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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현대민주주의론] 시민혁명과 민주주의의 확산

by 淸風明月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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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혁명과 민주주의의 확산

 

민주주의는 demoskratia의 합성어를 기원으로 하는 democracy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서양정치의 산물이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아테에서 시민권을 향유하는 제한된 시민에 의한 직접민주주의로부터 출발해서, 중세 말 부르주아의 정치적 참여를 계기로 고전적 자유주의로 발전했으며, 다시 노동자계급의 참여를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로 발전했다. 그러나 서구의 68혁명과 제3세계의 민주화를 계기로 광범위한 시민의 참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민주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1.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의 직접민주정치는 공인된 시민을 주체로 정치광장인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외국인, 부녀자, 노예 등은 시민이 될 수 없었으며 오직 가족을 구성한 재력있는 20세 이상의 성년 남자만이 시민의 자격을 향유했다 (로마에서는 외국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지주로 구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당시의 직접민주정치는 폴리스 전체 인구의 10% 내외로 구성된 지주계급의 제한된 직접민주정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한적이지만 추첨제를 통해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직접민주정치의 절차를 구축했다는 점, 사전 감사제도를 통해 공직참여의 적정성을 심의하고 도키마시아라는 사후감사 제도를 통해 공직참여의 투명성을 확보했다는 점, 참주의 등장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으로 오스트라시즘(ostracism/ ostrakismos/ 패각투표/ 도편추방)에 의해 잠재적 참주를 10년간 국외에 추방하는 등의 제도적 장치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매우 선진적이라 할 수 있다 (형식을 달리하지만 게르만족 역시 1세기를 전후한 시점에서 유사한 방식의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하였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소크라테스(469-399), 플라톤(429?-347), 아리스토텔레스(384-322)로 이어지는 철학자들에 의해 잘 정리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행적과 사상은 제자인 플라톤이 저술한대화편,소코라테스의 변명,파이돈,크리톤등에 잘 나타나 있다(그러나 아테네 감옥에서 했다는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그의 말이 아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치가를 지망했으나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철학으로 전환한 플라톤의 철학적 관심은 동굴의 우화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데아(Idea), 즉 본질에 대한 탐구였으며,국가론(폴리테이아)을 통해 아테네 정치가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아테네에서 아카데미아를 세워 교육활동을 했다. 후일 아테네를 멸망시킨 마테도니아의 왕 알렉산더의 스승이기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관념론적 관점에서 이데아를 탐구한 플라톤과는 달리 현실의 문제를 탐구했으며,정치학(폴리티카)에서 민주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정치체제를 유형화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이 제시한 독배를 받았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아테네가 두 번 어리석은 일을 하게 하고싶지는 않다"고 거부하였다.

 

2. 아테네의 직접민주정치는 중세봉건사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봉건사회 말기, 일련의 인문사회적, 자연과학적 발달의 성과로서 부활하였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르네상스와 자연과학의 발달, 해상항로의 발달과 신대륙의 발견, 이로 인한 해상교역의 증대와 상공업의 발달 등은 새로운 계급인 제3신분의 신흥부르주아지의 등장을 촉진하였다. 농업혁명으로 인한 잉여농산물의 비축, 13세기 이후의 농노해방, 14세기 중엽 흑사병의 창궐과 농업노동력의 부족, 군사기술의 발달로 인한 성곽과 기사 등 봉건적 도구의 불필요성, 그리고 자유로운도시의 발달과 도시로의 인구이동, 도시(도시인들이 납부하는 세금)에 대한 영주의 필요성의 증대 등 사회경제적 변화는 장원제의 해체를 촉발했다.

 

이 시기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독교가 촉발한 십자군전쟁, 중세의 마녀사냥, 연금술, 교회와 권력의 싸움 등을 수 있다.

