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ovanni Arrighi, "Marxist Century, American Century: The Making and Remaking of the World Labor Movement," Transforming the Revolution, MR Press, 1990.
1. The Communist Manifesto Revisited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지배의 종언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주장을 제시했다. 첫째, 부르주아는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 둘째 부르주아는 자신의 묘혈을 팔 사람들을 양산한다. 이러한 진술은 마르크스 이후 140여 년간 마르크스주의를 규정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시나리오는 부분적으로 모순되며, 마르크스의 후예들의 이론과 실천에서 그러한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한 모순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프롤레타리아의 무기력에 대한 것이다.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는 산업 발전의 성과를 공유하지 못하고 빈곤상태로 전락함으로써 사회의 생산력이 아니라 부담이 되어 버린다. 이와 대조적으로 두 번째 시나리오는 프롤레타리아의 힘에 대한 것이었다. 산업 발전 덕분에 프롤레타리아는 상호 경쟁보다는 상호 협동하며 그 결과 부르주아의 능력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마르크스에게 이 두 사실은 모순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약화 경향은 산업 예비군과 관련된 것으로 부르주아 지배의 정당성을 훼손시킨다. 프롤레타리아의 강화 경향은 활동적인 산업 상비군과 관련된 것으로 잉여를 전유하는 부르주아의 역량을 훼손시킨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이 두 경향을 상호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잉여를 전유하는 부르주아의 능력이 훼손되는 만큼, 산업 예비군을 재생산할 수 있는 수단이 감소하는 동시에 고용의 동기도 감소하며 따라서 산업 예비군은 증가한다. 착취에 저항하는 산업 상비군의 힘이 증가할수록, 이에 비례하여 부르주아 질서는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동시에 산업 예비군의 생계를 보장하지 못함으로 인한 정당성의 상실은 이에 비례하여 산업 상비군의 힘의 증가 및 질적 강화로 전환되어 나타난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는 산업 상비군이나 예비군 모두 동일한 인적 요소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적 질서는 산업 예비군과 상비군 모두로부터 동일하게 정통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모델의 힘은 단순성에 있다. 그것은 세 가지 가정을 근거로 한다.
첫째, 자본3권에서 말하듯이, 자본의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진화와 종국적인 사멸에 있어 동태적인 요소는 ‘산업 발전’이다. 산업 발전이 없다면 자본 축적은 불가능하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 그들의 연합으로 대체된다. 축적은 조만간 자멸에 빠진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론적 관점은 체계 전체와 장기적인 시기에만 적용될 수 있다. 특정 공간, 특정 시기의 결과는 불확정적이다. 이 모델에서 유일하게 불가피한 것은, 궁극적으로 자본축적은 프롤레타리아의 패배보다는 승리가 숫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상황을 조성하며, 마침내 부르주아의 지배는 폐기되거나 대체되거나 변형된다는 사실이다. 탈부르주아 질서로의 이행 시기와 양상도 불확정적이다. 이행은 시공간적으로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결합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와 패배의 다양성에 의해 좌우된다.
둘째, 대규모의 장기적인 사회 변화의 주체들은 구조적 경향의 인격적 담지체라는 가정이다. 의식과 조직은 경쟁과 협력의 구조적 과정의 반영이며, 이 과정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가 수행하는 다양한 투쟁은 구조적 변화를 이데올로기적이고 조직적인 변화로 변화시키는 데 필수적 요소이지만, 이러한 투쟁 자체도 구조적 변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셋째, 문화와 정치보다는 경제가 우선한다. 확실히 마르크스의 전체적인 연구작업은 노동을 여타 상품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데 개재된 허구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적 구도에서는 노동력과 여타 상품의 차이점이 단지 부르주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속에서만 나타났으며, 그 경우에도 무차별적인 프롤레타리아적 의지와 지성으로만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개인적, 집단적 차이는 제거되어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처리되었고, 프롤레타리아는 조국도 가족도 없는 존재로 상정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구상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생존수단을 둘러싸고 다른 원자화된 개인들과 경쟁하는 원자화된 개인이거나 아니면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보편적 계급의 일원이다. 마찬가지로 권력 투쟁은 단지 시장 경쟁이나 계급투쟁의 반영물에 불과하다. 권력 그 자체를 위한 권력추구의 여지는 없다. 정부는 단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통 관심사를 처리하기 위한’ 위원회로서 경쟁이나 계급지배의 도구일 뿐이다.
