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힉스(Wilson Hick) - 글과 사진 (Words and Pictures)에서 -
침착한 눈과 훈련된 눈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가 있다.
....인간은 과거 경험을 그의 생각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 상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 속의 세계에서는 반응적 행동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지각과 감각에 몰두한다. 이렇게 상상적인 세계에서 인간은 현실에서와는 다른 가치 체계와 지각 체계를 채택하게 된다. 상상의 세계는 기억 속 이미지의 세계인 반면에 현실 세계는 실제 현실에 보고 지각하게 되는 실체 사진의 세계이다. 기억 속의 이미지와 사진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어떻게 보면 사진은 사진을 찍은 사람의 기억 속 이미지를 다른 사람도 관람할 수 있게 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기억되는 상황과 마찬가지로 사진 속의 상황도 역시 반응을 요구하거나 부신에 자극을 주거나 심리 상태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는다. 기억 속의 이미지에서와 같이 사진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관람자는 냉정할 수 있다. 사진으로 인해 자극되는 감정의 상승은 현실 세계에서 보다는 약하지만 오히려 더욱 명백하게 인간의 의식으로 전달된다. 자신을 포함한 또는 자신과 관련이 있는 내용을 보여 주는 사진을 보는 자는 분리된 관점을 갖는다. 즉 현실에서와는 달리 그는 ‘사심이 없는 응시의 강도’를 갖게 된다. 또한 그는 사진 속 내용에서 행동을 하지 않고도 자극을 받을 수 있각. 다시 말하자면 연극을 보는 관객이 관객석에 앉아 무대 위의 연기자들을 보는 것만으로 그 연극의 내용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사진을 보고 “그 현장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어. ”라고 말한다. 사실, 사진을 잘 찍었을 때는 그 사진을 보는 것이 실제로 현장에 있는 것보다 더 구체적인 의식 형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항상 흥분된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우 침착한 의식 상태와 평온한 인체 상태에 놓여있다 해도, 인간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에 비해 덜 정확한 것이다. 풍경을 보고 있든 길 건너 친구를 보고 있든 간에 인간의 눈은 카메라의 훈련된 눈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인간의 눈은 보고자 하는 것만 선택해서 본다. 하지만 카메라의 렌즈는 가리지 않는다. 카메라는 항상 외부인의 자세로 있다. 특별히 알고 그래서 더 잘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메라의 지각 능력이 눈의 지각 능력보다 더 완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카메라의 ‘시각’에 있어 이러한 양적 가치는 포토 저널리즘에 장단점을 제공한다. 사진에 너무 많은 것이 보이는 것 역시 너무 안 보이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포토 저널리즘에서는 카메라로 보이는 모든 것을 기록하기를, 또 중요한 모든 것을 포함해서 보여 주기를 요구한다. 카메라는 하나의 물건에 불과하지만 이런 요구에 부응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포토 저널리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카메라에 있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고 사물을 포괄적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것을 똑똑히 분별하고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카메라 자체가 이런 기능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가는 이 도구를 신중히 사용하여 최대한 효과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사진가는 잘 관찰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 · 최대한으로 통재해야 하며, 카메라라는 도구와 같은 ‘훈련된 눈’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와 같은 ‘훈련된 눈에 대해 콜롬비아 대학교 역사 교수인 바준(Jacques Barzun)은 “예술가는 일반 사람들보다 우수한 지각 능력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환경에 대한 반응을 더욱 민감하게 보인다" 라고 언급한 바 있다. 화가이기도 한 바준이 말하기를, 화가는 구상을 하고 그 생각을 명확히 구성하여 기술적으로 그것을 캔버스 위에 옮긴다. 이것은 이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화가는 자신이 다른 일반인들보다 더 많고 흥미로운 것을 보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을 일반인으로써 자신의 반응과 그 화가의 표현 속에 닮긴 의미를 함께 받아들이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술가는 인간의 경험 세계를 넓혀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바준의 주장은 화가나 취재 기자 또는 사진가 등 모든 예술인들 게 있어 중요한 출발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은 과거 경험을 그의 생각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 상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 속의 세계에서는 반응적 행동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지각과 감각에 몰두한다. 