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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Structural Realism after the Cold War

by 淸風明月 2024.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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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uctural Realism after the Cold War

Kenneth N. Waltz. 2000. "Structural Realism after the Cold War," International Security Vol. 25. No. p 15∼41.

 

 

국제정치 학자들 중 일부는 현실주의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록 현실주의의 무정부성, 자력구제, 세력균형이 과거에는 적당했을지 모르지만, 상황은 변화하였고 더 나은 개념들로 대체된다고 본다. 적절하지 않을 정도로 국제정치체제를 바꿀 수 있는 것 단위 레벨에서 이루어지는 체제 내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체제자체에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핵무기는 국가들이 자신들의 안보를 어떻게 추구하는 방법에 있어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핵무기가 무정부적 구조로서의 국제정치체제를 바꾼 것은 아니다. 체제의 구조와 단위레벨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극성에서의 변화 또한 국가들의 안보추구 방식에 영향을 준다. 강대국의 수가 둘 혹은 하나로 줄어들 때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둘 이상의 강대국이 존재할 때, 국가들은 그들의 안보를 자신 내부의 노력과 다른 강대국과 맺을 수 있는 동맹 모두에 의존할 수 있다. 연합의 결집력과 힘의 정도는 측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다극체제에서의 경쟁은 양국체제에서의 경쟁보다 복잡하다.

 

무기에서의 변화, 극성에서의 변화 모두 체제 전체에 영향을 주는 커다란 분기점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변화가 체제를 변형시키지는 않았다. 만약 체제가 변한다면, 국제정치(International Politics)는 더 이상 국제정치International Politics가 될 수 없으며, 우리는 이를 다른 이름으로, 예를 들면 세계정치(World Politics)나 (Global Politics)로 불러야 할 것이다. 도대체 왈츠는 무엇을 체제 수준에서의 변화로 이해하는가? 또는 어떠한 변화가 체제로서의 국제정치를 전환시킬 수 있는가? 몇 가지 대답이 가능한데 다음 3가지 주장은 국제정치가 변화하고 있는 중이며, 따라서 현실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 3가지 주장은 1) 민주주의의 확산, 2) 상호의존의 증가, 3) 평화를 증진시킬 수 있는 제도들이다.

 

 

1. Democracy and Peace

 

Michael Doyle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의 평화적 행동을 연구하였는데, 이는 전쟁이 적어도 선진 산업국가들 사이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민주평화론은 민주주의 국가까리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부의 형태와 국제적 결과 사이에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후쿠야마는 심지어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는 결코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우리는 이론이 아니라 설명을 요하는 사실들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민주평화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올바른 형태의 민주주의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평화적이다. 이는 칸트의 관점이다. 하지만 그가 사용한 공화정에 대한 정의는 너무 제한적이어서 그러한 것이 실제 할 수 있는지 믿기 힘들다. 그리고 만약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계속 그러한 형태를 지속할 것이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올바론 형태를 과연 무엇으로 정의내릴 것인가도 문제이다. 오웬은 ‘서로 상대방을 자유민주주의로 이해하는 국가까리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고 위와 같은 정의의 문제를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때때로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해왔고 가끔 전쟁으로 치닫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레인은 민주주의 국가까리의 전쟁이 회피되었던 이유는 민주주의 국가끼리 싸우는 것이 꺼려져서가 아니라 다른 제 3의 세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앞에 언급한 정치적 형태에 가까운 국가들의 유사성은 아마도 전쟁의 몇몇 원인들은 제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부를 없앨 수는 없다. 민주평화론은 단지 전쟁의 원인이 국가들 내부에 있을 때만 지지될 수 있다.

 

 

2. The Cause of War

 

