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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이야기 하다

또 하나의 한국인 - 이재갑 -

by 淸風明月 201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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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한국인 - 이재갑 -


갤러리 와 2006년 10월 11일 ~ 2006년 11월 15일

“또 하나의 한국인”

오늘의 한국사회가 처한 현실과 상황은 분단으로 인한 6.25전쟁의 영향과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분단시대가 배태해놓은 모순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는 창작이 문학과 예술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사진가들 또한 민족 분단의 모순과 그 극복, 반전, 나아가 통일실현에 관심이 높다. 구자호의 “판문점” 김녕만의 “임진각” 이상일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재갑의 “혼혈인(국제가족)” 국수용의 “매향리” 등의 작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재갑은 14년 동안 “혼혈인(국제가족)”작업에 천착해온 사진가이다. 그는 한명의 혼혈인(국제가족)을 카메라 앞에 세우기까지 1년 혹은 2년에 걸쳐 설득할 정도로 가슴으로 사진을 찍는다. 주제의 깊이와 통일, 나아가 작업의 지속성에 있어서 인간이라는 한 주제만을 집요하게 파고든 사진인생 53년의 최민식, 79년 이후 한국을 비롯하여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일관되게 소외된 계층에 관한 작업을 해오고 있는 윤주영, 15년에 걸쳐 분교를 기록해오고 있는 강재훈, 15여 년 동안 루마니아,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난민 등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민초들의 삶을 기록해 오고 있는 성남훈 등과 함께 이재갑은 작업의 일관성을 통해 사진가 스스로 작업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다.

이재갑의 작업은 도덕성이 파괴된 전쟁의 폭력상태가 여성들의 삶을 강간과 겁탈의 위험 속에 내몰았음을, 또 살아가기 위해서 여성 스스로 미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서 출산된 혼혈인(국제가족), 그들의 반쪽 운명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버려진 한국인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한국인이 되었을 때, 전쟁으로 강요당한 한국 여인의 눈물어린 삶은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혼혈인(국제가족) 중에는 어머니와 미군 아버지와의 사랑의 결과로 태어났거나 정상적인 결혼생활로 태어난 사람도 많다. 그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연령층의 혼혈인(국제가족)의 존재는 혼혈인(국제가족)의 문제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현실적 상황임을 제시한다. 특히 외모와 피부색이 다른 가족사진에서 정교하고 세심하게 가슴 저밈을 표현해 내었다. 인간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집단이자 구심점인 가족의 쓰라림이 민족사적 슬픔임을 애절하게 울려준다.

이재갑의 14년에 걸친 작업은 혼혈인(국제가족)의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축적하여 혼혈인(국제가족)에 관한 다각적이고 통시적인 개념을 담아내었다. 그의 전시회가 순혈주의에 눈멀었던 차별과 냉대의 시대를 넘어 혼혈인(국제가족)에 대한 갈등과 모순을 일소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글 / 이기명 (갤러리 瓦WA 디렉터)













< 작업노트 >

또 하나의 한국인

한국에서의 주한미군 주둔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설명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일본은 36년간 한국을 지배했었다. 그러나 미군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이 땅에 60년이란 긴 세월을 주둔하고 있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라 앞으로도 무기한으로 주둔할 것처럼 보인다. 미군이 주둔한 대한민국 어느 곳이든지 혼혈인들은 있다. 혼혈인들은 제주에서 동두천까지 전국 각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국제화, 세계화 되어가는 오늘날 지구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사회나 국가 안에서의 다민족, 다인종, 그리고 혼혈이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혼혈인이라는 정체성은 당사자들에게는 큰 아픔이며 정상적인 인생행로를 가로막는 하나의 굴레이기도 하다.

혼혈인에 관한 보편적인 정의는 펄벅여사가 미군과 아시아지역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을 아메라시안(Amerasian)으로 부른데서 유래한 것으로 미국계 혼혈을 의미한다. 또 한국정부는 `1950년 이후 미군과 한국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와 3세`를 혼혈인으로 정의했다.한편 혼혈인들은 자신을 가르켜 ˝half-person˝ 또는 ˝half-blood˝라고도 하는데 이는 미국에도 한국에도 속하지 않은 반쪽 인생의 사람들이라고 자조하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혼혈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계 혼혈인의 출생은 1947년부터 시작되었다. 혼혈인의 출생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한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 된 후 실시된 미군정과1950년 6.25전쟁으로 인한 UN군의 참전, 그리고 UN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미군의 계속 주둔으로 인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그 원인이다. 혼혈인은 출생 시부터 외모와 피부색의 차이뿐만 아니라 이들의 출생상에 개입된 윤리적 문제로 인해, 순수혈통주의의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봉건적 윤리적 가치관이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 거부되고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다.

