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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정치과정] The Paradox of Civil Society

by 淸風明月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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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radox of Civil Society

Michael W. Foley & Bob Edwards , 1996, "The Paradox of Civil Society", Journal of Democracy, 7(3), pp. 38-52

 

1. 서론

 

마이클 왈쩌가 부르는 시민사회 논쟁은 논쟁들이 일치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복잡한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수용되고 있는 시민사회의 의미는 응축된 시민연대의 네트워크로 표현되며, 이는 공적 주장을 대표해서 시민을 동원하는 연대의 능력과 시민들의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에 대한 연대의 효과를 통해 민주정체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증진시킨다고 볼 수 있다.

 

시민사회 논쟁은 무엇을 시민사회의 주체로 볼 것인가?, 시민이 정치적이 될 때는 언제인가? 등 다양한 질문들을 야기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면서 다양한 시민사회의 개념을 정교화 시키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시민사회 논쟁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가 촉매작용을 했다. 그의 접근은 민주정체에 있는 시민들의 활동들 속에서 시민성의 형태가 양육되는 연대의 습관과 연대적 삶의 능력에 대한 특수하게 강조한다. 이는 시민사회이라고 부른다. 둘째,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화 과정에 관한 최근 논문에서 증명되고 있고, 1980년대 폴란드 공산정권에 저항한 전략을 형성했다. 이는 시민사회라고 부른다. 우리가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논쟁은 전제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능력과 국가의 독립을 위한 행동영역으로 시민사회를 특수하게 강조한다.

 

시민사회과 시민사회사이에 분명히 모순이 있다. 전자는 민주정체를 위한 연대의 긍정적 효과를 상정하고 후자는 국가의 대응세력으로써 시민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 시민사회의 대응세력은 권위주의 정권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정권에 짐이 되지 않는가? 이 점에 관해 맨커 올슨의 견해에 따르면, ‘응축된 연대의 그물은 국가나 시장과 같은 유연하고 등가적인 기능을 가짐으로 위협에 견딜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논쟁을 칭찬한다.

 

시민사회의 최근 버전은 이러한 질문에 경험적으로 근거있는 대답을 한 로버트 푸트남의 논문이다. 그는 ‘Bowling alone’에서 북부 이탈리아 지방정부의 응축된 시민참여 네트워크의 우수한 효능감은 모든 종류의 시민연대에 의해 증진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네트워크가 공동체에 보다 응축될수록 시민들의 공동이익을 위한 협력의 가능성이 증가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푸트남의 주장은 자극적이고 경험적 증거는 신선하지만 미국의 시민사회의 건전성과 북부 이탈리아 지방정부의 설명은 민주화와 민주주의에 있어 시민사회의 역할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기 전에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 연구해야만 하는 중요한 질문을 답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이 말을 해석하자면 시민사회의 이론적 토대가 성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푸트남은 경험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세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미국의 시민사회와 북부 이탈리아 지방정부에 대한 푸트남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고 시민공동체의 측면을 증진시킨다는 측면에서 특히 사회적 운동이나 정당과 같은 정치적 연대의 새로운 조직들을 저평가했다.

둘째, ‘시민참여 네트워크에 관해 현실에 대해 미화하고 시민사회의 집단들 중에 첨예하게 갈등이 있다. 특수하게 정치적 해결의 부재 속에서 이러한 갈등들은 시민분열과 폭력으로 나타난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에 근거한 정치적 해결에 있어 첫 번째로 봐야 할 점은 정체에 대한 이해이다. 이러한 해결이 사회세력과 시민사회에 효과가 있다. 더불어 우리의 주장은 푸트남의 시민사회에 대한 정의의 문제가 되는 특성을 제시하고 더 나아가 시민사회의 본질에 대해 다룬다.

 

2. 시민사회는 무슨 일을 하는가?