전쟁을 설명하는 것이 평화의 조건을 이해하는 것보다 쉽다. 무엇이든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국제정치의 조건 k에서는 전쟁은 반복되므로 전쟁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국제정치 자체를 앲애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자유주의자들은 정치 밖에서 정치를 구하려는 강한 욕구를 보였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은 자신의 활동을 범죄자들을 잡고 계약을 강제하는데 국한시키는 경찰국가였다. 민주평화론의 제안자들은 마치 민주주의의 확산이 무정부성의 영향을 거부할 것처럼 생각한다. 분쟁과 전쟁의 원인들은 더 이상 구조적 차원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후쿠야마는 ‘평화로운 무정부적 체계를 상상하는 것이 완벽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무정부성이 전쟁에 관련될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브루스 러셀은 충분히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존재하므로 최소한 17세기까지 국제정치에서 국가들의 행동을 지배하던 현실주의자들의 원칙들(무정부성, 국가들의 딜레마)을 극복하는 것이 부분적으로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국가의 적절한 행동에 대한보장은 국가의 내부적 자질에서 나온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것은 칸트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칸트는 외부적인 위험이 날마다 지속되는 곳에서 평화적인 국가들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던졌다. 그는 ‘정치질서의 원칙들’의 일곱 번째 전제조건에서 ‘내부적으로 적당한 헌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의 다른 국가들과 적절한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통계적인 데이터들이 민주평화론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데이비트 흄 이래로, ‘사건간의 관계가 곧 인과관계가 나타난다고 유추할만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안다. 즉 평화의 원인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른 어떤 조건들이 민주주의와 평화의 원인이다. 강대국들은 종종 약소국들이 포기하든지, 전쟁에 호소해야만 하는 곳에서 평화적인 수단으로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다. 도미니카 공화국과 칠레에서 보여준 미국의 정책을 현명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행동은 분명 민주평화론에 의문을 던져준다. 민주주의 국가가 다른 민주주의 국가와 전쟁을 했을 때, 파키스탄과 요르단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입법부가 전쟁을 호소할 때도 그러한 의문이 생긴다.

 

물론 도미니카 공화국과 칠레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고, 미국에 의해 그러한 국가로 이해되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자만 끝도 없다. 그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만약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전쟁을 시작한다면 그들은 이전보다 덜 민주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와 전쟁 중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과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심지어 모든 국가가 민주적으로 바뀌더라도 국제정치의 구조는 여전히 무정부적일 것이다. 국제정치의 구조는 제 아무리 넓은 변화라도 하더라도 국내적인 변화에 의하여 전환되지 않는다. 외부의 권위가 부재한 상태에서는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

 

 

3. DEMOCRATIC WARS

 

민주주의 국가들은 비민주적 국가들과 공존한다. 비록 민주주의 국가끼리 드물게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최소한 다른 국가들에 대항하는 전쟁을 공유한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시민들은 그들의 국가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단지 민주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국가를 선(good)하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민주주의 국가들의 시민들은 또한 비민주적인 국가들을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들이 비민주적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국가를 악(bad)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비민주 국가를 패퇴시키고 그들을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끔 민주주의가 전쟁을 조장한다.

 

만일 단지 세상을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만으로 세상이 안전하게 될 수 있다면 모든 수단이 허용되고 그러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심지어 의무가 된다. 국민들과 그들의 대표들이 지닌 전쟁에 대한 열정은 종종 억누르기 힘들다. 그러므로 Hans Morgenthau는 “민주적 선택과 정부관리들의 책임감은 효과적인 억제 체제로서의 국제적 도덕(international morality)을 파괴했다”고 믿었다.

 

Kant가 믿었듯이 스스로 방향을 정하는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때때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므로 평화는 고안되어야만 한다. 민주적 지도자들은 그들의 시민들이 때때로 표현하는 전쟁에 대한 열정에 책임이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이러한 열정을 부추기려고 시도하며 정부는 때때로 선거를 계산한 나머지 (전쟁) 예방 조치를 미루기까지 한다. 민주적 정부들은 그들이 외부적 필요에 반응해야 할 때 조차도 오히려 내부적 필요에 반응하곤 한다. 모든 정부들은 나름의 단점을 지니고 있고, 민주주의는 분명 다른 것들보다는 더 적은 단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실이 민주평화론을 지탱시켜 줄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 평화가 확산될 수 있다는 생각은 위안이 되지만, 그러한 주장의 앞면-민주주의는 비민주 국가들과의 전쟁을 조장할 수 있다-은 불안하다. 만일, 후자가 지지된다면 우리는 심지어 민주주의의 확산이 세계에 전쟁을 줄이는 그물(net)을 가져올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게 된다.