요컨대, 원래 마르크스주의 유산은 세 가지 강력한 예견을 내포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모델로 구성되어 있다.
(1)부르주아 사회는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양극화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 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일자리를 찾아야만 생존할 수 있고, 자신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킬 때에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2)자본축적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를 궁핍하게 만드는 동시에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3)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시장경쟁의 법칙은 이러한 두 경향을 부르주아 질서의 정당성의 전반적 상실이라는 방향으로 결합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예견들이 이후 자본주의 역사에서 어느 정도 입증되었는가를 평가하기 위해 1848년 이래 지금까지의 140여 년간을 세 시기, 즉 1848년에서 1896년, 1896년에서 1948년, 1948년에서 현재까지로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경제 활동의 ‘장기 파동’에 상응한다. 그 각각은 경제 내에서 협력 관계가 지배적인 ‘호황’의 국면(A국면)과 경쟁 관계가 지배적인 ‘불황’의 국면(B국면)으로 구성된다.
1848년에서 1948년 사이에 시장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사회는 마르크스의 분석처럼 그 정점에 도달했다. 근대 노동운동은 이 기간에 탄생하여 즉각적으로 핵심적인 반체제세력이 되었다. 경쟁적인 이념들과의 장기적 투쟁 끝에 마르크스주의는 이 운동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러나 반체제운동들 내부에서 그리고 반체제운동들 사이에 새로운 분열이 일어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도 혁명적 진영과 개량적 진영으로 분리되었다. 1948년 이후 시장 자본주의의 잿더미를 헤치고 법인 자본주의 혹은 경영 자본주의가 출현하여 지배적인 세계경제 구조가 되었다. 반체제운동들은 더욱 확산되었지만 내부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분열의 압력 하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위기로 빠져들었으며, 아직까지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쩌면 극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2. The Rise of the World Labor Movement
첫 번째 시기(1848-96)의 주요한 추세와 사건들은 선언의 예견에 부합했다. 1848년부터 20-25년이 흐르는 동안에 자유무역 관행의 확산과 운송 혁명으로 인해 시장자본주의는 범세계적인 실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세계시장 경쟁이 강화되었고 산업화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중간적 계층의 프롤레타리아는 보다 확산되었고, 양극화는 일반적인 경향으로 자리잡은 듯했다. 프롤레타리아의 궁핍화와 강화라는 자본축적의 경향도 분명했다. 산업화의 확산과 연관된 프롤레타리아의 집중 덕택으로 그들은 손쉽게 조합(union)이라는 형태로 스스로의 조직 만들 수 있었고, 새로운 생산 과정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로 인해 고용주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해서도 노동조합은 큰 힘을 발휘했다. A국면인 19세기 중반, 노동일을 제한하고 보통선거권을 확대시킨 영국 노동운동의 성공은 노동계급의 힘을 보여준 가시적 사례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궁핍화는 여전히 진행되었다. 바로 이 기간에 실업 문제가 새로운 차원을 띠게 되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조건과 생활수준의 상승을 압박하고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 압력을 강화했다.
마지막으로 선언의 예견처럼, 프롤레타리아의 궁핍화 경향과 강화 경향이라는 상반되는 경향이 동시에 작용하여 부르주아 지배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동의를 침식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정치적 자율성을 획득했고 노동계급 정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당의 존재 여부와는 관계 없이, 모든 중심부 국가의 임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이익에 대한 전통적 종속을 거부했고, 자신들의 독립적 이익을 자율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정치적 해방의 극적인 표출은 1871년 파리 코뮌이었다.
