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원론>
제2강의: 정치학 주제의 역사적 변천(2)
*. 김세균, “새로운 현상, 새로운 시각, 새로운 방법”, 김세균 외, [정치학의대상과 방법] 참조
I. 근대정치학의 고전적 주제들
- 근대정치학은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중세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기 시작한 시기에 출현한다. 초기 근대정치학은 고대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주류 정치학과는 달리 다른 사회현상들과 상대적으로 구분되는 정치현상 그 자체의 구명에 초점을 맞추는 근대사회이론의 한 분과학문의 성격을 지니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새로운 구성 원리 등을 구명하는 기초 위에서 국가와 정치의 문제를 다루는 사회이론 중의 사회이론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음
- 근대정치학이 애초에 부딪친 문제는 새롭게 출현하기 시작한 근대시민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국가체제 내지 정치체제가 어떤 것이어야 하며, 그러한 새로운 국가체제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였다.
- 초기 근대정치학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종교권력이나 경제권력과 같은 다른 사회권력들과 명백히 구분되면서 그러한 권력 모두를 자신의 권력 아래 포섭하는 새로운 국가체제 내지 ‘사회의 곁과 위에 선 특수한 공적 권력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체제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였다.
니콜로 B. 마키아벨리(Nicolo Bernardo Machiavelli)의 정치이론: 그의 정치이론의 고유의 관심사는 미래에 생존능력을 지닌 바로 그러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체제를 어떻게 건설할 것이며, 그러한 국가체제의 건설을 위한 군주 내지 정치지도자의 정치기술이 무엇이어야 하는 가였다. 그런데 그의 정치이론은 군주 내지 국가지도자의 행동이론으로 불릴 수 있을 만큼 현저히 ‘인격화’되어 있는 특징을 지닌 것이었음.
장 보당(J. Bodin)의 주권론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정치이론 : 근대적인 사회계약론적 정치이론 구성의 정초자, 그런데 이후 사회계약론은 자유주의 정치이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기능한 데에 반해 그의 계약론은 그것과 다르다.
독일의 국가학: 새로운 공적 권력체로서의 국가체제의 법-행정체계 등이 기본적으로 문제됨
- 새로운 형태의 근대국가가 뿌리를 내린 후 근대정치학은 크게 보아 한편으로 ‘자유주의 정치이론’으로, 다른 한편으로 ’보수주의 정치이론‘으로 발전한다.
1) 자유주의정치이론은 ’사회의 곁과 위에 선 특수한 공적 권력체‘의 형태를 띠고 출현하기 시작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어떻게 하여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이 시장경제를 토대로 출현한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에 적합한 국가, 즉 ‘부르주아적 시민국가’로 만들 것인가를 중요한 과제로서 제기한다. 이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정치이론은 ‘사회계약’에 기초한 정치사회의 구성과 제한정부, 권력분립 하에서 입법권의 우위, 대의제국가, 시민권 보장 등을 주장하는데, 그 고유의 문제의식은 사회권력들로부터 자립화된 국가에 의해 사유재산권과 시민적 권리들이 부당하게 침해받는 것을 방지하고, 부르주아적 시민들과 그 대표자들의 대의기구인 의회에 의한 행정부 토제를 확고하게 확보한다는 것이다.
존 로크( John Locke): 근대자유주의이론의 최초의 정초자
아담 스미스: 민부의 형성을 중요시하고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의 최소화를 주장한 그의 ‘야경국가론’ 역시 대표적인 초기 자유주의 국가이론에 속한다. 경제적 자유주의이론의 정초, 그러나 그의 이론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상응하는 정치적, 도덕적 자유주의 원리의 규며에도 많은 관심을 보인다.
