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배경과 역사적 의미
조원희(국민대 교수·경제학)
1.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의 일상적 풍경
"거대담론은 그만"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듣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요즈음 관심사는 정말이지 거창한 것들 투성이다. 좌파가 억지로 관심을 끄자고 주장하는 것과 무관하게 오늘의 현실이, 그리고 세계언론을 장악한 소수의 거대언론이 난리 아닌가. 세계화, 신자유주의, 신경제, 정보통신혁명, 전세계 주가폭락 및 불황위기 등등. 태러와의 '세계적 전쟁'은 또 어떤가.
그러나 너무 거창하게 시작하면 느닷없이 우리 앞에 나타난 요상한 유령들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다. 차라리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이 거대한 신시대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더 빠른 길일 수도 있다. 특히 본지의 독자들은 주로 문학적 상상력이 발달한 분들일 터인즉 생경하고 딱딱한 논리보다는 우선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한다. 얼마 전 잠시 매스컴을 장식한 머리에 무쓰 바르고 여의도 금융가에서 잘 나가던 하버드출신 미국투기군이 자랑삼아 자기 친구에게 보낸 전자 메일이 국제금융가에 퍼지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이야기가 통해 일상적 풍경을 음미해 보자. 잘나가기 시작한 인생을 망친 이 가련한 친구의 성은 정이고 24세의 교포 2세이며 미국 투자회사 칼라일 그룹의 한국인 간부로 막 부임한 참이었다. 우선 문제의 메일부터 보자.
제목:나는 왕처럼 살고 있소.
본문:한국에 온지 약 2주반 되었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나, 이곳의 인생은 더 할 수 없이 멋진데...한강과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방 세개짜리 끝내주는 새아파트. (독신인 내게) 왜 방이 세 개나 필요하냐고? 좋은 질문일세. 안방은 내가 잘 방이고, 옆방은 앞으로 2년간 한국의 물오른 영계(hot chick)들과 사랑을 나눌 방이지(10억번 중 5번은 했고...). 마지막 방은 너희 바람둥이(you fuckers)들이 한국에 들러면 쓰게 해주지...이틀에 한번 그리고 주말마다 한국의 최고의 크럽과 술집에 가는데, 바이사이드buyside 업무에 대해 더 배우게 되면 매일도 가능할 것 같군...매일 밤 여자들로부터 5-8통의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적어도 3명의 물오른 영계들로부터는 사랑을 나누자는 전화를 받지. 수없이 많이 은행가들로부터 이런 저런 사업제안을 받고 있는데, 이들은 나의 모든 변덕스러운 취미(골프, 최고의 저녁식사, 술집접대 등)를 충족시켜준다네...그러니 너희 바람둥이들은 나와 계속 연락을 하는 것이 좋겠지...(하략)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경제는 금융우위의 경제이다. 즉 금융자본의 발언권이 극대로 증대하고 그 금융자본을 통제하는 회사, 그런 회사의 책임자들이 '끝발'을 내는 경제이다. 금융자본이 투자한 일반회사의 경영자는 수익, 특히 단기수익을 극대화하여 회사 주가를 올려놓는 경우에는 이른바 스톡옵션(stock option)의 권리를 행사하여 수십억, 수백억의 차익을 주머니에 넣을 수 있지만, 반대로 주가를 떨어뜨려 놓으면 해고장을 받고 뒷골목으로 사라져야 하는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IMF경제위기가 나기 전 한국에서 목에 힘주고 다니던 사람들은 연령으로 보자면 적어도 50은 된 재벌 그룹의 최고경영자거나 그 밑에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경영자들이었다. 말하자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친구는 어림도 없었다. 물론 운이 좋아 재벌 2세로 테어난 황태자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 '왕처럼 사는 사람', 잘 나가는 사람은 문제가 된 칼라일 투자은행, 펀드메니저(조지 소로스 같은 헤지펀드메니저도 포함), 벤처기업가 들이다. 이른바 금융자본을 「관리」,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말아 좋아 관리자이고 투자자이지 솔직히 투기꾼들이다.
