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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마그나 카르타와 그 영향

by 淸風明月 202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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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 제27권제2호, (95.01)법원도서관

 

마그나 카르타와 그 영향

 

아이버 제닝스 경 지음/안경환·이동민 옮김

 

Ⅰ. 마그나 카르타란 무엇인가?

Ⅱ. 잉글랜드의 자유권

Ⅲ. 마그나 카르타와 의회

Ⅳ. 마그나 카르타와 보통법

Ⅴ. 해외에서의 마그나 카르타

Ⅵ. 마그나 카르타와 미래

 

 마그나 카르타 역문

 

Ⅰ. 마그나 카르타란 무엇인가?

 

1. 1215년 마그나 카르타 [각주:1]

 

대개 마그나 카르타로 알려져 있는 문서는 1215년 6월 15일에 `윈저(Windsor)와 스테인즈(Staines) 사이에 있는 러니미드(Runnymede)[각주:2]라 불리는 초원에서' 존(John) 왕[각주:3]의 날인으로 부여된(granted) 국왕의 특허장(royal charter)이다. 형식상으로 그것은 다른 모든 중세 특허장과 흡사하다. 그것은 라틴어로 양피지에 정서되어 있고 국왕의 날인에 의해 인증되어 있다. 흔히 존 왕이 그 헌장에 `서명했다'(signed)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타 페르 마눔 노스트람(data per manum nostram:朕의 손으로 작성함)이라는 문구를 오해한 것이다. 국왕의 헌장들은 서명된 게 아니라 날인된(sealed) 것이며 현존하는 사본 네 부 중 어느 것에도 서명은 없다.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 소장된 두 부의 사본 중 하나는 원본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급히 씌어졌고 하단에 수정문을 담고 있는 데에 반해, 더 한가할 때 씌어진 게 확실한 다른 세 부의 사본에서는 그 수정문이 본문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왕의 특허장은 `대헌장'(Great Charter)이라는 이름의 근거가 될 만한 예사롭지 않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수도원, 국왕봉신(barons)[각주:4], 자치도시(boroughs)[각주:5]에 자유권(liberties)[각주:6]을 부여하는 많은 특허장들이 있었지만 이 헌장은 `짐의 왕국의 모든 자유민(all the free men)에게' 자유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다수의 사본들이 날인되어 안전한 보관을 위해 대성당들을 비롯한 여타 지역으로 보내졌다. 현존하는 네 부의 사본 중에서 아마도 링컨(Lincoln)과 솔즈베리(Salisbury)에 있는 둘만이 모든 대성당으로 보내진 사본들 가운데 살아남은 것들일 것이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본'은 도버 성(Dover Castle)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아마도 유럽대륙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던 남쪽 해안의 오래된 다섯 항구 쌩 뽀르뜨(Cinque Ports)의 국왕봉신들에게 보내졌을 것이다. 또한 허용된 `자유권들'은 유례없이 광범위하여 잉글랜드 중세법의 많은 부분을 망라하고 있다. 이러한 권리부여는 이 헌장이 신민뿐만 아니라 국왕도 법률에 기속된다는 봉건적 의미의 법의 지배 원리를 천명한 증거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권력은 법률로부터 나오고 그가 국왕이든 성직자든 사적 개인이든 어느 누구도 법률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이러한 관념은 대개 법의 지배(Rule of Law) 또는 법에 따른 통치(government according to law)라고 일컬어진다.

 

2. 여러 개의 마그나 카르타

 

한편 원래 마그나 카르타라고 불리던 문서는 존 왕의 1215년 헌장이 아니라 헨리(Henry) 왕[각주:7]의 1225년 헌장이다. 존 왕은 그의 헌장에 날인하자마자 준수를 거부하고자 교황 이노센트(Innocent) 3세에게 청원했고 교황은 1215년 8월 24일에 헌장이 무효라는 교서를 내렸다. 교황의 이 조치가 어떤 법적 효력을 가지는지 여부는 물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존 왕은 1년 후에 죽고 왕위를 승계한 나이 어린 왕 헨리 3세의 후견인이었던 귀족들이 새 국왕의 이름으로 1215년 헌장의 수정판을 반포(issue)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급히 이루어지는 바람에 어떤 문제들은 고려되리라는 약속과 함께 제외되었는데, 1217년 이 문제들에 대한 고려를 담은 자유헌장(Charter of Liberties)과 삼림헌장(Charter of the Forest) 이라는 2개 헌장이 1215년과 1216년 헌장에 기초하여 헨리 3세의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국왕은 성년이 된 직후 몇가지 목적을 가지고 과세권을 하나 받아내려 했고 동산에 대한 15분의 1 과세권을 얻는 대가로 (1217년의) 2개 헌장을 약간 수정하여 1225년에 재반포하게 되었다. 1237년 헨리 3세는 1225년의 2개헌장을 확인하는(confirming) 또 다른 헌장을 반포하였는데 이 때 2개헌장은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와 `카르타 드 포레스타'(Carta de Foresta)라고 지칭되고 있어서 마치 그 용어들이 그 때 이미 통용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온전한 제목인 마그나 카르타 드 리베르타티부스 앙글리아이(Magna Carta de Libertatibus Angliae) 또는 잉글랜드의 자유권에 관한 대헌장(Great Charter of the Liberties of England)이란 이름은 1297년까지는 쓰이지 않았다. 그 해에 있었던 에드워드(Edward) 1세와 토지소유자들 간의 분쟁해결의 일부로서 국왕은 헌장들을 확인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8) 마그나 카르타의 사본을 작성하기 위해 영장이 발부되었다. 이 마그나 카르타란 1225년 헌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영장에 대한 보고서의 첫머리는 라틴어로 "우리는 잉글랜드의 자유권에 관한 우리의 아버지, 선왕, 上記 헨리의 대헌장을 조사한(inspected) 바 아래와 같은 …  "이라고 시작된다. 그리고는 헨리 왕의 1225년 대헌장 원문을 옮겨놓고 있다.  이 소위 인스펙시무스(inspeximus) 는 제정법기록집(Statute Roll)에 등재되었고 법률가들에게는 권위있는 텍스트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홀(Westminster Hall)내의 법정에서 법정변호사들이 인용하곤 했던 필사본 제정법 선집에서 그 사본들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말에 고법률들이 인쇄될 때 사용된 텍스트는 1297년의 것이었다. 16세기 유명한 토틀(Tottel)과 같은 어떤 인쇄업자들은 헌장을 몇개 장으로 나누고 영역문을 실었다. 토틀의 판은 제임스(James) 1세 에 의해 왕좌법원(King's Bench) 법원장 직에서 해임된 위대한 법학자 에드워드 코크 경(Sir Edward Coke)이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네 권짜리 저서 『잉글랜드법 원론』(Institutes of the Laws of England)은 뒤엣 세 권이 장기의회(Long Parliament) 명령으로 1642년에 간행되었는데 3백년이 넘도록 잉글랜드법에 대한 표준적 저작으로 남아있다. 제2권은 고법률에 대한 연구서이다. 그 첫째가 마그나 카르타인데 그것은 `헨리 3세 재위 9년에 반포되었다'고, 즉 1225년의 것이라고 기술되고 있지만 그 텍스트는 토틀이 인쇄한 형태로 1297년의 인스펙시무스로부터 취한 것이다. 법원과 법서에서 행해진 마그나 카르타에 대한 모든 언급은 바로 최근까지도 코크의 『원론』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된다. 영역문으로 `어떤 자유민도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하며'로 시작해서 `짐은 정의 또는 권리를 어느 누구에게도 팔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거부 또는 연기하지 않을 것이다'로 끝나는 유명한 장은 제29장(Cap.29)으로 불린다. 정말이지 이 조항은 항상 제29장으로 인용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잉글랜드의 법이면서 많은 다른 나라들의 법인 것은 바로 이 제29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항은 보통 존 왕의 1215년 헌장에서 제39장과 제40장으로 간행되는 조항과 내용이 거의 똑같아서 흔히 잘못 인용되고 있다. 1225년의 마그나 카르타는 최소한 55회에 걸쳐 헨리 3세로부터 헨리 5세까지의 모든 국왕에 의해 확인되었다. 가장 나중인 것으로 알려진 확인은 1416년에 있었지만 그 후에도 확인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헌장의 모든 점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평민원의 청원(petition)을 국왕이 의회에서 재가하는(assenting) 것이 관례였는데 의회기록의 일부는 유실되었다. 1429년과 1442년의 법률들에 마그나 카르타에 대한 언급이 있고 1472년의 법률은 `훌륭한 제정법(statute) 마그나 카르타'라고 언급하고 있다. 튜더 왕조(Tudors)[각주:8]의 법률에는 마그나 카르타가 등장하지 않지만 1628년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과 1641년 성실법원(Court of Star Chamber) 철폐법에는 그로부터 나온 규정들이 복창되고 있다. 마그나 카르타 全文은 19세기까지 제정법률집(statute book)에 남아 있었다. 법적인 목적을 위한 권위있는 텍스트는 『왕국제정법』(Statute of the Realm)(1820) 제1권에 25 EdwardⅠ(즉 1297년의 인스펙시무스)로 간행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가서 사문화된 조항들이 제정법개정법(Statute Law Revision Acts)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유명한 제29장을 포함하여 남아있는 부분은 『개정제정법』(Statutes Revised)(1950)의 최신판 제1권 31면에 25 EdwardⅠ로 수록되어 있다.

 

3. 진짜 마그나 카르타는?

