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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비교정치] 비교정치학의 역사와 미국의 비교정치학

by 淸風明月 202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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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정치학의 역사와 미국의 비교정치학 (비교정치노트정리)

<비교정치학의 역사>

 

고대

 

성경에서의 비교 정치학

성경은 아마 제일 오랜 된 비교 정치학의 문헌일 것이다. 특히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들(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가나안 등등) 과 비교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神民과 이방인들과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대의 정치형태는 왕정이었으나 삶뿐 아니라 가정과 정치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했다. 이 세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비교는 종교적인 목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스파르타의 Lycurgus

Plutarch 'Lives of the noble Grecians and Romans' 에 따르면 당시 스파르타의 영웅이었던 Lycurgus는 그리스와 지중해 동쪽을 넓게 여행하였다 한다. 그리고 강대국 뿐 아니라 약소국의 여러 정치형태(various political regimes)을 연구했다. 이런 점에서 그를 비교정치학을 연구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Lycurgus는 단지 학자는 아니었으며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적 의미에 가까운 정치과학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들의 저서 [공화정] [정치학]은 권력과 리더십의 본질, 정부의 다양한 유형들, 정치학의 사회적 기반들, 공공 정책 등 정치학의 모든 핵심 요소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A는 당대 각국의 헌법들을 150개 유형 이상을 수집하였고, 각각의 헌법 하에서 조직된 사회의 경제, 사회적, 문화적 토대를 연구했다. 그는 어떠한 유형의 정부가 더욱 안정적인가를 조사하기 위해서 불안정성의 원인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에 알려진 각국의 정치제도를 분류하는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로마: 키케로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제국을 시작으로 제국의 체제로 대체되어 갔다. 비교의 사례는 점차 감소되어 갔고, 정치 분석의 요점은 분리된 정치체제 사이의 상호작용으로서가 아닌 제국 내의 범위로 좁혀졌다.

 

Cicero6부문 분류 구조를 기본적으로 취했지만, 그의 관심 영역은 로마 공화정에 대한 가능한 최고의 형태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비교 정치학 이론에 있어 그가 중요하게 기여한 점은 적어도 19세기까지 서구 정치철학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한 개념, 즉 정치 생활의 기초로서 자연법을 강조한 점에 있다.

Regime rule by the one is called Monarchy - Tyranny

a Few Aristocracy - Oligarchy

Many persons Polity - Democracy(mob rule)

 

중세: 기독교

기독교의 발흥으로 인해 정신적인 삶을 크게 강조되는 반면, 세속적이거나 정치적인 문제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중세 기독교의 대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등은 다양한 정체를 연구하고 비교하는 것이 아닌, 기독교 왕국을 설립하는데 주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 조직의 유일한 형태로서 기독교적 연방(Christian Commonwealth)의 개념을 내세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주제에 관한 저서들은 카톨릭 학자 뿐 아니라 기독교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의 개념은 범 기독교 사회 운동의 진보에는 영향을 주었지만, 개념을 비교정치학의 가치중립적 연구에 있어 그다지 흥미 있는 요소로 작용하지 못했다.

 

현 대

콜럼버스의 신 대룩 발견으로 인해 비교 인류학 분야가 매우 크게 자극을 받았고, 신세계를 탐험함으로써 인류학 연구가 수행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비교정치학은 유럽의 도시국가의 성립과 16세기 종교개혁에 의해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이후 이탈리아, 독일 스웨덴이 독특한 문화와 정치적 형태를 갖춘 분리된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독립된 정치적, 문화적, 제도적 장치를 가진 도시국가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자연적으로 이러한 발전은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 북유럽과 남유럽 사이,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 스페인과 이탈리아 사이 등의 비교 분석을 가져왔다.

 

특히 르네상스와 갈릴리오, 뉴턴으로 시작된 과학 혁명 기간동안 정치 분석은 종교적 관념과 제한으로부터 과학적이고 세속적인 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6세기 초 마키아벨리는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학자로 여겨지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근본 목적은 그의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과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찾는데 있었다. 그는 권력을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가정으로서가 아니라 냉정하고, 침착하며 그리고 계량적 태도를 가지고 분석했다. 그는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휘두르고, 유지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국가 통합을 이룬 성공적인 군주 또한 예리하게 분석했다.

 

토마스 홉스는 17세기의 영국의 정치 철학자이다. 그는 최선의 정치 형태를 질서와 권위와 동떨어진 것으로 보지 않았기에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정부상태는 진보와 문명의 가장 큰 적으로 보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무척 혼란스럽다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강력한 국가만이 무정부상태를 방어할 수 있으며, 인간의 방종한(규칙에 따르지 않는)본성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보편적인 적용가능성을 가지는 정체의 모델을 가정, 제시하였다. 홉스의 방법론은 정치행동의 좀더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구조에서보다는 단일한 사례의 논리적인 분석을 추론하려 했다

 

홉스와 달리 몽테스키외(18세기)는 보편적 유용성을 상정했다. 그는 법의 정신에서 국가의 문화와 정신을 밝힘으로써, 연구 중심을 헌법 절차로 이동시켰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미국 제도에 영향을 준 권력분리에 대한 모델이었다. 또한 기후가 정치적 결과물과 연계성은 가진다는 연구를 시도했다.

 

홉스와 대조적으로 루소는 인간은 선한 존재로 태어난다고 믿었고,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여러 양상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루소에 따르면 사적 재산(소유)은 사람을 탐욕스럽도록 가르치는 제도중의 하나이므로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의 정체는 권력이란 일반 의지를 터득한 소구 엘리트에게 집중되어야 하고, 그들이 대중들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19세기)는 루소와 같이 사적 소유를 악으로 간주했고, 사회 발전의 과학 법칙을 발견했다. 마르크스의 논리 구조는 역사란 경제적 지배력, 계급 구조 그리고 생산과 분배의 수단을 지배하는 자들에 의해 운용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치의 상부 구조를 결정짓는 것은 경제적 하부구조이며, 정치는 종속변수로서 기능 하는 반면, 경제는 독립변수임을 역설했다.

 

베버는 정치와 경제 분야에 대한 문화와 종교적 요소의 영향력에 연구의 초점을 두었으나, 또 한편으로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무한한 추진력을 인정했다. 그 또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출발하였지만 경제력보다는 정치와 관료적인 요소를 강조했다.