E. Kant의 철학적, 윤리적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이론의 특징: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의 조화
2) 보수주의정치이론은 주로 어떻게 하여 사회세력들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는 국가의 자율성을 확보하며, 그런 국가가 사회를 어떻게 통제해 나갈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자유주의정치이론이 ‘약한 국가’를 지향했다면, 보수주의정치이론은 ‘강한 국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독일과 같이 부르주아지의 힘이 상대적으로 취약해 위로부터의 산업화-근대화를 추진한 나라에서는 보수주의정치이론이 주류이론으로 등장한 반면, 영국과 같이 밑으로부터의 산업화-근대화를 통해 부르주아지가 사회 속에 강력하게 뿌리내린 나라에서는 자유주의정치이론이 주류이론으로 등장했다. (영국 등이 세계자본주의 발전을 주도한 사실을 반영하여 크게 보면 자유주의정치이론이 근대정치학의 발전을 주도함)
수구적 보수주의 (대륙적 보수주의)와 합리적 보수주의 (E. Burke)
3) 자유주의 정치이론
존 로크의 정치이론 등에 기원을 두는 초기 자유주의정치이론: 무산대중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치 않는 ‘유산자들의 자유공화국’의 수립을 주창함으로써 근대초기에 성립된 ‘고전적 자유주의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치이론으로 기능. 이 국가체제는 애초에는 이전의 봉건제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한 다수민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정치적 권리의 확대를 요구하고, 시장경제체제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 등을 요구한 대중들의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민통합’, ‘사회통합’ 문제 등이 주요한 정치적 주제로 부각되기에 이르며, 자유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고전적 자유주의이론을 수정하려는 시도들도 나타나게 된다. 이런 시도들은 대체로 두 흐름으로 표시.
① ‘자유주의의 민주화’ 내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을 추구하는 흐름.
②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병폐를 완화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적 규제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흐름.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적 효용의 극대화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창한 밴덤(J. Bentham)이나 밀( J. S. Mill):보통선거권의 확대와 공적 이익을 옹호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자유주의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
‘적극적 자유론’ 및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창한 그린(T. H. Green)과 홉하우스 (L. Hobhouse)의 이론: 시장 병폐의 제거를 위한 국가개입 등을 옹호하는 ‘혁신자유주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T. H. Green, 1889; L. T. Hobhouse,1922 참조) -> 혁신자유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사민주의적 자유주의, 좌파 자유주의 등으로 명명 가능
제2차대전 이후 자유주의는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주로 로버드 달(Robert A. Dahl)의 이론 등으로 대변되는 ‘다원주의 정치이론’으로 발전하고(Robert A. Dahl. 1961; Robert A. Dahl, 1982 등 참조), 정치제도 측면에서는 자유주의의 민주적 형태라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미국에서 발전한 이른바 ‘경험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경험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학문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 주 흐름은 행태주의 (behaviorism)에서 오늘날 게임이론(game theory)으로, 거기서 더 나아가 겸험적 이론 구성에서 연역적 이론 구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의 관점을 수용한 공공선택이론(public choice theory) 내지 합리적 선택이론 (rational choice theory)으로 발전 - 방법론적으로 한편으로는 방법론적 환원론의 성격을, 다른 한편으로는‘방법론적 개인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의 성격을 지닌다..
2차대전 이후,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혁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중반까지는 자유주의의 지배적 흐름이 된다. 사회권을 시민권으로 옹호한 마셜(T. H. Marshall)의 이론이나 ‘배분적 정의론’을 제창한 존 롤스 (John Rawls)의 이론은 그와 같은 혁신자유주의 흐름을 대표하는 이론임.
- 자본주의체제로의 이행과 더불어 자본주의체제가 만들어내는 계급문제를 극복하려는 제반 사회주의 조류들 역시 등장. 그중 자본주의의 총체적 극복을 추구한 맑스주의가 적어도 제2차대전 이전까지는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흐름을 형성함. 맑스주의는 1917년 볼세비키 혁명에 힘입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세계자본주의체제와 구분되는 세계사회주의체제로 발돋음한 ‘현실사회주의체제’를 뒷받침하는 국가이데올로기로도 기능했다. 현실사회주의체제는 그러나 그 체제에 내재한 여러 모순들이 폭발함으로써 1980년대 말 ~ 90년대 초에 대체로 붕괴하기에 이른다. 이와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사회주의는 대체로 체제 내적 개혁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케인즈주의: 전후 사민주의만이 아니라, 혁신자유주의 이론에서도 광범위하게 수용됨.
- 근대세계로 이행하면서 국가가 민족국가 내지 국민국가 형태로 발전하게 됨에 따라, 주권적인 국민국가들 간의 관계로 특징져지는 ‘국제관계’가 정치학의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며, 특히 국가들 간의 관계가 발생시킨 ‘전쟁과 평화 문제가 국제관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대두하기에 이른다.
근대세계로의 이행과 더불어 국민국가의 건설과 공고화 문제, 부르주아시민국가의 정착과 민주화 문제,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문제 등이 야기하는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국민통합 내지 사회통합 문제, 국민국가들 간의 평화적 관계 수립 문제 등이 주류 정치이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제3세계의 정치적 독립과 제기된 ‘민족 내지 국민 형성’ 문제, 근대화 문제, 민주화 문제 등도 근대적 정치체제의 형성과 정착과 관련되는 문제들이다. 이에 대해 자본주의체제의 총체적 극복을 추구한 맑스주의가 주류 이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척점을 이루었다.
