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앙금 강운구 / 학고재 / 1998년 10월 01일 / 165p
신문사 사진기자로 활동했던 다큐멘터리 및 포토에세이 사진작가 강운구의 작품집. 1997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 93년서울 북한산, 97년 무안군 운남면의 도로 표지, 전국 각지의 버려진 집들, 시골의 버려진 풍경 등 시골을 배경으로 한 90컷의 흑백사진을 수록했다. 사람들이 떠나버린 텅 빈 마을의 폐가를 떠도는 적요는 깊고 서늘하다. 빈집의 낡고 때 묻은 벽지 위에 걸려 있는 빛바랜 가족사진과 뒤란에 버려진 묵은 연탄재, 함부로 솟아오른 잡초들 사이로 나뒹구는 고물 TV와 컴퓨터의 시체들만이 한때 이곳에 존재했을 삶의 흔적을 증거할 뿐이다. 가족사진조차 버려두고 떠나간 그들은 이곳에서 행복했을까. 아마도 가끔은 불행하고 또 가끔은 행복도 했으리라. 버려진 집들, 깨어진 풍경, 어떤 죽음, 어스럼녘 등의 소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 속 90여 점의 사진들은 근대화라는 괴물이 이 땅의 몸 구석구석에 남겨놓은 흉터를 냉정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므로 강운구의 사진은 그 어떤 과장된 비극보다도 더 비극적이다. 그는 말한다. ‘사진은 슬프지 않다. 다만 사진에 화석 같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들이 슬플 따름이다’라고. 시간과 겨루기에서 슬프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는 그의 전언은 속절없고 애잔하다. 그의 또 다른 사진집 「우연과 필연」 「마을 삼부작」과 함께 음미해보길 권한다.
사진은 풍경을 재연하는가?
강운구의 사진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얼핏 보기에 분명하고 단순한 것 같다. 물론 사진에 나온 모습들은 친숙한 모습들이다. 남해안의 석양, 강원도의 숲과 길, 버려진 집들, 버려진 텔레비전 수상기 등등의 모습은 그런 사물이나 풍경을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서 사진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사진을 ‘우리의 농촌이 이만큼 황폐하다’ ‘한국의 석양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식의 서술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강운구는 자신의 사진에 은유와 상징을 담고 싶어한다. 그 은유와 상징이 작가 자신이 붙인 제목이나 소제목들- ‘모든 앙금’ ‘산도, 바다도’ ‘깨어진 풍경’ ‘어려운 풍경’ ‘쉬운 풍경’- 에 의해 제공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진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요소들- 텔레비전 수상기(물론 그것들은 같은 수상기도 아니고, 작가가 일부러 갖다놓은 것도 아니다), 김일성 사망기사가 실린 신문지- 에 의해서 주어지기도 한다. 그 은유와 상징이 무엇인가를 여기다 쓰는 것은 영 재미없는 일이다. 그것은 보는 사람이 파헤칠 몫이므로...
문제는 그런 요인들, 즉 언어적 요인과 시각적 요인들이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이다. 그런 요인들은 ‘우연’을 촉발하기 위한 요소로서 주어져 있음에도 마치 무슨 필연성이 있는 듯이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앙금’이라는 말에, ‘어려운 풍경’이라는 말에 발목을 잡힌다.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강운구 사진에 들어 있는 언어 텍스트는 사진의 의미를 못박아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미의 흐름을 막는 자물쇠의 구실이라기보다는 의미의 분출을 가능케 해주는 병따개의 구실이다.
그런 점을 감안해 볼 때, 강운구는 이번 전시에서 풍경사진에 대한 반성이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즉, 풍경사진이란 풍경이라는 사물을 사진으로 옮겨놓은 동어반복적인 메시지라는 개념에 대해 진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진에 애매한 제목을 붙이고, 비슷한 요소들을 반복시킴으로써 풍경을 풍경 아닌 어떤 것으로, 나아가 사진 아닌 어떤 것으로 보게 만든다. 그것이 언어적인 연상일 수도 있고, 시각적 요소들간의 초현실적인 결합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미지의 진실성에 대해 가지는 믿음이 그런 연상과 결합에 의해서 배반당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사고가 굳어 있다는 증거이므로. 사진의 제목과 사진 사이에 싸움이 붙어서 작가 자신을 배반할 지경까지 갈 지 누가 알겠는가? - 이영준 (사진평론가) -
한국의 작가주의 사진가 1세대 강운구, 그를 만나다.