1992년 혼혈인에 대한 작업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촬영 준비를 하고 약속한 이영철(36세, 경기도 부평)씨를 만나기로 했다. 첫 만남이었는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처럼 편안하게 나를 대해 주었다. 혼혈에 장애까지 가졌으니 조금은 모날 거라는 만나기 전까지 가졌던 선입견을 일시에 잊게 만들었다. 태어날 때만 해도 건강했던 이영철 씨는 어린 시절 심한 감기몸살을 앓아 어머니가 집에 있던 감기약을 어린아이에게 먹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약이 독했던지 심한 구토와 함께 전신마비가 왔다고 했다. (그 약은 미군부대에서 구입한 성인용도의 감기약이었다.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그의 얼굴에서 풍겨져오는 따스한 눈길이 참으로 맑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바라보며 얘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눈망울 속으로 빨려 들어 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들의 눈빛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던 것 같다.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듯 슬프면서도 맑고 순수한, 그러나 때로는 분노의 눈빛까지도...

그들의 삶속에 보고 배운 건 한국에서의 혼혈이라는 것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시대의 아픔으로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경제의 비약적 성장을 거듭함에 따라 사회 각 분야별 복지에 눈을 돌려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1978년부터는 혼혈인 월정 생계비 지원사업을 하고 있으나 구호사업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마저도 대한민국이 OECD회원국이 되면서부터 미국 펄벅재단의 지원도 끊긴 상태다. 미국정부도 이들의 이민을 공식적으로는 허용하고는 있으나 `한국전쟁의 영향`을 1951년 1월1일부터 82년 10월 22일 이전 출생자로 한정하고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고 규제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개척해 보려는 혼혈인들에게 또 하나의 좌절을 주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한국과 미국정부의 제도적인 대책이나 뒷받침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급선무인 것은, 우리가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감추지 말고 이들이 전쟁이라는 인류의 부끄럽고 아픈 역사 속에서 생겨난 시대의 희생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들에 대한 편견을 접고 혼혈인들을 진정으로 더불어 사는 우리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Another Korean

The stationing of US army forces in South Korea is an issue that cannot be explained or addressed by any simple means. Japan`s governance on Korea ceased after 36 years of occupation whereas US forces have occupied this land for as long as 60 years since the Korean War, and the states are expected to last for an unlimited period of time under the provisions of the Korean-American Mutual Defense Treaty and the SOFA.

Wherever the US forces are stationed is found `the mixed-blood`.The mixed-bloods are scattered across the nation from Cheju-do Island in the south to Tong-du-cheon in the north. Mixed-blood, multi-ethnic, or multi-race would be natural to certain society or nations considering the current international stream of globalization. However, being a mixed-blood in Korean society means a great pain and an obstacle to average decency of human life.

`Mixed-blood`was first defined as ˝Amerasian˝ by Mrs. Pearl S. Buck, referring to the American-Asian children born between US soldiers andindigenous Asian women. Our government defined it as ˝the second and third generations born between US soldiers and indigenous Korean women since the year 1950˝.On the other hand, the people with so-called `mixed-blood` cynically call themselves as ˝half-person˝ or ˝half-blood˝ in the sense that their identity belongs neither to the American nor to the Korean society.

The birth of the `mixed-blood` by American father and Korean mother, which accounts for the most cases in Korea, began in 1947. It was resulted from a few historical contexts that our country has been through : the American military occupancy on the Korean peninsular after our nation`s independence from Japanese colonization at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in 1945; the UN forcesjoining in the Korean War in 1950, and the continued stationing of US forceswhich accounted for the majority of the UN forces. Not only different skin colors but also illegitimacy of their birth have been the ground for the refusal and isolation turned to them in our mono-ethnic society that is still deeply rooted in pre-modern conservatism.

My project for the people of `mixed-blood` was briskly proceeding when I made an appointment with Young-cheol Yee (36 yrs old, living in Bupyong, Incheon). He made me feel at home as if a long-term friend. A certain degree of nervousness that I had expected from a handicapped `mixed blood`like him was soon proved a pure prejudice. He used to be a strong boy before falling into general paralysis due to flu medicine that had been taken to treat his cold. The medicine had been prescribed from a US military camp for adults only.
His eyes, shining through the deformed face, were warm and clear. I felt magnetized into his eye balls looking at and talking with him for a while. It was such an experience that made me decide to contain their eyes in my lens - clear but sad and sometimes furious with the painful history cherished. What I learned from their life is that the pain of their life is not a personal but a social issue that should be collectively addressed with proper awareness of our history.

