때문에 민간경제의 측면인 경공업보다는 무기나 탱크를 만들 수 있는 근간이 되는 중공업에 신경을 집중함으로써 세계 경제에 대응하는 능력이 저하되었고 서비스 등 기타 3차 산업에 돌릴 수 없었기 때문에 산업 유연성 면에서도 퇴보하게 되었다. 경제학자인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중요한 기술 변화의 물결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창조적 파괴에 있다고 자본주의 우수성을 피력한 바 있다.

 

냉전시대 동안에 중요하게 부각된 문제는 ‘핵’이다. 핵이 있음으로써 전쟁의 성격과 양태를 바꿔 놓았다. 핵개발로 인해 핵전쟁이 발발하면 언제든지 인류가 멸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 때문에 각국은 핵사용에 있어 매우 신중하고 국지전이 발발해도 핵을 사용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 만큼 핵의 위력을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핵의 획기적인 전기를 이룬 것은 수소폭탄의 등장이다. 수소폭탄이 등장함으로써 핵무기가 소형화되었다. 그리고 수소폭탄은 5가지 정치적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첫째, 제한적 전쟁 개념을 부활시켰다.

둘째, 결정적인 순간에 위기는 있었지만 그 중심부에 전쟁은 없었다.

셋째, 핵무기는 억지를 주요 전략으로 만들었다.

넷째, 정치적 영향은 슈퍼 파원들의 분별력이 사실상 레짐을 이루고 발전했다.

다섯째, 대부분의 관료들은 핵무기가 전쟁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여겼다.

이처럼 핵무기의 발전은 ‘공포의 균형’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세력균형을 만들어냈다. 즉, 전쟁은 ‘핵억지’효과에 의하여 전쟁에서 핵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핵 억지는 먼저 상대가 공격을 하더라도 이를 당하는 국가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1개의 핵무기를 날린다는 2차 공격의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핵을 가진 나라에게 먼저 공격하는 것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핵의 무엇이 억지하는 효과를 나타내는가? 라는 물음에 효과적인 억지를 위해서는 피해를 줄 수 있는 능력과 무기가 사용되리라는 신뢰 두가지가 있어야 한다.

 

핵에 관한 이슈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도덕적인 문제이다. 핵을 가진 강대국들은 대기권에서의 핵실험을 제한하는 군축조약을 체결하고 핵확산 금지 조약을 체결하는데도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전쟁이 아무리 도덕적이라고 할지라도 정의롭게 해석될 수 없다. 더불어 인류를 한 번에 멸망으로 이끌 수 있는 핵무기의 존재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이다.

 

 

<STUDY QUESTION>

 

1. 언제 냉전이 시작되었는가? 언제, 왜 끝났는가? 현실주의. 자유주의, 구성주의 시각은 당신의 대답에 어떻 게 기여하는가?

☞ 제 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 독일을 제외한 서구 유럽국가 중에서 미국은 경제적 에서 세계 1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소련 역시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적, 지리 적인 면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과 소련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전화에 국력이 많이 쇠퇴해 졌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극과 극의 성격을 지닌 국가였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바 탕으로 세워진 체제이고 소련은 사회주의를 기초로 해서 움직이기 국가였다. 그래서 두 국가들을 중심 으로 동맹국이 만들어 전후 1945년부터 1989년의 약 40년 이상 냉전을 지속시켰다. 냉전기간 동안 서로 국가안보를 위주로 서로를 견제하였다는 측면에서는 현실주의 시각을 적용시킬 수 있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 이후 데탕트와 상호의존 및 경제협력의 상황에서는 자유주의적인 시각을 냉전에 적용 시킬 수 있다. 구성주의적인 측면에서는 사회문화적 기초가 냉전을 유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서로 각 기 다른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고 이를 동맹국이나 기타 다른 국가들에게 강요하면서 체제존속을 유지하 려는 측면에서는 구성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베트남 침공과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2. 냉전은 불가피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언제 불가피했는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언제, 어떻게 냉전을 피할 수 있었는가?

☞ 그럴 법한 주장은 전후 유럽에서의 권력진공이 미국과 소련,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빨려들어갔을 가능 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환경은 유엔의 작동을 방해했고,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제한했으며, 국제체제의 과정이 적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정치적 측면에서 과장과 이데올로기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2개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전자의 불가피성에 무게를 두고 싶다. 전후 전쟁의 처리과정에 있어 각기 다른 이데올로기적인 측면 양국이 국제평화를 증진한다는 것 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했기 때문에 동맹국이나 팽창, 자기와는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국가에 대 한 방어가 냉전의 불가피성을 높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3.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지도자들은 왜 협력체제를 복원할 수 없었나? 어떤 종류의 체제가 발전했는가?