 

그렇다면 왜 존 왕의 1215년 헌장이 마그나 카르타라고 불리는가? 두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는 1225년 마그나 카르타 조항들의 대부분이 수정이야 있건 없건 존 왕의 헌장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1215년 헌장은 잉글랜드의 자유권의 원천은 아니며 실제로 그 전에도 헌장들이 존재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서 1100년에 헨리 1세가 반포한 헌장은 1215년 헌장의 선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215년 헌장은 국왕의 의무를 상당히 세부적으로 적어둔 최초의 것이었다. 당대와 후세사람 모두에게 마그나 카르타의 중요성은 많은 부분이 그 세부사항에 있었으며 그것은 1216년과 1217년 헌장들을 거쳐 1225년의 최종적 형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두번째 설명은 윌리엄 블랙스톤 경(Sir William Blackstone)이 1759년에 그의 저서 『대헌장』(The Great Charter)을 출판하기까지 13세기 연대기작가들 때문에 생긴 커다란 혼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1215년과 1225년의 대헌장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 통용되던 텍스트는 1628년의 다넬 사건(Darnel's Case)에 대한 대논쟁에 이르기까지도 1297년의 텍스트였다. 그 논쟁에 참여한 위대한 법률가들 중 어느 누구도 1215년 헌장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로버트 커튼 경(Sir Robert Cotton)이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두 부의 사본을 손에 넣게 된 것은 그 바로 얼마 후였다. 존 셀든(John Selden)은 연대기작가 매슈 파리스(Matthew Paris)가 작성한 텍스트에 마그나 카르타 인쇄본에는 없는 두 개 조항이 실려있음을 지적했지만, 다른 이들처럼 그는 시행 중인 마그나 카르타가 러니미드에서 존 왕에 의해 처음으로 `제정된'(enacted)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블랙스톤은 네 개의 모든 헌장들_1215년, 1216년, 1217년, 1225년의 헌장들_의 텍스트를 출판하면서 그들 모두에게 마그나 카르타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이 전통은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답습되어온 것이다. 이것은 부당한 전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간에는 매우 커다란 공통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5년을 마그나 카르타 750주년으로 기념하는 것 또한 전적으로 타당하다. 반면에 오늘날까지 잉글랜드의 법과 이를 수입해온 많은 다른 나라들의 법에 일부를 이루어온 마그나 카르타는 1225년 헌장이며, 이 책에서 마그나 카르타에 대한 언급은 문맥상 다르게 지시되지 않는 한 9 HenryⅢ(1225) 또는 25 EdwardⅠ(1297)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제정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Ⅱ. 잉글랜드의 자유권

 

1. 법의 지배와 자유권

 

잉글랜드의 어떤 국왕도 동시대인들에 의해 절대군주(absolute monarch)로 여겨진 적은 없었다. 그같은 개념은 잉글랜드법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헨리 8세 때와 같이 `절대적인 국왕'(absolute king)이라는 문구가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단지 잉글랜드의 국왕은 상위영주가 없다, 다시 말해 잉글랜드는 독립된 왕국이다 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법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절대적인 국왕이 될 수 없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국왕대권(royal prerogative)이라고 알고 있는 권한은 마그나 카르타의 시대에는 국왕의 자유권(king's liberties)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교회, 영주 그리고 모든 자유민의 자유권과 똑같은 종류의 자유권이었다. 그러한 다른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법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법의 우위(predominance) 이론은 잉글랜드의 개창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브리튼(Britain) 섬 남반부에 정착하여 앙글란트(Angleland) 또는 잉글랜드(England)를 창조한 게르만 종족들은 로마제국의 신민이 아니었고 로마법에 대해서는 무지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관습법을 가지고 왔고 그 관습법의 핵심은 상호 권리와 의무의 일반적인 승인이었다. 고대 잉글랜드 국왕의 권리와 의무는 여타 잉글랜드인들의 의무와 권리의 逆이었다. 1066년의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은 이러한 일반명제를 변경시키지 않았다. 노르망디의 윌리엄(William of Normandy)은 고해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면서 잉글랜드의 관습법이었던 에드워드의 법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윌리엄 공의 통치하에 봉건적 관념이 잉글랜드에서보다 더욱 강하게 발달했다. 봉건법의 핵심은 영주와 봉신간의 상호관계였다. 봉신의 권리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은 영주의 의무였다.

 

존 왕에 대한 항거이유는 그가 자신의 자유권을 지나치게 확장하여 교회, 국왕봉신, 시(cities)와 자치도시, 그리고 자유민 일반의 자유권을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마그나 카르타는 법의 지배 원칙을 표명한 것이었다. 리베르타스(libertas) 또는 리버티(liberty; 자유권)라는 단어는 종종 한 지역에서 재판권을 행사할 권리와 같이 특허장(grant)이나 법규(prescription)에 의해 부여된 특권(privilege)을 의미한다. 노르만 불어 단어로는 리베르떼(liberte)가 아니라 프랑쉬즈(franchise)였고 현대법에서 리버티는 대개 프랜차이즈(franchise; 특권)라 불린다. 마그나 카르타에서의 자유권은 이런 종류의 특권이 아니다. 제1장은 이러한 문장으로 끝난다:`짐은 또한 짐과 짐의 영구한 후계자들을 대신하여, 짐의 왕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그들과 그 후계자들에 의해 짐과 짐의 영구한 후계자들로부터 소유되고 보유될, 아래에 적힌 모든 자유권들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자유권들은 존 왕이 자기 법적 권한을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항들에 관한 법의 명제들이다.

 

잉글랜드의 자유권(liberties of England)은 그리하여 잉글랜드법의 원칙이다. 이 말은 `신민의 자유권'(the liberties of the subject), "잉글랜드의 법과 자유권'(the laws and liberties of England), "근본적 자유권'(fundamental liberties)과 같은 문구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왕과 그의 대신, 관리, 판사들을 구속하는 법률의 일부이다. 국왕도 또한 그의 신민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자유권과 대권을 지녔지만 그의 권한은 그 신민의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법에 의해 부여되고 제한되며 보호되는 것이었다. 13세기 중반에 브랙턴(Bracton)이 말했듯이 `국왕은 신민 아래에 있어서도 안되지만 신과 법 아래에(under God and the Law) 있어야만 한다.' 

 

2.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과 함의

 

마그나 카르타에 상술된 잉글랜드의 자유권들은 현대인의 눈에는 틀림없이 매우 기묘한 골동품처럼 비칠 것이며 그 대부분은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만약 마그나 카르타가 의회제정법(Act of Parliament)의 형태로 다시 작성된다면 그것은 네 부로 구성될 것이다. 제1부는 제1장에서 나온 단일조항으로서 잉글랜드 교회의 권리와 자유권을 보 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도 (아직 시행중이니까) 지금도 용어상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실제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 조항의 근본목적은 교회수입과 기타 교회재산에 관한 왕의 개입을 금지하는 것이었음에도 18세기 일부 법률가들은 교황의 개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2부는 봉건적 토지보유(tenure)상의 의무와 부수부담에 관한 14개 조항으로 구성될 것이다. 하지만 토지보유는 1290년의 부동산권양도법(Quia Emptores)에 의해 심대한 영향을 받았고 봉건적 토지보유는 1645년부터 시작된 조치를 거쳐 1660년의 토지보유법(Statute of Tenures)에 의해 철폐되었다. 마그나 카르타가 토지관련법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제2부에서 현대적 조건에 적합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제3부는 사법행정에 관한 14개 조항으로 구성될 것이다. 이 중에서 제8장, 제14장, 제29장의 셋은 오늘날에도 효력이 있다. 대부분의 조항은 에드워드 1세가 단행한 개혁 때문에 13세기가 끝나기 전에 사문화되었다. 하지만 강조가 되어야 할 부분은 이 제3부인데, 그것은 유명한 제29장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조항들 또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판명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4부는 나머지 9개 조항으로 구성될 것이며 이 중에서 5개 조항은 아직도 유효하다. 몇개 조항만이 영속적인 중요성을 지녀왔는데 그 중에서 (외국)상인들이 항구를 자유로이 통과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제30장이 가장 두드러진다.  하지만 귀족원과 평민원이 2백년 가까이 마그나 카르타를 확인하고 준수하도록 주장한 것이 그 내용(content) 때문이 아니라 그 함의(implication) 때문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제29장은 14세기에도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매우 본질적으로 신민의 자유에 관련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헌장들이 확인되고 준수되어야 한다는 청원의 본질은 다른 이들과 같이 국왕과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잉글랜드의 법을 유지하고 준수해야 한 다는 것이었다. 마그나 카르타는 오늘날이라면 법의 지배, 법에 따른 통치, 또는 입헌정부(constitutional government)라고 불러야 할 원리의 상징이었다. 비록 그들이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14세기와 15세기 초의 사람들은 입헌정부의 초석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헌법'(constitution)이라는 말은 17세기 이전에는 통치의 틀이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다. 그 말은 튜더 왕조 하에서 의회제도가 발전한 까닭에 17세기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입헌정부의 유지는 법 전체의 유지(maintenance of the laws in general)를 요구한다. 14세기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안 것은, 모든 자유민의 자유권을 의미하는_그리고 17세기까지는 모든 잉글랜드인이 자유민이 되었다. 잉글랜드의 자유권은 국왕과 영주와 평민 모두가 법을 준수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법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

 

 

Ⅲ. 마그나 카르타와 의회

 

1. 의회주권과 자유권

 

마그나 카르타에는 의회에 관한 규정은 없는데 그것은 1215년이나 1225년에는 아직 의회라는 제도가 탄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상설적 기구가 확립되고 기록체제가 정비될 때까지는 그것을 하나의 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중세의회의 공식기록은 제정법기록집(Statute Roll)이었다. 그러나 법률은 대개 의회가 폐회된 후 판사들이 초안하여 평의회의 국왕(King in Council)이 승인하였다. 다른 기록들도 있었는데, 그 전부가 현존하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기록들 덕분에 역사가들은 제도로서의 의회의 역사를 세워볼 수 있다. 존 왕의 1215년 헌장 가운데 제12장과 제14장이 의회의 주요 원천이 된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어 왔다. 이 두 조항은 `짐의 왕국의 공통협의(the common counsel of our kingdom)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관습적인 헌금(aids)을 제외한 어떠한 면역세(scutage:봉건적 토지보유자가 영주에게 직접적 부역을 대신하여 지불하는 돈-원주)나 헌금도 부과할 수 없으며, 이 왕국의 공통협의를 획득하려면 다른 국왕직속 차지인들(tenants of the Crown)은 주장관(sheriffs)과 집행리(bailiffs)를 통해 소집되어야 하는 반면 대주교, 주교, 대수도원장, 백작과 대영주(greater barons)들에게는 개별적으로 영장이 발부되어야 한다고 명하고 있다. 선례가 선례를 낳는 식으로(from precedent to precedent) 확립되는 헌법에서는 모든 선례가 쓸모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1216년, 1217년, 1225년의 헌장들에는 이 조항들이 삽입되지 않았다는 것은 언급해야겠다. 그 조항들이 후세에 알려진 것은 오로지 연대기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매슈 파리스가, 다른 면에서는 1225년의 텍스트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마그나 카르타 텍스트에 그것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그 조항들은 준수되지 않았다. 14세기에 부조세(subsidies)는 의회에서 대개 승인되었지만 중세의회의 구성원은 국왕직속 차지인들이 아니고 대주교, 주교, 대수도원장, 백작, 대영주들에다가 주(counties)와 자치도시의 대표들이 첨가되었다. 이러한 발전 또한 선례가 선례를 낳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주의 대표들은 1227년에 최초로 참석했으며 자치도시의 대표들은 1237년에 참석했을 지도 모르지만 일부가 1265년 시몽 드 몽포르 의회(Simon de Montfort's parliament) 61)에 참석한 것은 확실하다. 에드워드 1세 재위 때부터는 평민 대표들이 대개 참석했다.

 

평민들이 의회에 참석한 사실은 그로 인해 잉글랜드의 자유권에 주의를 끌 기회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마그나 카르타의 발전상 중요하다. 존 왕의 헌장을 초안한 자들은 국왕으로 하여금 그것을 준수케 하는 것이 주요 난제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25인의 귀족(barons)을 선출하여 헌장규정을 실행할 권한을 맡도록 규정했다. 이 조항은 이후의 헌장들에 반복되어 실리지는 않았다. 마그나 카르타를 준수토록 보장하기 위해 州법원에서 州장관이 일 년에 네 번 그것을 낭독하도록 하고 헌장준수를 어긴 사람에 대해 주교가 일 년에 두 번 파문선언을 하도록 하는 방법이 강구되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마그나 카르타의 사본이 모든 개인 장서에 들어가게 되기 전에는 이런 식의 공표가 필수불가결했다. 하지만 주의 신민들이 헌장조항을 알고 있다고 해서 꼭 그 법에 복종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주교에 의한 파문선언조차 국왕과 그 대신들로 하여금 규정을 준수하도록 반드시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에드워드 3세와 리차드(Richard) 2세 재위기간(1327~99) 중에 24개 법률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가 확인되었다. 다른 경우에는 평민원이 헌장확인을 청원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는 대신 법률제정은 없었다.