II. 비계급적 문제들의 대두
제2차대전 이후에 이르면 선진국가들에서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안착, 계급타협체제의 구축, 미국 헤게모니 하에서의 새로운 평화적 국제질서의 수립 등으로 근대로의 이행과 더불어 제기된 주요한 문제들이 일정하게 해결되는 국면이 조성된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의 출현은 이전에 거의 제기되지 않았거나 중요한 문제로서 제기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다. 여기서는 이런 조건 속에서 어떤 새로운 주제들이 제기되고, 정치학이 이 주제들을 어떻게 접근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제2차 대전 이후에 이르면 사회민주주의체제나 혁신자유주의체제의 수립 등에 힙 입어 구축된 계급타협체제 하에서 노동자계급의 체제로의 통합이 폭넓게 이루어진다. 이에 힙 입어 제2차대전 이후에는 환경, 여성, 인종문제 등과 같은 이른바 비계급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에 이른다.
환경문제는 그 이전까지 한번도 본격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았던 ‘성장 위주의 산업화정책’이 가져온 새로운 문제에 속한다.
여성문제는 그 이전부터 제기되어온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전에는 주로 ‘남녀 간의 형식적 자유-평등’이 문제된 반면, 제2차대전 이후에는 ‘형식적 자유-평등 속에서도 관철되는 실질적 차별-불평등’이 중요한 문제로서 제기된다.
인종문제는 제2차대전 이후 본격화된 이주노동자들의 유입에 따른 제반 인종적 차별 등이 주요한 문제로서 제기된다. 이때 인종문제는 장애인, 레스비언과 같은 성적 소수자 등에 대한차별과 같은 이른바 ‘소수자문제’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서 제기된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들의 대두와 더불어 계급문제와 환경, 여성, 인종문제와 같은 이른바 비계급적 문제로 불릴 수 있는 문제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① 비계급문제들을 계급문제의 부수현상으로 파악, 비계급문제들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계급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입장, ② 계급문제와 비계급문제들의 ‘증층결정’을 인정하는 가운데 계급문제의 중심성을 주장하는 입장, ③ 그런 중층결정을 인정하는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가는 오직 정세적으로 결정된다는 입장, ④ 계급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비계급문제들의 고유한 독자성을 주장하거나, 중층결정을 인정하는 가운데 특정의 비계급문제의 중요성 또는 절박성을 주장하는 입장 등으로 나눠진다.
①의 입장은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해 대변된다면, ②와 ③ 입장은 사회주의자나 L. 알뛰세르(L. Althusser)와 같은 대변되는 쇄신된 맑스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해, (4)의 입장은 급진적 여성주의자, 산업문명 비판적 생태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해 대변된다. 그리고 여성문제와 관련해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주로 ‘기회제공의 균등’을,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녀 간의 실질적 평등과 가부장제적 구조-의식의 타파 등을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는 반면, 사회주의-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계급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합을 주창한다. 그리고 환경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환경친화적 시장경제체제의 구축’을,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은 ‘환경문제에 대한 인간중심주의적 접근으로부터의 하차’, ‘산업문명으로부터의 하차’ 등을 주창하는 반면, 사회주의자, 쇄신된 맑스주의자들은 대체로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계급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합을 주창한다. 문제 파악과 문제 해결의 방향 등과 관련해 나타나는 이런 견해의 차이와 관련하여, ‘서로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차이를 넘어 제기되는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연대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실천적 과제로서 제기되고 있다.
III. 탈근대의 문제설정, 차이의 정치학 내지 정체성의 정치학 및 내재적 접근법
1. 탈근대의 문제설정
1970년대를 거치면서 계급문제와 구분되는 비계급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과 맞물리면서 맑스주의와 같은 일체의 ‘거대담론’을 거부하고, 그러한 거대담론에 의해 억눌려온 ‘작은 것’들의 복원 등을 주장하는 흐름이 강력하게 대두한다. 이런 흐름이 제기한 새로운 시대인식은 1980년대에 이르러 포스트모더니즘이 시대적 담론으로 부각되면서 대체로 '탈근대' 개념으로 모아지고 있다(Jean-Francois Lyotard, 1979; Agnes Heller and Ferenc Fehér, 1988; 안드라스 게도 외, 1992; 정정호, 강내희편, 1989; 정정호, 강내희편, 1991 등 참조). 그런데 현재를 ‘탈근대’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가 현재 속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시공간적으로 '~ 이후의 존재‘(‘being after’)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후의 존재’란 다음의 의미를 가진다.