젊어서도 출세하고, 한목 잡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더 좋아졌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독자가 있다면 일찌감치 꿈을 깨는 것이 몸에 이로울 것이다. 한목하려고 이들과 어울리거나 그 근처로 갔던 사람들(예를 들어 집 컴퓨터 앞에 앉아서 주식거래에 여념이 없는 데이트레이드들 day-trader)은 대부분 깡통을 찼으니 말이다. 이번 뉴욕 테러로 죽은 사람들도 메릴린치, 모건스텐리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투자은행, 펀드회사 사람들이 많다.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 IMF경제위기로 실직하여 자살하거나 가출한 가장은 신문에라도 나지만 주식투자하여 깡통 찬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그것으로 그만이다. 왜? 신자유주의 원칙은 유난히 자기책임원칙을 강조하므로.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이들도 금융자본에 설설 기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기업의 경영실적이 나쁘게 나오면 정리해고를 감수해야 한다. 물론 정리해고에 있어 금융회사 자체는 예외이기는 커녕 솔선수범하는 입장에 있는 고로 위에서 말한 젊은 친구처럼 회사에 누를 끼친 자는 당연히 그 날로 해고이다. 노동시장이 금융시장의 논리에 종속된 것이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인 것이다.
위의 사건이 암시하는 현실의 또 다른 면은 금융자본의 투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테러로 폭삭 주저앉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는 투자은행 말고도 펀드회사도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들의 투자처는 세계 어디 건 돈 되다면 마다 않고 달려가는 금융기업들이다. 펀드 중 가장 투기적인 것이 바로 소수의 거부들의 재산을 위임받아 전세계 채권, 주식, 선물, 하다 못해 모스크바 부동산까지 사들이는 헤지 펀드이다. 한국의 자본자유화가 불러들인 것들이 바로 이런 류의 투자자본이다.
이들은 왜 한국 같은 금융후진국에 들어와서 왕처럼 군림하는가? 뭐 꿀리는 일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분명히 손쉽게 돈을 벌려는 한국의 금융기관, 그들의 고객(주로 기업들)은 뭔가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또는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을 잘 구슬러 같이 공모하여 한 건 올리려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금융자본이 판을 친다고 해도 적어도 미국에서는 법과 정해진 규칙은 지키면서, 즉 공정한 노름규칙은 지키면서 돈을 벌지만 한국의 금융자본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은밀히 내포하고 있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저차성이라는 문제 말이다. 최근 벤처 졸부들의 금융사기극에는 항상 조폭세력이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들어나고 있는데 조폭이란 언제나 뒤가 구린, 약점이 있는 곳에 달라붙게 마련 아닌가. 물론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조폭도 복잡한 금융시장의 생리를 이해할 정도로 머리가 좀 잘 돌아가야 하지만. 하긴 조폭영화로 한목 잡은 코메디언 출신 영화제작자도 있다 하니 이런 일도 신자유주의가 파생시킨 희안한 현상이다. 이쯤되면 그야말로 요지경 세상이다.
어디 그 뿐인가? 한국의 조기유학열풍도 알고 보면 상당정도는 우리의 주인공, 잠깐이나마 왕처럼 산 미스터 정처럼 미국 가서 영어배우고 경영학 석사(MBA)라도 받아 세계적인 금융회사에 취직하여 한국지부로 발령 받아 와서 왕처럼 살고 싶은 친구(또는 그 부모)들의 꿈이 불러일으킨 열풍이다. 20대에 억대 연봉의 촉망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 물론 세상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피하기 위해 한국의 살인적이고 비인간적인 교육 때문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지만 그런 고매한 생각에 이 땅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피상적인 이해이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극도로 증대했다는 사실에서 파생한 현상들이다.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패권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이 사태가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조기유학열풍의 근원인 것이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낸다고? 아니다. 사람은 미국으로 보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금언이다.