 

폭 넓은 시민사회논쟁은 시민연대의 다양한 기능들에 기인한다. 푸트남의 주장은 비록 강력하지만 협소한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푸트남에게 주요한 시민연대의 가치는 효과적인 협력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자본의 본질적인 요소인 신뢰와 보편화 된 상호호혜의 규범들 속에 참여자들을 사회화 시키는 능력에 있다. 시민연대는 상호호혜는 학습되어지면서 시민참여의 네트워크를 공급하고, 신뢰는 야기되며, 커뮤니케이션과 집합행동의 형태는 용이하게 된다. 이러한 수평적 네트워크는 카톨릭 교회와 같은 전통적으로 위계적인 조직이나 수직적 수혜관계의 네트워크와는 반대된다.

 

푸트남에 의해 강조한 사회적 자본을 생산하는 2차 연대는 다소 의문시된다. 이러한 사회적 자본은 진정한 공공선일지 아닐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이용가능한지 여부, 그리고 사회적 자본에 기인한 효과를 생산할 능력을 지칭한다. 푸트남의 경고는 중요하다. ‘분산된 네트워크의 응집성은 민주정체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지 아닐지 모른다. 때때로 그들은 시민분쟁에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연대를 창출하는 네트워크는 폭 넓은 협력을 위해 사회적 균열을 넘어서야 한다.

 

폭 넓은 협력을 위한 진정한 정신을 양육하기 위해서 이러한 종류의 연대는 극화 또는 정치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경고는 오래된 다원주의적 분석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대들은 특수한 정치적 이슈나 사회이익을 강요함이 없이 시민참여와 정치적 참여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푸트남의 주장은 이탈리아 지역의 시민참여의 중심에 에밀리냐나 로마냐 지역에 위치했다는 그의 저서에 비추어 보면 매우 모호하다. 푸트남은 스포츠클럽, 성가대, 협력적이고 문화적인 연대는 두 개의 주요한 정당(공산당과 기독민주당)에 의해 조직화 되었다는 점을 주목하는데 실패했다. 현재적 의미의 토크빌이 이탈리아의 민주주의에 관한 글에서 자율적 집단을 찾는다면, 그는 호소력이 적을 것이다. 정당은 지역에 뿌리내린 조직과 관료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공간을 침범하는 것이다. 푸트남의 시민공동체는 정치화 된 시민사회와 공존한다면 정치적, 사회적 균열들을 뛰어넘는 포괄적인 연대를 위한 필요성에 대해 무엇을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들은 푸트남의 분석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유형에서 국가억압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의 능력을 강조한다. 그 논쟁의 가장 흔한 버전은 시민연대는 자율적인이라는 점이다. 그 논쟁은 학술적 논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나 동유럽에 있는 시민사회의 특성에 대한 정치적 논쟁에서 나타난다. 시민사회의 유형은 정치에 대해 반정치적(정권에 반대하는 경향)이지만, 시민사회과 같이 발전된 서구산업국에서는 무정치적(정치에 관심이 없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시민사회은 무정치적 시민사회의 정치적 이점을 강조하고 시민사회은 관습적인 정치적 연대의 외부에 사회행위자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3. 무시당하는 정치적 연대

 

푸트남은 정치적 연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데, 경험적 근거로 그는 북부 이탈리아를 주목한 변화에서 의미있는 행위자로서 정당을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정당이 북부와 남부 이탈리아의 이질적인 사회적 상황에 매우 다른 결과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관찰했던 의미있는 대응세력으로써 비영리조직과 미국의 사회적 운동을 거부한다. 사회적 운동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평가는 여성을 위한 국가조직(NOW)와 시에라 클럽과 같은 집단에 회원들이 그의 주장에 내포된 구체적인 의미 속에 시민참여의 희박한 증거와 재정적 지원의 문제들을 이유들을 토대로 한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운동에 대한 푸트남의 조사는 많은 국내 조직의 다양한 측면들을 간과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폭 넓은 사회운동조직들의 기본토대는 국내적으로 작동된다. 푸트남은 이러한 사회운동조직의 회원들이 고도로 전문화 된 사회적 집단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시에라 클럽은 국가차원이나 지방차원에서 공동체 서비스계획을 후원하는데, 이는 푸트남의 시민공동체의 정신과 유사한 보이스카우트에 의해 후원을 받는 것과 넓은 의미에서 유사하다.