☞ 이데올로기의 첨예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전쟁의 사후처리에만 비중을 둔 점이 협력체제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로 인한 냉전의 고조는 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전쟁 이상의 두려움과 공포를 늘 지니게 만들었다.

 

4. 냉전의 전개에서 첫 번째 와 두 번째의 이미지는 얼마나 중요했는가? 소련과 소련의 국제적 야심에 대한 미국과 유럽 지도자들의 견해는 무엇이었나? 미국과 나머지 서구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견해는 무엇이었 나?

☞ 첫 번째 이미지는 스탈린의 망상증과 미국 국내의 과장 수사(매카시즘)가 있었고, 두 번째 이미지는 냉 전 초기 전쟁에 의해 소련이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더욱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유발시켰다. 이에 함께 소련의 팽창정책으로 동유럽을 자신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봉쇄 정책으로 소련의 팽창을 막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동맹국들에 대한 철저한 방 어를 했다.

 

5. 일부 역사가들은 “진정한 질문은 왜 냉전이 일어났는가가 아니고 왜 그것이 ‘열전’으로 확대되지 않았 는가? 라고 주장한다. 거기에 동의하는가? 왜 열전은 시작되지 않았는가?

☞ 동의한다. 열전으로 확대되지 않은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양국이 전쟁을 벌이면 제 3차 세계대 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양국이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닌 대리전의 성격이 강하다. 둘째, 핵 무기의 개발로 전쟁에 사용되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과 공포가 전쟁을 감소시켰다. 셋째, 초기 냉전에 있어서는 소련의 팽창정책과 미국의 봉쇄정책을 취해서 극단적인 상황을 유도했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으로 핫라인을 개통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의 증대가 전쟁을 막았다. 그 이외의 여러 많은 조건과 상 황들이 열전보다는 냉전을 유도했다고 생각한다.

 

6. 봉쇄란 무엇인가? 미국의 이 정책은 어떻게 나타났으며 어떻게 실행되었는가? 그에 대한 소련의 반응은 무 엇이었는가?

☞ 봉쇄란 정치적, 경제적으로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추구하기 위해 소련의 공산주의 봉쇄하려는 일련의 정책을 의미한다. 미국은 목표와 수단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목표에 있어서는 소련을 봉쇄하는 것인지 공산주의를 봉쇄하는지 불분명하고 수단에 있어서도 조그만 증가해도 막아야 하는지 결정적인 사건들을 제어해야 하는지 문제였다. 봉쇄정책을 시험할 수 있게 해 준 사건은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정책과 한국 전쟁이다. 트루먼은 유고와 한국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함으로써 소련 패권에 큰 상처를 주었다. 이에 대한 소련의 반응은 팽창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7.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와 어떻게 다른가? 핵무기의 출현은 국가들이 행동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는 가?

☞ 재래식 무기의 사용은 한정된 지역에 있는 인명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핵무기의 사용은 인류 자체 가 멸망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재래식의 무기의 강도와 핵무기의 강도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핵무기의 사용은 인류 멸명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핵무기의 사용과 실험에 있어 서 극히 제한적이고 전쟁의 형태가 슈퍼파워들이 참가가는 세계대전보다는 국지전에서 재래식 무기의 사용 빈도가 늘어났다.

 

 

8. 핵무기가 선진국들간의 주요 전쟁을 무용하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다는 뮐러의 주장은 옳은가? 그는 다른 어떤 요소들을 고려하는가?

☞ 뮐러의 주장은 제 1,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면서 전쟁의 동기를 감소시켰지, 핵무기가 억지하는 효 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뮐러의 주장은 전쟁이 주는 교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현 재의 국제관계에서 힘의 역학관계, 무기의 과학화 정도, 동맹과 국제기구 등을 고려하지 못한 주장이 다. 그러나 만약 그가 수정공처럼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우연과 오산이 산산조각날 수 있다고 생각했 을 것이다. 역시 핵전쟁으로 드려다 본 수정공은 파괴와 멸망, 그리고 통제불능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때문에 국제관계에서 핵억지 효과가 크다고 볼 수 있다.

 

9. 핵 억지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또는 도덕적으로 볼 때 (한 명의 이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메 모리얼 데이에 자동차 사고를 막기 위해 자동차의 앞 범퍼에 어린아이를 묶어 놓는 것과 유사한 것인가? 억지의 일부 전략은 다른 것보다 더 윤리적일 수 있을까?