 

공공 정책의 기준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강조한 영국의 실용주의자들은 정치학의 접근에 있어 철저하게 가치성을 포함시켰다. 그들은 정치제도에 내포된 어떠한 것의 유용성은 사람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제공해 주는 능력에 의해 판단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이런 목적을 획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서 민주주의와 대의제도를 상정했다. 이러한 경향은 토크빌()과 브라이스()로 하여금 미국 제도를 연구, 분석하도록 유도했으며, 비교 정치의 관점을 분석할 때 미국의 정치제도가 유용한 틀로서 충분히 기능하게 작용되었다.

 

미국 대학에서의 비교정치학

 

World War 2는 비교정치학에 중요한 영향을 가져왔다. 나치 독일과 파시즘 이탈리아에서 실행되어진 전체주의 현상이 소개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스탈린의 소련 연방을 포함시켜 분석한 결과, 전체주의 현상에서 우익과 좌익의 정체를 포함시키게 되었다.

 

여타 국가에 대한 지식과 흥미를 상당 수준까지 확대시켰다. 어떤 비교 정치과정은 이제 중국과 일본, 라틴아메리카,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영연방에 관해 처음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미국은 파시즘으로부터 유럽 인의 피난처로 이끌려졌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미국 대학에서 탁월한 지위를 획득했다.

 

<2차대전이후의 시기에 비교정치학에 몇몇 중요한 발전이 목격되었다.>

 

첫째, 취급되어지는 국가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둘째,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접근과는 사뭇 다른 정치 행동 연구와 이익 집단의 소비 혹은 정책 결정, 그리고 좀더 활발한 조사 작업과 방법론의 이용과 같은 비공식적 정치과정에 관한 미국정치학의 변화 움직임이 엿보였다.

셋째, 나치의 경험과 주요 요점으로 남겨진 전체주의 현상뿐만 아니라 새로이 냉전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필 요성이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넷째, 미국으로 몰려가게 만든 새로운 유럽인 이주자의 대다수는 유럽의 정치 체계들과 유럽적 분석 방법에 대해 고도의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비교정치학은 새로운 발전국면을 가지게 되었다. 전 쟁과 나치정권의 잔인성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남겼다. 전후 1세대의 주도적인 비교 학자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와 유사한 유형들이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방지하려는 그 들의 노력에 깊은 도덕적, 정신적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제2

 

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비교정치론은 서로 다른 정치 체계에 대한 냉정한 분석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 3아니라, 한편으로는 나치시대의 공포에 의해 조성된 심오한 도덕적, 정신적인 판단도 정당하게 고취하게끔 유도했다.

 

<참고 문헌>

Wiarda Introduction ch.2 "The History of Comparative Politics" pp.29-44

 

 

정치 발전 이론

 

정치 발전론은 형식적이고 합법적인 접근, 구성이나 조직이 강조되고 체계적인 절차가 다루어지는 학문이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나, 이후에는 비형식적인 과정들, 예를 들자면 공공 의견, 이익집단, 결정 과정 등등을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정치 발전 이론의 기원

 

적어도 6가지 정도의 주요한 영향이 정치 발전론의 새로운 경향을 설명해 줄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로 우선 정치 과학에 있어서, 정치 행태에 대해 좀더 일반적이고 더 비형식적인 정치면- 이익집단의 활동, 결정 과정, 정치 사회화 등-등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개발도상국과 같은 경우에는 정형화되어 있는 기존의 정치 발전 이론의 틀이 더 이상 맞지 않았으며 법과 제도 등의 미약함이 드러나 부분적으로 적절한 이론을 찾아가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관심의 두 번째 이유로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다수의 새로운 민족이 세계무대로 급부상한 데에 있다. 예를 들면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세계 제 1, 2차 대전 이후 독립했으며 중국의 혁명 등을 통해서 더 이상 기존의 몇몇 주요한 나라들에만 중심을 맞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신생 독립국- 개발도상국들에게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 학술적으로 혼합된 모습을 나타내는 사회 과학의 영향이 있다. 이 다음으로는 미국 정책의 변화를 중요하게 꼽을 수 있는데, 세계 대전 이후 중국 공산 혁명과 한국 전쟁, 동유럽의 공산화 등은 미국에게 상당히 큰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고, 1952년 초반, 미국 정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극복, 연구하기 위해 비교 정치 이론의 학생들과 경제학자들과의 활발한 접촉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연구된 것이 바로 정치 발전 이론이며 마지막 이유는 순수하게 개발도상국 그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찾을 수 있는데, 50~60 종류에 이르는 새로운 민족 및 국가는 이전에는 전혀 연구 대상이 되지 않던 미지의 분야였기에 학자들에게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부분이었다.

 

초기 정치 발전 이론

- 경제학자: 초기에 발전론은 주로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쓰여 졌다. 이러한 초기 연구는 미국과 유럽을 모델 로 하고 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주로 경제 발전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다루 고 있다. 학자들은 미국과 유럽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유형을 연구했고 이를 토대로 개발도상국들 에게 발전 모델을 제시했다. 그렇게 미국과 유럽의 과정을 모방하면 언젠가 그 발전 대열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제 3세계 개발도상국 - 신생 독립국 - 들은 이 불가피하게 따라갈 수밖에 없는 다원론, 현대화, 민주주의화 등의 과정에 많이 어긋나기 시작 했다.

 

- 사회학자: 다음으로 발전론에 입문한 쪽은 사회학자였는데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로는 정치학자 이기도 했던 Karl Deutsch가 있다. 그는 한번도 개발도상국에서 지내보지 않았으면서도 현대적 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잘 구분해 광범위한 다양성을 찾아냈다. 그는 이것을 "pattern variables" 라고 불렀으며 전통적인 것은 이름, 종족, 가족 등에 치중하는 반면 현대적인 것은 우주적인 가 치, 이득 등에 중점을 둔다고 설명했다. 이는 어떤 면으로는 유용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상당 히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경제 발전과도 연관이 깊다. 퍽 오랜 시간, 심지어 현재까지도 경제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Rostow라 는 학자는 여러 경제 성장 단계의 층을 분석하여 제시했다.