 

더 나아가 국내언론 프로필에 등재된 거대 조직은 현재의 사회운동의 폭 넓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기본조직들은 워싱턴에 토대를 둔 조직들보다 국내적으로 다수의 사회운동을 형성하고 지방공동체들의 시민네트워크와 공동체의 삶에 보다 많이 참여한다. 예를 들면 최근에 645개 조직의 국내환경조직들이 있는데, 그 중 유해폐기물을 위한 시민의 집진장치는 전국적으로 7,000-9,000개의 조직과 연계되어 있다. 평화운동의 인명도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1987년에 출판된 기초적인 평화운동조직의 목록은 7,700개의 조직들이 평화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그 중 300개만이 국내에 있고, 워싱턴에 있는 숫자는 불과 절반에 불과하다. 공동체를 토대로 한 운동조직 중에서 사회적 연대와 신뢰는 거대하게 연계된 회원조직과 똑같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관찰들은 1830년대 미국의 민주주의를 거대하게 자유로운 학교로 지칭했던 정치적 연대를 표현한 토크빌에게도 놀라운 것이 아니다. 토크빌은 정치적 연대를 어떤 정권에게도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토크빌의 단서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당 또는 왕국의 전제주의를 막을 수 있는 자유를 토대로 한 자유로운 정치적 연대를 보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정치적 연대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시민연대의 모체로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연대가 금지된 곳에 시민연대는 항상 부족하고 연약하며, 조악하게 관리될 것이고 그들의 활용에 실패하거나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토크빌은 주장한다.

 

이론적으로 푸트남은 토크빌이 야기한 영감과 유사하한 관심에 기인한 정치적 연대와 사회운동을 가져왔지만 시민사회의 지지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답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조직화 된 집단은 효과적인 민주정체에 긍정적으로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옳기 인식되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다원주의뿐 아니라 토크빌의 두려움을 반향한다.

 

푸트남의 이론은 두 가지 점에서 방어하고 있다. 첫째, 그는 시민공동체의 그림에서 특수한 정치적 연대와 사회운동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 둘째, 시민사회 그 자체를 묘사하면서 그는 사회적 균열들에 대해 초월할 수 있는 폭 넓고 수평적으로 구성된 조직능력을 채택하고 가장 일반적으로 기인하는 시민사회에 효과를 성취할 것 같다. 다원주의적 논쟁에 따르면, 만약 시민들이 현저한 사회적 균열들을 쫒기보다는 그것을 초월하는 조직들의 다양성에 속한다면 그러한 연대들은 균열이 약화될 것이고 그 까닭에 사회를 잘 관리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사회가 약하면 약할수록 국가는 강해진다는 주장과 동일하다. 이것은 명확하게 푸트남의 주장은 아니다.

 

4. 정치적 변수

 

시민사회논쟁의 지지자들은 두 가지 방법을 가질 수 없다. 만약 시민사회가 강하다면 현저한 사회적 균열들 또는 미미한 개인적 선호에 기인하는 시민이익들의 방어에 강할 수밖에 없다. 이미 보았듯이, 폭 넓은 시민사회 논쟁 안에서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계에 비중을 두거나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처럼 두 가지 경우에서 비록 그러한 자율성은 반대적 이유들을 위한 중요하다고 말할지라도 강한 시민섹터의 지지자들은 정파적 또는 선거적 정치에 기인하는 자율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논쟁은 국가에 대응세력으로서 시민사회에 초점을 맞춘다. 민주주의 전환에 상황에서 특히 기존의 정당은 전제주의 국가의 도구로 활용되었거나 억압받았으며, 약해졌다. 전통적 정치로부터 자율성은 반대되는 주장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러한 문맥에서 시민사회는 사회세력의 자율적인 영역으로서 처리되었고 시민들은 아래로부터 민주화와 독재로부터 그들 자신을 보호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전제주의를 압박한다.