1948년에서 1896년 사이의 사건과 추세가 선언의 예견과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이 초기 유럽의 노동운동에서 확립한 헤게모니를 설명해준다. 이러한 성공은 프롤레타리아화가 역사적으로 역전불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가 이런저런 협동적 생산과정을 통해 경제적 독립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인지를 둘러싸고 전개된 장기간의 지적 투쟁의 결과였다. 후자의 관점은 초기에는 영국의 오웬주의자들과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이 제창한 것이었지만, 이후에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의 프루동주의자와 바쿠닌주의자들과 독일의 라쌀레주의자들 사이에서 새롭고 다양한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유럽대륙 출신의 혁명적 지식인과 개량주의적 지식인의 혼합집단에 반대하여 마르크스가 영국 노조주의자들 편에 섰던 지적 투쟁의 선전장 이상이 아니었다. 마르크스가 그 쇼를 대부분 주도했지만, 한번도 명백한 승리를 이루어내지 못했으며, 설령 그런 경우에도 현실운동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진리의 순간은 파리코뮌과 함께 왔다. 파리코뮌의 경험에서 마르크스가 도출한 결론(사회주의 혁명의 전제조건으로 각국에서 합법적인 노동계급 정당을 결성할 필요성)은 각기 이유는 다르지만 대륙의 혁명가들과 영국의 노조주의자들 모두를 이반시켰고 인터내셔널은 종말을 고했다.
인터내셔널이 해체되던 1873년경 세기 중반의 호황 국면은 세기 후엽의 대불황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그 결과 근대적 노동운동이 출발하고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운동의 헤게모니를 확립할 수 있는 조건이 창출되었다. 경제적 압력이 심화되어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강화되었으며, 노사 갈등의 횟수도 증가했다. 한편 노동계급 정당이 전유럽적으로 결정되었고 1896년 경에는 이미 새로운 목표의 광범위한 통일을 이룬 노동계급 정당들에 기초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실체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들이 마르크스의 구상에, 특히 프롤레타리아 정치 그 자체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파리코뮌은 정권 인수를 가져올 것으로 상정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런 유형의 경향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파리코뮌은 구조적 요인이 반영된 결과가 아니라 프러시아에 대한 프랑스의 패전과 전쟁으로 인한 열악한 조건 등과 같은 정치적 요인들이 주로 반영된 결과였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가 정치적 혁명을 일으키려 한 이유는, 착취의 증대와 생산 과정상의 프롤레타리아의 세력 증대 사이의 모순이 커졌기 때문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가 프롤레타리아들을 다른 국가들로부터 방어해줄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직접적인 형태와 좀더 완곡한 형태 사이의 괴리는 파리코뮌 이후 다양한 형태로 확인되었다. 19세기 말 대공황의 도래와 함께 파업행위의 급증 및 전국적인 노동계급 정당의 형성이 이루어졌지만, 이들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구상에 쉽게 끼워맞추기는 어렵다. 파업활동에서는 선두적인 국가인 영국과 미국이 노동계급 정당의 결성에는 늦었던 데 비해, 독일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노동계급 정당의 결성은 경제적 착취, 노동계급의 형성, 그리고 노자간의 구조적 갈등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주요한 결정요인은 사회경제적 규제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과 기본적인 시민권 투쟁인 것처럼 보인다. 국가가 고도로 가시적이고 점증하는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점증했지만 기본적인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독일에서 계급투쟁은 노동계급 정당이라는 완곡한(roundabout) 형태를 취했다. 영국에서는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노동계급 정당이 성공적으로 형성되었고 미국에서는 그나마 성공한 적이 없다. 좀더 구체적으로, 산업프롤레타리아가 사회경제적으로 형성됨으로써 구조적 형태의 계급투쟁이 발전하게 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혁명적인 경향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인 경향조차도 발전되지 못하였다. 정치상황 자체가 변화하여 좀더 직접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혁명적인 정치참여를 촉발시키지 않는 한 정치권력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는 순전히 도구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3. Global Wars, Movements, and Revolution
1873년과 1896년 사이의 대공황은 19세기에 제도화된 세계시장 지배의 정점이자 최후의 지점이었다. 공황의 주요 측면은 해외의 저렴한 곡물이 유입된 현상이었다. 주요 수혜자는 미국을 위시한 해외공급자와 세계교역과 금융거래를 통제하고 있었던 영국이었다. 최대 피해자는 독일이었고, 이에 따라 독일의 지배계급들은 영국을 대체하거나 혹은 영국과 합류하기 위해 군산복합을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국가간 갈등과 두 번의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세계전쟁과 전쟁준비는 산업화와 궁핍화를 야기하는 더욱 강력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세계시장의 종말은 세계프롤레타리아의 사회권력과 대중의 빈곤이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분파(segment)들 사이에 과거 어느 때보다 불균등하게 분포되었음을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전쟁 동원기간 동안에는 전쟁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국가를 포함한 세계경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산업상비군의 규모가 증가한다. 게다가 전쟁의 산업화는 군사적 충원 못지 않게 산업노동력의 충원을 중요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노동자의 사회권력은 국가간 권력 투쟁이 고조됨에 따라 단계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은 자원을 소모하고 생산과 교환망을 파괴시켰다. 결국 마르크스의 구상에서 상정된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증대와 궁핍화의 결합은 세계 대전 때문에 나타났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세계적으로 계급투쟁의 물결을 낳았다. 개전 초기에 감소했던 파업 총량은 종전 무렵에 급격히 증가했다. 세계노동자 소요는 역사상 유래없는 최고 정점에 도달했고,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계급투쟁의 물결이 자본의 지배를 소멸시키지는 못했지만, 지배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베른슈타인과 레닌의 주장을 따라 상이한 궤도를 따라 진행되었다.
