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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Siseon"

The Americans - Robert Frank -

by 淸風明月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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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mericans by Robert Frank 

 - 글: 박태희 -

1955년과 56년에 걸쳐 로버트 프랭크는 구겐하임기금을 받아 구입한 중고 폭스바겐을 몰고 미국 전역을 돌며 사진을 찍었다. 라이카 카메라로 거의 500통에 달하는 필름을 찍었고 수천 장의 사진 가운데 83장을 뽑아 책으로 엮었다. 그러나 미국 출판사에선 출판을 거절당했고 프랑스의 델피르(Delpire) 출판사에 사진을 보냈다. 그의 사진을 본 로베르 델피르는 이 사진집을 출판하지 않으면 대대로 가계를 이어온 출판사를 떠나겠다는 위협으로 임원들을 설득해 마침내 사진집 ‘미국인들’은 1958년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듬해 미국 그로브 프레스(Grove Press)에서 당대 비트세대의 선두주자였던 잭 케루악(Jack Kerouac)이 쓴 서문을 실어 출판되었지만 ‘해롭고 악랄하며 반미국적’이란 비평가들의 악평과 더불어 판매도 부진했다. 그로부터 불과 몇년 안에 이 작은 사진집은 피카소가 회화의 역사를 바꿔놓았듯 사진의 역사를 바꿔놓았다는 재평가와 함께 사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책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란 개념을 전면적으로 뒤집고, 객관적 진실보다는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진을 바라보게 했다는 점에서 이후 사진가들에게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이 끼친 영향은 측정불가능하다. 사진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의 책장이라면 반드시 꽂혀 있을 사진집이 바로 이 ‘미국인들’이다. 


희망과 절망의 블루스

오후 해가 점점 기운다. 허공에서 바라본 미국은 오색 전구가 화려하게 깜박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다. 일년 내내 그 불은 꺼지지 않는다. 대롱대롱 매달린 장식들과 먼지들의 무게로 나무는 점점 기울어간다. 누렇게 잎이 변해가는 전나무는 쓰레기통에 버려지지만 전구에 불은 다시 들어올 것이다. 잎이 파릇한 채 밑동이 싹둑 잘린 전나무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풍요로운 미국이므로. 필자에게 사진을 가르쳐주신 미국 프랫대학의 필립 퍼키스 선생은 크리스마스가 지난 어느 날 길을 걸어가다 집 앞 길거리에 버려진 전나무들을 보며 탄식하셨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한다며 저질러진 또 하나의 살인이구나. 





개츠비가 본 희망은 초록이 아닌 핏빛이었다

미국은 풍요롭다. 미국은 광활하다. 미국은 강하다. 미국은 희망이다. 그 희망은 위대한 개츠비(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가 밤마다 그의 대저택 정원에서 바라보았던 아득히 멀리서 반짝이는 초록빛이다. 그 불빛은 그가 그토록 꿈에도 잊지 못하는 여인의 집 앞 선착장에 달린 등불이다. 그는 5년 전에 가난뱅이였던 자신을 버리고 부호와 결혼했던 여인을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았다. 마침내 그녀가 사는 동네에 대저택을 구입하고 여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했다. 개츠비의 여인에 대한 꿈은 미국이 표방하는 자유라는 이상처럼 찬란하고 순수하다. 그러나 그 순수함조차 범법자들과 손을 잡아 벌어들인 검은 돈으로 지켜졌다면, 대체 순수의 반대쪽에는 무엇이 있나. 사랑의 반대쪽에는 증오가 있다. 백인의 반대쪽에는 흑인이 있다. 미국은 극단이 섞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순수의 반대쪽에는 변질된 순수가 있고, 사랑의 반대쪽에는 욕망에 눈먼 사랑이 있고, 백인의 반대쪽에는 권력의 분배를 두려워하는 백인이 있을 뿐이다.

결국 개츠비의 사랑이 순수한 만큼 여인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무책임했고, 개츠비가 꿈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처럼, 위대한 개츠비 역시 변질된 누군가의 꿈을 이루기 위한 희생양이 되어 꿈도 사랑도 한낱 허공에 떠도는 먼지처럼 공허하게 사라져갔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이 침 튀기며 강조하는 선의 축이라는 미국에서 끝까지 순수하게 꿈을 지키기란 참으로 어렵다. 선의라는 이름으로 지구 곳곳에 무수한 피를 뿌리고 그 상처위에 통조림 세례를 쏟아 붓는 식이다. 분명 멀리서 바라본 미국은 꿈과 희망이 일년 내내 불을 밝히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다.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회전목마다. 그러나 불빛아래 나무는 시들어가고 멈추지 않는 목마를 탄 아이는 더이상 즐겁지 않다. 오로지 꿈과 희망을 품에 안고 미국의 초록 불빛을 쫓아 떠났던 수많은 이민자들은 어떨까. 그들의 등대가 되어 바다를 건너게 했던 희망의 불빛은 여전히 초록빛일까. 영화공부를 하겠다고 미국에 유학 와서 생활비를 버느라 학교마저 그만두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필자의 룸메이트 일기장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뉴욕의 거리에서 부딪치는 영화쟁이들과 영화학도들이 동지처럼 보이던 때 뉴욕은 내 꿈을 대변하였으나 어느새 내 꿈을 잡아먹은 도시가 되어버렸네.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추위와 택시 드라이버, 트레비스의 고독을 기억하는 동안 가난한 예술 혼이 내 꿈을 지켜주었건만 지하철을 버리고 택시를 타고 차를 몰고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부터 꿈은 조금씩 내 곁을 떠나 버렸다. (古 조현예 일기장에서 발췌)