회사원들이 자기 업무는 뒷전이고 미국, 한국의 주식시장 상황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아침신문을 받으면 어제 미국 증권시장 사정부터 챙기게 되는 현실, 항상 미국 월스트리트의 한국경제 전체, 한국 기업들에 대한 평가에 일희일비해야 하는 현실, 이 모든 풍경이 느닷없이 우리에게 다가온 일상이다. 신자유주의는 학자들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적 생활 환경인 것이다. 고매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작고 아기자기한 이야기(담론)들이 무의미해진 세상이 너무도 빨리 우리에게 다가왔다. 세계시장의 일원적 지배의 음모가 진행되는 판국이니 어쩌겠는가. 망하면 같이 망하는 판국이다. 그러니 한국 사람이 미국 테러에 더 난리다. 미국을 끔찍이 그렇게 사랑해서라기보다 이번 사태로 미국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떨어지고 미국에서 돈이 빠져나오는 날이면 우리 경제도 끝장일 테니 말이다.
2.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개념적 정의
세계화는 무엇이고 신자유주의는 무엇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또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헛갈려 하는 문제이다. 먼저 여러 개념들의 차이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과거에는 세계화 대신에 국제화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었는데 일단 이 문제는 국제화가 국지적이지 않고 전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될 때를 세계화로 부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본다면 국제화는 인류역사상 꾸준히 진전되어 온 것이고 특히 자본주의와 함께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윤이라고 하는 보편적 동기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본은 어떤 여타의 차별성에도 구애받지 않고 맹목적으로 확장하는 경향을 갖는데 근대 자본주의 단계에서 국제화의 주동력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국제화란 어디까지나 인류의 역사적 진보의 가장 중요한 척도로서 국제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어떤 이유를 대건 '반동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정도만큼 아무리 국제화의 주도세력이 자본이라 해도 사정은 변하지 않는다.1) 왜냐하면 자본이 주도하지 않는 국제화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계화이다. 세계화를 국제화의 목표, 종착역이라는 의미로 정의할 수도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의 세계화란 경제적인 단일 시장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단일체, 지구촌사회의 조건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민족국가간의 이질성, 분열, 이해대립 등 모든 문제를 고려해 볼 때 현재로서는 비현실적이며 위험한 사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같은 동포임에도 중국의 조선족들의 입국을 막는 통에 이들이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배 안에서 질식사하는 사건들이 수시로 발생하고, 불법체류 단속을 수시로 벌이는 우리의 현실만 보아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조건이 충분히 성숙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감상적인 잣대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일은 사물의 본질을 냉정히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만 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계가 내일 당장 하나가 될 것처럼 법석을 떠는 어떤 시대적 상황(세계화)이 자본주의 역사상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1870-1914(1차 세계화), 그리고 1980년이후(2차 세계화) 두 차례가 이에 해당된다.(혹자는 2차 세계화의 경우는 1960년부터라고 하기도 하는데 필자가 위에서 정의한 방식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80년까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국제화 단계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 이전 단계의 자본축적, 자본의 확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누적된 어떤 경제적, 산업적 조건이 자본의 활동영역내부에 내적 모순을 증대시켜서 자본이 발작적이고 공격적으로(자신의 근본적인 존립기반이 무너지는지도 고려하지 않은 채) 바깥으로 확정을 시도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모순은 자본축적의 외연적 확장을 통해 일시적으로 은폐되거나 완화, 그리고 전가되지만 궁극적으로 모순을 세계적인 차원으로 만들어 결국에는 이 과정은 파탄에 이른다. 1차 세계화가 전쟁과 공황, 그리고 세계화의 급격한 후퇴(지역주의의 만연)로 귀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80년 이래 다국적 기업(초국적 기업이라고도 불림)에 의해 주도되는 해외적접 투자(FDI)는 무역의 평균 성장률 약 10%보다 세배 빠른 속도, 즉 연평균 30%정도로 이루어져 왔다. 1990년 현재 이 투자의 총규모(저량)는 약 1.7조달러에 달하였고, 세계무역의 약 80%를 이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다른 지표로 보자면 1998년 경우 FDI는 세계각국의 전산업 자본형성의 평균 약 11.1%, 제조업투자의 약 21.6%, 민간자본형성에 대한 비율로는 약 13.9%를 차지하고 있다. 