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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이야기 하다

보수동 키드에서 사진가로, 김홍희

by 淸風明月 201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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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길어 올린 사진가의 꿈  - 글/사진 이상엽(사진가)<월간사진 2008년 4월호> 

 

요즘 내가 하는 일이 책 보고, 사진 찍고, 글 쓰고, 책 만드는 것이 전부라 조금 심심하기는 했다. 그래서 젊은 시절 본색으로 돌아가 ‘진보신당’의 평당원이 됐다. 정치할 생각할 눈곱만큼도 없지만 프리랜서만 ‘13년차’이다보니 사회와 조직이 그립기도 했다. 그래서 뭔가 신념대로 살 방법이 없나를 고민하다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당에서는 덜컥 ‘홍보대사’라는 직함을 줬다. 이런! 함께 일할 사람들의 면면을 보니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애마부인’의 김부선, 평론가 진중권, 소설가 김탁환 등등 꽤나 얼굴이 알려진 이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나 요즘 홍보에 사진만한 것이 있으랴? 이왕 명을 받았으니 열심히 사진 찍어 ‘당을 알리는 일을 하면 되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대략 난감! 그래서 다시 ‘배다리’로 갔다.

동인천역 근처 배다리는 지난 연재 ‘최종규편’에 등장했던 ‘사진책 도서관’이 있는 바로 그 곳이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드디어 산업도로에 의해 마을이 양단 날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글 말미에서도 약속한 바가 있어 배다리를 다시 찾아야 했다. 그런데 혼자는 재미없다. 그리고 뭔가 진보신당을 알리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진보를 향한 작은 사진여행>이라는 공짜 여행상품을 내놨다. 그리고 며칠 후 내 불순한(!) 낚시밥을 덥석 하고 물은 블로그 이웃 6명과 함께 배다리를 찾았다. 한산한 거리에 느닷없이 등장한 카메라 멘 7명의 사람들로 배다리 헌책방 골목의 고요가 깨졌다.

하지만 이곳에는 우리 같은 이들이 필요하다. 북적이는 인사동에서 대포 같은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 당연 불청객 취급을 받겠지만 이곳에는 그런 사람이라도 등장해야 뭔가 사람 사는 동네 같다. 아마추어사진가들이여! 부디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기억해 주오.

헌책에서 풍기는 서향이 좋더라

우리들은 이제 7개 서점 밖에는 남지 않은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돌아다녔다. 산업도로 공사장에서 보름째 천막농성 중인 지역 문화 활동가 깨독스에게 공사현황과 앞으로의 투쟁방향도 듣고, 왜 이 지역이 “나름 보존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게 들었다. 함께 동행한 사람들은 슬슬 이 골목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헌책방 운동가 최종규씨의 ‘사진책 도서관’을 방문한 일행들은 개인이 모아낸 방대한 장서에 놀라워했다. 나 역시 첫 방문 때 한 이야기지만 함께 동행한 이들은 “나중에 꼭 다시 와서 천천히 보다 가겠습니다”를 연발했다. 아쉬운 것은 한번 방문해서 볼 수 있는 그런 양의 책들이 아니기도 했고, 집이 먼 이들이 이곳을 다시 찾기란 그도 역시 쉽지 않은 노릇이란 점이다. 어찌하면 이곳을 수도권의 명물로 만들까. 먼 거리를 마다않고 카메라 한대 메고 찾을 만한 거리로 만들까. 이 헌책 가득한 곳에서 진보를 꿈꾸는 오지랖 넓은 사진가의 희망사항이다.

중국 화상이 영업하는 중국집에 들러 고슬고슬 잘 볶아진 볶음밥을 한 그릇씩 시켜먹고 우리는 배다리 최고의 헌책방 아벨서점에 들렀다. 아벨서점은 두 곳인데 한 곳은 최근에 만든 시문학 전문서점이자 책 박물관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 건물 2층에 마련됐다는 시집 전문 박물관을 보고는 놀라버렸다. 그것은 헌책에게 바치는 헌책방 주인의 오마주였다. 나무로 꾸며진 실내에는 근현대 중요한 시인들의 초간본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신동엽, 김지하, 고은, 신경림, 정희성, 박노해 등등. “사라지는 것, 낡은 것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바로 아벨서점 주인아줌마의 본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헌책방 주인아줌마의 책 사냥꾼으로서의 소질을 직감했다.