 

- 정치학자: 이 부분에서는 개발도상국의 정치라는 책을 1960년대에 써낸 Almond라는 학자와 Coleman이라 는 학자가 대표주자로 꼽힐 수 있다. 초창기에는 Almond에 대한 회의론도 일었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이해할만한 수단을 제시했고 모든 정치 모습에 적용 가능한 외부 기준선을 제시했다. 그의 접근법에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과학적이었다는 점이며 발전론에 쓰일 수 있을 분 아니라 한 나라의 발전 중 어떤 부분이 빠져있는 지를 연구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의 이론은 도덕적으로 옳았으며 낙관적이었고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외교정책을 폄에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발전 이론의 확산

 

1960년대에 비교 정치 발전 이론은 매우 널리 퍼졌다. 발전학자들의 접근 방법은 비교 정치 분야에 치중되었고 사회 과학 조사 단체의 비교정치 위원회는 Almond의 지도 아래 이끌어졌다. 장치발전 이론 학자들은 곧 이 단체의 협조아래 퍼져나갔고 많은 수의 다른 학자들이 근대화와 다른 발전의 면을 다룬 연구에 관해 연구했다. 발전은 이내 한 가지 학술적 접근에서 벗어나 개도국을 위한 미국의 보조 프로그램 아래 시행되었고 1960년대 초에 미국의 외교 정책의 일부분이 되었다. "만약 충분한 경제 지원을 보조적으로 한다면 중간 계층을 생성시킬 수 있을 것이며 민주 사회가 곧 도래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이 자연스레 나타날 것이다"라는 가정이 적용되었다. 모든 면이 혼합되어 있긴 했어도 경제 발전만이 개도국의 발전을 이끄는 최상의 길로 여겨졌으며 사업 등에 관련된 중요한 학술적 방법들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발전 이론에 대한 비판

 

- Almond의 이론은 훌륭했지만 지나치게 논리적인 이론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신진 학자들이 체험적으로 연 구 관찰하기엔 부적절했다. 실제로 "이익 단체""법의 판결" 보다는 종족, 씨족 등의 정책이 통하는 경우 가 효율적인 경우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이론은 너무나 추상적이었고 역기능적이었으며 개발도상국들이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설명하는 데에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었다.

- 두 번째로는 1960년대 중반에 있었던 베트남 전쟁의 영향력이다. 미국은 그들이 연구, 제시했던 여러 가지 정책들을 적용해보았으나 부적절했다.

- 1968Samuel P. Huntington"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을 보면 경제 성장, 근대화, 정 치 발전 등이 언급되어 있다. 그는 안정성과 민주주의로 이끄는 것보다 차라리 빠른 경제 성장과 social mobilization이 전통적인 타락 방식(사람들이 혼란과 붕괴를 만들어내는 )으로 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 여주었다.

- 젊은 신진 학자들이 1960년대 해외로 나가 정치 발전론을 공부함에 있어서 편견과 자민족 중심주의를 갖게 하는 기능을 다분히 갖고 있었다.

- 20세기 후반, 개발을 위한 국제적인 정황이 19세기, 대부분 유럽이 상승하던 시기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 에 대해 논란이 있다.

- 시기와 전후관련 상황, 서양이 훈련의 대상이 되었던 개발 모습은 현재 개발도상국 민족들에게는 재현될 수 없다.

- 발전론 학자들의, 가족이나 종교, 씨족, 관습 등의 전통적인 제도의 역할을 따르는 접근은 잘못 되풀이되고 있는 사례이다.

- 초기에 서구에서 적용되었던 발전론은 현재의 개발도상국에는 생소한 강한 사상과 편견으로 차 있으며 학 자들에게 비실제적이고 성취 불가능한 목표를 제공하고 있다.

- 각국의 문화는 다른 색과 다른 양식을 갖고 있으며 본래 다양하고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기존의 정치적인 잣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정치 발전론은 때로 상당히 부주의하며 개발도상국의 민족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안길 수 있다.

- 근본적인 비판은 발전 접근법이 모두 냉전의 일부였던 미국의 지배 하에 제 3세계들을 놓고 있는 데에 있 다. 3세계, 신생 독립국이며 대부분 개발도상국에 있는 그들의 문제는 독립적인 연구를 통해 다양성을 연구해야 함이 정식이지만 정치 발전론은 이전의 미, 소 양식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전 이론 접근의 재평가

 

발전 이론은 그 접근 구조 속에서 변화와 탈식민지 구조, 역동적인 요소들의 강조와 성실한 비교 등 제 3세계의 변화의 지식을 제공했다.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수많은 비판과 헛점을 갖고 있지만 제 3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치발전론에 대한 도전과 대안; 종속이론, 조합주의, 관료적 권위주의

 

- 종속이론 -

 

발전 이론은 배트남 전쟁과 학생 저항 운동, 그리고 좀 더 근본적인 비교 정치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나타날 때까지인 1960년까지 인기가 있었다. 비판적인 이러한 접근들은 새로운 이론이 출현하기 시작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등장했다. 발전 이론적 접근은 RostowAlmond 등의 다른 학자들이 개발도상국들에서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가에 대해 연구에 실패했던 일반적인 접근들과 학식들을 출판해 놓은 자료나 기존의 학위 논문들을 젊은 학자들이 재연구하고 비판하면서 그 한계를 서서히 드러냈다. 이러한 불만들은 시대적인 불만 요소인 베트남 전쟁이나 Martin Luther King, Robert Kennedy 등의 assassination,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냉전 체제 등과 합해졌다. 1970년 단순한 접근대신 각각의 분야별 이론과 학생들과 이론과 주격인 대변인들을 포함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종속이론