금융의 세계화는 1990년 이후 더욱 극적으로 전개되어 1993년 세계적으로 하루동안 약 1조달러가 국경을 넘어 이동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현재 약 2조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경을 넘는 자본투자(이른바 포트폴리오portfolio 투자)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단순한 외환투자(투기)에서부터 타국의 증권매매, 선물투자 등 다양하다. 1998년 현재 6800개의 투자펀드(mutual fund)가 있는데 이것은 1990년의 두배이다. 투자 펀드 가운데 가장 투기적인 것은 소로스의 퀀텀펀드 같은 헤지펀드이다. 이것도 급격히 증가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란 바로 이들 산업-금융분야의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것이며, 이들에게 최대한의 활동의 자유를 주고자하는 일련의 정치적 기획, 이데올로기, 정책을 총괄해서 부르는 용어이다.
3.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논리
자본주의는 그 시스템 내부에 무한정의 이윤과 축적, 다시 말해서 무한 질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아니라 물질이 목적이 되도록 모든 제도가 배치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이것이 불가피하다. 자본주의적 생존경쟁의 원리는 원칙적으로 경쟁력이 없는 기업, 경영자, 노동자 그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경쟁에 승리하면 선이고 패배하면 당사자는 도덕적으로 해이(morally hazardous)하다는 낙인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이 맹목적인 운동의 물결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무작정 달릴 수밖에 더 있겠는가. 이 과정에서 생산성은 증대하고 시장에 물건은 더욱 넘치지만 축적의 가속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자본운동의 내부에서 계속 수요가 발생한다. 기업의 투자활동, 고용의 증대, 임금의 상승 등이 결합하여 총수요 또한 공급의 증대에 조응하여 증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내부의 상호자극과 동반상승의 논리이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맹목적 상향운동의 위해서만 존재하며 또 이 운동의 역사적인 진보성과 필연성 덕분에 자본가의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체제이다. 노동자의 도전이 억제되는 것은 단지 실업자를 적당한 규모로 유지하여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상향운동의 각축전에서 뒤쳐지면 기업도 노동자도 공멸한다는 진정으로 무서운 공포가 체제의 내부로부터 생성되기 때문이다. 또 이 상향운동이 유지되는 한 생산성향상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가고 기업이 확장되면서 승진기회도 확대된다는 달콤한 이야기도 공포의 동전의 이면으로 존재한다. 끊임없는 이 상향운동이 없으면 공포도 달콤한 당근도 함께 사라지며 자본가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과 사회의 저 밑바닥에서 억눌려 있던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맹목적 상향운동은 자기에게 아무런 인간적인 의미도, 경제적 이득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항하는 자들을 양산하며 그 결과 사회 곳곳에 이윤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증대하며, 규제적인 제도들이 들어온다. 한편 개별 자본 자신의 경우 경쟁이 야기하는 스트레스와 위험을 회피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상호 결합하여 경쟁의 정도를 조절하며(독점의 강화) 약소자본과 소비자를 착취하여 손쉽게 돈 벌 궁리에 몰두한다. 이렇게 되면 경제 전체적으로 투자규모, 생산성 상승속도 등이 둔화되며 우수한 생산자원을 독점한 대기업의 투자와 생산성향상에 의해 시장에 쏟아놓는 상품은 조금만 과해도 팔리지 않게 된다.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한 조치가 결국은 경제전체의 투자활력과 생산성 향상을 떨어뜨려 자신의 물건에 대한 시장까지 축소시키고 만 것이다. 경쟁의 격화는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자본의 집중을 더욱 가속화하고 악순환적으로 대자본의 지배력은 더욱 증대한다.