그녀는 결국 영화의 꿈을 포기하고 역시 이민자로 텍사스에서 도넛 가게를 열어 힘겹게 살아가는 친언니를 도와주러 갔다가 돈 몇 푼 노린 18살 미국 아이에게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맞고 한때는 찬란한 불빛으로 반짝이던 밑동 잘린 전나무들처럼 쓰레기통에 버려졌으니, 죽기 며칠 전 전화 통화에서 신년에는 희망 없는 흑백 세상의 한점 컬러가 되어 힘들게 살아가는 불법 이민자들을 도와주고 싶다던 그녀의 새로운 꿈은 채 펴보지도 못하고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그러니 그녀가 갈구하던 그 컬러 한 점, 위대한 개츠비가 밤마다 바라보던 그 희망의 빛깔은 싱그러운 초록이 아니라 붉은 핏빛이어야 옳다. 



스위스 이민자인 로버트 프랭크가 본 미국의 내면 로버트 프랭크도 스위스에서 바다 건너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였다. 그는 뉴욕에 건너온 첫 주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지난 한주동안 평생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겪었어요. 마치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이곳의 삶은 유럽과는 너무 다르네요. 오로지 순간순간만이 중요하죠.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 같아요.”

그의 예민한 감성은 한눈에 미국을 알아보았다.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찬 나라에서 그가 받은 첫인상이 ‘내일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 이라니, 사진이나 글이나 그의 감성은 너무 정확해서 허탈할 정도다. 집단적 희망이나 집단적 애국심에 도취되어 스스로 눈을 감아버린 미국인들과는 달리 로버트 프랭크는 미국에 대한 환상을 즉각 벗은 듯 보인다. 광고사진으로 밥벌이를 했던 로버트 프랭크가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보장해주는 화려한 광고의 이미지가 거짓 인생임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그는 화려한 뮤지컬 무대 뒤로 곧장 눈길을 던졌다. 잿빛 공장과 탄광들, 무기력한 노동자들, 황량한 메인스트릿에서 운이 없는 사람들은 낙엽처럼 뒹굴었고, 호화로운 빌라와 수직으로 솟은 빌딩 숲에선 고독한 사람들이 술에 취해 따분함을 달랬다. 한쪽에선 지나친 과잉으로 다른 한쪽에선 지나친 결핍으로 슬픈 일상이 되풀이되었다. 로버트 프랭크는 카메라로 이 모든 결핍과 과잉을 담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 안에 공존하는 희망과 절망의 뿌리를 캐려는 듯이 집요하게 그리고 집중적으로.


“흑과 백은 절망과 희망의 상징이다. 이것이 내가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로버트 프랭크



미국을 돌아다니며 그는 수많은 도시들과 수많은 길들을 만났다. 똑같은 네온사인 불빛과 똑같은 드러그 스토어와 똑같은 광고판의 미소를 만났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 오색찬란한 중심에서 벗어나자 주변부로 방치된 잿빛 거리가 나왔다. 드문드문 성냥갑처럼 놓여진 트레일러들, 빛바랜 포스터들, 어깨가 축 늘어진 무기력한 얼굴들. 그때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잭 케루악이 서문에서 언급했던 그 음악, 바로 블루스였다. “거리 위에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주크박스나 가까운 장례식장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때, 미국이란 땅덩어리가 지닌 그 미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을 로버트 프랭크는 구겐하임 지원금으로 산 중고 폭스바겐을 몰고 48개주를 돌며 민첩성과 신비로움과 비범함과 슬픔으로 여태껏 필름에 담겨본 적이 없는 어두운 그림자에 어린 저 기이한 비밀스러움을 엄청난 수의 사진 속에 담아낸 것이다.”