소설가이자 영화평론가인 존 백스터는 조지 루카스, 로버트 드니로, 우디 앨런, 펠리니 등의 전기작가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가 더 유명한 것은 소문난 책 사냥꾼이기 때문이다. 책 수집가 또는 컬렉터라고도 불리는 책 사냥꾼들은 처음에는 헌책방을 돌아다니지만 조금 더 빠져들면 지방의 벼룩시장이나 상가집, 경매소까지 드나들게 된다. 그리고 수집하는 책도 다방면의 책을 수집하다가 장르가 생기고 최종으로는 한 작가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 작가에게 미치면 출판사 쓰레기통을 뒤져 육필원고를 찾고 책에 저자 사인을 받기 위해 우연을 가장한 스토커 흉내를 내기도 한다. 백스터의 책 <책 사냥꾼, 어느 책 중독자의 수다>(동녘 간)는 바로 책 사냥꾼의 세계를 그린 자전적인 논픽션이다. 하여간 책에 미친 나 같은 사람이 홀딱 빠져서 읽고 또 읽을 만한 명저(?) 중 하나이다.

하지만 책 사냥꾼들이 종횡무진하는 서구의 책 수집 역사와 달리 아직 우리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우리사회에서 헌책을 컬렉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중 한사람을 오늘 만난 것이다. 헌책방 주인이라는 이점도 있겠지만 시집만을 꾸준하게 수집해 온 아벨서점 아줌마의 책 사랑이 그렇게 가슴 뭉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아줌마를 따라 원조 아벨서점에 들어갔다. 수만권의 책이 정갈하게 꽂혀있다. 그냥 쌓아 놓은 것이 아니라 주인에 의해 분류되고 수리되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서향에 취해 이 책 저 책을 보다가 아는 이의 책을 발견했다. 사진가 김홍희의 책 <방랑>(마음산책)이다. 사진책 서가에는 <나는 사진이다>(다빈치)도 있다. 그가 사진을 맡았던 미국인 승려 현각의 이야기 <만행>(열림원)도 있다. 아마도 50만부쯤 팔렸으리라. 그러고 보니 우리 사진판에서 책을 가장 많이 판 이는 김홍희가 아닐까. 그래서 그를 만나러 부산으로 갔다. 이왕이면 헌책으로 가득한 부산 보수동 골목이 만남의 장소로 좋았다.

 

 


보수동 키드, 사진가가 되다

부산 국제시장 언저리에 자리한 보수동 헌책방 골목. 대로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골목에는 30여개의 서점들이 연이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만난 사진가 김홍희는 말쑥하지만 경쾌한 옷차림에 잘 정돈된 콧수염을 하고 있다. 우리 사진판에서는 보기 드물게 ‘패션어블’한 인물이다. 1년 365일, 방금 산에서 내려온 듯한 필자나 주변인물들의 차림새와는 판이하다. 골목 사이로 비켜든 따듯한 봄 햇살을 맞으며 함께 헌책방을 순례했다. 그는 어린시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했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 이곳은 그에게 거의 유일한 생각의 도피처이자 장차 사진가가 될 소양의 거처였다고 한다. 

Q : 처음으로 만든 단행본은 어떤 것이었나?  
A : 1997년 <암자로 가는 길>(열림원 재출간)이다. 소설가 정찬주씨가 글 필자로 함께 했다. 지금도 나가고 있으니 꽤 팔린 책이다. 열림원에서 개정판을 낸 후 7쇄 정도 찍은 것 같다. 내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후 돌아와 주로 하던 일은 <모닝캄> 같은 사외보 일들이었는데 우연히 샘터출판사에서 일하던 정찬주씨에게 사찰 사진이 있는 엽서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에게 중앙일보가 연재를 제안한 때였다. 그래서 둘이 한 달에 두 번 산사를 돌아다니며 신문에 1년 정도 연재를 했다. 독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래서 한권의 책으로 묶게 됐고 글과 사진이 함께 어울리는 책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지만 의외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덕분에 단행본 출판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20세기 말, 365명의 얼굴을 담은 김홍희의 사진책 <세기말 초상>. 사진가이자 갤러리 대표, 스튜디오 대표를 맡고 있던 열정의 시기에 만들어진 책이다.