종속 이론은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났으며 특별히 정치계의 좌익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이 이론은 두 가지 주요한 원천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Marxism이며 이것은 꽤 긴 시간동안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해왔지만 도미니크 공화국의 미군 간섭이나 베트남 전쟁 그리고 1969-1970에 이르는 학생 운동 등의 영향으로 조금씩 인기를 얻게 되었다. 다른 영향력은 개발도상국의 정치에는 관심이 있지만 선진국 이론의 해석에 별로 찬성하지 않는 비-레닌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들 수 있다. 발전 이론은 국제적 요소나 개발도상국의 자본주의로의 과정에서의 국제 시장의 역할 등은 연구하지 않고 계급투쟁이나 exploitation 등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종속적 요소들 - 어떤 나라의 발전을 다른 것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요소들 - 에 주목해야한다는 의견에 찬성의 목소리가 높고 나라의 혹은 몇몇 국가의 집합체들의 산업화된 국가로의 종속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산업화된 나라나 개발도상국들이 발전이론대로 순탄하게 나가는 것 대신에 종속 이론은 제 3세계에서의 발전은 이미 앞서 개발된 민족에게 의존된다는 이론을 갖고 있다. 이 종속 관계는 복잡한데, 외국의 문제나 정부의 활동을 포함하고 있는 게 아니라 local actor나 기관에 연관되어 있다. 이 종속 이론의 공헌과 한계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공헌은

1. 이 이론은 발전 이론이 하지 못했던 방면의 국제적인 요소들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며,

2. 국제 시장이나 개발국들이 종종 거의 다루지 못하는 금융 trends를 강조한다.

3. 그것은 multinational 협력과 때로 개발 국가 국민들의 internal affairs로 고려되는 다른 transnational 요 소들을 언급하며

4. 미국의 간섭, 자본주의의 역할, 초기의 발전 이론이 거의 다루지 못했던 국제적 요소들을 다룬다.

 

다음으로 한계점은

1. 첫째로 종속 이론은 발전이 개발도상국을 어깨 아래로 내려놓고 산업화된 민족들의 그것에 직각으로 배치 했다는 점이다. 물론 과장된 말이지만 종속이론의 인기가 특별히 개발도상국에서 있음을 설명해주는 요소이 다.

2. 특별히 미국과 다른 나라의 부조리를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3. 종속 이론의 접근은 미국에 의존하는 국가들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지만 초기 소련연방의 의존도를 무시하 고 있다.

4. 다른 요소들과 관련하여 종속이론은 일반적으로 급진파, 좌파의 성향을 띈다.

 

Corporatism (조합주의)

 

여기에서 Corporatism이 주식회사나 산업 기반의 의미로서의 법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조합주의적 접근은 (corporatist approach) 발전이론과 유사한 unhappiness를 가지고 등장했는데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종속 이론이 등장할 때와 같은 시기였다. 그것은 또한 선진국들의 발전이론이 잘못된 주제나 불완전한 분석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접근법은 용어의 사용에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Corporatism은 종종 중립적으로 사회 과학 용어로 쓰이면서 그 영향력을 제한하는 facism이라는 단어와 감정적으로 연합하기도 한다.

 

Corporatism라는 단어는, 주요한 사회단체가 국가 조직을 완전하게 하는 국가의 사회정치적 기반의 구조로 정의될 수 있다.

 

정부와 사회적 혹은 이익 집단을 완전하게 하는 Corporative한 조직은 나란히 혹은 수직적으로 존재하며 중요한 선거 조직, 정치 정당, 의회 그리고 좀더 친숙한 다른 자유로운 다수 개인들의 기관으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이익집단 이론과 다른 접근법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흥미있는 정치 활동들의 다양성을 측정하는 유용한 방법을 제시한다.

 

초창기에는 두 가지 Corporatism의 접근법이 있었는데

1. 한 가지는 Corporatism이 신 봉건적인 사회에서 출현했다는 점이었다. ;초기의 역사적인 Corporatism으로 부터의 줄기와 같고 종종 역사적이고 산업화되고 현대화된 세계의 새로운 현실로 다루어지도록 승급된 Aristotelian-Thomistic 통합의 정치적 세계관의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2. 두 번째 시각은 Corporatism을 일번적인 정치 조직의 모델로 보는 것인데 다른 특정한 문화적 정치적 이 데올로기적 연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시각에서는 Corporatism은 유럽과 일본과 미국 혹은 다른 지역 에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선진의 문화나 역사에 상관없이 국가의 정책의 길과 자본과 노동을 완전하게 정책 결정으로 만드는 하는 행위이다.

 

Corporatist적 접근은 특별히 현대 노동관계나 이익집단과 국가의 관계 의회와의 관계 일상적인 기구, 근대 국가의 정책 결정, 사회 보안과 노동과 국가가 연관된 복지법 제정 그리고 정책 결정과 공공 정책 사이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데 유용하다.

 

정치 현상이나 다른 - 발전적 이론이나 자유주의나 등의- 접근법을 이해하는 유용한 접근방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한계가 분명하지만 실용적인 Corporatism의 접근법은 비교 정치에서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 BA(관료적 권위주의): 관료적 권위주의 혹은 일반적으로 부르는 BA정권은 1960년대 말의 발전주의의 각성 과 함께 발전하게 되었다. 발전주의를 돌이켜 봤을 때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이 앞서면 민주주의가 뒤따라 오게되어있는 상호관계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아프리카, 아시아,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군사적 권위주의가 주어진 후에 민주적인 통치가 행해졌다. BA정권의 접근은 왜 발전이 민주주의를 낳지 않고 붕괴와 권위주의를 야기 시켰는가에 대해 무엇이 잘못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1단계: 관료적 권위주의에 대한 이슈

이 용어는 군 독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더 이상 불만을 품은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르헨티나, 칠레와 같은 복잡한 국가에서의 통치는 그들 자신의 근대화 수준과 균형 잡힌 복합성 수준에서의 분석이 필요하다.

 

2단계: Guillermo O'Donnell의 라틴아메리카의 종속적 위치

경제성장이 감소함으로서 툭히 낮은 계층의 불만족이 증가한다. 군을 포함한 지도적인 엘리트들은 명확한 선택권 (임금삭감이나 긴축정책)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낮은 계층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권력 안에서 억압적인 군부 통치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시민엘리트들과 군의 동맹은 낮은 계층을 통치하기 위해 관료적 권위주의라는 합치된 힘 안에서 가능하다.

 

3단계: O'Donnell'수입대체품'에 나타난 BA주장

역사적으로 외국에서 수입되는 그러한 대체제로서 지역상품을 생산하는 형태인 라틴 아메리카의 산업화는 포화상태가 되고 계속되어 질 수 없다. 어떤 경우든지 수입대체의 위기는 경제성장을 늦추게 하고 불만적과 군사정권장악을 일으킨다. O'Donnell은 그 지역에서 수입대체의 똑같은 위기를 권위주의로부터의 전환과 민주주의 방향으로 가는 이유로 사용하고 있다.