① ‘거대담론’ 이후의 존재(being after 'grand narrative'): 탈근대론자들에 의하면, 거대담론은 세계에 대한 특수한 해석의 한 방식으로서 대체로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식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신비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고정된 기원의 기점을 상정하고 있고, 명백히 인과론적이고 역으로 목적론적인 자기 확신을 지닌 이야기를 엮어낸다. 이와 관련해 탈근대론자들은 거대담론이 지닌 구조주의적, 본질주의적, 근본주의적, 환원주의적 인식론과 세계관 및 결정론 등을 부정하고, 문화와 담론의 다원성 및 여러 종류의 (지역적,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작은 담론들 간의 공생을 강조한다. 나아가 이런 입장에서 해체주의, 차이의 정치, 정체성의 정치, 주체성의 정치 등을 주창한다.
② ‘계급시나리오들’ 이후의 존재 (being after 'class scenarios'): 계급정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정치를 규정해온 계급정치를 다른 여러 정치들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③ ‘유럽’ 이후의 존재 (being after 'Europe'): ‘유럽적’이라는 프로젝트는 하나의 해석학적 문화의 표본으로 다른 문화프로젝트에 대해 팽창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모든 문화의 진리'로서의 유럽문화, 다른 문화의 '아직은 감추어져 있는 진리'로서의 유럽문화론 등을 내세운다. 이에 대해 탈근대론자는 유럽중심주의 및 모든 형태의 인종우월주의 등에 반대한다.
④ ‘역사’ 이후의 존재 (being after 'histoire'): 탈근대론자들은 목적론적 역사관 및 보상론적, 구원론적, 메시아주의적 정치관은 물론 모든 형태의 유토피아론을 부정하고 불확정성, 불확실성 등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해 모든 거대담론적 이데올로기, 구원종교, 맑스주의의 종언 및 '과학성의 종언', '진보적 진화의 종언' 등을 주창한다. 동시에 이성중심적 사유와, 객관적 과학,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가능성, 진리로서의 지식관 등으로 내세우는 계몽프로젝트, 인간의 이성적 기획을 통한 세계변화와 자연지배 및 역사적 진보에 대한 낙관론 등을 부정한다.
현대를 포스트모더니티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이런 담론들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먼저 탈근대 담론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펴본다면, 본질적인 것, 중심적인 것 등을 구명하려 한 근대적 담론이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 것, 그리고 사회의 주요한 현실적인 관계이지만 은폐되어 온 것 등에 대해 다시 정당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게 한 점, 그리고 이른바 '정상인'들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배제하면서 무시해온 다양한 종류의 '소수자들'의 목소리와 권리 및 주장 등을 존중하도록 만드는 데에 기여한 점 등이 탈근대 담론의 가장 중요한 공헌에 속한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 목적론적 인식 등과 결별하도록 만든 것 역시 중요한 기여에 속한다. 이 점에서 본질적인 것, 중심적인 것 등을 중시한 근대적 문제설정을 고수한다고 할지라도, 기존의 근대적 문제설정이 지닌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런 탈근대 담론이 지닌 긍정적 측면의 수용이 요구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탈근대 담론에서는 다음의 문제점들도 나타난다.
첫째, 지배적인 탈근대 담론에서는 무엇보다 적대와 차이, 차별과 차이간의 차이를 부정하고 그런 모든 형태의 차이들을 차이로서 일반화-상대화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사회적 관계가 적대와 그러한 적대와 접합한 차별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적대와 차별 구조는 극복되어야 하지만 적대와 차별과 구분되는 단순한 차이는 적극 긍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만든다.
둘째, 소수자들의 목소리, 권리 등을 존중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지니지만, 적대와 차별의 구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구조적 권력을 향유하는 층의 권리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반동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셋째, 탈근대 담론의 유행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선진자본주의체제의 구조변화와 크게 관련을 지닌다. 즉, 대량생산-대량소비체제가 구축되고 자본주의가 장기호황을 누리는 가운데 중간층의 경우 물질적 생활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됨에 따라 표준적-평균적인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는 개별적인 다양한 욕구의 충족을, 물질적 향유를 넘어서는 문화적-비물질적 향유를 중시하는 경향이 대두한다. 이를 배경으로 근대정치에서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 생존권의 문제, 제반 사회적 필요를 최저수준에서라도 확보하는 문제, 계급문제, 구조적인 문제 등이 이들 중간층에게 무시되거나 부차적인 문제로 되고, 비물질적 욕구들이 전면화된 것이 탈근대 담론이 지배적인 담론으로 출현하게 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주체성'의 강조 등도 그런 조건 속에서 나타난 개인들의 철학적 표현의 성격이 강하다.