Q : 지금까지 참 많은 책을 만들어 왔는데 가장 아끼는 책이 사진책 <세기말 초상>이라고 들었다.
A : 나의 아이덴티티(정체성)는 시류를 쫓지 않는 도도함에 있다고 본다. 스스로 “도도하게 한 세상”이라고 자신을 추스린다. 설산을 찾아가는 부처님 모습처럼, 광야로 나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처럼,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처럼 이치를 향해 다만 갈 뿐이다. 나는 뉴스를 쫓지도 이슈를 쫓지도 않는다. 다만 내 삶의 일상을 사랑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많은 시간과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별이 있어 하늘이 되는 것처럼 내 삶 역시 여름날 쏟아지는 폭우 속의 온전한 한 방울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 사진책 <세기말 초상>은 그런 사유의 결정이자 실천의 집약이라고 본다. 

Q : 포토저널리즘 또는 다큐멘터리사진에 종사하는 이들은 잡지 등 매체를 통해 돈을 번다. 하지만 단행본을 통해 돈을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꼭 팔린다는 보장도 없고, 아직도 책은 돈을 버는 수단보다는 명예를 얻기 위한 방법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A : 나는 책을 만들 때 꼭 인세로 계약한다. 어떤 책은 정말 안 팔려 푼돈을 쥘 때도 있지만 어떤 책은 수십만부씩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진가들이 이 방법만을 선택할 수는 없다. 일본의 ‘고단샤’처럼 대형 출판사들은 많은 사진가들과 관계를 갖는데, 이는 일본의 출판시장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 마니아층을 겨냥한 다종의 고가 책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이는 사진가들에게 잡지기고하듯 단행본 일을 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현재 우리 출판에서 사진가가 살아남는 방법은 혼자 찍고 혼자 쓰는 것이다. 철저한 작가의식이 없으면 출판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 같다.

Q : 많은 출판사와 관계를 맺어왔고 지금도 많은 편집자와 관계를 갖고 있다. 그들은 사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A : 이미지를 사용하고 싶어 할 뿐 사진에 전문적인 편집자는 거의 없다. 단지 글에 부응하는 사진을 원할 뿐이다. 그들은 사진이 책의 중심이 되는 편집을 본 일도, 만들어 본 일도 없다. 단지 보기에 좋은 사진이 아니라 독자들이 반응하는 그런 사진을 골라내는 것이 디렉터의 역할인데 그런 눈을 가진 이가 별로 없다. 디자이너 역시 사진을 글의 종속물로 읽는다. 현재로서는 그런 관행을 깨기 힘들다. 내 책 <방랑>(마음산책 간)의 경우 사진과 글이 따로 가는 듯 보이지만 독자들이 보고 난 후 시너지를 일으키는 책이다. 책의 사진은 글을 설명하는 사진이 아니어야 한다. 나름 의미 있고 글과 함께 모여 폭발력을 만드는 사진 말이다.

Q : <방랑>은 정은숙이라는 출판계의 스타 편집자가 만든 책인데….
A : 당시 정은숙씨는 <만행>의 담당 편집장이었다. 하루는 정은숙씨가 정준모 열림원 사장과 이해인 수녀, 허문영 동아일보 기자 등과 함께 현각스님 원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우연히 참석했던 내가 이 책은 “사진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왜 사진이어야 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포토제닉하게 생겼잖아요.” 그때 정은숙씨와의 인연으로 마흔 넘어 쓴 글과 사진을 보냈다. 그런데 사진이 칙칙하다고 책을 안 내주는 거다. 그런데 그 사진들로 내가 만든 엽서를 보더니 “제가 사진을 잘못 봤나 봐요”라며 금세 책을 냈다. 하지만 시대를 조금 빨리 앞서간 탓인지 이 책은 초판에서 끝나고 말았다. 개정판도 나왔지만 다시 뜨기는 정말 힘들다.(웃음) 나름 이 책은 문학적 글쓰기를 한 책이라 사진판에서는 안 봐줬지만 문학판의 몇몇 평론가들은 좋은 평가를 해준 책이다.