 

3. 신흥부르주아지의 등장과 장원의 해체를 바탕으로 한 봉건국가의 몰락 및 동시적으로 진행된 교황권의 약화는 왕권의 강화를 가져왔고, 관료제와 상비군으로 무장된 왕권은 봉건국가에 이어 절대국가(전제국가)가 등장하는 기초가 되었다. 에스파냐/포르투갈(펠리페 2, 1527-1598)), 영국(엘리자베드 1, 1533-1603,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 프랑스(루이14, 1638-1715)), 러시아(표트르 대제, 1672-1725), 독일(프로이센의 프리이드리히 대왕, 1712-1786, “왕은 국가의 제1의 머슴”) 등은 절대국가의 전형적인 사례들이며, 이 시기에 중상주의적 정책을 기반으로 해상교역과 수출을 통한 부국강병책이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 토마스 홉스(1588-1679)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라고 주장하면서 절대군주제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리바이어던, 1651(Reviathan)을 저술했다. ‘교회 및 시민 공동체의 내용형태권력이라는 부제를 단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거대한 영생동물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교회권력으로터 해방된 국가권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스튜어트 왕조의 절대군주제를 옹호한 그는 이에 반대하는 청교도혁명이 발발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였다가 크롬웰 정권 당시 귀국하여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4. 절대국가의 전제정치는 신흥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의 저항을 촉발하여 17세기 이후 서구사회를 부르주아혁명 혹은 시민혁명의 시대로 몰아갔다. 부르주아혁명은 먼저 영국에서 권리장전에 의한 평화적인 명예혁명(1688)으로 촉발되었지만 역사적으로는 마그나 카르타(1215)와 청교도혁명(1649)에 기초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독립전쟁과 독립선언(1766)으로 나타났으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대혁명(revolution by sans-culotte/ proletariat)자유평등박애의 인권선언으로 나타났다. 서구 부르주아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중세봉건시대에 형성된 성직자(1신분)와 귀족(2신분) 등 특권계급에 저항하여 신흥부르주아지가 제3신분으로 등장하였음을 선포했다는 것인 동시에 이들이 역사발전의 주체이자 정치적 주체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제3신분인 부르주아지 뿐만 아니라 귀족, 노동자, 농민 등 4계급이 혁명의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초기에는 국왕이 소집하는 삼부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지만 나중에는 독자적으로 국민의회나 국민공회를 통해 왕권을 장악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되며, 오늘날 의회 혹은 양원제 하에서의 하원(the House of Representative/ the House of Commons)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상은 로크(John Locke, 1632-1704)시민정부론, 몽테스큐(Montesqieu, 1689-1755)법의 정신, 1748, 볼테르(Voltaire, 1694-1778)관용론, 루소(Rousseau, 1712-1778)사회계약론, 1762등으로 대표된다. 특히 청교도혁명 당시 왕당파에 대항한 의회군의 일원으로 참가했고 그 후의 명예혁명을 대변했던 로크는 홉스의 자연사상과 절대권력론을 비판하면서 시민의 입장에서 국가권력의 제한을 요구하는 제한권력론을 주장했으며, 그의 사상은 후에 유럽과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삼권분립을 주장했던 몽테스큐에 앞서 활동했던 로크는 행정권과 입법권의 분리를 의미하는 이권분립을 주창했다.

 

영국은 17세기에 청교도혁명(1640-1660)과 명예혁명(1688)이라는 두 차례의 시민혁명을 통해 의회주의를 발전시켰다. 청교도혁명의 권리청원과 명예혁명 이후 1688년의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1689년의 권리장전(Bill of Right)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문서로서, 주요 내용은 영국 왕은 영국 사회에 속한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률을 작성하거나 정지할 수 없고 과세와 상비군을 설치할 수 없다. 의회 내의 언론의 자유 보장. 왕에 대한 인민의 청원권(불만) 인정. 국민은 부당한 보석, 벌금, 보석금, 잔인한 처벌 등을 받지 아니한다. 이유 없는 의회의 불소집은 불가하며, 의회의 회기는 자주 연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5. 그러나 부르주아혁명을 통한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정의 확립은 신흥부르주아지의 정치적 권리를 신장한 반면 혁명에 참여한 산업혁명의 후예들 (노동자계급/프롤레타리아트/쌍뀔로뜨)에게는 아무런 과실도 제공해주지 못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는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전체 인구 1,400만명중 겨우 16만명이 유권자였다) 귀족출신과 신흥부르주아지에게는 복수투표/차등투표 등의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중반인 1838-1848년 영국에서 노동자 참정권운동인 챠아티스트운동 (chartist's movement)을 촉발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노동자혁명인 1848년의 2월혁명이나 1871년의 파리꼬뮌(Paris Commune)을 촉발하기도 하였다.