넷째, 기존의 근대적 담론에서는 환원주의, 본질주의 등의 문제점이 드러나지만 보다 사회적 중요성을 지닌 구조적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는 지향성이 담겨 있는 반면, 지배적인 탈근대 담론에서는 그러한 지향성이 결여되어 있고, 자기만족적인 요구와 필요의 충족만이 절대시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상의 논의와 관련하여, 탈근대적 담론은 '탈근대적 문제설정에 의한 근대적 문제설정의 대체'가 아니라 '근대적 문제설정의 확장과 보완'의 관점에서, 또는 'post-post-modernism'의 관점에서 수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2. 차이의 정치학 내지 정체성의 정치학
탈근대적 문제설정과 관련하여 새로운 접근법으로 부각되고 있는 차이의 정치학, 정체성의 정치학에 대해 좀 더 검토해 보자.( Amy Gutmann ed. 1994; R. D. Grillo, 1998; Baumeister, 2000 등 참조) 사회현상적으로는 여성해방운동, 게이 및 레즈비언 운동, 소수인종운동, 인디언 운동, 장애인 운동 등 계급운동으로 모두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이 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의 '신사회운동'이 '정체성의 정치'와 같은 새로운 이론적 개념을 불러왔다.
정체성의 정치 등이 지닌 중요성은 그것이 단지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의 확보를 추구하는 운동이라는 데에서 더 나아가 계급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사회적 억압과 차별들의 극복을 위한 운동 내지 정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다.
때문에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를 ‘탈정치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은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가 지닌 긍정적인 의미를 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를 그렇게 이해하는 한 그 운동은 ‘자족적이고 자기패쇄적인 동아리 운동’ 수준의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사회적 억압-차별구조의 극복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구조의 온존에 기여할 수 있을 뿐이다.
개인들은 자신이 그 속에 놓여 있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 속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획득하는 가운데 계급적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새로운 정체성도 아울러 부여받게 되는데, 이런 정체성은 성, 인종, 지역의 차이에 따른 정체성을 가리킨다. 이때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는 계급적 정체성과 구분되는 새로운 운동적 정체성을 내세우면서 전개되는 운동이다. 이와 관련,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를 주장하는 이들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기존 사회주의 조류들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정체성의 정치'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기본적으로 '계급론'이 핵심 쟁점으로 부각된다.
정체성의 정치를 강조하는 이들에 의하면, 노동자계급은 맑스주의적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바의 보편적 계급, 즉 세계적 해방의 필연적 담지자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목표와 가능성 속에 한계 지어진 복수의 사회적 담지자들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그리고 단일하고 고정된 노동자계급이란 대개는 고전 맑스주의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구일 뿐이다. 그와는 달리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해온 것은 분열된 노동자 계급이며, 그들의 정체성은 종종 계급과 거의 관계가 없거나, 또는계급적 정체성은 여러 정체성 중의 하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 라끌라우·무페, 1990 참조)
이에 맞서 계급정치의 옹호론자들은 사회변혁에서 차지하는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 등을 강조한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이 변혁의 중심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유일하게 억압당하는 사회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며, 착취관계는 여타 다른 억압적 관계와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에 속한다는 점, 때문에 사회의 어떤 다른 집단도 자본주의 극복에 대해 노동자계급과 같은 정도의 이해관계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쟁과 관련하여, 기존의 좌파정치에게는 계급정치로 모두 환원되지 않는 제반 사회적 억압과 차별을 위한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와 얼마만큼 결합할 수 있는가가 과제로 제기되는 반면, 정체성의 정치에게는 전체 사회변혁의 일환으로 자신을 얼마만큼 확장시킬 수 있는가가 과제로서 제기된다.
이와 관련, 먼저 계급정치의 과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점들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 전통적 계급정치의 과제를 풍부화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성적, 인종적 차이, 환경 등을 자본축적의 요구에 합당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자본축적의 요구로 진행되어온 환경의 파괴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집단은 도시 주변층, 노동자들이다. 때문에 노조가 사용자와 담합하여 환경오염을 묵인하는 대가로 임금을 인상했다면 결과적으로 노동자 가족이나 주변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된다.