1896년 국제사회주의자대회는 대회의 최종 결의 가운데 하나에서 국가 권력의 행사를 사회주의 정당의 당면 의제로 올리게 될 총체적 위기가 임박했음을 예견했다. 이 대회는 모든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계급의식을 갖춘 시민으로서 ‘각자가 속한 국가의 사업을 공공선을 위해 조정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정언적 필연성’을 부과했다. 이러한 결의의 연장선상에서 모든 무정부주의자들을 배제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와 바쿠닌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이 종결되자 곧 이어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었다. 모든 국가의 프롤레타리아가 추구해야 할 공동의 정치적 목표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이 제기되었고 이를 공개적 토론으로 이끌어낸 최초의 사람은 베른슈타인이었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거시적 차원에서 유럽대륙 노동운동의 미래와 미시적 차원에서 독일 노동운동의 미래를 가장 잘 이끌어줄 지침은 영국 노동운동의 과거와 현재라고 믿었다. 따라서 베른슈타인은 영국 노동운동의 추세에 관심의 초점을 두었다. 그는 영국 노동운동을 염두에 두면서 노동계급의 사회권력 증가라는 마르크스의 첫 번째 명제의 증거를 찾아내었지만, 궁핍화라는 두 번째 명제의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벨 에포크 시기로 특징지워지는 현대 사회에서, 자유주의적 조직은 지속되어 갈 것이었으며, 노동계급의 사회권력이 무한히 증가하는 것도 수용할 만큼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은 ‘조직과 정력적인 활동’뿐이었다. 이는 ‘운동이 전부일 뿐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되었다.
레닌은 이와 대칭되는 입장을 정교화했다. 사회주의자의 국가권력 장악만이 운동의 과거업적을 모두 보존․확장할 수 있고, 따라서 운동보다는 목표가 우선성을 가진다. 게다가 베른슈타인식이 운동을 통해 성취된 업적은 믿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프롤레타리아가 처한 상황의 한 측면만을 반영했을 분이다. ‘노동귀족’ 명제를 새롭게 강조함으로써 레닌은, 유럽 대륙과 그 밖의 지역에서 노동운동의 미래를 이끌어 줄 최상의 지침은 영국 노동운동의 현재와 과거에서 얻을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관점을 은연중에 폐기했다. 영국에서 노동계급의 사회권력이 증가하는 것은 세계 경제에서 영국의 위치와 관련해서 생겨난 국지적이고 단기적인 현상이었다. 보편적 차원에서 유럽 대륙과 국지적 차원에서 러시아 제국의 프롤레타리아가 처한 상황은 고도로 정력적이고 잘 조직된 노동운동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궁핍화의 증가와 정치적 압제의 지속이었다. 이로부터 외부로부터의 주입 테제와 운동조직의 전달벨트 테제가 도출되었다.
