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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1997년] 생산직 여성노동자 운동 : 1987 - 1996

by 淸風明月 2016.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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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생산직 여성노동자 운동 : 1987 - 1996

  * 관련단체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 1997 년

  * 첨부파일

 생산직 여성노동자 운동.hwp 

 

생산직 여성노동자 운동 : 1987 - 1996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목차)
Ⅰ. 머리말
Ⅱ. 한국여성노동자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 노동위원회의 조직 배경

Ⅲ. 대응활동과 쟁점

Ⅳ.맺는말

Ⅰ. 머리말


생산직 여성노동자운동의 뿌리는 제조업이 이 땅에 도입되기 시작하던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부터 1940년까지의 노동자 투쟁 123 건 중 94건이 여성노동자 단독의 투쟁이었고 나머지도 남녀 노동자투쟁이었다 (이효재, 1989:103). 전평이 불법화된 1947년 이후, 노동자 투쟁의 급격한 소강상태를 겪는 와중에서도 경공업 중심의 여성노동자들은 훨씬 오랫동안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승희, 1994:158-64).

 

또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통해, 유신독재 치하에서 섬유, 봉제, 전자업종의 생산직 여성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노동운동의 단절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탄압에 맞서 나체시위를 전개하고 똥물을 뒤집어쓰면서도 꿋꿋이 민주노조를 사수했던 동일 방직, 8시간 노동제 확보투쟁에 나선 해태제과, 폐업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유신독재를 무너뜨리는 기폭제 역할을 했던 YH 등 70년대 노동운동의 선봉에 선 이들은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이었다.

 

생산직 여성노동자들은 노조운동의 중심에 서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왔고, 선도적으로 여성과제를 해결해 나간 사업장들도 있었다. 콘트롤테이타노조의 결혼퇴직제 철폐와 생리휴가 사용 풍토조성, 여성노동자의 저임금 개선 위한 하후상박 임금제도 도입과 삼성제약노조의 수유시간 확보 투쟁이 그 예이다. 그러나 조직적인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이 해고, 블랙리스트, 결혼 등으로 생산현장을 떠났으며, 소수의 여성지도자들이 현장 밖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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