그리고 포드주의적 계급타협은 일자리 문제를 여타 삶의 문제 앞에 둠으로써, 선진국 자본의 제3세계 착취, 환경파괴를 묵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세계적 경쟁의 격화는 계급문제와 여성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복지삭감과 실업은 가정의 토대를 부수게 되고, 그것은 높은 이혼률과 가정폭력, 여성의 빈곤, 매춘 등을 가져오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여성은 빈곤층의 주력부대이다. 여성과 가족은 자본의 유연화 전략의 충격과 사회적 재생산비용 삭감의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여성 노동력은 인종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분할통치를 용이하게 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전통적 계급정치가 인종과 성 정체성, 환경 정체성 등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과제를 끌어안아 자신의 과제를 풍부화하고 다른 영역과 연대를 수립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둘째, 계급 내부의 분화와 차이에 대한 인식을 재고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이 노동자계급의 분화와 정체성의 다양화에서 비롯된다면, 이들 중 한 집단의 요구를 허구적으로 보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분화와 정체성의 다양화에 기반 하는 새로운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긴요해진다. 예컨대 오늘날의 축적구조가 낳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화 - 안정적인 정규직, 불안정 노동, 실업 - 가 각종의 정체성들을 낳는다면, 그런 분화를 인정하면서도 그런 분화를 넘어 여러 노동자층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결합시키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내부의 분화와 차이를 인식한 가운데 그런 분화와 차이를 넘어 하나의 계급 형성에 기여하는 대중운동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의 과제로서는 다음의 점들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 자기 영역만의 해방을 추구하는 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정체성은 집합행위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치가 연대의식을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기획되고 조직될 때 그 힘을 커질 것이며 사회적 억압-차별구조의 타파에 적극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이와는 달리 정체성의 정치는 흔히 '자신의 영역 안에 갇히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억압받는 정체성'이 진보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그 정체성이 처한 '주변성'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정체성에 따라 자신의 활동을 제한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성'을 토대로 다른 주변화된 사회의 주체들과 연대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둘째, 자기영역의 해방과제를 절대화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자신의 영역 안에 갇히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영역에서 제기되는 과제를 절대화하는 경향을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체성의 정치'는 선험적인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넘어 사회변혁에서 연대적 힘으로 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의 ‘주체화’ 과정을 밝히고 있고, 또 보편적 해방을 추구하면서도 계급담론의 절대화 등으로 다른 사회적 억압과 차별 문제에 적극 대응하지 못한 기존 좌파운동의 실천적 한계를 보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정체성의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와 관련, 기존의 계급정치와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가 전체 변혁운동의 역량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서로 어떻게 긍정적으로 상호침투할 것인지가 실천적으로 적극 고민될 필요가 있다.
3. 내재적 접근법
기독교와 이슬람, 정상인과 장애인, 백인과 흑인, 여성과 남성 등은 적대나 차별의 관계가 아닌 차이의 관계로서 공존과 상생의 관계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대-차별의 관계로 전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관계를 다시 공존-공생의 관계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타자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이 요구된다고 지적되고 있는데, 특히 과거 유럽의 식민지였던 지역의 역사-문화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주장하는 이론적 조류는 오늘날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라는 이름으로 총칭되고 있다. 내재적 접근법이란 내재적 이해에 기초한 내재적 비판의 방법을 가리키는데, 이때 ‘타자가 타자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 말하게 하는 ‘내재적 이해’는 ‘내재적 비판’의 전제를 이룬다.
내재적 접근이 ‘문화적 상대주의’로 이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러나 내재적 접근법에서는 보편성이 기성의 보편성이라기보다는 상호간의 비판적인 내재적 이해에 기초한 새로운 보편성으로 이해된다. 즉, ‘~과 ~’라는 차이를 서로 타자의 입장에서 이해함으로써 그 차이를 넘어 보다 보편성을 지닌 ‘생산적인 제3의 것’의 창출이 가능하며, 또 그렇게 창출된 ‘생산적인 제3의 것’이 차이를 지닌 것들의 공존과 상생을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Politics and Society Archi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88]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자료집 (0) | 2022.07.27 |
---|---|
1980-1987 군사독재정권미술탄압사례 (0) | 2022.07.27 |
[강의노트] 정치학원론: 정치학 주제의 역사적 변천 part I (0) | 2022.07.24 |
[정치철학] 계급과 대중의 변증법과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주의 개조 작업 (0) | 2022.07.24 |
[정치철학] 국가 소유에 관한 재론 (0) | 2022.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