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리뷰 >
얼마 전 중앙 일간지들과 TV 라디오 방송이 한권의 사진집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다큐멘터리사진가 성남훈씨의 사진집 <UNROOTED, 유민의 땅>이 그것이다. 텍스트가 이미지보다 ‘힘이 쎄다’고 굳게 믿는 기자들이 이렇게 한권의 책을 집중 조명한 것은 분명 이례적이 일이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사진을 흰 벽면에 걸어야만 예술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럽겠지만 글이나 사진이나 모두 팩트fact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43·사진) 씨의 사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끝없이 이어진 코소보의 천막촌 앞에서 우는 할머니, 콩나물시루 같은 기차에 실려 가는 르완다 난민들, 쓰레기 더미 옆에서 먹고 자는 인도네시아 빈민들, 추위를 피해 도시의 맨홀 속에 사는 몽골 아이들, 포탄 옆에서 노는 맨발의 보스니아 아이들…. 그의 사진 속에 담긴 휴먼 드라마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전해 준다. (동아일보 고미석)
루마니아 집시, 몽골 유목민, 스페인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달동네 빈민, 코소보와 르완다 난민, 이라크 피란민…. 그들에게는 집이 없다. 유랑, 분쟁, 도시개발, 자연재해, 전쟁으로 제 땅에서 내몰린 방랑자에게는 하늘이 지붕이다. 떠도는 이의 얼굴은 거칠고 파리하나 사람 냄새는 오히려 물씬하다. (중앙일보 정재숙)
다큐멘터리사진의 도덕성
기자들은 바로 그의 사진집에서 팩트의 냄새를 재빨리 맡은 것이다. 사적인 성찰보다는 인류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승적인 자세는 기자들의 후각을 자극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진집들 펼쳐본다. 그가 이야기하는 인류의 삶은 안온하지 않다. 피가 튀기고 굶주리며 내침을 당하고 있다. 이것을 한 사람의 사진가가 감당하고 있었다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뼘 만한 지면이지만 책이라도 한권 더 팔게 돕자.’
사실 다큐멘터리사진은 매우 전통적인 도덕률을 가지고 있다. 20세기 초 루이스 하인Lewis W. Hine의 미국이주민 연작이나 아동노동에 대한 보고서 형식의 사진들은 최초로 포토스토리Photo story라는 말을 만들었고 이는 감성에서 서사로의 이행이었다. 그는 사진작업을 통해 사회문제에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고, 후배들에게 변치 않는 다큐멘터리사진의 정의를 내려줬다. 지난 100년 동안 다큐멘터리는 이웃의 고통에서부터 본 일도 없는 지구 저편의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의 영역을 넓혀왔다.
사진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유일한 언어이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을 나눌 수 있게 해주고,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여건을 명백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인류의 인간애과 무자비한 광경의 목격자가 된다. (헬무트 게른스하임 <창조적 사진> 1962년)
세계화가 한창 진행 중인 오늘의 시점에도 인간 노동의 근원적인 모순을 담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Workers>가 출판되었고 냉전의 해체 후 더욱 심해진 민족분규를 예리하게 파악한 질 페레스의 <Farewell to Bosnia>가 선보였다. 냉전 해체 이후 맑스주의 만큼이나 진부하다고 느껴졌던 다큐멘터리사진은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내전과 제국주의 전쟁, 기아와 난민, 자본의 불균형한 이동 등으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사진의 형태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더욱더 정교해진 대중매체의 편집기술과 대형화된 사진에이전시의 등장은 다큐멘터리사진가가 전달하려는 본질을 왜곡시켰다. 동일한 사건 현장에서 제작된 사진은 전 세계로 배급될 수 있었지만 그 본뜻은 편집자들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은 다큐멘터리사진에 어떤 설명도 달지 않고 전시를 했다. 사진에 담았던 시공간의 구체성은 증발되고 오직 형태와 미학만이 남았다. 이는 어찌 보면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사진에 대한 도전이자 전복이기도 했다.