 

6. 노동자계급이나 진보적인 세력들은 참정권을 요구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을 결성하여 정치에 참여하였다.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프랑스의 공산당과 사회당, 이탈리아 공산당, 기타 서구의 사회민주당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참정권운동은 20세기 들어 일정 선거연령 이상의 모든 국민들이 선거에 참여하게 되는 보통선거, 모든 국민들에게 동일한 투표권이 주어지는 평등선거 등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투표권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부여되었다 (미국 14개주 1890-1914, 뉴질랜드 1893, 호주연방 1902, 핀란드 1906, 노르웨이 1907, 덴마아크 1915, 네덜란드 1917, 영국과 독일 및 오스트리아 1918, 스웨덴과 룩셈부르크 1919, 미국과 체코 1920, 폴란드와 유고 1921, 프랑스 1946, 한국 1948, 스위스 1971). 따라서 19세기 후반 이후 정치적 참여의 확대는 참정권의 확대와 새로운 정당의 창당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7. 60년대 이후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확산된 신사회운동’ (new social movement)은 정치참여의 새로운 방식으로 부각되었다. 여성운동과 인권운동, 환경운동과 반핵운동 등을 주제로 한 신사회운동은 정당과 정치권의 역할을 넘어 시민사회의 정치적 역할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독일 녹색당(green party)은 시민운동의 영역에서 정치운동으로 전환함으로써 많은 관심을 촉발했다. 현재 시민운동이 정당으로 전환한 사례는 많지 않지만 다양한 시민운동들이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전제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정치참여의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유사한 시기에 사회주의국가인 동유럽에서도 시민사회의 성장이 목격되었다. 바웬사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 연대노조(solidarity)의 성장과 성공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60년대 이후 유럽에서 목격되고 90년대의 시점에서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공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공영역인 시민사회는 정치참여의 매우 중요한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8. 서구와는 다른 측면에서 7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의 제3의 물결 역시 남부유럽과 제3세계에서 군부통치에 저항하여 시민의 정치참여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확대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2차 대전을 계기로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중남미 국가들은 50년대 중반 이후 군사쿠데타에 시달리면서 정치불안을 경험했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민주화를 시작으로 중남미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아시아에서 필리핀과 한국의 민주화 등을 계기로 전반적인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국에서 4월혁명,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 6월민주항쟁 등은 민주화를 위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평가되고 있다.

 

9. 반면, 8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구소련의 개혁과 개방(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으로 시작된 사회주의국가들의 변화는 구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 및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가져옴으로써 19세기 이후 형성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 이에 근거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대결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17년 세계를 놀라게 한 러시아혁명 이후 1945년 이후의 동유럽과 북한, 1949년의 중국혁명, 60년대 이후 쿠바와 베트남 등 일련의 사회주의적 경향은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방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이후 실패로 판명되었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패는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의 모순을 반영한 국가사회주의의 필연적인 결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결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촉발하였다.

 

10.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형성된 동서진영간의 냉전적 대결,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역사적 대결이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민주적 제도인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이것은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참여 문제를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과 모색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서구의 68혁명 이후 부각되기 시작한 참여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결사체 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 등의 논의나, 자본주의로 전환한 동구 국가들에서 나타난 각종 색깔혁명’(200311월 대선에서 그루지야의 장미혁명,/벨벳혁명, 200412월 대선에서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20053월 몰도바의 포도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레몬혁명, 20061월 카자흐스탄의 튤립혁명, 20063월 벨로루시의 데님혁명, 아르메니아의 살구혁명 등)이나, 최근 중남미에서 불고 있는 좌파 열풍(1999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 2002년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200410월 우루과이의 바스케스 대통령, 200512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 20061월 칠레의 바첼렛 대통령 등. 20066월 결선투표를 치를 페루의 우말라 후보, 20067월로 예정된 멕시코 대선의 오브라도르 후보 포함)은 민주주의 논의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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