 

수입대체의 위기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끌 수는 없고 이 지역적 결정을 포함한

 

O'Donnell의 분석은 정치에 따른 것이지만, 압도적인 비판은 그의 주장이 명백하지 않은가를 제시했다.

 

대부분 학자들의 평가는 관료적 권위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다고 인정 1960년 대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경제적위기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헤 군에 의존했던 엘리트와 중산층을 위협했다는 것으로 들 수 있다.

 

BA현상은 1960년대 엘리트 계층 위협과 사회정치적 위기를 받아들이고 있으나 경제적 결정주의자적인 요소는 부정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기록은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겪고, 역사적 이해를 보여준다.

 

정치발전론에 대한 도전과 대안;

 

정치적 경제학, 국가-사회 관계, 고유 이론들의 변화

 

* 정치적 경제학: 경제학은 오랜 시간 연구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키아벨리 같은 정치과학자들은 경 제적 요소에 주목하였고 아담스미스와 칼 맑스와 같은 경제학자도 정치적요소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렇듯 경제학의 길잡이는 경제와 정치의 상호작용을 제시함으로서 '학문의 분야'의 장애물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많은 영향들이 PE접근방법의 중요성을 증가시켰고 해석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발전주의가 감소하고 덜 중요시 되면서 정치 경제적 접근방법이 더 지배적이게 되었다.

워터게이트와 1960년대 말 학생들의 저항이 맑시즘의 영향을 증가시켰다.

PE의 증가원인은 세계문제에 국제적 경제문제를 중시하는 것이 증가함에 따라 실용주의가 되었기 때문이 다.

 

이제는 국가간의 관계가 군사적인 힘보다는 경제적인 힘이 우선시되고 있다. 이에 대한 예로서 노동조합의 정치적 규칙, 국제간의 빛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정치학자들도 그들을 위한 정치공부의 필요성을 발견. 그들이 원하는 것에 관련된 해답을 찾기 위해 따로 연구. 이에 부진함을 느낀 비교학자들이 다수의 경제학의 이슈를 해결하려는 비교정치학자들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발전과 경제적 발전이 관련되어 있음을 주장하였는데 경제발전을 이루면 정치발전으로 향상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학과 졍제학은 다른 면이 많았고 정치학은 이론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요소와 정치적 편견으로 경제학은 한동안 지지받지 못했다.

 

그러나 비교정치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복잡한 작업들은 경제학의 관점을 도구로 사용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경제학을 분석의 도구라기 보다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 국가-사회와의 관계: 연구방법으로서의 국가-사회간의 관계는 협동주의와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완 전한 연구방법은 아니지만 다른 연구방법들에 대한 보충물로서 의미되어진다. 국가-사 회간의 연구는 중앙제국가와 사회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이익집단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다룬다.

 

마르크스 이론 : 국가를 상부구조의 일부로 보고 이 구조가 계급제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봄

비마르크스 이론 : 국가를 이익집단의 논쟁을 심판하긴 하지만 중재인의 일종으로 보고 있음.

 

물론 비교 정치학의 많은 학자들이 국가나 정부를 독립 변수로써 믿어왔던 것은 주목되어져야 한다. 그들은 국가의 자율권과 정책 결정 과정에 있어서의 독립성에 대해 상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정치적 변수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경향을 지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은 국가 사회 연구론의 재생에 책임을 가려왔다.

 

라틴 아메리카 연구: 국가-사회의 연구를 힘과 통합. 종종 그 지역에서의 국가의 조직체 역할 강조

다른 개도국 : 국가-사회간의 관계의 초점이 개혁과 국가정책과 사회적 필요 또는 요구에 의해 현대사회에서 정책형성. 이러한 지역에서 국가-사회간의 초점은 종종 협동주의 연구방법과 겹쳐진다.

 

비교정치학에서 우리 중 대부분이 국가-사회간 연구론을 더 좋아한다. 그것은 너무 많거나 적은 것을 요구하지도 포함하지도 않고 동시에 사회, 경제적 요소 뿐 아니라 정치적 요소들을 강조한다. 그것은 협동주의, 종속이론, 발전이론으로서 다른 연구방법과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사회간의 연구는 대개 큰 과시 없는 분야에서 받아들여졌다.

 

<고유한 이론들의 변화>

 

발전주의는 1970년대에 제3세계 현대화에 대한 모델로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많은 여러 지역에서 맑시즘 - 레닌이즘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수많은 개발도상국들과 지역들은 그들 자신의 이론으로, 고유한 것으로, 이론들의 변화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지방, 국내 제도들의 기초가 되는 발전 모델을 원했다. 해외로부터 들어온 사상들이 수입된 제도들 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국가 (관계)상황에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고유한 것 위에서의 강조, 3세계 모델의 변화는 초기 모델의 강력한 비판에 수반하여 일어났다. 3세계는 주장한다. 발전주의와 맑시즘 - 레닌이즘이 유럽이나 미국의 사상이라고 한다. 그들은 크게 발전주의와 함께 유럽의 경험위에 기초하여서 다소 그들 자신의 나라에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주장했다. 그들의 문화, 역사 그리고 전통이 기본적으로 서구와 다르다고 했다. 그것은 시대와 국제 상황이 다르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 자신의 환경(상황)과 이하는 방식에 적합한 발전주의 틀이 필요했다. 이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것은 널리 널리 반영하였다. 3세계 환멸은 발전모델과 함께 경향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비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그들 자신의 지도 방향 안에서 노력은 시작하였다.

 

3세계의 노력은 그들 자신 방식을 찾고, 그들 자신의 문화나 문화들을 진실 되게 찾기 위해서 누가 공감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서구 방식의 희미한 모방들로써 계속해서 싸움하지 않는가?

 

그러한 공식화는 또한 의미했다. 추측하건대 우리는 이슬람의 발전 모델, 라틴아메리카 발전 모델,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발전 모델, 유교 발전 모델, 힌두 발전 모델, 그리고 많은 다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고유한 모델은 지방적 제도에 의지했다. 게다가 함축했다. 부족이나 민족연합들은 사회와 정치조직의 기초로서 몇몇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역할을 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조직(기관)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협조 조합 제도들로서 역할을 했다. (적어도 최근에 거기에서 민주주의 하는 데 개방되기 전에는)

 

이것은 무모한 일일뿐만 아니라, 그것은 잠재적으로 명백한 논쟁의 대상이다.