1896년에서 1948년의 전기간에 걸친 노동운동의 실질적 발전 과정에서 우리는 레닌이나 베른슈타인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어디를 보느냐에 달려있다.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증가하는 노동계급의 장기적 사회권력을 정치․경제적으로 수용하도록 지배계급을 압박하는 데는 조직과 정력적 활동으로 충분하다는 베른슈타인의 예측과 처방은 앵글로색슨과 스칸디나비아 세계의 노동운동의 궤도의 본질을 포착해낸다. 그러나 1896년에서 1948년은 스스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전위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유라시아대륙의 거의 절반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한 시간이기도 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경험은 상이하지만 중요한 면에서 비슷했다. 격렬한 저항운동은 프롤레타리아의 생존조건을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 사회권력의 증가보다는 대중적 궁핍화의 증가가 오히려 지배적 경험이었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에게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하는 지배계급의 능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위의 힘의 원천은 대중의 점진적인 궁핍화에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노동계급의 사회권력이 발전하고, 다른 곳에서는 대중의 궁핍화에 저항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경향들에서 드러나는 가장 놀라운 측면은, 종합적으로 볼 때 이 경향들은 산업프롤레타리아가 사회주의 혁명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혁명의 실제에 역사적으로 둔감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사회권력과 사회주의 혁명의 배반관계는 이미 파리코뮌 시절에 맹아적으로 나타났고, 1차 인터내셔널을 해체시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시 마르크스는 쟁점을 미결상태로 남겨놓았다.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하나의 정치적 제도로 변화하자 어떤 식으로든 선택이 필요했으며, 특히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성향과 사회권력간의 배반관계가 오히려 늘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더더욱 그러했다. 베른슈타인은 이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자의 사회권력을 강조했던 반면, 레닌은 점증하는 대중의 궁핍화로부터 성장한 혁명적 성향을 강조했다. 한편 카우츠키는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는 입장을 택했고 이것이야말로 카우츠키가 ‘정통성’을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였다. 그러나 그것의 정치적 함의는 재난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카우츠키의 경우처럼 전략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력은 이 지역들에서 노동조직이 직면한 복합적인 사회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 사회적 상황은 노동자의 사회권력이 증가하는 경향과 노동자의 대중적 궁핍이 증가하는 경향 중 어느 하나가 압도적인 형태가 아닌 양자의 결합으로 특징지워진다. 양자간의 모순은 현실로 나타나며 토착화되었다. 이 양자간의 결합은 산업프롤레타리아 내부에 비교적 개량적인 성향과 아울러 상당한 비중의 혁명적 성향이 자리잡게 만들었으며, 이는 운동 지도부를 진퇴양난으로 몰아넣었다.
어쨋든 이러한 상황에서 개량과 혁명에 대한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모순적인 경향이 빚어낸 정치적 불확정성은 노동조직의 정통성을 기반부터 흔들어놓았다.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가 부상한 것은 전면전과 계급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촉진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앵글로색슨계 강대국에 결정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사회주의 혁명정권의 영토가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을 포함하게 된 것은 이 국면에서의 일이었다.
산업프롤레타리아의 대표로 선출되거나 대표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놀랍게 확장된 현상이 산업프롤레타리아 속에서 자발적인 혁명 경향이 거의 소진되는 맥락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반드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업프롤레타리아가 1871년의 프랑스, 1917년의 러시아, 1919-20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처럼 ‘코뮌’이나 ‘소비에트’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려고 시도한 곳은 2차 대전 동안이나 이후에 한 곳도 없었다. 사회주의 혁명정권의 영토가 늘어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군대를 쳐부순 군대 덕분이었다. 중심부 국가의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을 거부했지만, 사회주의 혁명은 민족해방운동에서 호응도가 매우 큰 새로운 지지층을 획득하였다.
4. U.S. Hegemony and the Remaking of the World Labor Movement
전쟁 이후에 기존의 추세는 역전되었고, 20년간 자본주의는 새로운 황금기를 구가했다. 가장 중요한 발전은 국가간 관계의 화해와 미국 헤게모니 하의 세계시장 재건이었다. 1968년 이전까지는 세계시장의 재건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그것도 미국의 군사적, 금융적 능력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 후 1968년과 1973년 사이에 브레튼우즈 시스템이 붕괴하고 베트남에서 미국이 패전함으로써, 그러한 능력만으로는 이후 세계시장 재건과정을 충분히 지탱할 수 없고, 따라서 그러한 능력이 세계시장 재건에 필수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973년 이후 세계 시장은 특정한 한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자율적인 힘’이 되었다.
오늘날 세계시장의 사회적 토대는 19세기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그전 50년 사이에 붕괴된 것과 같은 유형을 세계시장을 재건하려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차이와 별도로, 미국과 영국에서 조직노동자들이 획득한 권력과 영향력 그리고 유라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 이같은 재건을 실현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새로운 세계질서는 세계부르주아의 사회권력과 희망만으로 건설될 수 없었고, 가능한 광범위하게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분파들을 포함해야만 했다.
