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함께 등장한 전쟁사진은 바로 포토저널리즘의 큰 줄기라고 할 수 있다. 보도사진은 전쟁사진으로부터 시작되어 포토저널리즘의 진수를 보여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삶 자체를 보여주는 화판이다. 죽느냐 죽이냐의 갈림길에 선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전장이기 때문에 이 사진이야말로 포토저널리즘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오직 카메라에 목숨을 걸고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대는 포토저널리스트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경지에 있는 것이다. 보도사진가들은 치열한 전투에서 총탄을 뚫고 전진하는 병사들과 함께 그들의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인간적 고뇌를 카메라에 담아 기록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포토저널리스트들은 전장도 기록하지만 인간의 참모습도 초점을 맞춘다. 전쟁이 없었다면 포토저널리즘의 진수를 느낄 수 없었으며 그에 따른 보도사진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쟁터는 보도사진가에게는 인간의 참모습을 적나라하게 찍을 수 있는 최상의 장소였다. 극단적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비정함과 인간성이 상실된 잔학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전쟁기록사진이다. 포화로 폐허가 된 전쟁터의 정적 속에서 부상입은 병사의 절규하는 참혹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 모든 것은 사진으로 기록된다.
보도사진가의 카메라는 이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사진은 포토저널리즘에서 가치있게 평가받는다. 전쟁을 통해서 영웅이 탄생되기도 하지만 이는 곧 사라지고 전쟁의 승패를 떠난 현장을 기록한 보도사진가는 영원한 영웅이 되어 인류의 머리 속에 그의 작품과 함께남는다. 1853년 크리미아 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사진은 1861년 미국의 남북전쟁, 러일전쟁, 청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내란, 제2차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및 기타 국지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보도사진의 큰 줄기를 이루어왔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전장에서 가장 치열한 곳을 찾아, 작렬하는 포화의 한 가운데에서 목숨을 걸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전설적인 전쟁사진가 로버트 카파는 후배를 위해 늘 이렇게 말해왔다. 그대가 좋은 전쟁사진을 못찍는 것은 전쟁의 중심에서 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쟁사진가는 통신병이나 공보장교로부터 들은 정보를 토대로 기사를 쓸 수 있는 종군기자들과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좋은 사진을 위해서는 전선의 한 복판에 서서, 쓰러지는 병사의 한발 앞에서 셔터를 눌러야 한다. 수많은 보도사진가들은 전장에서 병사들과 생사를 같이 하며 전쟁의 아픔을 빠짐없이 기록해왔다. 위대한 전쟁사진가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 등 많은 전쟁보도사진가가 혼신을 다해 찍은 사진이 어떤 것인가, 또 그 상황이 어떠했을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난 역사적인 배경과 이곳에서 일어난 보도사진가들의 휴먼스토리를 부연하지 않을 수 없다.
1) 최초의 전쟁사진가 로저 펜턴과 크리미아 전쟁
1853년 러시아는 동과 서로 세력을 확장한 여세를 몰아 남진정책을 펴 서남아시아인 터키령 크리미아반도를 침공했다. 러나 인도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던 영국이 이곳을 러시아에 빼앗길 경우 인도로 가는 길목이 막혀버리기 때문에 프랑스와 독일·오스만 터키등과 동맹연합군을 형성, 이를 저지했다. 그 3년의 전쟁중 마지막 전투인 세바스토폴(Sevastopol) 전투에서 영국연합군이 승리, 러시아를 물리쳤다.
이에 앞서 1855년 영국정부는 크리미아전쟁의 현장을 국민에게 알리려고 사진가 로저 펜턴(Toger Fenton)을 특별 대우하여 초청했다. 이때의 사진장비는 부피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튼튼한 사륜마차를 동원해야만 했다. 이 마차에는 다리가 달려있는 카메라와 유리원판 500장, 사진약품, 공구, 식량 등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3개월여의 오랜 여정 끝에 전선에 도착한 사진마차는 마치 신병기를 수송하듯 병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커다란 카메라를 매고 전선에 나타난 로저 펜턴을 괴롭힌 것은 신기하기만한 카메라에 자기들을 찍어 고향에 그 모습을 보내고자 기념촬영을 요구하는 병사들이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선에서 그들 없이는 많은 짐을 옮길 수 없었으므로 응해줄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고층은 정부가 치열한 전투의 참혹한 장면이 담긴 사진이 아니고 자국의 병사들이 의기양양하게 전선에 있는 모습의 사진을 국민에게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진가가 갖는 본연의 의식을 살려 360장에 달하는 전쟁사진을 찍었다.
