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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바라 시세이4

Kuwabara Shisei (구와바라 시세이) 구와바라 시세이는 일본 시마네(島根) 현 츠와노(津和野) 출생으로, 도쿄농업대학과 도쿄사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수은 중독에 의한 공해병인 ‘미나마타 병’을 주제로 한 첫번째 작업이 일본사진비평가협회가 주는 신인상을 수상(1962)하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사진계에 입문하였다. 1964년부터 두 번째 작업으로 한국을 취재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40여 년간 한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면서 10만여 컷의 방대한 작업량을 축적하였다. 그가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사건 전면에서 벗어나지만 현실의 핵심을 찌르는 영상미학과 표현 스타일’을 시종일관 견지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는 사진의 본질은 ‘기록성’이라는 신념을 평생 구현해 온 ‘보도사진가’로서 예.. 2024. 2. 28.
침묵시위하는 대학생 - Kuwabara Shisei 1965년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전국이 불안한 정세에 놓여 있었다. 일제로 부터 독립된지 20년 한국전쟁 휴전으로 부터 12년째의일이다. 수도 서울과 지방의 대학에서 한일 국교 수복의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학생 데모로 혼란했고, 그것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을 와해시킨 4.19혁명에 이은 민중의 봉기라고 할 수 있는 격동의 시기였다. 한일국교 수복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도 과거 36년간에 걸친 일본에 의한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상기시키고 민중의이념과 일본에 대한 불신감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혹한 역사를 경험해야 했던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일본과의 국교 수복은 너무 빨랐고, 그만큼 충격도 컸다. 보슬비 내리는 서울거리를 학생들이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그 4개월 후인 12월 .. 2022. 6. 7.
미군문화 - Kuwabara Shisei 인권의 그늘 기지촌여성들 사전에는 기지촌을 ‘외국군 기지주변에서 외국 군인들을 상대로 상업행위를 하며 사는 사람들의 동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지촌은, 한국의 땅이면서도 한미 두 정부에 의해 운영, 통제되는 ‘공창’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미군들은 ‘성적 서비스의 제공’, 즉 성매매가 자신들의 재충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한국정부는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포주들의 불법행위를 묵인해왔을 뿐 아니라, 기지촌 여성에 대한 정기 성병검진과 치료를 통해 미군들의 ‘안전한 성매매’를 적극 보장해왔다. 현재 기지촌 여성들에는 대체로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자란 농촌 출신의 저소득, 저학력 여성들이 많은 수를 차지한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외국인 여성들.. 2011. 10. 20.
파월장병 환송식 - Kuwabara Shisei 파월장병 환송식 사진 : 구와바라 시세이(日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베트남 전쟁은 대한민국 군대가 외국에서 싸운 첫 전쟁이었다. 1965년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견을 시작으로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해병 1개 여단(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 국군 4만8000여 명이 연합군과 함께 베트남의 공산화를 저지했다. 파병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1963년 수출액은 8680만 달러, 국민 1인당 GNP는 100달러에 불과했다. 미국으로부터 연간 5억 달러의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받았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 파병으로 5400여 명의 인명 손실과 비동맹국가와의 외교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심화시켜 한반도의 안보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 베트남 .. 2011.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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