제1차 세계화나 제2차 세계화에 있어서 자본의 새로운 시장을 행한 공격적이고 발작적인 확장운동은 모두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때의 시장이란 항상 지리적으로 한 경제 바깥에 있는 외부시장만이 아니라 그 내부의 새로운 시장의 개척, 즉 시장의 심화도 내포한다.
제1차 세계화의 처참한 귀결이 자본에게는 원죄가 되어 2차 대전 이후 세계 각국은 자본의 국제적인 이동을 통제하였고, 국내적으로도 사전적, 사후적으로 시장의 결과를 국가가 개입하여 교정하는 규제체계를 도입하였다. 특히 노동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의 힘이 증대하여 국가 그리고 기업 차원에서 여러 가지로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른바 케인즈주의라는 정책적 기조, 경제사상이 이 시대를 지배했고, 체제적으로는 복지국가, 수정자본주의가 하나의 주류를 형성했다. 70년대 이후 감소하는 이윤과 투자기회의 위축, 생산성 둔화, 실업의 증대 등이 발생하고 정치 경제적인 갈등은 극대화되었으며 위기국면이 조성되었다. 위기는 바로 기회였는데 일본과 독일 등에 비해 경제상황이 나빴고 또 진보적 정치세력, 노조의 힘이 약했던 미국, 영국 등에서 「이렇게 가면 우리는 죽는다」, 「미국의 주도권이 상실된다」는 등의 위협논리로 보수세력들이 집권에 성공했다. 집권 보수세력의 정책으로 자본자유화가 가능해지자 불황과정에서 인수합병 등을 통해 더욱 거대해진 대자본은 규제를 피하여 세계화를 급속히 추진하였다.
80년대 증대한 생산의 국제화는 국내적으로도 대자본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였다. 노동에 대해 여차하면 짐을 싸서 다른 나라로 철수하겠다는 위협 말이다. 또한 이윤성이 없는 전통산업의 많은 부분을 개도국으로 양보함으로써 노동권의 약화와 국가 복지의 축소 없이는 경쟁에서 진다는 논리를 정당화시켰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만약 탈복지, 탈규제, 민영화, 노조 약화 및 노동유연성 증대 등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행하게 되면 앞에서 말한 주어진 범위의 기존 자본주의 내부에서 강력한 생산성 증대와 투자, 소비수요의 증대가 발생하는, 앞에서 말한 동반상승의 경향이 다시 나오고, 외적인 팽창의 경향성은 약화되는 것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1990년대 후반 미국의 신경제(new economy)가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주장을 했다. 미국은 외부로 팽창하기는커녕 세계의 자본을 동원하여 투자를 불러일으킨 것 아니냐고 말이다.2) 이 생각은 이미 신경제의 짧은 호황이 막을 내린 데서도 증명되듯이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을 침소봉대한 것이다. 신경제도 결국은 타부문으로부터의 수요가 없으면 계속 성장 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정책의 흐름이 주 이유는 그동안 기업의 경영자, 노동자, 개혁적 국가권력에 빼앗겼던 자본의 주도권을 되찾고 그럼으로써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지출을 줄여 자본의 이윤을 증대시키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개혁이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국가가 바로 미국, 영국이었다. 이른바 보다 순화되고 강화된 잉글로섹슨 자본주의 모델이 80년대를 경과하면서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이 자본주의 유형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자본의 소유자, 또는 오늘날은 전형적인 회사의 형태가 주식회사이므로 기업의 주주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경제이다. 개인 주주가 직접 주식을 소유하는 비중은 미국의 경우 현재는 약 40%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대부분 이른바 기관투자가라고 불리는 금융기관이 소유하므로 금융기관이 기업경영자에 대해 우위에 서는 경제이다. 이들 금융기관의 자금은 연금, 보험, 신탁 등 궁극적으로는 개인 저축자, 개인 자본가의 것이지만 실제적인 권한은 운용주체인 금융기관이 행사하게 된다.
