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한국사회에서 이 두 글자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두 글자가 얼마나 대단한고 하니 삼성을 비판하는 칼럼은 신문에 조차 실리지 못하고, '삼성이 하는 일=국익' 그러니 삼성의 잘못정도는 눈감아줘도 되는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지니고 있는 글자이다. 민주주의사회라는 한국사회가 얼마나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짓눌려 있는 상태인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삼성을 이야기 하는데 있어 한국사회의 기이한 형태인 '학벌'을 빼놓을 수 없다. '학벌'이란것이 어떻게 보면 권력의 '기생권력'이 아니겠는가! 한국사회에서 학벌문제는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이다. 바로 이것을 재생산하고 있는것이 지금의 신자유주의와 사회경제체제인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조의 최정점에 서있는것이 삼성의 이건희 일가이다. 이건희가 누리고 있는 특권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가? 이건희와 그 일가들이 누리고 있는것은 우리사회의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 다른 표현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학벌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에 분노했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왜 삼성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 '삼성'을 우리가 바꿔보자는 '삼성불매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이것에 대해 다른 재벌도 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데 왜 삼성만 문제삼냐고 하는 이들도 있고, 여기에 적극 호응하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삼성과 이건희일가는 다르지 않느냐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실효성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많다. 삼성의 대표적인 상품이 반도체인데 소비자의 입장에서 어디에 쓰이는지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도한 삼성그룹의 매출 대부분이 해외에서 발생한다는 것 역시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이다.
삼성의 비리에 대해서 사법부도, 언론도 올바른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아닌가! 그럼 그 비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묻어두어야 하나? 회사의 비리를 척결하는 방법은 노동조합이 앞장서서 비리를 공개하고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나 삼성에는 노조가 없다. 아니 노조의 성립을 끈질기게 방해했다. 그렇다면 다른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소비자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 방법뿐이다. 왜 삼성만 문제 삼느냐는 지적은 황당하다. 한국사회의 병폐인 학벌 체제를 무너뜨리려면, 결국 서울대를 겨냥해야 한다. 서울대가 가장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서울대가 기득권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혹은 SKY대학을 비켜가면서 학벌 체제를 무너뜨릴 방법은 없다. 다시말해 재벌 체제, 기업독재 체제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바꿔내려면, 정점에 있는 삼성을 먼저 겨냥할 수밖에 없는것이다. 또 삼성과 이건희를 분리하자는 말도 있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다. 삼성 노동자들이 이건희의 비리에 맞서 싸울 때만 가능한 논리가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이건희가 경영복귀를 선택한 그 순간 삼성 인트라넷에 올려졌던 글들만 봐도 알듯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다.
삼성 그룹 매출의 대부분이 해외에서 발생하는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삼성 불매운동을 부정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해외에서도 삼성 불매운동이 벌어져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근거는 아닐까? 우리가 그렇게 동경에 마지 많는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라면 노동조합을 금지하고 분식회계를 밥먹듯이 저지르는 기업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걸 모르는가? 개발도상국 역시 불매운동이 필요하다. 삼성은 개발도상국에 공장을 둔 경우가 많은데, 국내언론들이 쉬쉬해서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노동인권적인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있는 경우가 많다. 현지 주민들이 계속 피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불매운동은 필수적이지 않을까?
삼성의 가장 큰 수입원이 반도체 판매이다. 이것 가지 불매운동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굳이 그렇게가지 근본주의적 입장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삼성이 생산한 부품까지 쓰지 않으며 생활하기란 한국사회에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불매운동의 초점은 삼성 브랜드가 찍힌 완제품 및 서비스 상품에 맞추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불매운동의 목적이 불매 행위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매운동은 삼성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이 집단적으로 벌이는 실천이며, 동시에 우리 내면의 욕망을 성찰하는 작업이다. 삼성을 비난하는 많은 이들 역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건희 회장을 닮고 싶어 한다. '우리 안의 이건희'를 지우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이건희가 나오는 것은 필연이다. 그렇다면, 설령 삼성과 이건희가 사라진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 안의 이건희'를 정직하게 들여다 보는 작업이 바로 삼성 불매운동의 근본이유인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마치 진리인양 인식되어 졌으며, 국가 위에 기업이 존재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옛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위에 당이 있었는데, 그보다 더 답답한 구조다. 당은 그나마 통제 가능성이 있지만, 기업을 기업 바깥에서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기업 내부는 일종의 독재 체제로 운영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선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민주주의의 퇴행에 다름 아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한마디로 '기업 독재' 체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단 이런 현상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공화국' 전통의 유무가 낳은 차이다. 이런 전통이 살아 있는 나라에서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공화국' 전통과 기업 독재 흐름이 서로 맞부딪히면서 균형을 맞춰나간다. 반면 '공화국' 전통이 없는, 국가기구가 한 번도 온전히 공공적 기관이었던 적이 없으며, 국가기구가 소수의 권력집단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적으로 점유한 수탈과 억압의 도구로만 쓰였던 한국에서는 기업 독재 흐름을 견제할 힘이 설 자리가 없다. 그렇다고 절망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비록 공화국의 전통은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저항 공동체'의 전통이 있지 않은가! 80년 광주만 봐도 알 수 있다. 6월항쟁도 그런 측면이 있다. 지난해 5월 18일, 진보신당 광주시당은 '삼성독재 해체 투쟁'을 선언했다. 1980년 5월 신군부에 온몸으로 맞섰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 이런 선언은 의미가 깊은 것이 아닌가? 어떻게 본다면 진보신당의 선언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 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왔지 않은가?
'생활정치', '생활진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참 좋은 말이다. '현실과 싸우지 않는 진보는 결국 보수에 전용된다.'는 말이 있다. 구체적 현실을 파악하고 지금 그 현실과 맞서야 한다. 두렵다고 뒤로 미룬다면 결국 우리 후세대들에게 더 큰 피해가 돌아갈 뿐이다. 지금 이곳에서 삼성에 맞서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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