바로 눈앞에 터지는 포탄의 파편을 맞으면서 최선을 다한 전쟁사진이었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만족할만한 사진이 될 수 없으나 종군하여 찍은 최초의 전쟁사진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 한가지 콜로디온(Collodion)습판법 사진술은 많은 시간과 큰 부피 때문에 고도의 기술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그의 위업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크리미아전쟁사진중 49장은 영국 로열사진협회에 지금까지 보존되어있다. 크리미아쟁은 두사람의 영웅을 낳았는데 만국적십자를 낳게한 나이팅게일과 사진가 로저 펜턴이다.
2) 보도사진가와 화가가 함께 종군한 청일, 러일전쟁
미국·영국 등 서양의 강대국들은 중국을 침략한데 이어 1853년 미국의 해군사령관인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와 일본에 강압적으로 통상을 요구, 하코다테와 시모다를 개항하는 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어 1858년 영국·네덜란드·러시아도 똑 같은 조약을 맺었다. 200여년이나 쇄국정책을 펴오던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자 사회와 경제가 혼란에 빠졌으나 명치유신 후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는데 성공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국가로 발전했다. 이에 힘입어 군대를 기른 일본은 청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어오던 조선을 침략하고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터가 되어버린 한반도는 주로 일본 종군기자들이 129명에 달했으나 그 중에서 사진기자는 불과 4명에 지나지 않았다. 서양보다 뒤떨어진 열악한 사진기재와 미숙한 사진기술로 인해 전쟁사진다운 사진은 없었으며 군대 행렬이나 구축되는 진지와 수송되는 군수물자 등을 촬영하는데 그쳤다. 오히려 11명의 화가가 종군하여 스케치한 그림이 전쟁사진과 다름없는 내용을 담았다. 어쨌든 동양 최초의 전쟁사진은 청일전쟁에서 탄생했다. 청일전쟁에 이긴 일본은 만주의 요동반도와 대만을 차지하나 프랑스·러시아·독일 3국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는 돌려주고 만다. 청일전쟁에 이긴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한반도에 이은 중국·남지나에 이르는 침략의 길을 열었다. 청일전쟁에서 경험을 얻은 보도사진가들은 보다 나은 기재와 기술을 이용, 러일전쟁에서는 무려 4,847장의 전쟁사진을 남겼다. 물론 한반도의 인천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이 사진은 모두가 일본군이 승리하는 객관성 없는 사진들이었다. 이는 전쟁사진이라기보다는 기록사진으로 평가된다.
3) 로버트 카파를 영웅으로 만든 스페인 내란
1934년 시작된 스페인 내란은 수세기에 걸친 정치적·종교적 갈등과 산업혁명의 시대흐름에 휘말린 국내정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내란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다른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 6개월 후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해 나갔다. 스페인 내란은 동족상잔의 싸움이었지만 보도사진사에 있어서 가장 뜻이 있는 전쟁이었다. 스페인 내란은 아무 이름 없던 신출내기 로버트 카파를 보도사진의 영웅으로 탄생시켰으며 프랑스 화보집 뷰(VUE)의 명성을 올리고 보도사진의 새 장을 연 라이프(Life)가 창간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로버트 카파는 뷰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란 취재를 위해 국제 의용군과 함께 종군했 다.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은 코르도바 전선에서 였다.
공화당 병사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을 찍은 불후의 명작 병사의 죽음을 탄생시켰다. 이 사진은 화보집 뷰에 특집으로 실려 세계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공화파의 병사가 전선을 가설하다가 프랑코군에 저격당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걸작이다. 함락되기 전의 마드리드 시민들의 어두운 표정과 부상당한 병사들의 처절한 이동장면 등은 뷰를 통해 전쟁의 비극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전쟁보도사진의 가치를 확인시켰다.
로버트 카파가 찍은 전쟁사진은 전쟁이 인간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여과없이 보여준 대작이다. 스페인 내란으로 로버트카파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왔다. 스페인 내란을 직접 취재하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쓴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우연하게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만남은 두 천재들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쉽게 동료의식을 갖게 된 두 사람은 스페인 내란을 소재로 한 미국 라이프의 두가지 포토스토리를 제작하는 데 동의했다. 하나는 스페인 내란을 소재로 하는 포토에세이로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사진물로 구성하는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헤밍웨이 자신이 직접 제작한 스페인 대지라는 영화를 취급한 라이프의 사진기사였다. 이 두사람의 시각과 판단은 너무나 잘 맞아 두작품 모두 성공을 이루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집시 라파엘의 이미지가 로버트 카파와 비슷하여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 때 로버트 카파에게 라파엘역을 맡아달라고 권하기도 했다. 스페인 내란은 전세계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다주었다. 더욱이 스페인 내란을 연속해서 특집으로 게재한 라이프는 사세를 확장하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전쟁이야말로 보도사진의 보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라이프는 곧이어 벌어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인도차이나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 수많은 보도사진가를 종군시켜 전쟁사진의 진수를 보여주게 된다. 스페인 내란은 한 영웅과 라이프의 대발전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4) 보도사진의 전성기를 이룬 중일전쟁
중국은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진서구세력의 개방압력과 현대사회로의 변화를 강요받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정부와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은 서로 맞서 싸우다가 1937년 국공합작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게 되었다.일본군은 1910년 한반도를 합병하고 1932년 만주를 점령한 다음 7월 28일 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드디어 아시아는 전쟁의 와중에 들어갔고 이 전쟁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빨려 들어갔다.중국의 동·남부를 포함, 전 국토를 거의 점령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진주만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중일전쟁 반발 초부터 세계의 언론은 동양의 전쟁을 중심으로 취재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라이프 창간호에는 가난한 중국민중이 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항공기 50대를 미국으로부터 구입, 장개석 총통에게 생일 선물한 것을 특집으로 실은 데 이어 서안사건의 주역인 장학량 장군의 기사를 특집으로 엮어 보도했다.