 

Kant는 강대국 내에 공화국이 세워지면, 공화국적인 형태가 점차로 전 세계 내에 우세해질 것을 기대했다. 1795년에 미국이 희망을 제공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이 최초로 그들의 관점을 표현한 이후로 그들은 분열되었다. 일부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몽매한 민중의 정신을 향상시키고 자유, 정의, 번영의 이익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John Stuart Mill, Giuseppe Mazzini, Woodrow Wilson, Bill Clinton) 다른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세계에 가져다 줄 수 있는 이득에 동의하면서도 민주주의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어려움과 위험을 강조해왔다. (Kant, Richard Cobden)

 

만약 세계가 지금 민주주의 때문에 안전하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는 세계 때문에 안전한지 어떤지에 대하여 의아해 해야만 한다. 민주주의가 우세한 때, 개입주의자들의 정신이 활기를 띠었다. 미국이 지금 그러하듯이, 하나의 민주주의 국가가 지배적이 되었을 때 그러한 영향은 강조된다. 평화는 전쟁의 가장 고상한 원인이다. 만약 평화의 조건이 결핍되면 그러한 조건을 만들 능력을 가진 국가는 물리력을 통해서든 아니든지 간에 평화를 만들고픈 욕구를 느끼게 된다. Kant가 주장하듯이, 그러한 목적은 고상할지 모르지만 권리의 문제에 있어서(as matter of right),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의 내부적 일에 간섭할 수는 없다. 사실상, 우리는 개입이, 심지어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서도, 종종 이익보다는 해가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평화는 내부와 외부의 억제가 정밀하게 균형을 이룸으로써 유지된다.

 

만일 민주평화론(thesis)이 옳다면, 구조적 현실주의 이론은 틀린 것이다. 공화국은 일반적으로 좋은 국가들이고 불균형한 권력은 누가 이것을 행사하든지 간에 위험하다고 믿어질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집합의 안팎에서, 평화는 불안정한 세력 균형에 의존한다. 전쟁의 원인은 단지 국가 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체제 내에서도 존재한다. 민주평화론(thesis)의 주창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4. The Weak Effects of Interdependence

 

앞에서 기술한대로 만약 민주주의 하나만으로 평화가 만들어지기 힘들다면, 국제 상호의존의 강화와 결부된 민주주의의 확산은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제안하고 오늘에도 종종 반복되고 있는 평화를 위한 처방을 만족시킬 것인가? 상호의존은 아마도 평화 지향적인 민주주의국가들에게 이익 동기에 대한 추진력을 덧붙일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평화와 이익을 추구하는데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중상주의 국가는 정치-군사적 국가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이제 시장의 힘은 국가의 힘과 대등하거나 능가하고 있다.

 

상호의존은 국가간의 접촉을 늘리고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면서 평화를 촉진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분노나 심지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갈등의 기회 역시 증가시킨다. 사회적 결속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상호 영향 역시 증가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국가들은 다른 국가의 행동을 자신의 정치체제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취급하게 되고 (그렇다면 결국) 그러한 사건들을 통제하고 싶어 할 것이다.

상호의존이 평화뿐만 아니라 전쟁 역시 유발시킨다는 사실은 종종 충분히 이야기되어 왔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국제정치를 형성하는 다른 힘들에 비해 상호의존은 미약한 것이다’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내의 상호의존은 국가간의 그것보다 훨씬 밀접하다고 할 수 있는데, 상호의존을 넘어 거의 통합에 가까운 체제를 만들었던 소련의 해체를 통해서 상호의존이 그다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지 않음을 밝힐 수 있다. 국가들은 그들의 능력이 된다면 위기나 전쟁 동안 거부될 수 있는 자원들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다른 국가의 침식으로부터 한 국가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충동 역시 강한 것이다. 상호의존이 전혀 존재하지 않다면, 갈등도 전쟁도 가능하지 않다. 상호간에 존재하는 공간은 회색빛을 띤다. 이 공간은 분업의 이익과 상호 이해, 문화적 풍부함을 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보호주의, 상호 분노, 갈등, 전쟁을 낳을 수도 있다.

 

상호의존의 불균등한 효과는 Robert Keohane과 Joseph Nye의 “비대칭적인 상호의존(asymmetric interdependence)"의 개념에 의해 모호해진다. (Keohane과 Nye는 국가간의 독립과 의존의 관계를 ”비대칭적인 상호의존“이라는 개념으로 대체시켰다.)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의존적인 국가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 ”의존(dependence)"라는 단어를 생략하는 것은 국가간의 관계를 특징짓는 불평등을 무디게 하고, 마치 모든 국가가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국내정치가 그러하듯이 국제정치의 많은 부분들은 불평등에 관한 것이다.