이렇게 상상적인 세계에서 인간은 현실에서와는 다른 가치 체계와 지각 체계를 채택하게 된다. 상상의 세계는 기억 속 이미지의 세계인 반면에 현실 세계는 실제 현실에 보고 지각하게 되는 실체 사진의 세계이다. 기억 속의 이미지와 사진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어떻게 보면 사진은 사진을 찍은 사람의 기억 속 이미지를 다른 사람도 관람할 수 있게 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기억되는 상황과 마찬가지로 사진 속의 상황도 역시 반응을 요구하거나 부신에 자극을 주거나 심리 상태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는다. 기억 속의 이미지에서와 같이 사진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관람자는 냉정할 수 있다. 사진으로 인해 자극되는 감정의 상승은 현실 세계에서 보다는 약하지만 오히려 더욱 명백하게 인간의 의식으로 전달된다. 자신을 포함한 또는 자신과 관련이 있는 내용을 보여 주는 사진을 보는 자는 분리된 관점을 갖는다. 즉 현실에서와는 달리 그는 ‘사심이 없는 응시의 강도’를 갖게 된다. 또한 그는 사진 속 내용에서 행동을 하지 않고도 자극을 받을 수 있각. 다시 말하자면 연극을 보는 관객이 관객석에 앉아 무대 위의 연기자들을 보는 것만으로 그 연극의 내용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사진을 보고 “그 현장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어. ”라고 말한다. 사실, 사진을 잘 찍었을 때는 그 사진을 보는 것이 실제로 현장에 있는 것보다 더 구체적인 의식 형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항상 흥분된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우 침착한 의식 상태와 평온한 인체 상태에 놓여있다 해도, 인간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에 비해 덜 정확한 것이다. 풍경을 보고 있든 길 건너 친구를 보고 있든 간에 인간의 눈은 카메라의 훈련된 눈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인간의 눈은 보고자 하는 것만 선택해서 본다. 하지만 카메라의 렌즈는 가리지 않는다. 카메라는 항상 외부인의 자세로 있다. 특별히 알고 그래서 더 잘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메라의 지각 능력이 눈의 지각 능력보다 더 완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카메라의 ‘시각’에 있어 이러한 양적 가치는 포토 저널리즘에 장단점을 제공한다. 사진에 너무 많은 것이 보이는 것 역시 너무 안 보이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포토 저널리즘에서는 카메라로 보이는 모든 것을 기록하기를, 또 중요한 모든 것을 포함해서 보여 주기를 요구한다. 카메라는 하나의 물건에 불과하지만 이런 요구에 부응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포토 저널리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카메라에 있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고 사물을 포괄적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것을 똑똑히 분별하고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카메라 자체가 이런 기능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가는 이 도구를 신중히 사용하여 최대한 효과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사진가는 잘 관찰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 · 최대한으로 통재해야 하며, 카메라라는 도구와 같은 ‘훈련된 눈’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와 같은 ‘훈련된 눈에 대해 콜롬비아 대학교 역사 교수인 바준(Jacques Barzun)은 “예술가는 일반 사람들보다 우수한 지각 능력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환경에 대한 반응을 더욱 민감하게 보인다" 라고 언급한 바 있다. 화가이기도 한 바준이 말하기를, 화가는 구상을 하고 그 생각을 명확히 구성하여 기술적으로 그것을 캔버스 위에 옮긴다. 이것은 이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화가는 자신이 다른 일반인들보다 더 많고 흥미로운 것을 보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을 일반인으로써 자신의 반응과 그 화가의 표현 속에 닮긴 의미를 함께 받아들이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술가는 인간의 경험 세계를 넓혀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바준의 주장은 화가나 취재 기자 또는 사진가 등 모든 예술인들 게 있어 중요한 출발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1962년 의회 유세 기간 동안 미네소타주의 폴 거리에 있는 히포드롬에서 민주당원들에게 열렬한 연설을 하고 있다. 하원 의원인 휴버트 험프리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68년에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었다. 역시 상원의원 맥카시는 후보자 지명전에서 험프리에게 반기를 들었다.
여기에서의 카메라는 그것이 국가의 정치적 계급 제도를 나타내는 것처럼 명확하다. 사진기의 목적은 현실적인 유형의 혼란 상태에 질서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실례에 있어서 사진가는 대통령이 도착하는 순간에 연설자의 연단에 있는 군중의 본질적인 혼란율과 효과적으로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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