자본의 세계적 확장과 그들간의 경쟁은 보다 자유로운 영업적 환경과 높은 이윤이 보장되는 지역으로 자본이 몰리는 현상을 야기하게 마련이며 각국은 노동과 진보적인 정치세력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쟁논리에 지배되어 점점 더 경쟁적으로 내부 구조를 친자본적으로 개혁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내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수용하는가는 상당정도 당해국의 계급적 힘의 관계, 정치적 세력간의 힘 관계에 의존한다. 유럽대륙, 특히 독일 같은 나라는 대외적인 팽창물결에 편승했지만 그렇다고 내부 질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하지는 않았다. 선택적이고 부분적으로 채택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데에 있다.
어쨌든 선진국경제 전체를 보면 과거에 비해 시장은 더 개방되고 더욱 친자본적으로 개혁되었다. 다국적 금융-산업자본은 세계화를 통해 국가권력과 노동자를 압도했고 이윤기회를 확대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제2차 세계화의 경우 동전의 앞뒷면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진국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최근 미국, 일본, 유럽의 동시 침체를 통해 그 가능성을 상당정도 소진한 감을 주고 있다.3) 그도 그럴 것이 선진국 내부에서 노동자를 희생하고 그 소득을 자본이 가져가는 데는 이미 한계에 달한 것이다.4)
4. 전망
궁극적으로 독점이 강화되고 거대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경제는 외부로 확장하지 않는 한 충분한 성장동력을 회복하지 못한다.5) 따라서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후진지역으로 그 영역이 확장하려는 경향을 필연적으로 띤다. 이점은 제1차 세계화와 2차 세계화에 모두 적용되는 사항이다. 그러나 2차 세계화는 산업화 과정에 있는 후진경제를 거대 산업-금융자본의 순환 속에 끌어 들여 상품시장, 생산기지로 활용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자본시장을 통해 금융적인 이득을 얻고, 제조업 뿐 아니라 보험, 증권 등 새로운 사업영역을 장악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후진국에 상품시장 개방 이외에 모든 영역의 투자 기회, 자본시장 개방의 요구를 간단없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차 세계화에서는 철도, 해상운송수단의 발달로 운송비가 크게 감소한 것이 기술적인 면에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차 세계화에서는 정보통신혁명을 통해 통신비가 대폭 절감된 것이 결정적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기술적 기반을 이용하여 국제 금융기관, 특히 월스트리트의 금융기관은 전세계적인 규모로 영업범위를 넓히려는 충동을 갖게 되었다. 1차 세계화에서 자본은 무력을 앞세워 후진국을 착취했지만 지금은 금융시장을 통해 투기적인 방법으로 이윤을 얻으려 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와 개혁, 개방이후 시장경제는 크게 확대되었다. 세계에는 일인당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세계인구의 약 1/2에 해당하는 30억 명이 되고 단돈 몇 푼에 영혼이라도 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약 40억 명이 줄을 서 있다고들 한다. 그러니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크루그만(P. Krugman)은 「거리에서 대모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건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현상적으로 보자면 다국적 기업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더 가난해질 것이고 어린이 고용을 반대하지만 그럴 경우 더 나쁜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일도 증대할 것이라는 겁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제한된 자본과 제한된 시장을 고려할 때 세계의 거대자본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서 후진국 경제, 세계의 수십억 명의 생활이 이들에 의해 개선될 것을 기대하는 일은 연목구어일 터이다. 진정한 의미의 상호상승적 경제성장이 내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가용자본의 획기적인 증대, 시장의 획기적인 확대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후진국이 완전한 대외 개방적 정책을 취하는 것의 귀결은 제한된 자본을 서로 많이 유치하려는 가운데 더욱 임금은 떨어지고, 선진국을 포함하여 전세계 노동자, 특히 미숙련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하락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대외개방 뿐 아니라 세계의 그 어떤 국가보다 앞장서서 대내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수행하고 있는 한국 같은 나라는 이미 세계화 물결의 중심부로 깊숙이 빨려 들어와 있는 것이고 선진 경제, 특히 미국경제의 파도에 같이 춤을 추고 있다. 