 

만약 시민사회가 독재정권을 왜곡하는데 활용될 충분한 염려가 있다면, 독재정권이 민주정부를 결정하는데 활용되는 것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 시민연대가 강할수록 그들은 특수한 욕구, 열망, 그리고 공공선의 개념들에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들을 관리할 것이다. 기득권은 사회적 자원들을 막을 것이고 못 가진 자들의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을 가로막을 것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시민사회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적 강점 또는 정치적 실패에 기여하는 사회의 조직화 된 요소들은 무엇인지에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분석가들과 같이 푸트남은 어떤 환경에서도 통용되는 시민사회이론에 대한 일반화를 만들기 원했다. 이탈리아와 미국의 분석에서 푸트남은 시민사회논쟁은 국가의 능력을 상쇄시키는 것이 아닌 오히려 관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민사회의 논쟁과 일관되게 푸트남은 민주국가에서 전개되는 시민연대에 시민참여는 문화적, 조직적 이익에 관한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함축된 것은 만약 그러한 연대들이 분열적인 정치적 연대의 형태와 가깝다면 그들은 첨예한 사회적 균열들과 실제적으로 효과적인 관리를 위한 능력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시민들의 중심 사명감으로서 정책변화를 추구하거나 갈등을 촉발시키는 원인들을 이론적으로 검증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함으로써 푸트남은 두 가지 측면을 원했다. 그는 분명히 활발하고 참여하는 시민을 원했고 시민연대들에 의해 수행되는 사회화는 참여시민을 창출하는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러한 연대들은 장기적인 사회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갈등을 분할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점에 있어서는 다소 소극적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의 목적은 시민사회논쟁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흔히 제시되고 있는 시민사회논쟁은 부분적이고 심각하게 오도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시민사회가 제공하는 정치적 평화를 상정한다. 전제국가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의 능력이 강조된 곳에 민주국가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의 능력은 무시되거나 저평가되어 있다. ‘마음의 습관이 협력과 집합행동으로 전도된다는 것을 강조할 때, 푸트남의 주장은 거시정치적결과들 속에 미시사회적효과들을 이전하는 메커니즘은 너무 지엽적이고 모순적이거나 둘 다 일 것이다.

 

두 가지 사례에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변수이다. 미시적으로 보면, 정치적 변수는 평화롭고 다소 질서정연한 방법으로 경쟁하는 이익들을 푸는데 필요한 정치적 타협, 억제, 그리고 수용의 일과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치적 연대를 포함시켜야 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변수는 게임의 룰과 수용된 결과들을 관리하는 정치적 해결을 포함시켜야 한다. 최근 역사에서 엄청난 사례들은 그러한 해결들이 정당이나 최적의 재정적 조건, 그리고 잘 조직화 된 시민사회의 요소들로부터 나왔다.

 

시민사회의 역할은 모호하다. 사회운동은 시민의 책임성에 대해 너무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거나 기존조직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회적 책임성으로부터 후퇴했다. 그들의 노력은 무반응적인 정치체계 또는 억압적인 국가의 측면에서 좌절로서 폭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그들의 회원들 사이에 협력과 시민행동의 습관과 신뢰를 형성한다. 정치체계는 최소로 반응적인 곳일지라도 그들은 시민들을 동원하고 논쟁을 자극함으로써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중요성을 고조시킨다. 짧게 말해 결정적으로 정치적 연대는 시민사회논쟁에서 시민연대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그들에게 보다 나은 상황을 만든다.

 

the_paradox_of_civil_society.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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