 

소위 비민족중심적인 발전의 이론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이 움직임(운동)을 부추기는 도움은 이 시대의 극적인 몇몇 사건들이었다. 1979년에 이란 혁명은 왕가가 붕괴하였고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이슬람의 기초자들이 힘을 가졌다. 종종 비탄에 잠기거나(슬퍼하거나) 심지어 서구에서 조롱하는 동안에 중동을 통해서 관념(개념)화가 일어났다. 관념화(개념)은 진짜로 전 지역에서 수용 가능한 이슬람 발전 모델이었을 것이다. 인도에서의 카스트 제도는 다시 생각되어지고 있다. 머지않아 전통적인 제도들은 발전주의 속에서 현대화 과정으로서는 멀리 쇠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대화의 기능들로써 정댱에 유사하게, 국가와 사회를 연결하는 것이다.

 

유사하게, 아프리카의 부족집단은 현대화의 충격 아래에서 확실히 사라지는 , 퇴보하는 제도로써 머지않아 검토되어졌다. 그러나 사회적 봉사(역할), 치안(경찰 보호) 그리고 공동체 의식을 수용하는 실행 가능한 기능들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1980년대 민주주의 쪽으로 다시 흔들리기 전에 조합(단체)과 조직에 바탕을 둔 역사적 제도들은 몇몇 지역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많은 일들은 까다롭게 변했다. 이란 혁명은 위험(불쾌)하고 야만적인(잔인한) 것으로 증명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이슬람 세계에서조차 기대되기보다는 덜 인기 있는 것이 되었다. 아프리카는 자기 민족중심주의를 시험하였다. 그리고 다른 고유한 모델들을 종종 권위주의 안에서 퇴보하였고 대기아를 낳는 것을 도왔다. 고유한 모델들은 엘리트 탄생 증명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지적인 것보다 이 지역들에서 일반대중과 함께 덜 인기 있었다. 라틴아메리카는 반영함에 있어서 조합주의나 조직주의 제도들 위에 기초하기를 원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대의제의(대리하는)국가 위에는 기초한다. 지금 고유한 모델들 효과는 잘 되어지거나 기대되어진다.

 

1980년대 동안 고유한 모델이나 발전 모델의 사상의 과정은 민주주의 승리에 의해서 더욱더 침식(침체)하였다.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합 안에서 맑시즘 - 레닌이즘의 쇠퇴와 풀어짐, 그리고 민주적인 사상의 세계적인 압도적인 승리, 3세계 관념(개념) 결과, 고유한 노선(), 민주주의와 맑시즘 - 레닌이즘은 또한 대혼란으로 들어갔다. 서구의 문화인 코카콜라, 블루진, 록뮤직, 소비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그것은 사실상 사람들을 납득시키는데 불가능하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실행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그들은 뭔가를 위해 시도한다. 아마도 일반대중이 아니고 지적인 엘리트들의 생산일 것이다. (이로움)과 실(해로움)을 위해서, 서구의 방식들과 일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다. 고유한 발전 모델의 개념은 희미해져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되었다.

 

여기 가장 좋은 무대에서 다양한 제3세계들은 서구사상의 공격 아래에서 그들의 역사적인 문화에 대한 뭔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희망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혼합하고 여과할 수 있다. 그리고 서구에서 가치 있는 것을 허용하는 것 안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 그들 자신의 방식들을 보전하는 동안 일본은 이 방식들을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발전하는 사회들의 가장 높은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 그것을 만드는 유일한 비서구 나라가 될 때 까지 이 방식들을 성취할 수 있다. 일본은 서구로부터 빌려왔고 채용하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본래대로의 문화의 많은 부분을 보전했다. 한 가지 두려움, 다른 두려움, 더욱 약해진 제3세계 문화들은 선택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서구의 힘, 문화, 일하는 방식들에 의해서 압도 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성공적으로 새로 유입된 방식들을 그들 자신의 전통적인 방식들과 함께 결합하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하나의 고유한 사상은 국내 노선() 또는 한나라, 각각의 주요 나라가 발전하는 데 대단히 문제가 되는 것으로 남았다.

 

<미래에 대한 암시>

 

발전론자 접근법의 비판과 계속하여 일어나는 쇠퇴, 1960년대 비교정치에서 우세한 접근법은 다른 다양한 접근법들이 일어남에 길을 열었다. 독립이론, 단체(조합주의), 관료주의적 권위주의, 정치적 경제, 국가 - 사회관계(상황), 그리고 발전론자 접근법에 대해 대안으로 삼거나 그것을 변경하는 것으로써 모든 변화에 고유한 이론들이 나타났다. 발전사상 처럼 그 새로운 접근법은 그들 대표자의 장(), 선구자(개척자), 집단들 또는 졸업생들로부터의 동창들 모임과 젊은이 재능(능력), 이론들, 그리고 경전 - 문학은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졌다. 모든 새로운 접근법들의 접근법은 비교정치 접근법으로써 논쟁되는 것으로 세워졌다. 또는 접근법들의 결합은 가장 좋은 것과 가장 유용한 것이었다.

 

우리는 각각의 접근법 안에서 보아왔다. 더욱더 왜곡된 해석일 뿐만 아니라 통속적인 것이었다. (적어도 어떤 접근법들의 개업자) 어떤 접근법들은 맹렬한 사상이나 정치적 신념(이론)과 함께 압박되어졌다. 학생들은 접근법 안에서의 사고에 대한 분리된 학파들뿐만 아니라, 이 다양한 접근법들을 통해서 분류함으로써 신중해야 한다. 만약 접근법이 실천적인 당원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정치를 원한다. 그렇지 않다면 접근법은 신중한 학문과 조사와 문서()가 신중히 간주되어져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그리고 나서 접근법은 균형과 중립만큼 가능한 것으로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당파심이나 이데올로기적인 변론을 어떤 학문적 접근의 언어에서 가장(변장)하는 데시도해서는 안된다. 간단히 말해서 접근법들 개요는 이 장에서 분석의 유용한 도구들이다. 그러나 접근법은 활용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해야 한다.