이 전략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탈식민화 및 주권국가 체계의 확대강화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었다. 윌슨과 마찬가지로 로저벨트는 레닌의 견해를 무식적으로 수용했다. 유라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물결을 막으려면 중심부 국가간 전쟁을 종결짓고 세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취약한 부분들의 자결권을 인정해야만 했다. 로저벨트의 세계 헤게모니 전략의 2차적이면서도 중요한 목적은 국내에서 노동자의 사회권력을 수용하고 그 힘을 해외로 팽창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을 장악하게 된 이익들의 제휴에 수많은 이점을 가졌다. 법인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정책은 국내 대량소비시장을 유럽과 기타 지역으로 확장할 것이며 법인자본의 초민족적 팽창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조직노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정책은 세계의 나머지 지역 거의 전부에 해당되는 노동력의 낮은 임금수준에서 발생하는 경쟁압력을 감소시켰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계급의 사회권력을 국내에서 수용하고 해외로 팽창시키는 정책은 미국의 진보적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탈식민화에 지원과 이러한 정책을 통해 미국은 진정한 세계 헤게모니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역량은 이전 50년간 미국 자본이 경험한 구조적 변화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미국 자본은 1973-96년의 대공황기에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완전한 발전에 조응하는 법인기업을 창출했다. 브레이버만의 주장처럼 이와 같은 축적구조의 창출은 작업구조의 재구성과 관련이 있다. 기술적 분업의 재조정은 비교적 소규모의 숙련 임금노동자 계급의 사회권력을 침식했다. 그러나 동시에 반숙련 임금 노동자 계급의 수와 사회권력은 더욱 증가했다. 탈숙련화는 자본의 가치증식을 용이하게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곤란하게 만드는 양날의 칼이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노동자의 사회권력의 광범위한 토대는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후반 사이에 미국에서 일어난 노동자 소요와 파업의 물결 속에서 처음 드러났다. 파업의 물결은 1930년대 초에 극심한 경기침체의 부담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려는 자본의 시도에 산업노동자 대중들이 자생적으로 대응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존의 AFL은 파업의 물결을 일으키는 데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시에 대안적인 조직의 가능성이 출현했고 그것은 후에 CIO로 현실화되었다. 투쟁은 전시 동원기에 성공적이었다. 매카시즘의 선풍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획득된 이점의 대부분은 전시 동원이 끝난 이후에도 강화되었고, 그 후 10-20년 동안 미국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전례없는 경제적 복지를 누리고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다.
미국의 법인자본이 초민족적으로 활동을 확장시키는 성향은 1930-40년대의 파업물결 훨씬 이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1930-40년대에 국내 노동계급의 사회권력이 증가하여 직접투자가 긴급해진 바로 그 때 국제적 갈등은 그것을 방해했다. 따라서 전후 법인 자본의 요구에 걸맞게 유럽을 재편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시에 유럽 각국의 정부와 기업은 미국이 설정한 권력과 부의 새로운 기준을 따라잡기 위해 그리고 유럽 내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 적응하기 위해 유럽 재편 사업에 동참했다. 그 결과 미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축적구조가 유럽에서도 배태되었고, 이에 따라 유럽 노동자의 사회권력이 신장되었다. 그 신호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의 파업물결로 나타났는데, 이는 미국의 1930년대와 40년대의 현상과 유사한 것이었다. 첫째, 이는 주로 산업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자기-동원과 자기-조직 역량에 기초했다. 둘째, 이러한 역량의 기반은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실질적 상황에 내재한 것이었다. 셋째, 운동은 노동자의 사회권력을 지배계급이 수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의 사회권력 팽창의 수용은 둔화되다가 생산공정의 이전에 의해 중단되었다.