"근본적으로 작가는 외톨이여야 한다."라고 잘라 말하는 강운구 선생. 『마을 삼부작』, 『우연과 필연』, 『모든 앙금』등의 작업들을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가로 사진가들이 존경하는 사진가. "전시회가 무슨 기록경기도 아니고, 나는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 있을 때만 전시회를 한다. 내 주제에 개인전 세 번 한 것은 많이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명료하게 밝히는 사람. 여전히 서구의 시선에 부화뇌동하는 세태를 단호히 비판하고, 그러면서도 주제에 대한 의식이 같다면 "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하고도 안 가린다"고 말하는 사람. 부드럽지만 한편 단단한 그의 육성을 들으면 사진가로서 몇 십년을 한결같이 작업한 고집과 정신을 뜨겁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강운구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사진가 강운구가 활약했던 시대를 봐야 돼요. 왜? 강운구 자신이 그 시대를 살아간 한 사람인데다, 강운구의 사진도 그 시대의 산물이자 새로운 징표이고 그 시대를 산 사람의 발언이거든요. 근원적인 것을 짚어야 한다는 거죠. 불교에서 잘 하는 이야기로 이런 것이 있어요. 흙덩어리를 개에게 던지면 개는 그 흙덩어리를 물지만, 호랑이에게 던지면 그 흙덩어리를 던진 사람을 문다는 거지. 강운구를 논할 때도 우리는 흙덩어리인 강운구를 보면 안 돼요. 오히려 흙덩어리를 던진 사람을 봐야지. 그런 점에서 시대가 중요해요." <내가 만난 사진가 강운구> 육명심(사진사가) 132쪽
"오래전 영화지만 <고래사냥>을 촬영할 때, 촬영지였던 강원도 임계에서 우리 마을의 전형을 본 일이 있다. 또 <만다라>를 찍을 때 눈밭을 거닐며 스쳐가듯 포착한 우리 마을의 풍경도 떠오른다. 강운구 선생의 이 사진에서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때 보았던 푸근함이다. 지붕과 지붕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듯한 느낌. 몸과 몸이 서로 부비고 온정을 나누는 듯한 그 모습이다. 서로 엉키고 맞닿아 있는 초가의 모습들에서 이웃에 대한 정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강운구의 사진 한 장 1-몸과 몸을 맞댄 초가집 풍경> 안성기(영화배우) 112-113쪽
"작가는, 자신이 사라져 버린 가옥에 대해 갖는 관심은 "건축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그 삶의 환경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강운구』에서 인용한 작가의 사진 설명). 강운구의 수분리와 용대리 사진은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들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폭력적으로 추방된 것들을 담고 있다. 때문에 그의 사진을 보는 일은 사진 속의 피사체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것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맥락을 보는 것이다. 공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채운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보는 것이다. 특별한 미학적 장치도, 의도적인 시선의 배치도 없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그 순간들을 담은 강운구의 1970년대 사진들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여전히 현재적이다."
<공간을 채우는 삶, 삶을 찍은 사진-강운구의 수분리와 용대리 사진에 대한 단상> 윤세진 131쪽
'갤러리 "Sise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의 관조" - 파시오(Sara Facio) 우루과이, 1963 (0) | 2022.05.27 |
---|---|
"남북전쟁" - Mathew B. Brady (0) | 2022.05.27 |
The Americans - Robert Frank - (0) | 2022.05.27 |
Water (1942년) (0) | 2014.11.04 |
"EUROPEANS" (3) - Hanri Cartier-Bresson (0) | 2013.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