 

마그나 카르타의 중요한 발전은 헌장확인법(Confirmatio Cartarum, 1297), 헌장에 관한 조항(Articuli super Cartas, 1300)과 에드워드 3세(1327~77)의 법률 중 7개 법률에서도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5조와 제14조의 선례가 된 유명한 `적법절차'(due process)조항이 있다: 재산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도 법의 적정절차에 의해 심리받지 아니하고는(without being brought in answer by due process of law) 토지 또는 보유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하며,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하며, 상속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하며, 사형에 처해지지 아니한다. (28 Edward Ⅲ, Cap.3, 1354) 이것은 그 첫째가 마그나 카르타인 `일곱 법률' 가운데 하나로서, 잉글랜드의 자유권에 관한 가장 유명한 논쟁에서 인용되었다. 토마스 다넬 경(Sir Thomas Darnel)과 다른 네 기사들(knights)이 찰스(Charles) 1세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에게 부과된 강제대부금(forced loan)의 납부를 거부했다. 그들은 구금되었고 보석으로 석방되기 위해 인신보호(habeas corpus)영장을 발부받았다. 법원이 그들에 대한 보석을 거부했으므로 평민원에서와 귀족원과의 협의에서는 대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의 결과 1628년에 에드워드 코크 경에 의해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이 기초되었다. 국왕은 마지못해 이를 재가했다. 완강하게 버티는 국왕에 맞서는 최후의 방법은 반란이었다. 봉건법 하에서 그것은 사실상 합법적이었고 존왕의 1215년 헌장으로 귀결된 사건은 일부 귀족에 의한 정식의 `반항' 또는 충성의 거부로 시작되었다. 에드워드 2세(1327)와 리차드 2세(1399)는 의회에서 폐위당했고, 찰스 1세는 내란 끝에 처형당했으며(1649), 제임스 2세는 의회제정법에 의해 퇴위한 것으로 선언되었다(1688). 현 여왕은 1936년의 퇴위선언법(His Majesty's Declaration of Abdication Act)에 의해 수정된 의회제정법과 왕위계승법(Act of Settlement, 1701)에 따라 왕위를 보유하고 있다. 헌법적 의미에서 보면 1642~60년의 내란은 유익한 경험이었다. 그로 인해 야기된 황폐함은 현대의 내란이 야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했지만, 죽거나 겨우 살아남은 보통사람들의 삶이 짓밟힌 것은 필연적이었다. 상대적 평화의 시기도 있긴 했지만 내란은 18년간 계속되었으며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쿠데타의 연속이었다. `성자들'(saints)의 전제정치는 스튜어트 왕가(Stuarts)의 전제정치보다 더욱 가혹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통사람들을 더욱 가까이에서 괴롭혔기 때문이다. 군대에 의한 통치는 12세기에조차 군대가 의회 양원 모두의 결정에 의해 해마다 법적 승인을 받아야 할 만큼 인기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법에의 복종은 법 전체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변경시킨 것은 헌법일 뿐이고 일반법은 그대로 불변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강제력은 필연적으로 약화되었다. 불법적 수단으로 권력을 획득한 자들은 군사력을 배후에 두고 있었지만 법에 대한 복종의 기초인 안전감(sense of security)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런던경찰, 보우 가(Bow Street)의 경범죄판사, 최고법원의 판사, 근위병여단, 내무장관 또는 여왕까지, 이들 모두가 도움은 되지만 우리의 자유권이 이들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유권은 또한 -트란드(Strand) 街 79)를 달려서 화이트홀(Whitehall)과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 이르는-'클랩함 버스(Clap\ham Omnibus)를 탄 사람' 즉 합리적인 보통사람 없이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헌법상의 계속성(constitutional continuity) 원칙이라고 불려온 원칙이 나오는데 이 원칙에 따르면 최근의 영연방 역사가 실제로 보여주듯이 헌법상의 변경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헌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1660년에 장기의회가 입법을 통해서 찰스 2세에 의한 합법적인 의회 소집을 막았을 때에도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법을 고수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또한 1688년 명예혁명은 명백하게 불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인 외양을 띠게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조지(George) 3세의 정신병 때문에 약간의 불법적 행위가 불가피했지만 그 이외에는 1689년 권리장전(Bill of Rights) 이래로 잉글랜드 내에서 그리고 의회가 관할권을 가진 모든 영역 내에서 헌법상의 계속성은 유지되어 왔다. 14세기와 15세기에는 많은 입법이 과세에 관한 것이었다. 과세의 오래된 두가지 형태인 면역세와 헌금은 1215년 존 왕의 헌장에서 다루어졌지만 1225년의 마그나 카르타에는 거기에 관한 아무런 규정도 없었다. 한편 제29장에 의해 보장된 재산권의 자유는 만약 국왕이 자의적으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면 가치가 거의 없는 것이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법은 재산세가 재산권의 축소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것은 매우 형식적인 해석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세금은 재산으로써 지불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유효한 마그나 카르타 제14장은 똑같은 이유에서 과도한 벌금을 금하고 있다. 중세 평민원은 특히 관세(customs duties)에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이 커스텀즈(customs)라고 불린 것은 양모, 모피, 피혁에 대한 통관세는 법적 힘을 가진 고대 커스텀(custom; 관습)에 의해 부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들은 전쟁 때문에 평소보다 돈에 쪼들리게 되면 흔히 관세를 인상하는 수단에 호소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의회가 동의를 해주었고, 그것은 어떤 때에는 사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금지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2헌장확인법으로 알려진 1297년의 `제정법'에서 행해졌다. 그 제정법은 의회의 청원이 아니라, 에드워드 1세가 모금을 위해 소집한 토지소유자 회합(assembly)의 청원에 기한 것이다. 2헌장확인법은 어떠한 헌금이나 세금도 `왕국 전체의 공통동의'(common assent of the whole kingdom) 없이는 징수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는데 그 후의 법률가들은 이것을 의회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원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고 에드워드 1세는 교회, 토지소유자, 자치도시, 상인들과 개별적으로 협상을 계속했다. 과세는 소집된 의회에서 잉글랜드의 평민대표들(the Commons of England)에 의해 가결되어야만 한다는 원칙이 확립된 것은 그 다음 세기였다. 이러한 발전조차도 관세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는데, 왜냐하면 일부 왕실법률가들은 관세부과가 외국과의 관계를 통제하는 국왕대권에 부수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법원은 제임스 1세의 명에 의해 부과된 추가관세 지불을 거부한 레반트의(Levantine) 상인 존 베이트(John Bate) 사건에서 1606년에 그렇게 판결했다. 그 판결의 결과 관세율은 다시 인상되었다. 1628년에 평민원은 관세뿐만 아니라 강제대부금도 다루어야 했으며 1628년의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은 `지금부터 어떠한 사람도 의회제정법에 의한 공통동의 없이는 어떠한 증여, 대부 헌납금(loan benevolence), 세금 또는 그와 유사한 부담금도 하거나 내도록 강요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는 선박세(ship-money)라고 알려진 별난 세금(세금이 아니라고 주장되었지만)을 계속 걷었다. 존 햄프든(John Hampden)은 그에게 부과된 20실링의 납부를 거부했지만 법원은 아슬아슬한 과반수로 선박세의 효력을 인정했다. 그 판결은 1641년 장기의회법에 의해 `이 왕국의 법과 제정법, 재산권, 신민의 자유권, 의회가 이전에 내린 결정들, 권리청원 …  에 반한다' 하여 번복되었다. 찰스 1세가 의회 없이 통치하려고 했던 1629년에서 1640년 사이 소위 `11년 전제정치'는 잉글랜드 국왕은 대부분의 법률가들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하는 범위 이상으로 자신의 대권을 확장시킨다 하더라도 `혼자 살'수는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찰스 2세 89)에게는 훨씬 더 명백했는데 왜냐하면 병역조건부 토지보유(military tenures)로부터 걷던 수입이 1645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례(Ordinance)는 국왕의 재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로 간주되었지만 1660년 토지보유법에 의해 확인되어야 했 다. 따라서 (국왕은-역자삽입) 의회에서 가결된 과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1688년 이후에는 아주 명백해졌다.

 

의회의 과세통제는 중과세를 막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자의적인 과세는 확실히 방지했다. 또한 의회의 과세통제에 발맞추어 의회의 입법통제도 발달했다. 1688년 이후로는 어떠한 법률제정, 조세징수, 군대유지도 의회의 권위(authority)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때 의회에서 벌어진 대논쟁은 의회, 특히 평민원이 잉글랜드의, 그리고 스코틀랜드와 통합한(1707) 후에는 브리튼(Britain)의 자유권에 대한 수호자라는 전통을 창조했던 것이다. 스스로 휘그당(Whigs)이라 불렀던 다양한 정치가들의 그룹은 자신들이 자유권의 옹호자이며 지지자라고 여겼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피터 라슬레트(Peter Laslett)의 연구를 통해, 존 로크(John Locke)의 『시민정부론』(Treatises of Civil Government) 두 편이 1688년의 명예혁명에 대한 (사후적-역자삽입)옹호로서 씌어진 게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 책은 휘그당이 받아들일 만한 정치철학 즉 `1688년 원리'에 대한 해설서였다. 로크의 자유권은 법에 따른 자유권(liberty according to law)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자유란 로버트 필머 경(Sir Robert Filmer)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모두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원하는 대로 살고 어떠한 법에 의해서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권"이 아니다. 정부 하에서의 인간의 자유(Freedom of Men under Government)는, 삶에 기준이 되고 그 사회의 모두에게 공통되며 그 속에 수립된 입법권에 의해 제정된 지속적인 규칙(Rule)을 갖는 것이다.' 96) 그런데 이것은 우리를 마그나 카르타로 되돌아가게 하는데 왜냐하면 잉글랜드의 자유권은 법 아래에서의 자유권이기 때문이다. 이미 강조했던 바와 같이 마그나 카르타의 핵심적 원칙은 법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곧 1225년 이후 `잉글랜드의 법과 자유권'(the laws and liberties of England)이 법과 자유권 사이의 본질적인 동맹을 보여주는 표준적인 정칙이 되기까지의 법의 발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1688년 이후 잉글랜드의 자유권에 대한 보장은 의회, 특히 평민원에 달려 있었는데 왜냐하면 입법권_입법권은 의회의 법과 관습에 따라 행사되며 어떠한 성문헌법에 의해서도 제한되어 있지 않다_은 의회내의 국왕(King in Parliament)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보통법에 의해 발달한 자유보장책이 아무리 완전하더라도 의회내의 국왕이 잉글랜드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법률을 제정한다면 그 보장책은 무력한 것이었다.