 

1970년의 에세이에서 나는 미국이 상호의존을, 강한 국가나 약한 국가, 부유한 국가, 가난한 국가가 모두 상호의존의 두터운 망 속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미국에 의해 사용되는 이데올로기로 묘사한 적이 있다. The Retreat of the State에서 Susan Strange는 다소 독특한 방식을 통해서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녀는 “세계 경제의 급진적인 통합이 국가들이 힘의 균형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시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1) power는 약한 국가로부터 강한 국가에게로 이동한다. (2) power는 국가로부터 非국가 권위체인 시장으로 이동한다. (3) 어떤 power는 누구도 사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증발한다. 중앙의 권위가 없는 국제정치에서 power는 때때로 사라지거나 시장을 향해 이동한다. 중대한 이동이 일어나면, 강대국들은 이를 바꾸기 위해 끼어들며, 강대국들의 기업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시장의 가장 큰 점유율을 관리한다. (2)와 같은 전제조건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Strange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정부의 권위는 시장의 경고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 “멕시코의 운명은 Wall Street보다는 Washington에서 결정되었다.”

 

지난 2세기의 역사는 가면 갈수록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는 중앙집권화 된 정부(central government)의 역사였다. 비록 약한 국가들이 국외 문제에 있어 자신들의 영향력을 다소 상실했을지는 몰라도, 강대국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18, 19세기에 영국은 전 세계에 개입하면서 역사상 가장 방대한 제국을 세웠고, 냉전 이후 미국은 제국을 세우지 않고서 영국의 행위를 반복했다. 하지만 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다른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과 통제가 더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국가의 권력(the power of the state)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희망이나 환상이지 실제로 세계 대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다.

 

 

5. The Limited Role of International Institutions

 

현실주의 이론은 제도들의 중요성에 대하여 경시한다고 비판받는다. NATO의 예에서, 현실주의자들이 왜 국제제도들이 국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제한된다고 믿는지 알 수 있다.

 

 

6. EXPLAINING INTERNATIONAL INSTITUTIONS

 

제도의 성격과 목적은 구조에 따라 변화한다. 과거의 다극 세계(multipolar world)에서는 동맹의 핵심은 동등한 능력을 지닌 적은 수의 국가들로 구성되었다. 서로 비슷한 규모의 국가들이었기 때문에, 서로 간의 안보에 대한 기여는 무척이나 결정적이었다. 주요한 동맹국들은 군사적으로 밀접히 상호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한 국가의 탈퇴는 다른 동맹과 경쟁하는데 있어서의 약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양극 세계(bipolar world)에서 동맹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한 국가에서 그들의 블록(bloc)의 안보 대부분을 제공한다. NATO에서 프랑스가 철수하고 소비에트 블록에서 중국이 탈퇴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전체 균형을 기울이지는 못했다. NATO와 WTO(Warsaw Treaty Organization;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과거 스타일의 군사적 동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증을 위한 조약들 이였다.

 

냉전의 종식은 동맹 국가들의 행동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1990년에 NATO는 유럽의 급진적인 상황변화에 따라 새로운 군사 계획을 검토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뒤이어 NATO의 유럽 멤버들은 NATO의 계획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신들의 군사적 수위를 축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과거의 목적이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NATO가 살아남아서 확장까지 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제도주의자들은 제도란 한번 만들어지면 그 제도의 후원자들이나 멤버들의 의지에는 점점 덜 의존하면서, 자신 스스로의 자율성을 지니고서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NATO가 아마도 그러한 생각에 유효한 예인 것 같다.

 

목적에 대한 질문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조직이란 한번 만들어지면 그것은 자신이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을 찾을 것이다. 커다란 조직은 그 조직의 영속성 속에서 커다란 이익을 개발하는 다수의 관료들에 의해 운영된다. (Gunther Hellman과 Reinhard Wolf에 따르면, NATO 역시 그러하다.) 국제정치의 구조가 변화하고 조직이 과거에 지니고 있던 목적이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NATO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제도가 자율성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제도주의자들의 주장에 강력한 증거가 된다.