1968년에서 1973년 사이에 해외직접투자가 가속화되었는데, 여기서는 과거의 후발주자들 특히 일본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88년에 이르자 초민족적 생산과 분배의 네트워크에 대한 통제는 모든 국적의 중심부 자본의 공통적 특징이 되었으며, 일본 자본은 그 규모와 범위에서 미국을 거의 따라잡았다. 일본의 자본은 파업이 늘어나고 임금이 올라가자, 생산시설을 즉각 해외로 재배치했다. 게다가 일본의 자본가는 초민족적 팽창의 초기단계에는 이윤확대보다 비용절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금융투기와 비용절감 활동은 자본의 팽창에 수반되는 노동자의 사회권력 증가를 수용하지 못하는 법인자본의 무능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것의 주요 충격은 중심부지역에서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대중 궁핍화의 확산으로 나타났다. 그 현상은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미국에서는 주로 실질임금의 하락으로, 서유럽에서는 주로 실업의 증가로 나타났으며, 거의 모든 중심부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수입에서 임금의 비율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중적 궁핍화는 노동의 사회권력 감소와는 연계되지 않았다. 법인자본의 팽창과 노동의 사회권력 증가가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금융투기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은 2차대전 이래 자본의 지배가 의존해온 사회적 합의를 뿌리채 흔드는 것이다.
비용절감 활동은 세 가지 주요한 형태로 나타났다.
(1)모든 중심부국가 내부에서 고임금 노동력의 저임금 노동력, 특히 여성 노동력이나 이민 노동력으로의 대체
(2)국경을 넘어서는 대체. 공장 재입지와 수입
(3)생산과정에서 보다 지적이고 과학적인 노동력의 투입.
처음 두 형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전체적인 사회권력 감소와 관련이 없다. 다만 사회권력 소유자의 대체가 있었을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 번째 대체는 프롤레타리아의 사회권력을 축소시켰다. 그러나 이 경우도 지식 프롤레타리아화가 진행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규모와 권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 따라서 중심부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수준 저하는 현재와 미래의 노동계급 내부에서 사회권력의 상실이 아니라 재분배와 관련된다. 사회권력과 대중적 궁핍화는 20세기 중분과는 달리 이제 세계프롤레타리아의 상이한 분파들 속에서 양극화되지 않는다. 궁핍화는 중심부국가에서 확대되었고, 사회권력은 주변부와 반주변부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현실은 선언의 시나리오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수준 저하를 경험하는 산업프롤레타리아의 특정 부문은 동시에 사회권력의 상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중심부 국가에서 노동자 생활수준의 악화에 대한 저항은 지금까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 사회권력을 얻게 된 부문은 아직 생활수준의 근본적 저하를 경험하지 않았다. 산업프롤레타리아의 하층부를 차지하게 된 여성과 이민 노동자들의 경우 두 가지 상황이 생활수준 저하의 영향을 완화시켜주었다. 첫째, 이들이 얻게된 직장의 임금수준이 많은 경우 과거보다 높았다. 둘째, 그들은 자신의 수입을 다른 수입원천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들의 노동을 일상적 직업이 아니라 일시적 부가물로 여긴다. 그래서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인내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
이 두 현상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것이다. 더 일반적인 궁핍화가 진전되면, 공개적인 저항이 일어날 것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미 중심부 국가의 여성과 이민 노동자들이 강한 저항 성향을 보여주었고, 자신들의 사회권력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들의 불만에 구체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산업 갈등의 주요 몰결을 보지 못했다. 만약 그러한 것이 일어난다면, 상층부에 속하는 노동자들의 저항과 상호작용할 것이다. 노동의 상층부는 지식인과 과학자들에 의해 점유된다. 현재 그들은 비용절감 경쟁의 주요 수혜대상자다. 그러나 그들이 비중이 커질수록 그들은 점점 더 비용절감 경쟁의 주요 타격대상이 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이들의 저항과 사회권력의 활용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심부국가의 미래의 운동형태이다. 그러나 반주변부에서 미래의 운동형태가 이미 시작되었다. 근본적으로 상이한 정치체제와 사회구조에도 불구하고, 반주변부 국가들에서의 폭발적 소요는 공통점을 보였고, 이중 일부는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미국 또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의 서유럽에서 나타난 계급투쟁 물결의 특징과 유사하다.
5. The Crisis of Marxism in World-Historical Perspective
선언의 예견이 지난 90-100년에 대해서 보다 앞으로 50-60년에 대해서 적실성을 가질 것이라는 주장은 노동자 조직과 마르크스주의 조직이 최근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과 상충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여기서의 분석과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사회조직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조직도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구조를 가지고 전략을 추구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들의 원래 상황이 종식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같은 유형의 전략과 구조를 유지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몰락할 것이라는 현재의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은 모두 20세기 전반기의 전형적인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20세기 전반기에 마르크스의 예견을 따라 노동자 계급의 사회권력 증가와 대중적 궁핍화 증가라는 두 가지 경향이 부각되었고, 프롤레타리아적 투쟁, 이데올로기, 조직의 확산은 추진력을 얻었다. 그러나 두 경향이 현실적으로 양극화되어 구현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적 투쟁, 이데올로기, 조직은 마르크스가 예견하거나 주장한 적이 없는 궤도를 따라 발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언에서 혁명적 전위가 해서는 안될 사항으로 상정된 행동 목록들을 차례로 실행했다.