 

공식적인 오래된 학파들 사이에서 - 관료적 형식주의와 발전주의, 모든 새로운 접근법들의 연구는 전복하고 있다. 그 새로운 접근법들은 사람들과 분야에서 비슷한 사상들에 도전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교정치는 더해지는 차이점과 새로운 학문에 대한 통찰력으로 이 새로운 접근들을 환영했다. (심지어 그들이 분야의 통합을 전복시키고 하나의 진실 세우기의 접근법을 빼앗았다.)에 새로운 접근들은 모든 하나의 병의 조짐이다. 그러나 오히려 비교정치 번영의 조짐이다. 지금 비교정치는 하나의 학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다양한 접근법을 가졌다. 그것은 이 분야에서 우리들 중 가장 실천(실행)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다음 장에서 이 접근법들을 다듬는 일을 하자. 그들의 보다 더 유용한 접근들로부터 통속적(저속)이고 독단적인 구성과 우리의 개인적이거나 협력적인 연구들 쓰는 것을 수행하도록 하자. 그 접근법들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유용성을 제공한다. 동시에 비교정치는 몇 가지 이론의 고립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학자들은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이론상의 관계가 개념(관념)과 독립이론을 만들었다. 또한 발전사상과 국가 - 사회 관계성을 만들었다. 다른 것과의 결합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계들이 만들어질 때 비교정치는 분야에 대해서 더욱더 단일화(통일화)된 이론을 재건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때때로 상당한 다양성의 현대 상황과 경쟁하는 접근법들과 함께 대체적으로 대조하였다.

 

민주주의와 민주화

 

<기본조건>

 

민주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각국으로 그 영역이 넓어지고 있으며 대체로 권위주의 정권에서부터 발전되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비록 그것이 올바른 시도의 모습이긴 하지만) 규칙적이고 자유로운 선거 뿐 아니라 강하고 독립적인 모습의 의회와 법원 제도, 강력한 정치적 정당들, 그리고 그들의 견해를 강하고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이익 집단들과 정부 내에서의 풀뿌리처럼 든든한 참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인내력과 다양한 견해들에 대한 차별 없는 존중과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보장한다. 이러한 조건들의 유무, 상태들에 따라서 민주주의도 그 등급과 종류 레벨들을 달리한다.

 

<귄위주의의 성쇠와 이후 민주주의로의 회귀>

 

1960년대 개도국에서의 성쇠는 거의 보편적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발전 이론에 따라 경제적 성장을 우선 추구했던 나라들이 민주주의를 따르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군사적인 권위주의에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민주주의와 함께 추구되었던 초기의 실험들은 실제 민주주의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상품들"이나

"서비스" 등의 환경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다.

2. 개도국의 나라들은 경제적 위기에서 오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3. 1960년대의 사회적인 유통, 동원 과정은 통치 계급인 엘리트들에게 계급적 도전과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종속이론은 상당히 강력하게 인식되었고 심지어 비교 정치 학생들은 과거에 탄탄하게 기반을 갖고 지지를 받았던 민주주의적 발전에 대한 중요성을 소홀히 생각할 지경에 이르도록 권위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민주주의적 정치 단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권위주의 하에서 자유에 대한 갈구나 다원주의에의 지지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권위주의나 전체주의의 대치 의미로써 민주주의로의 회귀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군대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서독, 이탈리아, 일본 이 세 나라가 였음.) 1970년 중반의 첫 민주주의로의 변화는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유럽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적 전환의 요인들>

 

- 국내 요인들:

1. 권위주의의 가 되던 군부 체제가 1970년대 후반부터 불신을 얻기 시작함

2. 경제적인 위기, 악화 ; 힘든 시간에의 결과로 군부 체제에 대한 정치적인 저항이 나타났다.

3. 사회적인 변화 ; 새로 나타난 변화들은 좀 더 문명적이고, 도시적이며, 정치적인 의식도가 높을 뿐 아니라 기동력이 있었다.

4. 문화적, 정치적인 사회의 부흥 ; 부활한 문명사회는 군사적인 규율의 생동감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었다.

5. 군부 세력의 약화의 요인 ; (설명하기가 퍽 애매하고 불문명한 부분이지만 중요한) 분위기의 변화

 

- 국제적 요인들:

국제적인 사회에 있어서, 우선 Jimmy Carter 대통령의 인권에 대한 캠페인이 명확한 충격을 가져왔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강조는 미국으로 하여금, 정치적인 개방이나 변화를 요구하기 어려운 칠레나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의 나라에 힘을 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이들 나라에 공공 의견이나 메디아, 의회 등의 방향을 민주적으로 돌릴 수 있도록 정책을 펴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 초기의 현실주의에의 성장도 도움을 주었다 ; (관료적 권위주의나 기타 등의 다른 체제가 아닌)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리고 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시스템 체계였다.

 

<민주적 변이의 논쟁들>

1. 힘을 잃은 군부 체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 ; 전문적으로 나라를 보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만큼 쉽사 리 무너질 집단이 아니다.

2. 새로운 자유를 얻었다면 그 확장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또한 다원주의를 얼마나 확장시킬 수 있는가.

3. 사회적 요인들의 사용에 관한 논쟁. ; 권위주의 혹은 전체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변화는 종종 치명적인 실 수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4. 귄위주의 체계의 강압적인 탈취, 이전과 함께 등장한 전통적으로나 새로운 민주 정부는 종종 새로운 조직 에의 의무를 수반하도록 강요를 받는다.

5. 만약 민주주의로의 변이가 성공적이라면 이는 새로운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위기가 도래하고 있 다는 말도 된다. ; 국민들은 새로운 체제의 정부가 그들의 삶을 단시간에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으나 이것은 불가능하며 우선은 경제 발전 계획이 선행되어야 한다. - 새로운 발전 계획 필요etc의 부수적인 문 제들 발생.

 

<민주주의의 강점과 약점>

 

- 세계적인 개관:

1. 민주주의가 공고히 굳어있는 첫 번째 나라들은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이다.