 

권리침해의 예를 찾는 것은 쉽다. 가장 명백한 것은 1819년의 악명 높은 `여섯 법률'(Six Acts)이다. 수차에 걸친 對프랑스 전쟁이 워털루(Waterloo)에서의 승리로 끝난 후 평화시 상태에의 신속한 적응기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경제·사회적 동요의 시기에 대중이 교회와 국가의 개혁을 위한 급진적 선동에 넘어가기는 특히 쉬웠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같은 유형의 브리튼대혁명(British Revolution)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는 없었지만 산업화로 인해 도시로 와서 지저분하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게 된 막대한 인구는 부유한 계급에 속하는 많은 이들에게 사회적 안정성에 대한 중대한 위험으로 보였다. 앤(Anne) 여왕 101) 하에서 꽤 만족스러웠던 대의제도는 1832년까지는 변경되지 않았지만 섭정 황태자(Prince Regent) 102) 하에서는 변칙적으로 되었다. 대체로 잉글랜드는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훨씬 더) 통치미비 상태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는 사실상 치안부재 상태였는데 왜냐하면 촌락과 상업도시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는 대도시, 특히 런던에서는 전혀 부적당했던 것이다. 내무성(Home Office)이 공중소요 가능성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정보원의 비밀보고인데 그들 중 다수는 자기들의 보고가 신빙성있는 외형을 갖추도록 신경을 썼다. 소요가 실제로 발생할 경우 의지할 수단이라곤 군대동원밖에 없었다. 워털루전투 이후의 전반적인 소요, 정보원들의 과장된 보고, 파리 공포시대(Terror in Paris)의 기억, `폭도'에 대한 일반적인 두려움 때문에, `웅변가' 헌트(Hunt) 103)가 맨체스터(Manchester) 시 성베드로 광장(St. Peter's Field)에서 6만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을 때 104) 이미 불안은 야기되고 있었다. 군중은 비무장이었지만 행정관들은 이것이 반란의 시초라고 생각하여 기병대를 불렀고 진압작전은 약간의 생명손실과 다수의 부상자를 낳았다.

 

여섯 법률은 현대의 맨체스터 시에서라면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경감 한 명과 경관 한 소대로 대처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정부와 의회의 과도한 대응이었다. `피털루'(Peterloo)라고 비꼬아 불렸던 이 터무니없는 사건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로버트 필 경(Sir Robert Peel) 105)이 1828년에 (두번째로) 내무장관이 되었을 때 그는 당시에는 지금만큼 명확하지는 않았던 타개책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보통법상의 정규 경관 권한을 가진 비무장 경찰의 전문적 무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런 던에서 시도된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연합왕국(United Kingdom) 106) 전역으로 확대 시행되었다. 법을 모독하려는 조직적 시도가 있는 곳에는 확실히 특별한 권한이 필요하고 (1914~18년과 1939~45년의 브리튼과 같이) `전면전'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특별한 권한이 필요하다. 107) 경찰력과 공중 자유권 사이의 정확한 균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현대 런던의 교통상태에서 예를 들면 조직된 정치 유격대 그룹이 벌이는 공공연한 시위는 규제되어야 하며 전면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러한 시위는 대개 공적 불법방해(public nuisance)를 획책하기 때문이다. 보통법은 변화하는 상황에 맞도록 입법에 의해 강화되어야만 했다.

 

2. 비판하고 감시하는 야당

 

법과는 별도로 시민은 의회 양원으로부터 보호받는다. 마그나 카르타의 근본 원칙들은 입법과 보통법에 의해 다듬어져서 사상의 공동자산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은 사회적 관행에 수용된 원칙이다. 마그나 카르타의 원칙들은 법률가들에게는 명료할지 모르나 일반인에게는 쉽게 납득하기 힘든 명제들이다. 제29장은 라틴어로부터 뒷골목(back streets) 언어로 번역되었다. 의회의원들과 왕국의 귀족들은 이 서민적인 관념 또는 편견을 공유하면서 행동이나 연설로써 이들을 실행에 옮긴다. 부정의(injustice)로 보이는 것을 다룰 때 평민원의 기능은 십분 발휘된다. 비판이 의회 한쪽 당에 의해서만 제기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양원 모두에 조직된 야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심대한 중요성을 지닌다. 미합중국이 끊임없이 예증하고 있듯이 기본적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다른 방법들 108)도 있지만, 특히 효과적인 방법은 책임지는 정부 109)와 정치적 반대당의 결합이다. 브리튼의 제도상 거의 모든 입법은 국왕의 대신들(Ministers of the Crown)로부터 나오며 내각(Cabinet)의 승인을 받는다. 법안을 기초하도록 지시하는 것은 관료들이지만 그 실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오랜 경험을 쌓은 직업 법률가들이다. 이 법률가들은 변호사나 판사로 있는 자기 동료들의 편견을 공유하고 있다. 관료들은 상정된 법안 배후의 정책에 더 신경을 쓰지만 그들의 주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의회에 있는 자기들 장관에 대한 비판을 예견하고 이에 대비하는 일이다. 정책 문제에 관한 비판은 대개 예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초법안에서 결함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지적하고 강조하는 것이 야당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민의 자유권에 관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정부쪽 지지자들 사이에서 야당의 주장이 많은 공감을 얻는다. 장관은 변호하기 곤란한 조항은 싫어하며, 더구나 자기가 충분히 변호할 수 없고 표결에 부치면 다수확보는 할 수 있을지라도 `의회의 분별력'(sense of the House) 때문에 철회하거나 수정해야만 할 조항은 더욱 기피 한다. 의회내 `소동'으로부터 장관을 보호하고자 하는 관료와 잉글랜드 법률가의 모든 편견에다가 법률초안자를 결합시킴으로써, 기본적 자유권에 대한 침해를 제안하는 기초법안은 보통 효과적으로 방지된다. 만약 그것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여왕폐하의 정부(Her Majesty's Government)가 내놓은 법안을 흠잡게 되어 희희낙락하는 여왕폐하의 야당(Her Majesty's Opposition)이 포진하고 있는 양원 모두에서 문제조항은 도전을 견디어내야 한다. 귀족원에도 중립적(cross-bench) 110) 귀족의원들이 다수 있다. 그들은 어떤 당과도 적극적인 관련을 맺지 않으면서, 정략을 떠나 상정법안의 결함을 강조하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생각한다. 그들 중 최소한 열두 명 정도는 판사들 111)로서, 그들은 정치적 문제에 관해서는 불편부당성을 견지하려고 조심하며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의 논평은 더 큰 힘을 가진다.

 

그렇다고 기본적 자유권의 보장이란 것이 입법에 의한 침해를 방지하는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고도산업사회의 5천 3백만 112) 국민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통치조직이 요구되며, 정부와 국민이 만나는 어떠한 수준의 행정조직에서도 부정의가 행해질 수 있다. 원칙적으로 여왕폐하의 정부는 여왕이나 그 대신들에 부여된 권한 내에서 취해진 조치나 결정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그러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날마다 이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데 의회통제가 요구하는 높은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이 때때로 생기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책임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의회 양원의 승인하에 정부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브리튼 통치의 상당부분은 선출된 지방 행정당국의 수중에 있다. 런던 바깥에서 경찰 통제권은 지방 행정당국 대표들과 치안판사들(justices of the peace)로 구성된 공안위원회(watch committees)가 보유한다. 런던 경찰에 대한 내무장관의 통제권도, 관할 경찰력에 대한 공안위원회의 통제권도 법집행에 대한 명령을 내리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경관은 일반법원에 의해 통제되는 독립된 권한을 가진 경찰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심각한_정치적인 중요성이 있든 없든, 피해 당사자에게 심각한 행정행위의 하자(miscarriage of justice)가 있게 되면 정부와 의회가 관계한다.

 

이런 경우 표준적인 처리 테크닉이 존재한다. 제1단계는 의회의 의원에게 알리는 것이다. 의원은 관련 장관에게 연락한다. 많은 경우 장관은 즉시 조사를 개시한다. 만약 정식 심판소(tribunal) 113)가 설치되어야 한다고 생각되고 선서증언청취의 권한을 의원이 수여 할 수 없는 경우라면 그는 의회 양원에서 조사심문기관(tribunal of inquiry)의 설치를 위한 동의를 제출한다. 한편 장관의 조치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의원은 의회에서의 질의를 통해 구두답변을 요청한다. 장관의 답변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되면 의원은 그 문제를 연장토의에 부칠 것을 제의할 수 있고, 이 절차에 따라 평민원 공식업무 마지막에 30분간의 토론이 이루어진다. 매우 중대한 사안인 경우 의원은 질의시간 마지막에 `긴급한 공적 중요성을 띤 특정문제'(a definite matter of urgent public importance)의 심의를 위한 회의연장을 동의한다. 그 문제가 이 범주에 해당한다는 평민원의장의 판단과 40인의 찬성이 있게 되면 연장토의가 허용된다. 여왕폐하의 야당이 포진하고 있는 까닭에 찬성은 보통 40인을 넘는다. 그러고 나면 그날 저녁에 안건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화이트홀에서는 장관의 답변준비를 위한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장관이 해명을 잘 하지 못하면 그는 사실을 시인하고, 신중했더라면 벌써 설치했어야 할 심판소를 설치해야 한다.

 

의회가 이런 활동에 착수케 하는 민원(complaint)이 반드시 위법한(illegal) 행위에 기인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위법한 행위에 대해서는 보통법상의 구제수단이 있고 재판절차가 이미 개시된 경우 의회는 이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법하지만 부당한(unconscionable) 행위도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의회 밖에서는 구제받을 수단이 없다. 이러한 의회활동의 결과 법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권은 확장된다. 장관이나 공무원, 경관의 어떤 행위가 합법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평민원이나 조사심문기관이 볼 때 부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행위가 부당하며 책임이 장관에게 있다면_장관은 자기 부에 속한 공무원들의 행위에 책임을 진다_그는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고, 그에게 실제로 과실 또는 기타 잘못이 있다면 사표는 수리되고 아마도 그의 정치경력은 영원히 종말을 고할 것이다. 경관의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장관도 책임이 없기 때문에 당해 경관은 상관에 의해 견책을 받고 사직하는 길을 택하게 될 것이다.

 

의회내에서 벌어지는 드라마의 주역은 여왕폐하의 야당이 담당한다. 야당은 정부입법에 대한 비판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한다. 야당은 부당한 행위의 사례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의원이라면 소속정당을 불문하고 지원한다. 이것은 2백년에 걸친 역사가 야당에게 맡긴 임무의 일부이다. 브리튼의 다른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선례가 선례를 낳는 식으로 확립되었기 때문에 명확한 기원은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찰스 제임스 폭스(Charles James Fox) 114)를 최초의 야당당수로 간주하고, 아들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15)가 스물네 살에 수상이 되었던 1783년을 그 원년으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1937년 이래로 야당 당수도 장관의 경우와 같이 해마다 의결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영속적인 입법에 의해 통합기금(Consolidated Funds) 116)으로부터 지급되는 공무원 봉급을 받고 있을 만큼 야당은 브리튼 헌법상의 제도이다. 1965년 의회내의 여왕(Queen in Parliament)이 시몽 드 몽포르 의회 700주년을 기념하여 평민원내 야당당수의 봉급을 인상하고 귀족원내 야당당수에게 봉급을 수여하며 양원내 주요 야당 원내총무들(Chief Opposition Whips)에게 봉급을 지급한 것은 야당의 이러한 제도적 성격에 부합하는 일이다.