As part of social welfare program after the economic improvement since 1970,the `mixed-blood`have also been covered by monthly living-cost supports. However, they do not go beyond the nature of charity, and our entry into OECD has stopped the sponsorship of the Pearl Buck foundation. The US government has officially permitted the immigration of the `mixed-blood`, but frustrated many hopefuls by limiting `the effect of the Korean War`to those born between January 1, 1951 and Oct. 22, 1982 and setting up other various strict conditions and regulations.

It is imperative that the two governments of Korea and US support these disadvantaged people with systematic provisions and measures. However, what is urgent for us, first of all, is to stop refusing or hiding their existence as such and to be aware that they are victims of our shameful and painful history of war and include them into our neighbors to live with.


< 약력 >

이재갑(Lee, Jae Gab, 李在甲) 66년 4월 20일, 대구생

학력
계명문화대학 사진과(85년 졸)
광주대학교 산업디자인 사진전공 (87년 졸업)
상명대학교 대학원 순수사진 졸업(2001년 8월)
현 사진가, 영남대학교, 부경대학교(부산), 예술대학교 강사

개인전
1991년, 무대뒤의 차가운 풍경(대구동아갤러리/구미 동아갤러리)
1997년, 혼혈인-내안의 또 다른 초상(서울삼성포토갤러리/대구동아미술관)
2000년, 식민지의 잔영(서울 갤러리 룩스, 대구 고토 갤러리)

단체전
1993 사진,미래색전(젊은 사진가모임 주최),대구대백프라자갤러리
1994, 전쟁그이후전(한국 다큐멘터리학회 주최),대구동아갤러리
1994년, 우리의 땅, 우리의삶,우리전(젊은사진가 모임주최),대구문화예술회관
1995년, 분단그리고...전, 서울 삼성포토갤러리
1996년, 맥전, 대구문화예술회관
1996년, 젊은 바람전, 대구문화예술회관
1997년, 젊은사진가전, 대구문화예술회관
1998년, 현대사진영상학회전, 대구문화예술회관
1999년, 젊은 사진가전(부제-Straight Photography), 대구문화예술회관
1999년, 전쟁그이후전Ⅳ, 대구동아갤러리
2000년, 전쟁그이후전Ⅴ, 대구고토갤러리
2000년, 성의 사회성과 몸의 접근전(젊은사진가전),대구문화예술회관
2002년, 사진교류전「Asian Crossingːvol.1 韓國×日本」교토예술센터/대구문화예술회관

<초대전> (단체)
2002년, 하남국제사진페스티발 국제청년작가전, 하남 특별전시관
2003년, 계명문화대학 교수 미전 , 구미문화예술회관
2003년, 「눈 . 밖에 . 나다」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덕원갤러리 서울
2003년, 한국현대사진의 조망Ⅱ제 2회 동강사진전
2004년 동강사진축전 “33의 다큐멘터리전”
2004년, <영속하는 순간들 - 한국과 오키나와 그 내부에서의 시선들>
           - 기간 : 2004년 10월 17일-12월 13일 (12시-18시) 화, 수요일은 휴관
           - 장소 : MoMA’ s PS 1 Contemporary Art Center (미국근대미술관 별관)
22-25 Jackson Ave at 46th Ave, Queens .2005년, <명상> 展 - 기간 : 2005. 7. 16 - 9.22 / 장소 : 전라남도 옥과 미술관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사진한마당
          - 기간:8월10일 - 16일 / 장소 :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별관(광화문 갤러리)
2005년 <국기에 대한 맹세> 제17회 조국의 산하전
          - 기간:7월27일-8월9일/ 장소:공평 아트센터2층/ 주최서울민족미술인협회
2005년 <영속하는 순간들 - 한국과 오키나와 그 내부에서의 시선들>
          - 9월 26일 - 10월 28일 - 심포지음 9월 27일 오후4시
          - 미국 브라운 대학 특별전시장
2006년 <새마을> - 근대생활 이미지展
          - 3월 3일 - 4월 16일 일민미술관(동아일보사)
          - 참여작가 : 구성수, 남민숙, 신기선, 이재갑, 이정록 장용근, 최원석

<초대전> (개인)
2002년 식민지의 잔영 , 대구 서구문화관
<작품소장> 강원도 동강사진박물관 8점
<사진집출간> 2005년 10월 “또 하나의 한국인”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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