<나는 사진이다>의 괴력?

그도 이렇게 보면 출판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출판경력 뿐 아니라 사진판 안에서의 위상까지도 제고하게 만든 책이 있으니, 바로 <나의 사진이다>(다빈치 간)이다. 이 책은 기획단계부터 특별했고, 꽤 많이 팔렸으며, 사진책으로 흔치 않게 영문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싱가포르에서 출판된다. 

 


Q : <나는 사진이다>의 기획에 대해 들어보자.
A : 사실 나는 아마추어 사진클럽이 어떤 게 있는지도 몰랐다. 제자 중에 한명이 니콘클럽 회원으로 있었는데, 뭔가 클럽의 분위기와 내게서 배운 것이 잘 맞지 않았나 보다. 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길래 내가 직접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그리고 글을 올렸다. 철학적으로 써봤더니 아무도 안 봐!(웃음) 조금 쉽게 썼더니 보네. 그래서 연재한 글이 ‘날 때부터 프로냐?’였다. 그리고 그곳 회원들이 댓글을 달면 빠지지 않고 응답을 했다. 전략적으로 달은 것이다. 회원들이 궁금해 하는 모든 것, 그것을 파악하고 자극해가면서 집필을 했다. 한 1,200매 정도 나왔다. 꽤나 인터넷에서 회자됐다.

Q : 인터렉티브한 인터넷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한 셈이다. 
A : 하지만 꽤나 고생한 책이다. 처음에는 유명 출판사에 갔다가 거절을 당했다. 원고가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다빈치출판사로 갔고, 그들도 원고를 들고 한 달 이상을 고민했다고 한다. 정말 책의 운명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Q : 하지만 책의 명성만큼이나 많이 나간 것은 아닌 것 같다.
A : 책이 ‘사진’으로 분류되지 않고 ‘에세이’로 분류되는 바람에 약간 손해를 봤다. 아무래도 정확한 분류가 책을 찾는 이들에게는 필요한데, 서점에서 한번 정해진 분류는 바꿀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싱가포르에서 영문판으로 책이 나온다는 것이다. 번역원의 지원사업으로 선정돼 영문 번역작업이 이루어졌다. 사진분야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들었다.

Q : 앞으로 어떤 책을 내고 싶은가?
A : 사진에 대한 철학서를 쓰고 싶다. 강의를 채록해 둔 것이 있다. 그중에 핵심 화두가 되는 이야기를 건져내 책으로 묶고 싶다. 기술서는 충분히 나왔다. 그리고 이론가들은 너무 고고하다. 그 중간에서 교양을 전달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지식의 단순 수입보다는 경험과 실천에서 오는 사진가들의 지식에 독자들이 반응한다. 하지만 책은 작가 혼자 내는 것이 아니다. 헤밍웨이도 “내 책의 40%는 출판사가 썼다”고 하지 않았나? 출판사 사장, 편집자, 디자이너 등 작가와 함께하는 이들은 많다. 이들이 바로 책의 공동필자들인 것이다. 나는 이런 원칙 속에서 꾸준히 출판작업을 해볼 생각이다.

그에게는 작가로서의 출판 일 외에 사진을 가르치며 조직하는 ‘일우’라는 사진집단이 있다. 그는 한국사진판에서는 드물게 일우를 커다란 사진집단으로 키워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이 집단에 둘러쌓여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나는 강운구선생이 이야기한 “작가는 외로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그래서 솔직히 사진가 김홍희가 걱정된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기나라 사람의 우려’이었으면 한다. 아직도 그에게는 풀어내지 못한 ‘경상도 사내의 구라’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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