중일전쟁에서는 뛰어난 보도사진가 여러 명이 활동했다. 인민의 영웅으로 추대를 받고있던 모택동은 최초로 사진 촬영했고 중국공산당의 실체를 카메라에 담았던 에드가 스노, 주로 일본군편에서 종군하여 일본국내의 일본군과 파죽지세로 중국대륙을 침범하는 일본군을 찍은 나도리 요노스케, 스페인 내란 보도사진의 영웅 로버트 카파, 일본군의 북경공략을 찍은 월터 브로샤도, 폴 도시, 칼 마이던스 등의 활동은 대단했다. 이들의 생사를 건 전쟁사진은 라이프지의 전문편집자들에 의해 사진이 말해주고 있는 핵심부분을 클로즈업시켜 편집되어 나왔다. 라이프지는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좋은 전쟁사진이면 무엇이든 보도했다. 세계는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으나 진주만 공격이후 그 시각이 달라졌다. 중일전쟁의 사진은 대단한 전쟁사진들이었다. 중요한 전투는 물론 전쟁이 지나간 자리의 처참한 모습을 놓치지 않고 찍었다.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인 중경시가지, 공포와 겁에 질려 참호 속에서 떨고 있는 중경의 시민들, 폭격으로 불타버려 폐허가 된 가옥에서 식사하는 중국인, 남경함락으로 방황하는 민중과 널려진 시체들, 희생된 자식을 매장하고 있는 비통한 부모들, 안개낀 숲속을 행군하는 일본군, 이 모든 전쟁사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명작들이다.
이렇게 전쟁사진에서 뛰어난 작품들은 구설수에 한번씩 오르내린다. 같은 전쟁에 종군하던 무능한 사진가들의 시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란에서의 걸작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병사도 연출한 사진이라고 모략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중일전쟁의 뛰어난 사진이 이와 같은 모함에 시달리는 일이 있었다. 1937년 수십 대의 일본폭격기가 상해시가를 폭격할 때 항주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던 수백 명의 순수한 민간인이 살육을 당했다.
이때 열다섯명의 어린아이가 희생되었고 폭격당한 역구내에서 엄마를 잃은 아기가 울고있는 사진은 전세계의 신문들이 일제히 게재, 전세계의 반일감정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진은 사진가 H.S 윙이 찍은 것으로 중일전쟁을 대표하는 보도사진으로 꼽히고 있다. 또 일본의 사진가 요노스케가 세계적인 사진가로 태어나는 계기가 된다. 라이프지는 이 사진가의 작품을 전쟁사진으로서는 있어야 할 모든 것이 다 있다. 고 평가했다. 중일전쟁의 빼어난 전쟁보도사진은 레이 스콧이 찍은 광동의 피난민, 칼 마이던스의 부인 셀리가 찍은 중경의 재난, 폴 도시가 찍은 차창에서 몸을 내민 일본군 등을 꼽을 수 있다.