 

하지만 제도주의자들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깊게 틀어박힌 국제적 관료조직이 조직의 유지를 도울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들이다. 현실주의자들의 시각에 따르면, NATO는 동맹이라는 자신의 주요한 기능을 상실한 뒤, 유럽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외교, 군사적 정책을 유지시키는 방법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NATO의 생존과 확장은 多국가적인 성격으로서의 제도보다 오히려 미국의 힘과 영향력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다 죽어 가는 제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미국의 능력은 국제 제도가 어떻게 강대국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제 제도들은 기본적으로 국제 이익보다는 국가 이익에 봉사한다.

 

NATO의 확대를 위한 이유들은 취약하다. NATO는 유럽에 새로운 구분선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의 서쪽을 향해 멈출 줄을 모른다. NATO는 러시아인들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향하고픈 마음을 약화시키고 오히려 그 반대를 강화시킨다. NATO가 러시아를 유럽과 미국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중국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발칸 반도 등에서 미국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사훈련들을 유럽국가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지니고 봐라보았고, 결국 그들은 스스로 군의 현대화와 독자적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만약, 유럽 국가들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한다면 미국에 의해 통제되는 NATO와 독립적인 유럽의 행동을 허락하는 NATO 사이의 긴장이 다시금 문제시 될 것이다.

 

유럽에서의 상황과 러시아의 반대는 NATO의 동쪽으로의 확산을 거부하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다. 반대방향에서의 추진력은 미국이다. 확산의 추진력은 종종 깨지기 힘든 것이다.

 

혹자는 미국이 단순한 세계적인 지배 세력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지배 세력(liberal dominant power)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확장의 고안자들은 어리고, 약한 국가들의 민주주의를 육성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임무가 왜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어야 되는지, 정치-경제적 기구가 아니라 군사적인 기구가 그러한 일을 추진해야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NATO의 예를 통해서 중요한 결론에 이르렀다. 냉전의 종식이 NATO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현실주의의 예측은 틀렸다. 하지만 이러한 실수는 현실주의 이론의 실패로부터가 아니라 미국의 우매함에 대한 과소평가로부터 나온 것이다. NATO의 확장은 구조적 설명의 결점이 아니라 한계를 묘사할 뿐이다. 요컨대, 가장 강력한 국가는 구조적 압력에 대해 자신의 정책을 어떻게 만들지 결정할 수 있고, 구조적 변화가 제공하는 기회를 활용할 수도 있다.

 

Keohane과 Martin은 현실주의자들이 “제도는 극히 제한된 영향(marginal effects)만을 준다"고 주장했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현실주의자들은 제도가 어떤(강한 혹은 약한) 영향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은 국가들이 의도하는 바에 달렸다고 지적해왔다.

 

흥미롭게도 Keohane과 Martin은 Mearsheimer의 신랄한 비판을 반박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들에 따르면 제도는 권력 실체(power realities)와의 결합에 따라 중요한 차이를 지닌다. 자유주의 제도주의는 더 이상 현실주의의 분명한 대안이 아니고 현실주의 안에 포함된다. 구조 이론에서 출발한 제도주의 접근법은 이것을 제도의 생성과 작동에 적용하고 당연히도 현실주의자들의 결론에 도달한다.

 

동맹은 제도주의의 약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도이론은 대부분 국가들 안에 기원을 두고 있는 제도들을 causal effects로 취급한다. 하지만 NATO의 예는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NATO는 제도 자체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그것을 원해서 이기 때문이다.

 

NATO의 예는 또한 balance-of-power 이론의 흥미로운 측면을 보여준다. Robert Art에 따르면 NATO나 미군이 없다면, 유럽은 군비경쟁에 휩쓸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강조하다시피 이것은 현실주의적 전망이다. 그러한 관점은 고려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국제제도들은 국가의 결정에 의존한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다.

 

Keohane은 “냉전 이후 유럽에서의 군사적 갈등을 피하는 길은 제도적 협력(institutionalized cooperation)의 지속 여부에 달렸다”고 믿는다. ‘하지만 무엇, 혹은 누가 그러한 pattern of institutionalized cooperation을 유지시키는가’의 문제는 남는다. 현실주의자들은 대답을 안다.