 

 

Ⅳ. 마그나 카르타와 보통법

 

1. 민사보통법원과 왕좌법원, 그리고 상서법원과 회계법원

 

마그나 카르타 제11장(존 왕의 헌장 제17장)은 `민사보통소송(common pleas)은 짐의 朝廷(our Court) 117)에서 다루지 않고 어떤 특정 장소에서(in some certain place) 재판한다'고 규정하였다. 마그나 카르타 제17장(존 왕의 헌장 제24장)은 `어떠한 주장관, 치안관, 검시관이나 다른 집행리도 국왕소송(pleas of our crown)을 재판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민사보통소송은 시민 간의 소송으로서 민사법의 대부분을 취급하고 있다. 국왕소송(pleas of the crown)은 보통 여왕 명의로 행해지는 형사소송으로서 형사법의 대부분을 취급하고 있다. 중세 법률가들에게 보통법(common law) 118)이라는 말은 이러한 법의 두 분과가 합쳐진 의미를 가졌다. 중세적인 표현이 사실을 숨기고는 있지만 위의 두 조항은 사법부의 독립을 향해 내디딘 공식적인 첫걸음이다. 마그나 카르타의 초안자들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가 없다. 왕실판사들(royal judges)은 국왕의 신하였고 국왕이 마음 내키는 대로 임명되고 해임되었다. 국왕은 자기 법정을 몸소 주재하고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존 왕은 자주 그렇게 했다. 또 국왕은 자신이 참석하지 않을 때에는 그의 판사들이 재판할 사건에 대해 훈령(commands)을 내릴 수도 있었다. 존 왕 당시의 귀족들은 다른 제도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제11장은 국왕에게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사건에서 제소자들의 편의를 도모하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판사들이 국왕과 함께 왕국을 순회하는 동안에는 119) 제소자들은 국왕의 소재가 파악되는 경우에 국왕이 체재하는 곳으로 가야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판사들 가운데 일부는 어떤 특정 장소에서 민사보통소송을 심리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 규정이 준수됨에 따라 일정수의 판사는 국왕을 수행하는 판사들로부터 분리되어서 민사보통법원(Common Bench) 120)을 형성하게 되었다. 14세기에 이따금씩 변화도 있었지만 (마그나 카르타 제11장이 규정한-역자삽입) `특정 장소'는 웨스트민스터 홀이었다(1965년 1월 30일 장례식 전에 윈스턴 처칠 경(Sir Winston Churchill)의 유해가 정장 안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국왕을 수행하던 판사들은 御前판사(King's Bench; 왕좌법원)로 불렸다. 국왕이 어리거나 (대개 그랬듯이) 웨스트민스터 근처에 있을 때 왕좌법원 판사들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21) 더 이상 국왕을 수행하지 않고 항상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하게 되었다. 왕실판사들 앞으로 오는 민사소송은 尙書廳(royal chancery) 122)이 발부하는 국왕영장(royal writ)으로써 개시되었다. 따라서 보통법과 형 평법(law and equity)상의 관할권을 발전시켜서 상서법원(Court of Chancery) 123)이 된 상서청은 웨스트민스터 홀에 위치하는 것이 편리했다. 124) 끝으로, 원래는 왕실세입과 관련한 사건만 다루던 會計廳(Exchequer)의 귀족들은, 제소자는 국왕에 대한 채무자이고 피고가 채무를 변제하지 않기 때문에 제소자도 자신의 채무를 변제할 수 없다는 의제(fiction)를 사용하여 보통법과 형평법상의 관할권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125) 귀족들은 왕좌법원과 민사보통법원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처럼 왕실판사였으므로, 회계법원(Court of Exchequer)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접근이 쉬운 사무실에서 재판을 했다.

 

2. 보통법상 적정절차와 법조, 그리고 사법부의 독립

 

왕좌법원과 민사보통법원 양자가 사실문제의 판단을 배심(jury)에 의존하는 관행을 발전시킨 것도 관련이 있다. 마그나 카르타에는 배심재판(trial by jury)에 관한 것은 일언반구도 없지만 후대의 법률가들은 이것이 제29장에 내포된 것으로 해석했다. 페르 레갈레 유디키움 파리움 수오룸(per legale judicium parium suorum)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들의 同輩들(peers) 126) 〔또는 동등한 자들(equals)〕의 적법한 판결에 의해 라는 뜻이다. 배심의 구성원은 피고(인)의 동배들이다. 따라서 제29장은 보통법상의 모든 재판에 배심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역사학자들이 배심제도는 마그나 카르타에 들어있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지만, 우리 선배 법조인들(our learned predecessors)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고 우리 선배 법조인들이 말한 것이 잉글랜드의 법이다. 배심재판은 변호인이 소송의뢰인의 사건의 성격을 구두로 배심에게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 다음 그는 자기 증인을 불러서 배심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로 심문한다. 그리고 상대편 변호인은 그 사건에 대해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 위해 그 증인에 대해 반대심문을 해야 한다. 원고 또는 검찰 측 증인이 모두 소환된 후 피고(인)측 변호인은 자기 소송의뢰인의 사건을 배심에게 설명하고 자기 증인을 심문하며 그 증인은 또 반대심문을 받는다. 끝으로 변호인들 사이에서 심판(umpire)처럼 행동하는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판사는 법적 논거를 듣고 나서 배심에게 법률적 원칙을 설명해 주고 증거를 요약해 준 다음 평결을 논의하도록 맡긴다.

 

이것이 이미 인용한 바 있는 1354년 법률(28 Edward Ⅲ, Cap.3-역자삽입)이 요구하고, 또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시행된 보통법상의 `적정절차'(due process)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홀은 번화한 장소였으므로 법정은 난간(bar)에 의해 공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변호인은 법-써전트(serjeant-at-law; 상급법정변호사) 127)라고 불렸는데 써 전트(serjeant)란 봉사자(servant)를 의미한다. 상급법정변호사는 자기 소송의뢰인뿐만 아니라 법에도 봉사했던 것이다. 상급법정변호사는 칙선변호사(Queen's Counsel) 128)에 의해 계승되어 왔는데 129) 이들의 임무는 국왕과 법에 봉사하는 일이다. 국왕의 임무가 법이 준수되고 정의가 집행되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에 칙선변호사의 이러한 이중적 임무는 상호간에 아무런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 선배 상급법정변호사처럼 그들은 `난간 안으로 불려온다'(called within the bar; 칙선변호사로 임명되다). 상급법정변호사들은 난간에 서 있는(stood at the bar) 조수 또는 견습생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완전한'(utter)〔또는 외부(outer)〕'법정변호사'(barrister) 130)로 불렸다. 과거에나 지금에나 이들은 `난간 쪽으로 불려온다'(called to the Bar; 변호사 자격을 얻다). 법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난간에 서서 판사와 상급법정변호사의 법해석을 경청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논의들은 논의 그 자체로 끝나버리기 십상이기에 흔히 법정변호사들은 이를 기록하여 `판례年報'(year books) 131)에다 정리해 놓았는데, 이 책들은 법정변호사와 상급법정변호사, 판사에게까지도 판매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13세기 후반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놀라운 `판례기록집'(law reports) 시리즈를 보유하고 있다. 판사, 상급법정변호사, 법정변호사들은 웨스트민스터 시와 런던 시 사이에 있는 여관들(inns and hostels)에 거주했다. 그들은 만찬을 같이 하고 토론도 같이 하면서〔에드워드 코크 경의 판례기록(Reports) 중 일부는 상급법정변호사 숙소(Serjeant's Inn)의 만찬 후에 있는 토론과 관계있다〕직업적 공동체의식을 키워 나갔다. 상급법정변호사의 몰락과 함께 그들의 숙소도 사라지고 132) 지금은 판사 숙소(Inns) 133)가 네 군데 남아있다. 이전에 성당기사단(Knights Templar) 본부였던 곳에 있는 이너템플(Inner Temple)과 미들템플(Middle Temple), 그리고 하이 홀번(High Holborn)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링컨즈 인(Lincoln's Inn)과 그레이즈 인(Gray's Inn)이 그것이다. 서열결정의 기준은 직위가 아니고 운영위원에 오르게 된 순서이므로 칙선변호사 또는 심지어 법정변호사일지라도 귀족원판사(Lord of Appeal)보다 상급자일 수 있다. 법조학원들은 학생에 대한 법정변호사 자격부여와 자격박탈에 있어서〔후자의 경우 고등법원(High Court)에의 상소가 보장되기는 하지만〕완전한 재량권을 갖는다. 직업적 범절(etiquette)은 매우 엄격한데 이것은 법조인의 위신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_법조학원 운영위원들(Benches)은 수입에 대한 논의는 절대 하지 않는다_법의 위신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서류는 공개리에 낭독되고 모든 발언은 공개리에 행해져야 한다는 소송절차에 따라 재판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판사의 진술(observations)과 그가 배심에게 행하는 설시(charges)는 문자로 기록되어서 직업적 평판을 악화시키는 데에 인용될 수도 있었다. 중세에는 여전히 국왕이 판사에게 훈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보통 그 훈령을 공개리에 설명할 것이 요구되었다. 판사들이 난간 내측과 외측에 있는 동료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상당한 독립성을 획득해 나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17세기에 와서도 에드워드 코크 경은 법원장으로서 국왕에게 통고하여 국왕은 왕좌법원을 주재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판사의 입을 통해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1627년 다넬 사건(Darnel's Case) 134)에서 판사들은 선례에 따라 국왕의 의견을 묻고자 했기 때문에 보석허가를 연기하였다. 그러나 판사들은 의회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고 실제로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출두했다. 선박세 영장의 유효성은 그 영장이 발부되기 이전에 판사들에 의해 확인되었지만 존 햄프든 사건(John Hampden's Case) 135)이 공개법정에서 재판되었을 때 판사들은 견해가 나뉘었다. 그리고 다수의견에 따른 판결은 결국 의회에서 번복되었다. 1616년 제임스 1세는 에드워드 코크 경을 해임하였고 뒤이어 다른 판사들도 해임되었다. 그러나 `고집센 노인 코크,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고집센 사람'의 운명은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었다. 1701년 왕위계승법(Act of Settlement)은 판사의 신분보장에 대한 규정을 두어, 판사는 국왕이 마음내키는 동안이 아니라, 적절하게 처신하는 한 그 동안(during good behavior) 136) 판사직을 보유하며 의회 양원의 결의(address)가 있어야 해임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701년 이후 실제로 해임된 판사는 한 명도 없으며 판사는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우침도 두려움도 없이' 재판한다. 이것은 마그나 카르타의 원래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 결과였다.