예술과 기록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 세계적인 난민문제를 묵직한 보고서 형태로 제출한 성남훈의 책 <UNROOTED, 유민의 땅>은 첫 번 째 사진부터 마지막까지 사진 설명이 붙어있지 않다. 사진 설명은 책의 말미에 모두 몰아넣었다. 독자는 사진을 보면서도 막연하게 추정할 뿐 정확한 시간과 장소, 어떤 사건인지에 대해 알 수 없다. 다큐멘터리 사진집으로서는 독특한 이 같은 편집 방식은 자신의 이미지가 텍스트로부터 오염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있다. 사회의식을 갖춘 사진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불변의 의미를 담고 진실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진은 늘 특정한 맥락에 놓이기 때문에 그 의미도 변질 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한 맥락에서 어떤 사진이 당면 문제에(특히 정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곧 그 사진이 그렇게 쓰일 수 없거나, 그렇게 쓰이는 게 적절치 않게 되는 맥락이 등장하게 된다. (수잔 손택)
사진가 성남훈의 책에 담긴 사진들은 거의 대부분 인쇄 매체들을 위해 촬영된 것들이다. 그가 속해있는 사진에이전시 ‘라포’나 프랑스나 미국의 시사주간지 등이 요청을 했거나 스스로 기획해서 전달한 사진들이다. 그는 사진을 신중하게 촬영하고 사진들이 어떤 맥락에 놓여있는가는 심사숙고해서 완성한다. 하지만 사진이 그의 손을 떠난 순간부터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것은 사진을 받은 후 편집과정을 통해 제목을 뽑고 사진캡션을 다는 순간부터 발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해치우는 편집자나 편집기자들은 사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발터 벤야민은 “이제 (카메라는) 임대주택이나 쓰레기 더미를 찍어도 꼭 어딘가를 변형시키지 않고는 가만있지를 못한다. 이렇듯 카메라는 유행을 쫓아, 기술적으로 환벽하게, 비참한 가난마저 유희의 대상으로 바꿔버린다”고 이야기 한다. 이 때문에 편집기자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은 말이 이미지를 보완하거나 교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진설명은 사진을 보는 이의 주관적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면 제한적인 정보만을 특화한다. 이 때문에 성남훈은 자신의 책을 스스로 완성하면서 텍스트의 역할을 철저하게 이미지로부터 추방한다. 이미 당할 만큼 당했다는 의미일까? 사실 그는 지금까지 그의 사진을 사용한 매체 중에서 마음대로 사진적 의미를 왜곡시킨 대표적인 매체로 미국의 주간지 <타임>을 꼽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성남훈이 선택한 방식은 사진의 예술주의를 의심케한다. 그의 사진집 제작에 참조했을지 모르는 살가도의 사진집 <Workers>와 <Migrations>는 사진 설명이 없다. 오직 별책으로 만들어진 사진설명집이 첨부된다. 이 별책을 잃어버린다면 독자는 살가도의 사진에서 구체적인 정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 이 같은 살가도의 시도는 호화로운 사진전시와 프린트판매로 이어져 출처를 알 수 없는 ‘아트 다큐멘터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사실 20세기 초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은 공공연하게 사진의 예술성을 조롱했으며 브루스 데이비드슨과 같은 사진가 역시 “내 사진은 설교를 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예술인 척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살가도를 포함해 브루스 자신도 손마디가 부르튼 차농장의 여성노동자를 동정하고 브리클린의 젊은이들에게 연민어린 시각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그 사진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거실 벽을 장식하고 있다. 사진가가 직접 목격하고 함께 고통을 공유했던 것은 증발하고 오직 아름다운 원근법과 핀 흐림만이 벽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 손택은 “사진의 미학적 경향(피사체를 미화하는 경향) 탓에 세상의 고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은 그 고통을 중화시켜버린다”고 갈파한다.
다시 포토저널리즘으로 회귀
사진집 <UNROOTED, 유민의 땅>은 표준렌즈에서 재현된 회화적인 쿠델카 풍의 루마니아난민들 사진부터 초광각렌즈의 질 페레스 풍의 저널리즘사진까지 다양하게 망라되어 있으며, 뛰어난 구도와 세련된 프레이밍의 미려한 흑백사진들로 ‘다큐멘터리사진의 예술주의’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이번 사진집이 단지 그가 사진을 공부했던 프랑스에서 함께 활동했던 대가들의 아류라거나 다큐멘터리와 아트에 적당히 양다리 걸치고 있는 사진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먼저, 지금까지 수많은 다큐멘터리 사진들이 도전해 왔던 거대 담론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즉 산발적이고 불연속적인 주제가 아니라 ‘유민’이라는 단일하고 일관성있는 주제를 통해 ‘세계화’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그의 사진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즉각적인 감동이나 분노을 유발하기 보다는 연극에서의 소격효과(관객은 배우에 몰입해 동화되어서는 안된다는 브레히트의 이론, 성남훈은 대학 때 연극을 했다)처럼 적당한 선에서 사진에 담긴 이야기들을 분석하고 비평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지로부터 텍스트를 추방한 이번 책의 약점을 보완하는 강력한 힘인 것이다.
성남훈은 다큐멘터리사진 중에서도 포토저널리즘에 뿌리는 둔 사람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인쇄매체였고 그의 사진들은 대부분 이를 통해 발표됐다. 하지만 근래 그의 사진은 이런 인쇄매체들 보다는 갤러리에서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최근 사진의 상업화에 불을 붙인 몇몇의 화랑들은 이런 성남훈을 독려했고 이에 고무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회화를 액자에 넣듯이 사진도 액자에 넣어 하얀 공간에 걸어둬야 한다’는 예술주의에 대한 반발도 커 보인다. 그는 이야기 한다. “앞으로 아트보다는 저널리즘에 천착하고자 한다면 분명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책이 지금 나오게 된 이유도 어쩌면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15년간 단 한시도 인간과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은 사진들이 없습니다. 또 앞으로 최소한 5년간 분명한 사진의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 책 <UNROOTED, 유민의 땅>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저 자신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던 성남훈은 한국 다큐멘터리사진계에서 가장 사진을 잘 찍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 그가 휴머니즘으로 무장하고 분쟁지역을 뛰어다니던 때와 조심스럽게 완성도 높은 프린트로 갤러리에 자리하고 있는 지금을 많은 사람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마저 우아하게 소비하려는 오늘날 그의 선택은 그리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집 이후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상엽 / 사진가
이 글은 이미지프레스 http://imagepress.net와 월간 포토넷에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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