 

 

7. INTERNATIONAL INSTITUTIONS AND NATIONAL AIMS

 

NATO에서의 원칙은 다른 국제 제도들 모두에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국제 제도들이 국가 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이 제도를 만들고 유지시키는 주요 국가들의 능력이나 의도가 제거된 단지 일부분에 한해서 이루어진다. The Bretton Woods system 등의 국제적 관습, 조약, 제도들은 국가능력의 배분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국제법들은 대부분의 시간동안 준수되지만, 강대국들은 그들이 선택하기만 하면 법을 무시한다.

 

 

8. Balancing Power: Not Today but Tomorrow

 

현실주의 이론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국제 정치가 국가 능력의 배분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증명된다.) 또 다른 전제는 세력 균형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현실주의 이론은 한번 붕괴된 균형이 언젠가 복구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국제정치이론의 역할은 국가에 가해지는 구조의 압력을 다루지, 그러한 압력에 국가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다루는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균형이 언제 복구될 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후자는 이미 발생하는 균형의 경향을 관찰한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련 몰락이후 국제정치 체제는 unipolar system이 되었다. 구조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unipolarity는 오래 지속되기 힘든 것이다. 첫째, 지배적 권력은 너무 많은 임무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는 결국 그들 스스로를 약화시킬 것이다. 둘째, 심지어 지배적 권력이 절제와 자제를 지니고서 행동하더라도 약소국들은 이 국가의 장래 행동에 대하여 불안해할 것이다.

 

 

9. THE BEHAVIOR OF DOMINANT POWERS

 

지배적 권력으로서 미국이 동일한 반응을 이끌어 낼 것인가? 권력 불균형은 다른 이들에게 잠재적인 위험이다. 친절한 의도를 지니고 미국은 행동해왔지만, 이는 때때로 다른 국가들에게 당황스럽게 하는 방식으로 지속될 것이다.

 

 

10. BALANCING POWER IN A UNIPOLAR WORLD

 

분명히 변한 것은 있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권력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이 반발하고 싶어 하지 않게 만든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power politics 게임을 하는 것은 너무 비싸고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로운 균형은 천천히 등장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 이는 금새 나타날 것이다.

 

 

11. INTERNATIONAL STRUCTURE AND NATIONAL RESPONSES

 

unipolarity에서 multipolarity로의 이동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내부 발전과 외부 반응은 두 국가를 강대국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미국은 십만 명의 군대를 동아시아에 주둔시키고, 일본과 남한에 안보를 공급하면서, 중국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아시아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세력 균형을 방지하고 (계속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는) 의도이다. 서유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NATO를 확대시키는 의도 역시 마찬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세계를 unipolar 상태로 지속시키려는 미국의 열망은 이미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머지않아 이러한 역할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인구학적, 정치적 자원의 한계를 초월할 것이다. multipolarity는 우리의 눈앞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balancing의 법칙에 따라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section에서 balancing에 대한 논의는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다소 경험적이고 사색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균형 이론에 대하여 조금 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 구조 이론과 세력 균형 이론은 국가가 항상, 심지어 일반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균형은 생존을 위한 전략 중 하나이고 자국의 자율적인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는 시도의 방편이다. 국가들은 다양한 생존 전략을 시도한다. 균형은 그러한 것들 중에 하나이다.

 

균형 이론은 행동의 일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내에 존재하는 주요 국가들의 행동에 있어 강력한 경향성을 말한다. 국가들은 당연히도 서로 다른 생존 전략을 추구한다. 하지만, 균형을 향한 행동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과 그러한 행동이 만들어내는 반복의 형태들은 균형이론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이다.

 

 

12. Conclusion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면, 항상 사람들은 realism이 죽었다고 외치곤 한다. 하지만, 국제 정치가 전환되었다는 것은 이것과 다른 이야기이다. (평화가 있다고 해서) 국제 정치 자체가 전환된 것은 아니다.

 

구조적인 변화들은 국가의 행동과 그들의 상호작용이 낳는 결과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국제 정치의 중요한 계속성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국제정치 자체의 전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전환은 더 이상 자조(self-help)하지 않아도 되는 국가들에 의해 국제 체제가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국가 사이의 협력과 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걱정은 그러한 협력과 제도의 작동방식을 결정하고, 그들의 성과를 제한한다. 전환이 일어날 때까지, 혹은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구조적 현실주의는 국제 정치의 기본적인 이론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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