빔 벤더스의 블루스에 관한 영화 ‘인간의 영혼(The soul of a man)’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잭 케루악이 말한 음악의 의미를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블루스의 기조를 이루는 단순한 가락의 패턴은 노래하는 사람에게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운 변용의 기회와 인간사 모든 고난과 모든 걱정과 모든 슬픔들을 다 뱉어내게 하는 넉넉함을 선물했다. 힘들고 슬플 때 안길 누군가의 품처럼 위로가 되는 음악, 육체와 정신의 괴로움을 위로해줄 음악을 탄생시킨 건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가장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흑인들이었다. 힘들고 고단한 삶, 고향을 벗어나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칸 미국인들의 한과 설움으로 읊조리던 이 가락이 재즈와 락앤롤과 힙합의 뿌리가 되었다하니 노래는 분명 기쁨이 아니라 슬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빔 벤더스는 흑인과 피부색도 다르고 국적도 다른 자신조차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어린 시절 처음 블루스를 들었을 때부터 그 진솔한 영혼의 흐느낌에 블루스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렸다는 얘기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해석 이전에 누구나가 희망과 절망으로 뒤범벅된 내면의 얼굴을 비춰보게 하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처럼 말이다.



블루스의 가락과 슬픈 싯구 연상시키는 사진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 속에서 자연스레 들리는 이 블루스의 가락에 잭 케루악이 “이 사진들을 보고 나면 당신은 마침내 주크박스가 관보다 더 슬픈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썼을 때, “이제까지의 사진 가운데 가장 쓸쓸한 사진은 여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 앞에서 영원한 슬픔 속에 구두를 닦고 있는 구두닦이다”라고 썼을 때, “낡은 지팡이를 짚고 오래전에 철거된 낡은 계단 아래 엉거주춤 서있는 노인네와 환상적인 베니스 캘리포니아의 뒤뜰에 망가져서 방치된 차 시트에 앉아 성조기를 지붕삼아 쉬고 있는 정신 나간 남자”라고 썼을 때, “어떤 이유로 황혼녘인지 이른 새벽인지 모를 시간에 바통 루즈의 미시시피 강물이 밝게 빛나는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하얗게 빛나는 십자가를 들고 강 건너에선 결코 알 수 없는 비밀스런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신비의 중개자인 니그로 목사”라고 썼을 때, “무시무시한 죽음의 위압감 속에 비단 베개를 베고 관 속에 누운 검은 남자의 성스러운 얼굴 속에서 죽음과 닮은 게 무엇이고 죽음과 닮은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보기 위해 슬쩍 눈길을 던지는 슬픈 조문객들”이라고 썼을 때, “똑같이 천국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는 흑인 간호사와 품에 안긴 귀여운 백인 아기”라고 썼을 때, “고무 고양이 말곤 아무도 얼쩡거리지 않을 3월 밤의 저 감자밭의 안개로 짓눌린 샌프란시스코 언덕에 바람으로 쓰러진 중국인 묘지의 화환들”이라고 썼을 때, “텍사스 90번 도로에서 숲으로 들어간 아빠를 기다리지 못하고 잠에 곯아떨어진 저 애처로운 어린 아이들”이라고 썼을 때, 가락은 노랫말을 담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러운 악마들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그 작고 외로운 엘리베이터 걸, 그녀의 이름과 주소는 뭐죠?”라고 물었을 때, 잭 케루악은 로버트 프랭크가 연주한 블루스의 가사를 완성시켰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미국의 비트세대를 주도한 미국의 가장 위대한 지성인 가운데 한명인 잭 케루악이 서문 마지막에 던진 찬사를 한번 들어보라. 사진의 발명이 공포된 1837년 이후에 발간된 사진집 가운데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찬사를 들은 사진가를 나는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다.

“누구라도 이 사진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알겠는가.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집으로 가서 TV 앞에 앉아 순해 빠진 말을 타고 커다란 모자를 쓴 카우보이들이 보여주는 쇼나 보면 된다. 고집 세고, 사려 깊은 스위스인, 로버트 프랭크는 작은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아메리카에서 삼킨 슬픈 시정을 사진으로 찍어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비장한 시인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버트 프랭크에게 난 이 말을 꼭 해야겠다. 당신 정말 안목이 있군요.” 



사진가들이여! 그대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 안목, 도저히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볼 줄 아는 그 안목을 기르기 위해, 로버트 프랭크는 미국 대륙을 바람처럼 달리는 동안 휘발유를 채우기 위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낯선 장소에 무수히 멈출 때마다 또한 무수히 자신에게 물었을 것이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답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를 채우고 휘발유를 채우고 잠을 채우는 일은 오로지 허기진 영혼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물음 또한 길이 없는 길속에서 멈추지 않고 달리게 한 휘발유며, 빵이며, 침대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한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 앞엔 틀에 박힌 상투적인 모습만 담은 ‘미국인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진 역사상 치명적인 손실이다. 그러니 사진가들이여 물을지어다.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물을지어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그래서 만나는 대상마다 부딪치는 내 영혼의 반응을 마치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인 듯 카메라로 담아내어라. 세계의 중심에서 길을 잃고 내 안의 중심을 찾아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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