실물 경제 뿐 아니라 주식시장까지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면서 같이 움직이고 있다. 개방된 자본시장 조건 하에서 지극히 유동적인 세계 금융자본의 운동이 우리의 운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현단계 세계화의 근본 모순은 세계경제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거대 산업-금융자본은 극도로 '세계화'되어 있는 데 반해 그 운동을 적절히 통제할 정치적 구심력은 부재하다는 데에 있다. 국민국가의 통제력이 크게 감소했는가 아니면 여전히 유효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나치게 초국적 자본 편향적인 것만이 문제인가라는 논쟁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세계적인 규모의 생산력을 확보한 거대 자본과 여전히 국민국가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생산관계'간의 모순에 있다. 생산의 사회화가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된 반면, 그 사적 독점적 성격은 강화되어 말하자면 생산의 무정부성이 전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많은 양심적인 지식인들,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자, 케인즈주의자들은 공격적이고 위험한 세계화를 중단하고 1960-70년대의 안정적이고 적절히 통제된 구조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세계경제내의 근본적인 모순과 이질적인 이해관계가 착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에서 그러한 대안이 현실성이 있을 것인가?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은 아닌가? 역사는 오직 앞으로 전진함으로써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는 것 아닌가? 자본이 중심이 되어 추구되는 단일의 세계라는 목표는 평화롭고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라 불연속적이며 충동적 전진과 후퇴를 필연적으로 내포한 과정이다. 진보를 향한 씨앗은 이 속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아직 그 방향은 분명치 않다. 앞으로 이 물결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한 노력이 21세기 지성의 최대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세계화의 흐름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는 그야말로 세계적 차원에서 제기되고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하겠지만 당장 개별 국가, 개별경제가 당면한 문제는 그 때 그 때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한다. 당장 살아남아야 먼 미래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IMF위기에 대한 현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야기한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장기적인 방향 모색과는 별도로 모색되어야 한다.<끝>
1) 이 주장을 의심하는 독자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한 다음의 진술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부르조아지는 세계시장을 이용하여 생산과 소비에 전지구적 특성을 부여한다. 반동들에게는 대단히 비통스러운 일이겠지만 부르조아지는 공업을 떠받치고 있었던 민족적 기반을 그 발 아래에서부터 제거했다...종래의 지방적 민족적 고립과 국산품에 의한 생존 대신에 여러 민족 상호간에 모든 방면에서의 상호교류와 보편적 상호의존이 나타나고 있다...개개 민족의 정신활동의 성과는 모든 민족의 공동의 재산으로 된다...민족적 편견 및 편협성은 점차 존재 불가능해지고 여러 민족적 지방적 문화로부터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가 형성된다」(Marx & Engels, Collected Works, vol.6, Progress Publisher, p.488).
2) 미국으로 매년 2000역에서 4000억 달러가 순유입되었다.
3) 그동안 FDI의 흐름을 보면 약 97%가 선진국에서 흘러 나왔고, 그 투자 대상국을 보면 75%가 다시 선진국이었다. 후진국의 경우는 약 10개의 개도국에 투자가 집중되었고, 최근에는 중국이 반 이상을 가져가고 있다.
4)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의 상위20%계층의 총소득을 하위20%소득계층의 총소득으로 나눈 비율이 1980년에 5.3이었던 것이 1992년에는 10으로 증가했다. 이 수치는 한국의 경우보다도 거의 두배에 달한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이 비율은 2000년 현재 5.28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소득 분배가 그동안 얼마나 악화되었는지를 여기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5) 컴퓨터, 통신,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주요 성장 산업, 첨단 산업에서 세계시장의 과잉생산의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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