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란 기껏해야 하나의 나지막한 목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또는 여러 장의 사진이 이루는 전체적인 조화가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여 지각으로 매개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어떤 사진들은 그것들이 사색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이것은 어느 한 개인이나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성의 소리를 듣게 만들고, 이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며,때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찾아내도록 인도해 갈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생활방식이 그들에게 낯설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와 연민을 느낄 것이다. 사진은 하나의 작은 목소리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진은 잘 구성하기만 하면 그 소리를 들려줄 수가 있다.
1937년 스미드는 일생 동안 사진 작가로서의 길을 가리라고 굳게 결심하고는 캔자스주의 위치토시를 떠나 뉴욕에 도착한다. 그가 사진계에 등장한 것은 미국의 사진잡지들이 몰고 온 충격이 점차로 커가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1936년 「라이프(Life)」지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보도사진 전문지가 탄생되어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을 확장시켜 주어 단시간내 대량의 정보를 대중이 공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유진 스미드는 마가렛 버크 화이트,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 등과 함께 <라이프>의 전성기를 함께 했다.
「라이프」지를 기점으로 우후죽순격으로 늘어난 잡지들 덕에 포토 저널리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즉 문자언어에 의한 '읽는다'는 행위가 영상언어와 결합되어 '보는 것'을 추가시켜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데 큰 몫을 한 셈이다. 18살의 어린 나이로 「뉴스위크」지의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유진 스미드는 사진의 시작부터 끝나는 날까지 보도사진만을 고집한 사진가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스미드의 주된 활동무대였던 「라이프」지는 스미드에게 큰 도약의 발판이 된 셈이다.
1942년 그는 「라이프」지와의 일을 그만두고는 「퍼레이드Parade」라는 주간지의 핵심적인 사진기자가 되었는데, 이 잡지는 그의 기록 사진 덕에 크게 각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미 스미드는 당대의 가장 훌륭한 보도사진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3살에 불과했다. 극적이고 감동적인 힘에 넘치는 그의 스타일은 전전(前戰)의 혼란한 시기의 신문의 요구에 완전히 부응하는 것이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지프 데이비스(Ziff Davis)가 발행하는 「플라잉Flying」지의 특파원으로 일했다.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찾아낸 생명 존중 정신 1943년 말에 USS 벙커힐(Bunker Hill)호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해병대의 어벤저(Avenger) 폭격기에 탑승하여 다섯 달 동안에 걸쳐 16회의 출격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많은 전투 장면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가 가지고 온 사진들은 태평양에서의 공방전 현장에 직접 있었던 유일한 사진 기자에 의해 포착된 가장 충격적인 기록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44년 5월 USS 벙커힐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온 그는 다시 「라이프」지의 기자가 되어 6월에 다시 태평양으로 떠난다. 전투가 한창 치열하던 그 당시에도 여전히 그는 사이판, 괌, 레이테, 유황도, 오끼나와 전투에서 해병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유진 스미드는 1942년부터 그가 취재한 열세 번째의 작전인 오끼나와 전투의 전선을 취재하다가 포탄에 부상을 당한다.
한 장의 사진을 본다. 등에 무언가 짊어진 한 사내가 오르막길을 오른다. 인위적인 노동으로 쌓은 듯한 뾰족한 산이 굴뚝 연기에 흐릿하다. 검은 가루가 잔뜩 앉은 지붕들, 늘어선 길, 빨랫줄에 걸린 희끗한 빨래가 사내가 걸어가는 배경을 흔든다. 어둡고 구석진 모퉁이를 걸어 오르는 사내, 빨래 한 조각보다 작은 사내의 몸피. (미발표 사진 '대영제국' 중) 대공황으로 파산한 아버지가 산탄총으로 자살했을 때, 열일곱 살 아들 유진 스미스는 이미 거대한 사회구조에 한없이 휘둘리는 인간 조건을 인식했던 걸까. 그는 주로 벼랑으로 내몰린 듯한 인간 상황을 담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될 결심을 한다. 그리고 밑바닥 깊이 천착된 인간애가 스며든 생생한 보도사진으로, 2차대전 종군과 뉴스위크를 거쳐 라이프지(誌) 재직 시절인 30대 중반에 이미 '보도사진의 성자이며, 순교자적 인물'로 추앙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살아있는 전설'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수백 번 찍고, 며칠을 꼬박 몰두하는 그의 열정과 정신이 담긴 당시의 시골의사, 조산사, 스페인 마을, 채플린, 슈바이처 등의 연작 사진들은 텔레비전이 없던 1950년대 초반의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강박적 몰두와 알코올과 약물 의존은 그의 생활을 점점 황폐하게 만들고, 더군다나 사진가의 역할이 네거티브에서 끝난다고 믿는 편집진과 제대로 된 프린트와 지면 배치까지도 자신의 몫이라고 믿는 그의 예술관은 격렬한 마찰과 반목으로 이어져 결국 라이프지와 갈라서는 사태를 불러오고 만다.
결국 아내와 네 아이들을 팽개치고 맨해튼 꽃 도매시장 창고 건물에 들어가 7년간 재즈 연주를 찍고, 창을 통한 바깥 풍경을 찍으며 보내던 스미스는 두번째 부인이 된 에일린과 일본으로 건너가 작업한 '미나마타' 연작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한 공장이 무단으로 흘린 수은에 중독된 중증 장애인 도모코의 목욕 사진은 '페스트의 희생자가 넘치는 세계를 찍은 한 장의 피에타'라는 찬사까지 받는다.
1978년 건강악화로 뉴욕을 떠나 정착한 투손의 애리조나대학 부근 상점에서 스미스는 고양이 먹이를 사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쉰아홉 살이었다. 그의 유품은 무서울 정도로 방대한 양의 사진과 레코드, 책, 수많은 글과 편지 그리고 주머니엔 마지막으로 남은 18달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 약 력 >
1918년 미국 캔자스주 위치토 출생
1937년 뉴스위크 NewsWeek」지의 기자로 활동
1939∼41년「라이프 Life」지의 계약 사진가로 활동
1942년 지프데비스사 소속으로 태평양전쟁 취재
1944년 라이프 Life」지의 종군 사진가로 사이판, 오키나와 전투를 취재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부상입고 일시 활동 중단
1947년 <라이프 Life>지로 돌아와 활동
1951년 <스페인 마을(Spanish Village)>로 U.S 카메라상 수상
1955년 라이프 Life」지를 그만두고 「매그넘 Magnum」에 가담
1956∼57년 구겐하임 재단의 기금으로 <피츠버그(Pittsburgh)>를 촬영
1959년 <매그넘 Magnum>탈퇴
1968년《유진 스미스》 사진집 출판
1971년 뉴욕과 일본에서 회고전
1975년 뉴욕 국제사진센터에서 『미나마따병(Minamata)』전 개최
1978년 애리조나 대학의 사진창조센터에서 사진을 가르치며 일생을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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