 

3. 지방사법

 

그런데 재판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만이 아니고 지방에서도 행해졌다. 제17장 137)은 주로 이러한 주와 런던의 법원들에서 이루어지는 지방사법행정에 관련된 것이었다. 나중에 순회판사(justices of assize) 138)로 계승된 순찰판사(justices in eyre) 139)는 지방사법행정을 감독하기 위하여 순회하며 재판을 하였다(eyre(순회)=iter = 여행). 여행과정에서 순찰판사는 민사보통소송과 국왕소송 모두를 심리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순회판사가 하고 있는 업무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앞에는 캠브리지 대학교 총장(Vice Chancellor)의 통지문이 와 있는데 그것은 학장, 대학간부들 등에게 자신이 1965년 2월 26일 오전 10시에 `[순회]판사들의 캠브리지 도착을 영접하기' 위해 대학이사회관을 출발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순회판사 가운데 한 사람은 캠브리지주(Cambridgeshire)의 주장관(High Sheriff)이 되며 (지금은 폐지된) 마그나 카르타 제17장에 어긋나게 실제로 국왕소송을 심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송과정에는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원칙은 준수하게 된다. 지방사법은 예전에 평의회의 국왕이 감독했지만 그 관할권은 실제상으로는 1641년 장기의회에 의해 소멸되었다. 하급법원은 이론상으로는 순회판사들에 의해 감독되지만 실제상으로는 런던 스트란드 街에 있는 최고법원(Supreme Court of Judicature) 140)이 감독한다. 최고법원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행사되던 왕좌법원의 권한을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국왕과 정부에 대해서 지방사법은 스트란드 가 사법과 같은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한다.

 

4. 로마법 법원과 웨스트민스터 홀의 헤게모니

 

그런데 1641년까지는,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행해지거나 거기서 통제하던 사법은, 웨스트민스터 홀이 아니라 로마법(Roman law)에 의해 세워진 전통에 따르는 다른 관할들에서 행해지던 사법과 경쟁관계에 서 있었다. 교회법원(ecclesiastical courts)은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관할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심의 자유라는 관념은 마그나 카르타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그 관념은 1688년 이후에야 마지못해 받아들여졌다. 교회법원에서 이교도로 선고된 자를 화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하이레티코 콤부렌도 영장(writ de haeretico comburendo) 141)은 1677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교회법원이 평신도에 대한 관할권을 사실상 상실한 것은 1641년이었다. 142) 해사법원(Court of Admiralty)은 공해(high seas)상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관할권을 보유하고 로마법 143)에 따라 재판했는데 재판실무 담당자들은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로마법학자'(civilians) 144)이었다. 그런데 해사법원의 관할권은 교회법원과는 달리 왕좌법원이 발부하는 영장에 의해 행사될 수 있었다. 이 법학자들은 (교회의 승인하에-역자삽입) 교회법원에서도 변호업무를 담당했고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 145) 이후에는 교회법원의 판사로 되었기 때문에 1859년까지는 146) 박사 협회(Doctors Commons) 147)를 통해 그런대로 존재를 유지했으나 그 때에는 이미 그들 대부분이 법정변호사 자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국왕평의회와, 튜더 시대에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기구들, 특히 악명높은 星室법원(Court of Star Chamber)이었다. 국왕평의회는 여타 국왕법원들이 얼마간의 독립성을 획득하고 난 뒤에 국왕에게 남아있던 관할권을 행사하였는데 거기에는 다른 법원을 통제하는 국왕의 관할권이 포함되었다. 국왕평의회의 관할권 행사에는 로마법 학자들과 보통법 법률가들도 참여했지만 국왕 자신과 주교, 귀족인 것이 보통인 평신도들도 참여했다. 국왕평의회는 보통법 절차가 아니라 로마법에 기초한 `糾問主義'(inquisitorial) 절차를 사용했는데 많은 국가들은 아직도 이 규문주의 절차를 사용하고 있다. 결점도 있긴 하지만 이 절차도 잘만 사용하면 훌륭한 절차이며 보통법 절차에 비해 몇가지 강점이 있다. 원래 성실법원은 국왕 부재시에 (천장에-역자삽입) 별장식이 있는 방(Star Chamber)에서 열리는 국왕평의회였는데 (이 악명높은-역자삽입) 성실법원조차도 실제로 16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익한 기능을 수행했다. 성실법원은 배심이 다루기 어려울 정도로 권력이 막강한 범법자들을 다룰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다루었다. 그리하여 위증죄(perjury)를 포함하여, 보통법상의 심리를 통해서는 부당한 결과에 이르게 되는 범죄의 대부분을 만들어 냈다. 성실법원을 포함한 국왕평의회 재판 일반이 악명을 드날리게 된 것은 평의회에서 반역죄(treason)와 역모죄(conspiracy)에 대한 심리를 이끈 데서 비롯되었다. 어떠한 법률가라도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48)의 심리를 읽으면 밥맛이 떨어질 것이다. 또한 평의회는 보통법원과는 달리 역모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사용하였다. 우리는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 149)에 대한 수많은 역모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해마다 11월 5 일 150)이면 〔`가이'(guy)인형 태우기와 함께〕벌어지는 불꽃놀이의 유래가 된 화약음모 사건(Gunpowder Plot) 151)과 그 때 행해진 가이 포크스(Guy Fawkes) 152) 등에 대한 심리를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치안이 부재하고 조직화가 덜 된 사회에서 음모를 입증하는 일의 어려움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41년 장기의회가 성실법원을 철폐하고, 지금은 추밀원 사법위원회(Judicial Committee of the Privy Council) 153)가 보유하게 된 관할권을 제외한 나머지의 평의회 관할권을 사실상 철폐한 것은 장한 일이었다. 잉글랜드에서 사법상의 고문을 당한 마지막 사람은 대주교 로드(Laud) 154)의 관저를 습격하는 군중을 이끌고 북을 친 존 아처(John Archer)란 사람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웨스트민스터 홀의 헤게모니로 귀결되었다. 회계법원도 상서법원도 보통법 절차를 따르지 않았지만, 회계청의 귀족은 수백 년 동안 보통법 판사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고 1673년 이후로 상서(Chancellor)는 보통법 법률가가 맡았다. 노팅엄 경(Lord Nottingham) 155)(1673~82)과 그 뒤를 이은 사람들하에서 형평법 규칙들(rules)이 정식화되었다. 156) 그리하여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에 대한 14세기의 해석이었던 `법의 적정절차'는 17세기와 그 이후에는 사실상 보통법과 형평법 상의 절차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자유민이었기 때문에 제29장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었다. 서머세트 사건(Somersett's Case) 157)(1772)에서 노예제는 잉글랜드의 법에 일치하지 않으며 어떠한 노예도 이 나라에 들어오면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에 의해 해방될 수 있다고 판시되었다. 따라서 배심재판을 받은 후가 아니면 어떤 사람도 사형에 처해지지 아니하고, 보통법이나 제정법 하의 적법한 체포 또는 보통·형평법원의 판결에 의한 징역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떤 사람도 구금되지 아니하며, 적법한 압류 또는 보통·형평법원의 승인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떤 사람의 재산도 박탈되지 아니한다 등등, 이런 점들에 대하여 법은 수세기를 두고 발전되어 왔다. 코크의 『원론』(1642)에서 마그나 카르타와 그에 대한 주 석은 빽빽한 인쇄로 78면에 걸쳐 있고 그 중 14면을 제29장이 차지하고 있다. 158) 그러나 1607년에 카우엘(Cowell) 159)은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법은 어느 정도는 마그나 카르타에 의존한다'(유래한다)고 말했다.

 

5. 인신보호영장

 

하베아스 코르푸스 영장(writ of habeas corpus; 인신보호영장)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17세기 법률가들은 이것이 마그나 카르타 제26장(존 왕의 헌장 제36장) 160)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들은 그렇지 않음을 밝혀냈는데, 제26장에서 언급하는 영장은 구금된 자가 보석(bail)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신보호영장의 여러가지 용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인신보호영장은 법원으로 하여금 어떤 구금이든 그 적법성을 조사하여, 구금이 위법한 경우 피고인을 석방하고 적법한 경우 보석으로 석방할 수 있도록 하는 훨씬 광범위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 인신보호영장의 발전은 마그나 카르타의 결과였다. 코크가 제29장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제정법 위반에 의해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은 보통법상 그 제정법에 기한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부여된다. 인신보호영장은 원래는 계류중인 소송절차에 출석할 필요가 있는 사람을 해당 법정에 출두시키는 영장이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영장들이 창안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제29장에 위배되는 위법한 구금에 대해 구제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윌리엄 홀즈워스 경(Sir William Holdsworth) 161)이 인신보호영장은 `신민의 자유권 보장을 위해 창안된 것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되었다'고 한 언명은 국왕의 영장이 미치는 어디에서나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체 사법체계내에서 간수(gaoler)에게 `신병을 확보'(have the body) 162)하여 법정에 인도하도록 명령하는 무조건적(peremptory) 인신보호영장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없다. 신병인도를 태만히 하거나, 왜 인도되지 않는가를 해명하는 답변서 제출을 하지 않는 것은 법정모욕죄(contempt of court)에 해당한다.

 

 

Ⅴ. 해외에서의 마그나 카르타

 

1. 보통법의 세계

 

마그나 카르타는 웨일즈(Wales)와 아일랜드(Ireland)에는 수출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스코틀랜드(Scotland)에 수출된 적은 없는 것 같다. 아일랜드의 경우 헨리 왕의 1216년 헌장을 번안한 것이 이른바 마그나 카르타 히베르니아이(Magna Carta Hiberniae) 163))였다. 1225년의 마그나 카르타가 아일랜드에 명확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잉글랜드법의 다양한 확장부분들은 잉글랜드의 자유권을 적용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잉글랜드의 자유권이 수출되었다. 바다 건너 164) 외국에 정착한 잉글랜드인들은 새로운 나라의 조건에 적용가능한 한에서 잉글랜드의 법과 자유권을 가지고 갔다. 그 정착민과 그들의 후손들은 새로운 지역으로 퍼져나갈 때에 그 법과 자유권을 가지고 다녔다. 잉글랜드의 보통법과 제정법은 적용가능한 한에서 그 해당지역의 보통법이 되었다. 그리하여 미합중국의 거의 전지역, 165) 퀘벡(Quebec)을 제외한 캐나다(Canada) 모든 주(provinces),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와 뉴질랜드(New Zealand)에서는 마그나 카르타 가운데 그들 조건에 적용가능한 부분을 받아들였다.  다른 많은 지역에서 잉글랜드법은 추밀원칙령(Order in Council)이나 지역입법에 의해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적용되었다. 잉글랜드법이 전체로서 적용되지 않은 곳에서조차 얼마동안이든 의미있는 기간동안 브리튼의 지배하에 있었던 곳이면 어느 지역이든 사법행정은 잉글랜드 전통을 따랐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잉글랜드 방식이 간접적으로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서해안 166) 브리튼 식민지(colonies) 네 곳의 법은 내지의 보호령(protectorates)에까지 확장되어서, 마그나 카르타 가운데 그 지역 조건에 적용가능한 부분은 갬비아(The Gambia), 가나(Ghana), 나이지리아(Nigeria), 시에라 리온(Sierra Leone)의 법에 일부가 되었다. 인디아(India), 파키스탄(Pakistan)과 버마(Burma) 167)에서는 19세기 법전들을 통해 잉글랜드법의 많은 부분이 적용되었고 법의 흠결을 메우기 위해 잉글랜드의 관념들이 `정의, 형평, 양심'(justice, equity and good conscience)으로서 적용되었다.