☞ 자동차에 아이를 묶고 달리는 것과 똑같다. 아이가 앞에 묶여 있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가 감소하는 것 이 아니다. 핵의 사용가능성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핵무기를 전쟁의 수단으로 쓰지 않을까? 라고 조마조마 하는 것보다는 핵무기 자체를 없애는 것이 오히려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 다.

 

10. 핵 억지를 떠나서 볼 때, 핵무기와 국제정치의 관계는 무엇인가? 핵무기는 얼마나 유용한가?

☞ 전쟁의 확대를 방지하고 재래식 무기 외에는 전쟁에 사용할 없다는 각국가간에 암묵적인 사고가 국제 관계에서 존재한다. 핵무기는 1번 사용에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국제관계에서 영향력 은 존재하지만 핵무기의 사용이 유용하지는 않다.

 

11. 핵 우위는 중요한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핵 우위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 핵 우위는 중요하지 않다. 1개 핵무기가 인류를 1번에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핵무기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다. 혹자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이 핵 우위를 갖고 있어 전쟁으로까지 이어지지 않 았다고 주장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위기라든지 전쟁이라든지 발발하게 된다면 ‘핵’이라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근저 사고에 문제가 있다. 핵 우위는 끊임없이 핵을 선택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개연성을 남겨 놓고 있기 때문에 핵을 감축하고 일정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

 

 

연대기 : 뿌리깊은 냉전의 시기

 

1943년 11월    스탈린, 처칠, 루스벨트의 테헤란 회의
1944년 7월    브레튼우즈 회의 :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창설
1944년 8월    덤바턴 오크스 회의 : 유엔의 창설
1944년 10월    처칠과 스탈린의 모스크바 회의 : 발칸 국가들에 대한 영향 계획
1945년 2월    스탈린, 처칠, 루스벨트의 얄타회담
1945년 4월    루스벨트의 사망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
1945년 4 ~ 6월    샌프란시스코 회의 - 유엔헌장 제정
1945년 7월    최초의 핵무기 실험; 트루먼, 처칠/애틀리, 스탈린의 포츠담 회의
1945년 8월    핵무기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파괴; 소련의 아시아 참전
1945년 9월    일본의 항복
1946년 3월    처칠의‘철의 장막’연설; 그리스 내전의 재개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선언
1947년 6월    마셜 플랜 선언
1947년 10월    모스크바에 의한 코민포름 창설
1948년 2월    체코 공산당의 쿠데타
1948년 3월    베를린에 대한 부분적 봉쇄 시작
1948년 6월    베를린에 대한 공수시작;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축출
1948년 11월    트루먼의 재선
1949년 4월    워싱턴에서 북대서양 조약의 서명
1949년 5월    베를린 봉쇄의 종결
1949년 8월    소련의 최초의 핵무기 발사
1949월 9월    독일연방공화국 탄생
1949월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독일인민공화국 선포
195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중소 협정의 서명
1950년 4월    NSC-68의 초안 작성
1950년 6월    한국전쟁 시작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1953년 6월    동베를린 혁명
1953년 7월    한국에서의 휴전
1953년 8월    소련의 최초 수소폭탄 실험
1953년 9월    흐루시초프의 소련공산당 서기장 취임
1954년 9월    중국의 퀘모이와 마츠 폭격
1955년 5월    독일의 NATO가입; 바르샤바 조약의 서명;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의 서명;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1956년 2월    제 20차 당 회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난
1956년 6월    폴란드의 포즈난 봉기
1956년 10월    헝가리 봉기의 시작
1956 11월    부다페스트에 대한 소련의 개입
1957년 8월    최초의 소련 ICBM 의 발사
1957년 10월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
1958년 2월    최초의 미국 위성 발사
1958년 8월    중국의 대만 위협
1959년 1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승리
1959년 9월    흐루시초프의 미국 방문
1960년 2월    프랑스의 첫 번째 핵실험
1960년 5월    소련 영내에서 미국 U-2 정찰기의 격추; 파리정상회담의 실패
1961년 4월    쿠바에서 피그만 상륙작전의 실패
1961년 6월    흐루시초프와 케네디의 비엔나 회담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의 건설
1961년 10월    베를린의 체크포인트 찰리 사건; 긴장의 고조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죠셉 나이의 Understanding international conflicts의 Chapter 5의 마지막 장 ‘연대기 : 뿌리 깊은 냉전의 시기’에서 발췌

 

 

[첨부파일]

understanding_international_conflicts5.pdf
0.2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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