5)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1939년 9월 1일은 히틀러가 인류사상 초유의 살육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날이다. 6년간에 걸치 이 전쟁은 6,000만 명이 참전했고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히틀러는 전쟁도발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한 후 1940년 4월 전 유럽을 공격하기 시작, 노르웨이는 62일, 덴마크는 불과 3시간, 네덜란드는 5일, 벨기에는 18일, 프랑스 파리는 40일만에 점령했다.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한 나치는 파죽지세로 전과를 울렸지만 추위를 대비 못한 독일군은 소련군의 반격으로 패배하게 된다. 1944년 미국·영국·캐나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며 제2차 세계대전의 대미를 장식한다. 1945년 3월 조지 패튼 장군이 이끄는 제3군은 라인강을 건넜고 4월에는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는 방공호에서 자결했다. 드디어 연합국의 승리의 팡파르가 울렸다. 유사 이래 제2차 세계대전만큼 고도의 전략과 고성능무기가 난무한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주역은 인간이었으며 인간에 의해 계획된 살육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합리화 될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 비극의 전쟁터는 사진가들에게는 타고난 재능과 좋은 앵글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수많은 보도사진가가 종군했다. 유럽, 아프리카, 태평양전선 구석구석까지 그들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안달루시아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최초의 스페인 병사로부터 아프리카전선의 폭염 아래에서 탱크에 깔린 병사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전장을 보도사진가들은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그들은 최전선에서 총을 든 병사와 함께 카메라를 들고 모든 역경을 이겨냈다. 불타는 유럽전선에 종군한 여류보도사진가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이탈리아전선 카시노북방의 설산에서 미국병사와 침식을 같이하며 맹활약을 했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던 보브 랜들리는 아프리카와 유럽전선에서 정열을 쏟았다. 랜들리는 북아프리카 사막의 한 전장에서 지친 몸으로 사막벌판에 주저앉아 있는 병사들 앞에서 군목이 바이올린을 켜면서 예배를 보고 있는 영국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은 전쟁터라기보다는 차라리 휴먼스토리가 짙게 풍기는 밀레의 만종과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보브 랜들리는 1943년 패튼 장군 휘하의 미군과 함께 시실리섬 상륙작전에 참가했고, 로버트카파는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 또 한번의 걸작 사진을 찍었다. 로버트 카파는 노르망디 최초상륙군 제1부대와 동행하여 빗발치는 포탄을 뚫고 돌진하는 병사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의 작품 프랑스 D데이 노르망디 해변은 치열한 전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기의 걸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대표하는 전쟁보도사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전쟁터의 보도사진가들은 모두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에서 종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전선을 누비며 영원히 살아있는 보도사진을 찍은 마거릿 버크 화이트, 로버트 카파, 보브 랜들리, 조지 실크 등 포토저널리스트들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그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당시 행운의 사진가들이 있었다. 피터 스택폴은 항공모함을 타고 출항중 진주만 공격이 가해져 재난을 피했다. 미 해군소령 에드워드 시타이켄은 일본군에게 폭격을 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항공모함 렉싱턴호를 타고 사진반까지 동원, 진주만의 참상을 샅샅이 촬영하는 행운을 잡았다.1942년 필리핀 철수하면서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맥아더 장군이 2년 7개월뒤 필리핀에 다시 돌아왔을 때의 모습을 찍은 아크메 뉴스 픽처의 프랑크 브리스트, 맥아더 장군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사진이 그의 대작이다. 유럽전선에서 마거릿 버크 화이트와 로버트 카파가 대활약을 했다면 태평양 전선에서 는 단연 유진 스미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타라와섬에 처음으로 미군을 따라 종군한 이후 1945년 종전될 때까지 무려 13회에 걸쳐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레이테섬에 상륙했을 때 야전병원으로 사용하던 스페인 풍의 교회 안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미군장교의 모습을 담은 그의 사진은 전쟁의 잔학상의 인간애를 같이 표출시킨 뛰어난 전쟁사진이었다. 그는 태평양상의 대격전지 유오섬과 오키나와, 사이판 등을 종횡무진 사력을 다해 전쟁의 아픔을 찍어냈다. 사이판섬의 동굴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며 간신히 기어나오는 일본인 군속에 일그러진 표정은 참혹한 전쟁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폭발현장을 빠짐없이 촬영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 일본인 마쓰시게 요시로의 사진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가공할 파괴력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진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참혹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주며 전쟁의 처참한 광경을 렌즈에 숨김없이 잡은 전쟁보도사진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발발한 한국전쟁은 보도사진가들에게 또 다른 사명을 주었다. 불과 일주일도 안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했던 저명한 보도사진가들이 속속 전선을 찾았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은 전쟁발발 3일만에 한국에 가장 먼저 도착, 한국 전쟁 사진을 라이프에 보도했다. 비행장에 있는 C54기가 소련제 미그기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사진이 그의 첫 한국전쟁 보도 사진이었다.다음 장으로 애기 바타안호 앞에 늠름하게 서 있는 맥아더 장군 사진과 C54기가 불타고 있는 사진을 나란히 게재하여 공포와 기대감을 대조적으로 보였다. 던컨은 라이프의 보도사진가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한국전쟁을 취재한 기자였다. 그는 주로 보병을 따라 전선의 비통한 광경을 흑백사진으로 촬영했다. 그의 사진은 마치 고야의 그림을 보는 듯한 사진들이었다.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병사의 표정과 격렬한 전투에 지친 초췌한 모습의 사병들, 부상입고 고통스러워하는 해병대의 일그러진 얼굴, 이 모든 사진은 오늘까지 남아 있는 주옥같은 사진들이다. 던컨은 계급장없는 군복에 철모를 쓰고 군화를 신고 보병부대 사병과 동고동락하면서 전선의 리얼한 모습을 앵글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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