 

그런데 마그나 카르타의 영향은 주로 심리적인 것이었다. 미합중국, 캐나다, 오스트레 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어쩌면 남아프리카(South Africa) 168) 이외에는 법조인을 제외하면 영향받은 바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조인들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판사와 변호사(Bench and Bar)라는 잉글랜드적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그것은 아직도 법조학원(Inns of Court)이란 것이 (잉글랜드의-역자삽입) 독특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몰타(Malta) 169)와 사이프러스(Cyprus) 170)는 예외로서 제외되어야 하는데 이 나라들은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의 전통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영연방(Commonwealth) 171) 내의 다른 지역과 영연방 외의 버마, 수단(Sudan),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들에서는 잉글랜드적 전통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 식민지나 보호령이었던 나라의 판사들은 최근까지 식민지 법률서비스(Colonial legal service)의 구성원이었고, 대부분의 법정변호사는 해당국가에서 탄생한 잉글랜드적 변호사회(English Bar)의 구성원이었으며, 대부분의 법률학교에는 처음에 잉글랜드 법학교사가 배치되었다. 미합중국은 물론이고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인디아, 파키스탄, 실론(Ceylon) 172)을 포함하여 오랜 법전통을 가진 나라들에서는 잉글랜드 법률학교와 거의 동일한 원리가 교육되었고 이에 따라 법학문헌은 국제화되었다. 173) 퀘벡, 남아프리카, 로디지아(Rhodesia) 174), 모리셔스(Mauritius) 175), 사쉘(the Seychelles) 176), 몰타, 실론의 법은 기본적으로 로마법이며, 인디아, 파키스탄, 말레이지아, 적도 아프리카에는 사회생활의 많은 측면을 규율하는 지방법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판사와 변호사에 대한 법적 관념 들은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그 결과 보통법의 세계(common law world)는 보통법 자체의 지배범위보다 넓다.

 

법의 지배, 법에 따른 통치, 입헌정부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원칙이 연합왕국에서는 사법제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의회제도에 의해서도 유지된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의회제도도 영연방 전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이 제도가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캐나다 연방(United Canada)〔1867년 이전에는 온타리오(Ontario)와 퀘벡 177)〕과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 모두에서 처음에는 책임지는 정부라는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모델을 작동하게 만드는 환경과 복합적인 인적 관계를 창출하는 일보다 웨스트민스터 모델의 개요를 문자로 옮겨놓은 형식적인 헌법을 작성하는 일이 훨씬 쉽다. 실제로 민주적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는 곳에서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준수되는 것과는 다른 일련의 정치적 관행(political conventions)이 존재할 것이다. `아프리카의' 관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관행이란 것이 갬비아의 바서스트(Bathurst) 178)로부터 탄자니아(Tanzania)의 다르 에스 살람(Dar es Salaam) 179)에 이르기까지 동일하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민주체제, 법의 지배, 입헌정부를 유지하는 데에 성공한 나라들은 정치제도와 정치관행상 상이한 형태가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웨스트민스터 모델의 다양한 변형을 기대해야 한다. 다만 그 변형이 기본적 원칙을 침해하지 않는 변형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2. 마그나 카르타 제29장과 권리장전, 사법심사

 

잉글랜드에서 여러 세기를 두고 해석되어 왔듯이 마그나 카르타로부터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전은 제29장과 관련되어 있다. 이제는 우리가 18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제도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1688년 명예혁명 이후에 잉글랜드를 지배한 시민적 자유의 정도는 연구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특히 구체제 하의 마지막 세기를 보내고 있던 프랑스에서 그랬다. 존 로크가 자유주의적 휘그당의 철학을 이미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연구는 어렵지 않았다. 인간의 권리에 대한 학설이 발달하게 된 것은 로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실제상으로) 존왕의 1215년 헌장과 함께 시작된 진화과정과 로크 사이의 관련은 명백하다. 그런데 최초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기초된 곳은 프랑스가 아닌 (아메리카의-역자삽입) 버지니아(Virginia)였다. 버지니아 권리선언(Virginian Declaration of Rights)은 1776년 6월 12일에 주 하원(House of Delegates)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 선언은 같은 해 7월 4일에 채택된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보다 더 공식적이고 논쟁의 여지도 적었다.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은 제1조와 제8조 두 조항에 나타난다. 제8조는 다음과 같다: 

 

사형을 부과할 수 있거나(capital) 형사적인 모든 소추의 경우 피고인은 고소의 사유(cause)와 성격(nature)의 고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고, 고소인, 증인과 대면심문할 권리,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시할 권리가 있으며, 12명의 이웃사람으로 구성된 공정한 배심에 의한 신속한 심리를 받을 권리가 있고, 배심의 만장일치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유죄로 인정되지 아니한다. 또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시하도록 강요받지 아니한다. 나라의 법(law of the land) 180) 또는 동배들의 판결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떤 사람도 자유를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마지막 문장은 직접적인 인용이지만, 그 나머지도 예를 들면 1769년에 처음 출판된 블랙스톤(Blackstone)의 『주석』(Commentaries) 181) 4권에 서술된 바와 같은 보통법상의 관행에 대해 깔끔하게 요약한 것이다. 이 규정은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5조에 상이한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대배심(grand jury)에 의한 고발(presentment) 또는 기소(indictment) 없이는 어떤 사람도 사형을 부과할 수 있는 죄 또는 기타의 파렴치죄(infamous crime)로 심리를 받지 아니한다. 단 육군, 해군 또는 민병대(militia)에서 전쟁이나 공적 위험시 복무 중에 발생한 사건에 관하여는 예외로 한다. 어떤 사람도 동일한 범행에 관하여 재차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위협을 받지(twice put in jeopardy) 아니하며, 어떠한 형사사건에 있어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지 아니하며, 법의 적정절차(due process of law) 없이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하며, 정당한 보상 없이는 사유재산을 공공목적을 위하여 수용당하지 아니한다. 이 수정조항에서 앞엣 절은 14세기 잉글랜드 입법에서 유래한다. 이 법은 다넬 사건에 관한 논쟁에서 마그나 카르타 제29장과 함께 인용되었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1350년의 성록수여제한법(Statute of Provisors)은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을 인용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는데 이를 (영어로-역자삭제) 번역하면, 지금부터 누구도 적정한 방식으로(in due manner) 또는 보통법상의 소송개시영장(writ original)에 의한 절차에 따라, …  행위가 이루어진 곳과 동일한 지방의 건전한 성인이 한 기소나 고발에 의한 것이 아니면, 국왕 또는 그의 평 의회에 제기된 소송(petition) 또는 신고(suggestion)에 의해 체포되지 아니한다. 이 규정도 `적정절차' 규칙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것은 노르만 불어 원문으로 읽으면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법의 적정절차'는 (에드워드 3세의-역자삽입) 1354년 법률에서 유래하는데 이 법률은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을 아래와 같은 형태로 윤색하고 있다. 재산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도 법의 적정절차에 의해 심리받지 아니하고는 토지 또는 보유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하며,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하며, 상속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하며, 사형에 처해지지 아니한다.

  한편 `재차 받는 위협'에 관한 절 182)은 제정된 법에서 온 것이 아니고, 블랙스톤이 `어떤 사람도 동일한 범행에 관하여 두 번 다시 생명에 대한 위협을 받지 아니한다'고 인용한 바 있는 보통법의 격률(maxim)에서 온 것이다. 끝으로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는 엘든 경(Lord Eldon) 183)이 `이 나라 법에서 가장 신성한 원칙'이라고 평한 바 있다.

 

잉글랜드의 미합중국 헌법 주석가들은 미합중국에서 기본적 자유권의 보장이 연방헌법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혹 망각한다. 실제로 1868년에 채택된 수정헌법 제14조가 동일한 효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184) 수정헌법 제5조는 주정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미합중국 연방헌법내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 185)에는 각 주헌법내의 권리장전이 부가되어야 한다. 게다가 몇몇 주에서 채택한 바와 같이 이러한 권리장전의 효력은 그것이 보통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많은 부분 뒷받침되고 있다. 권리장전의 대부분의 조항은 보통법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종이 위의 규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권리장전은 높은 산의 꼭대기이지 허공에 뜬 구름은 아닌 것이다. 한편 헌법규정에 의해 연방법원(그리고 주헌법과 관련해서는 주법원)이 입법을 무효로 선언할 수 있기 때문에, 권리장전이 헌법조항으로서 지니는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잉글랜드의 어떤 법원도 그런 권한은 갖고 있지 못하다. 보통법의 기본적 원칙은 행정행위에도 적용될 수 있고 또 해석의 규칙으로서_금세기에 제29장은 그런 사건에서 인용되어 왔다_의회제정법이나 행정명령(statutory instruments)에 적용될 수 있는데, 그 근거 는 기본적 원칙에 위배되는 해석이 준수되는 것을 `의회가 의도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국왕 대 할리데이(Rex v. Halliday) 판결 186)(1917)과 리버시지 대 앤더슨(Liversidge v. Anderson) 판결 187)(1942)에서 제출된 유명한 반대의견들이 이러한 테크닉을 잘 보여준다. 두 판결에서 귀족원판사(Lords of Appeal) 다수는 전쟁 와중이 아니었더라면 무효로 선언되었을 행정명령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반대의견을 낸 판사들은 열정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뒤엣 판결에서 아트킨 경(Lord Atkin) 188)이 남긴 말은 인용해볼 만하다: 

 

신민의 자유권과 관련된 주장에 직면하여 단순한 해석문제[즉 의회제정법의 해석문제]에 대해 행정부보다 더 행정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판사들의 태도를 본인은 염려스럽게 생각한다. 전쟁 와중에 있는 이 나라에서 법은 침묵하고 있지 않다. 개정될 수는 있지만 법은 전시에도 평화시와 일관되는 목소리를 낸다. 우리가 지금 목숨을 바쳐가며 지키려는 것이 자유라고 할 때[윈스턴 처칠 경] 언제나 자유의 기둥이면서 자유권의 원칙이 되어온 것 중의 하나는, 판사는 누구를 특별하게 차별대우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신민의 자유권에 대한 행정부의 침해 기도와 신민 사이에 서서, 모든 강제적 행위가 법적으로 정당한 것이 되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 사건에서 본인은 찰스 1세 시대 왕좌법원에 제출되었더라면 수용되었을 법한 주장을 들었다. 본인은 설령 혼자가 되더라도, 장관에게 무제한의 구금권한을 부여하는 결과를 수반하는 억지해석이 내려지는 데에 반대하는 바이다.

