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entio ergo sum

기본소득의 역사와 현재

by 淸風明月 2013. 12. 5.
반응형

 

 

[기고] 기본소득의 역사와 현재 - 김성일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

 

기본소득의 역사

 

기본소득은 지역과 사람에 따라 기본소득, 시민소득, 보장소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기본소득이 어느 한 사람의 돌발적인 주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논쟁의 역사를 통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기원을 따지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18세기 프랑스에서 기본소득과 철학적 맥락을 공유하는 주장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자코뱅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의 연설에서 사회는 성원 모두에게 물질적 · 사회적으로 살아갈 권리를 최우선적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전제군주적 정치경제'가 탈취 과정에서 비롯되며, '민중적 정치경제'를 위해서는 재산을 탈취당한 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토머스 페인은 이 '탈취'와 '보장'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토지가 자연적 유산이라는 논리에 따라 '토지독점'을 수탈로 규정지었고, 자연적 유산을 상실한 모든 이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방법으로 사유지에 대한 과세를 통해 ‘국가 차원의 기금’을 창설하고, 21살 이상의 모든 이들에게 매년 총액 10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그가 이 모든 조치를 사회성원에 대한 '자비'가 아니라 사회성원의 '권리'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샤를 푸리에 역시 자신이 제안한 새로운 공동체 아이디어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의식주에 필요한 소득을 무상으로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이 아이디어는 푸리에주의 작가인 죠셉 샤를리에가 한층 더 구체화하였는데, 그는 모든 시민에게 의회가 매년 정하는 금액을 매월 조건 없이 지급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기 시작한 것은 영국 옥스퍼드의 경제학자 조지 D. H. 콜에 의해서이다. 그는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를 통해 사회보장을 ‘사회배당’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는데, 1953년에 출간된 자신의 책 <사회주의 사상사>에서부터 명확하게 ‘기본소득’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벨기에에서 스스로 ‘샤를 푸리에 서클’이라 지칭한 이들이 '개인의 생활에 필요한 돈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매달 지급하라'라는 선언을 발표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이들은 기본소득에 대한 몇 가지 원칙을 정립했고, 그 원칙들은 지금까지도 기본소득의 원칙으로 합의되고 있다. 그들은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동안 같은 생각을 가진 세계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유대는 점점 부피가 더해져 1988년에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Basic Income Europe Network)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Basic Income Earth Network)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에 들어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간간이 있어왔지만, 그 논의와 요구가 작게나마 집단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회양극화와 복지의 시장화, 여기에 고용조차도 명확하게 줄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새로운 사회시스템 구축의 한 방법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확산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분배도, 고용도 없는 성장시대

 

최근의 지하철 역사에는 무인 발권기가 창구를 대신하고 있다. 지하철, 사무실, 공장, 병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 있던 자리에 기계가 들어서고 있다. 일자리는 분명히 줄어들고 있다. 우리 사회의 빈곤과 실업, 양극화 문제는 더 이상 '고용창출'이라는 말이 해법으로 작용할 수 없다. 임기 중 600만 개 일자리 창출을 약속한 이명박 정권은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는 데에 분명히 실패했다. 쌍용차 사태에서 보듯 오히려 해고는 폭발적으로 늘었고, 희망근로를 위시한 정부주도의 일자리들은 안정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생산적이지도 않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정부는 해고유연화와 복지축소를 감행한다. 서민들의 목을 조르는 정책기조에 대해 정부는 '경제위기'를 방패로 내세우고 '트리클 다운'을 우상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올해 대기업 2분기 매출은 사상 최대수준을 기록했고, 그 '성장'은 가계경제에 보탬이 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체제는 '분배 없는 성장'과 함께, '고용 없는 성장'을 계속 경신 중이다. 이러한 악화일로에 대한 해답으로 정부는 '더 큰 신자유주의'를 내세운다. 절벽으로 질주하는 자동차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되레 속도를 올려야 한다는 소리다. '트리클 다운'은 허구다.

 

 

빚잔치 대신에 기본소득을

 

공장은 하나 둘 문을 닫는다. 서민들에게 생산품을 구입할 능력이 없으므로. 정부는 서민들에게 요구한다. 기업들이 무너지니, 물건을 사라고. 내수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서민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라고 모를리 없다. 서민들의 삶터에 순방을 나서며 '정부 탓 하지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훈시만 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점도. 이명박 정부가 위기도 벗어나고 고집도 지키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신용카드 가입기준을 완화하고, 대출상품을 늘리는 것. 그리 먼일도 아니다. 최근 아이돌 그룹을 내세워 '고객을 생각한다'는 광고를 내보내는 모 카드회사는 회원 메일로 '빚테크'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그리고 10년 후의 목숨을 담보로 서민들의 주머니에 대출금이 채워질 때, 그들은 외친다.

 

 

“질러라!”

 

거품은 무한정 커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우리도 미국처럼 거품대폭발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다. 이것이 선진국을 따라잡았다며 축배를 들 일은 분명히 아니다. 문제는 단순하다. 서민들 주머니에 돈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가 단순하면 해답도 단순하다. 주머니에 돈을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주머니에 돈이 채워지면, 내수는 활성화되고 가계 부채는 줄어들 것이다. 내수의 활성화는 생산을 증대시키고, 생산의 증대는 고용 확대를 낳는다. 트리클 다운이 아니라, 역(逆)트리클 다운이 필요한 시기다. 부자 감세로 채워진 재벌의 재화는 곳간에서 썩을지언정 흘러넘치지 않는다. 우물에 물이 넘쳐 흘러내리길 바랄 것이 아니라, 물을 퍼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조건도,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은 그만큼 단순한 이야기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