19세기말에 다른 노동계급 정당과 경쟁할 뿐 아니라 종종 대립적이기까지한 별개의 독립된 당을 결성한 것이 첫 번째 행동이었다. 곧이어 벌어진 수정주의 논쟁은 구체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운동이 혁명적 전위가 세운 원칙보다 우선성을 갖는다는 생각을 제거해버렸다. 또한 자신의 영토를 획득한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그 자신의 이해관계를 발전시켰다(강압적 지배).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의 목적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심부 국가가 누리는 부와 권력을 따라잡고 그와 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산업화). 강압적 지배와 산업화를 더한 것이 정통의 새로운 핵심이 되었다. 마르크스의 유산에 대한 점차적 부정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전체와 노동운동의 공통이익을 대변한다고 계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권력 이해에 맞게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공통이익을 재정의함으로써 점차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중적 궁핍화라는 현상에 근거하여 형성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는 중심부 국가의 프롤레타리아가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는 현상을 낳았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대중적 궁핍화와 일체감을 갖게 될수록,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혈투와 일체감을 가질수록, 마르크스주의는 중심부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낯선 것이 되어갔다. 그리고 역으로 중심부국가에서 노동계급의 사회권력 증가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이 개별국가 내에서 권력과 부를 획득하는 데 성공할수록,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들을 지배적인 사회블럭의 타락한 하위구성원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상호적대감은 세계부르주아지에게 귀중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제공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는 미국 프롤레타리아의 경험이 전세계적으로 복제될 수 있다는 주장에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 노동운동을 미국 노동운동의 이미지에 따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절반은 허구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노동자의 사회권력 증가는 미국에서와 달리 노동자의 대중적 궁핍의 감소를 가져오지 않았다. 법인자본주의가 팽창할수록,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수중에 넘어간 모든 사회권력을 법인 자본주의가 점차 수용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팽창속도가 둔화되었고, 1970년대와 80년대의 비용절감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조직 노동자의 위기와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위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새로운 노동의 사회권력 향상과 동시에 진행된 조직 노동자의 위기는 중심부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대중적 궁핍화를 막을 수 없었던 구조적 무능력에서 주로 기인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위기는 프롤레타리아의 사회권력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지 못한 구조적 무능력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 위기는 동일한 것이넫, 왜냐하면 이 두 유형의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노동자가 기존의 정치․경제 제도에서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회권력을 가진 상황에 대처할 수단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20세기에 걸쳐 세계 노동운동의 이중적 발전의 기초가 되었던 ‘운동’과 ‘목표’ 사이의 해묵은 대립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 같은 재구성은 1960년대 이탈리아 노동자가 만들어낸 ‘목표를 실천하자’는 구호 속에서 공개적으로 주창되고 예견되었다. 이 구호 아래 직접적 행동의 다양한 실천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비록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대사회적인 혁명적 효과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 투쟁을 통해 재배치된 사회권력은 마르크스주의적인 노동계급 조직과 비마르크스주의적인 노동계급 조직을 포함한 정치․경제적 제도가 민주적이고 펴등주의적인 운동의 추동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재편되도록 압력을 가했다. ‘운동’과 ‘목표’의 초보적 재구성을 보여주는 좀더 강력한 증거는 1970년대 스페인과 1980년대 남아공과 폴란드에서 나타났다.
분명 지난 15-20년간의 비용삭감 경쟁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모든 구성원들이 연령, 성별, 피부색, 민족성, 종교 등에 따라 고용비용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어떤 자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노동의 도구라는 지적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자본이 이러한 성향을 갖는다고 해서 노동자들도 독특한(distinctive) 사회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다양성을 포기하는 성향이 있다고 유추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가부장적 전통, 인종주의, 쇼비니즘은 20세기 노동운동의 형성 과정에 통합되었고, 대부분의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와 조직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다. 문제는 이러한 관행과 조직으로부터 억압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투쟁하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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