 

하지만 아트킨 경조차도 미합중국에서는 법원이 헌법적 권한의 한계 밖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입법을 심사하고 통제하는 데 반해, 의회제정법의 표현이 명료했다면 잉글랜드법원은 그 효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시인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인간의 권리 선언(Declarations of the Rights of Man)에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 이 선언들은 미국의 권리장전들처럼 현존하는 법률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로크와 브리튼의 경험에 영향받은 18세기 철학자들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789년 권리선언 제7조에서는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의 메아리가 들린다. 법에 의해, 그리고 그 법이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  결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기소, 체포, 구금되지 아니한다. 이러한 종류의 선언의 목적은 입법을 무효로 선언하는 데에 있지 않고 입법자가 따라야 하는 규칙을 규정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언의 효과는 선언된 원칙이 입법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정도에 달려있다. 이 점은 어디에서나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은 그 자체로는 큰 가치가 없다. 이 조항이 중요한 이유는 오로지 그 원칙이 입법과 보통법에 의해 실현되어 왔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하는 수단은 권리의 선언에 있지 않고, 적절한 구제수단이 공정한 재판정(tribunals)에서 제공되고 또 그 판단이 존중되고 실행되는 데에 있다. 189) 그러나 해외의 영연방 국가들과 미합중국, 기타 몇몇 나라에서 권리장전은 입법에 대한 사법심사(judicial review)도 내포하고 있다. 사법심사를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인디아 헌법에 있는 `국가정책의 지도원칙'과 같은 것으로써 규정을 그렇게 한다. 브리튼(Great Britain)과 영연방의 오래된 일부 나라 국민들은 여론의 힘과 의회 전통에 의존하고 190) 또 잉글랜드의 법의 확립 기초가 된 원칙들을 판사와 변호사들이 단호하게 반복해온 것 191)에 의존하는 데 만족해왔다. 하지만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에까지 실론에서와 같은 입법에 대한 헌법적 제한이 존재한다. 1960년 캐나다 의회는 연방입법의 해석에 사용할 수 있는 선언적인 권리장전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권리장전은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으로 시작된다: 

 

이로써 캐나다에서는 인종, 국적, 종교, 성별을 이유로 하는 차별 없이 아래와 같은 인권과 기본적 자유, 즉 생명, 자유, 신체적 안전과 재산 향유에 대한 개인의 권리, 그리고 법의 적정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것들을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가 언제나 존재해 왔고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선언하는 바이다.

 

영연방 내 대부분의 신생국가들은 정식의 권리장전을 갖고 있다. 인종, 종교, 언어, 계급 또는 종족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차별이 염려된다는 점이 주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1920년 아일랜드, 1935년 인디아, 1946년 실론에서와 같은 단순한 불차별 조항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겨졌다. 게다가 1947년과 그 이후로 권력을 이양받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 나라가 일반시민의 생명, 자유,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헌법체제 내에서 급속한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룰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종종 브리튼의 정책에 비판적이기도 했지만 많은 지도자들은 브리튼이나 미국의 대학, 또는 자기 나라의 브리튼식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법과 함께 이어받은 기본적 자유권을 확립하고 유지하며 또 흔히는 증진하고자 했다. 버마가 선례를 남겼다. 1947년 버마 헌법은 다른 규정 중에서도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의 핵심을 되풀이하여, `법에 따라서가 아니면 어떤 시민도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하지 아니하며 주거를 침입받지 아니하며 재산을 몰수당하지 아니한다'는 형태로 규정하였다. 1950년 인디아 헌법은 훨씬 더 세련된 권리장전을 두고 있는데 그 중 제21조는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을 재현하여,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서가 아니면 어떤 사람도 생명 또는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인디아의 권리장전은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 1956년 파키스탄 헌법과 후에 1963년 말레이지아 헌법이 된 1958년 말레이 헌법에 응용되었다. 상황을 변화시킨 새로운 요소가 1950년 로마협약(Rome Convention) 즉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보장을 위한 유럽협약(European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192)에 의해 도입되었다. 연합왕국은 1951년 3월에 이 협약을 비준하였고 1953년 9월에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또 1953년에 연합왕국은 연합왕국 정부가 국제관계를 책임지는 모든 지역으로 이 협약을 확대시켰다. 이 지역 목록에는 1953년 이후 영연방 내에서 독립국가가 된 모든 지역이 포함되었다. 어떠한 법률도 제정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 협약에 의해 보장되는 기본적 자유권이 연합왕국과 해외지역 모두에서 이미 법에 의해 보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 그런데 이러한 발전이 가져온 결과 중의 하나는 서인도 諸島(West Indies)와 아프리카 신생독립국의 권리장전은 로마협약을 그 기초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정한 경우와 법이 허용하는 절차에 따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사람도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하지 아니한다는 취지의 조항으로 마그나 카르타 제29장을 대신하고, 그 다음에 그 일정한 경우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여 합법적 구금에 관한 세부사항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인디아 헌법상의 권리장전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왜냐하면 합법적으로 개정되긴 했지만 인디아의 최고법원과 고등법원은 일련의 귀중한 판결에서 인디아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념해야 할 것은 이것이 국민의회당(Congress party) 지도자들의 현명한 자제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캐나다 권리장전만 제외하고 영연방 전역에 걸쳐 권리장전들은 통상의 입법에 의해서는 개정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확립되어'(entrenched) 있다. 그런데 확립이라고는 해도 거기에는 어떤 문제에든 항상 의미있는 소수(substantial minority)가 있게 마련이며 그들의 동의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경험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조건이 항상 충족되지는 않는다. 독립을 성취하는 지도자들과 그들이 이끄는 정당은, 전통적인 있으나마나한 법률(Dogs Act)을 제정하는 것만큼이나 쉽게 수정헌법을 제정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지위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Ⅵ. 마그나 카르타와 미래

 

사람이나 제도나 사건이나 그 몇주년 기념이라는 것은 기념대상의 중요성을 과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레스터 伯(Earl of Leiceter)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가 1265년에 소집한 의회는 도읍과 시의 대표들이 소집된 최초의 경우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했다. 194) 그러나 의회제도의 발전은 13세기 중엽에서 1688년 명예혁명까지,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 왔다. 존 왕의 1215년 헌장 반포는 당대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또 그 헌장은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유해온 1225년 마그나 카르타의 원형 또는 최초의 초안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제29장이 포함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렇게 자주 인용되지 않았을 것이고 마그나 카르타의 대부분은 현대적 조건에는 부적합한 것이다. 그렇지만 네 헌장 모두는 설령 1225년의 제29장 또는 1215년의 제39장이 없었다 할지라도, 국왕조차 법 아래에 있다는 함의 때문에 헌법사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잉글랜드의 법에 대한 마그나 카르타의 영향은 너무나 깊고 넓어서 제29장을 제외하면 별도로 인식되는 일이 드물 정도이다. 실제로 제29장과의 관련성이 언제나 주목을 받는 것도 아니다. 재산징발에 관해서는 방대한 판례법이 존재하는데 그 본질적 관심은 제29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법적 근거가 제29장이 아닌 귀족원의 결정에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심지어 신체적 자유에 관해서도 제29장은 보통법의 은하계 속에 떠 있는 한 조각 달에 불과하다.

 

다른 보통법 관할지역에서 그것은 달조차도 못된다. 신체적 자유권이 권리장전에 의해 보장되는 곳에서 권리장전 자체는 반드시 주목을 받지만, 한두 조항이 마그나 카르타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은 흥미롭긴 하지만 엉뚱한 것으로 취급된다. 심지어 근대 입헌주의와 마그나 카르타 사이에 존재하는 관련의 중요성이 과장되어서는 안된다고도 한다. 그러한 관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5) 더구나 17세기에 마그나 카르타에 기한 기소가 가능했다는 사실은 잉글랜드가 입헌주의의 장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아마도 역사가들은 그것이 복합적인 역사적 발전 속에서 대수롭지 않은 요인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한 발전 속에서 한가지 중요한 요인은 평민원이 대체로 스튜어트 가의 국왕들에 대항하여 보통법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영구화 사건(Case of Perpetuities) 196)으로 알려진 처들리 사건(Chudleigh's Case) 197)은 1589년에서 1595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사건 논거에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8)은 자신이 `이 모든 영구화들'(all these perpetuities)이라고 부른 것을 의회제정법이 일소해버릴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영구화란 말을 통해 베이컨이 의미한 것은 특히 잉글랜드의 법과 자유권이었다. 실제로는 어떠한 법률(Act)도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 199)은 반란을 일으킨 아메리카 식민지들로 하여금 제한된 권한을 가진 입법부를 세우 고 또 그들의 성문헌법 속에 권리장전을 삽입시키도록 하였다. 200) 많은 나라들이 이러한 예를 따랐지만 모든 헌법이 판사에게 입법부의 헌법적 권한을 넘어서는 입법을 무효라고 선언할 책임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사법심사'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미합중국과 영연방에서 그것이 특히 효과적인 것은 헌법과 보통법이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또 대부분 공통된 내용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미합중국뿐만 아니라 인디아에서도 현저한데 왜냐하면 인디아의 법전들은 대부분 보통법을 성문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201)

 

1947년과 그 이후에 독립한 일부 나라들의 경험이 언제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의 정당에게 우월권을 부여함으로써 권력분립의 원칙에 도전하고, 또 수세기의 경험을 통해 브리튼인들이 신봉하게 된 본질적인 원칙들을 침해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흔히 첫번째 마그나 카르타라고 불리는 존 왕의 1215년 헌장 750주년과 1265년 시몽 드 몽포르 의회 700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실제 정치에 있어서 범할 수 있는 오류의 대부분은 잉글랜드 또는 연합왕국이 언젠가 겪은 적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해 봄직하다.

 

 

  1. 이하에서 소제목들은 역자가 편의상 내용을 구분하여 붙여 본 것이다. [본문으로]
  2. 지금 이 곳에는 전미변호사협회(American Bar Association)가 세운 마그나 카르타 기념비가 있으며 영·미 법률가들은 매년 마그나 카르타 협회(Magna Carta Society)의 모임을 갖는다. [본문으로]
  3. 失地王 존(John Lackland, 1167~1216), 1199~1216 재위. 강력하고 치세에 능했던 헨리 2세 (1154~1189 재위)의 아들로서, 앙주 가(Angevis)의 프랑스 실지를 회복하려는 원정이 1214년에 실패하고 국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런던이 점령당한 상태에서 마그나 카르타를 강요받게 되었다. [본문으로]
  4. 국왕으로부터 직접 토지를 수봉한 대귀족 [본문으로]
  5. 도읍(town)이 국왕 특허장을 부여받으면 자치도시가 된다. [본문으로]
  6. 이하에서 liberty 또는 liberties는 자유권(들)로 번역한다. [본문으로]
  7. 헨리 3세, 1216~1272 재위. [본문으로]
  8. 헨리 7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까지, 1485~160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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