2. 브라질, 아르gps티나, 칠레, 우루과이, 필리핀 등이 민주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검토, 지향하고 있으며 남아 메리카와 아시아의 지역들의 경우 이전에는 군부 체제를 겪었지만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발전하고 있다.

3. 동부유럽의 전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과 Soviet Union.; 민주주의의 경험이 거의 없으며 지리학적으로 서유 럽에 가깝다. 고로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있어 이점을 얻을 수 있으며 보다 쉽게 이행해 갈 수 있는 장점들 을 많이 갖고 있다.

4. 권위주의 체제에서 깨어나 민주주의로 가고 있는 도중에 있는 국가들로써 이전에는 철저하게 단 한 번도 민주주의 체제에의 경험이 없다. - 중국, 중동부 지역, Haiti같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 etc.

 

- 강점

1. 관료적 권위주의나 맑스-레닌주의, 조합주의 등은 더 이상 이목을 끌지 못하며 민주주의가 모든 영역을 장 악하고 있다.

2.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상을 갖고 있으며 세계화 지향 분위기 속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다.

3. 사회 경제적인 체제는 보다 단단한 기반을 제공해준다.

4. 문화적인 차이들이 사라지고 제 3세계도 정보의 활성화에 따라 세계적인 분위기로 통합되어 가고 있다. (Coca-Cola, 청바지 문화, rock음악 etc.)

5. 정치적 그리고 공공단체의 발전이 증가하고 있다.

6. 미국의 정책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 약점

1. 군사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이 아직 강하게 남아있다.

2. 거대한 국제적 부채로 인해 쇠약해진 나라들의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3. 새로운 민주적 민족들은 가난, 높은 문맹률, 기아, 영양실조 등의 사회적인 문제로 찌들어 있다.

4. 민주주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전통적인 자세들이 남아 있고 지속되고 있다.

5. 많은 나라에서 공공 단체의 뒤쳐짐, 지연이 계속 되고 있다.

6. 좌파와 우파의 극단론에 의해 여전히 문제가 많다.

7. 마약 문제는 민주주의의 근본을 손상시키고 있다.

8. 다양한 나라들에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민주화의 유형>

 

위로부터, 아래로부터, 타협에 의한 민주화

 

1] 위로부터의 민주화

정부가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여론을 수용하면서 민주화를 추진하는 경우로써, 비교적 평화적 이고 질서있는 방식으로 이행되는데, 정치가의 각성과 자기 부정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정부의 중심 세력보다 약해야 하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권위주의 체제에 대해 궁극적인 억압 수단을 분명히 통제하고 있는 체제하에서 일어난다. , 이렇게 민주화를 이룬 체제 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원할 때 언제든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브라질을 예로 들어 볼 때, 이는 위로부터의 해방, 혹은 정권에 의해 주도된 자유화였는데, 여 기에는 브라질 교회의 힘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70년대 이후 보여준 카톨릭교회의 인권옹호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적극적 참여는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들로부터도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는데, 브라질교회는 군부독재에 대항하여 민주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을 뿐 만 아니라 농촌과 도시의 변두리에서 대중의 권리회복과 인권옹호를 위한 사회적 관심과 신학적 성찰을 발전시켜왔다.

 

교회의 특수한 성격을 결정짓는 한 요소는 브라질 정치의 성격에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군부독재 국가와 비교해볼 때, 브라질의 경우 1964년 이전에는 외부의 위협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교회지도자들은 특히 1968년 이후 공산주의의 권력 장악 또는 사회경제적 붕괴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교회지도자들이 사회경제적 변화 또는 전복의 가능성을 인식한 것은 최근의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해, 군부가 지녔던 브라질의 쿠바화에 대한 두려움을 교회의 지도자들 은 이해 할 수 없었으며, 만약 1964년에, 공산주의의 쿠테타 가능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면, 야당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고 이들은 믿었다. 오히려 만약 교회가 대중들에 게 보다 효과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공산주의자 또는 다른 종교적 그룹(개신교)들이 대중들을 흡수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브라질 교회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1950년대와 1960 년대에 걸쳐, 보다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공동체와 사회정의와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9년경에 시작된 바닥공동체 (CEB)운동도 이러한 관심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비록 1964년과 1970년 사이에 있었던 CEB운동은 교회 상층부까지 확고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비판적 정치적 전망을 발전시킨 유일한 민중조직이었다. 이것은 1964년의 군부 쿠테타 이후 브라질의 주교단(Conferencia Nacional dos Bispos do Brasil: CNBB)이 군사정부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에서 나타났다. 특히 북동부의 아마존 지역에 위치한 교회들은 빠른 속도로 급진화 되었고 바닥 조직 차원에서의 발전에 영향을 받은 CNBB1970년 이후 군사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카톨릭의 바닥운동이 군사정부가 정치적 자유를 실시 하게 된 초기 결정에 어떤 의미있는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자유화는 1974년에 시작 하였고 그 시기는 대중운동이 아주 허약 하던 때였고 군사정부가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을 때 였다. 비록 필연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민중운동이 아주 허약하였었기 때문에 군사정부가 최소한의 위험부담을 갖고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1970년대 초반기에 정부는 이러한 바닥 조직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으며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선거정치를 보다 의미있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정부는 광범위한 대중적지원이 필요하였기에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을 약화시켰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반정부인사들을 인정하려 하였다.

 

위로부터의 민주화는 정부 내에서 민주적 개혁파들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전제 조건에서 시작한 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혁파의 반()세력인 보수파의 제거나 숙청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서 위험이 따른다. 보수파를 한편으로 약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시키면서 그들의 변화를 유도, 반대 주장을 중립화 시켜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수파와 타협을 하고 설득을 하며 포섭 해나간다 해도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불협화음이 생길 수 있다. , 민주 개혁파는 변화에 대 해 지나친 기대를 할 수 없고 조화를 추구하며 보수파의 변화를 저지하려는 극단적 세력의 극단 적 행동에의 위험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온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쪽으로 더 많은 힘을 쓰게 된 다. 게다가 민주화에 대해 시민 의식이 많이 성숙되지 못했을 경우, 그 정당성과 유용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와 옹호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책임도 있다.

 

2]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밑으로부터의 민주화는 위기적 상황에서 완강히 권위주의 체제를 고수하려는 집권층이 민중의 저항에 부딪쳐 와해되는 경우로서 혁명이나 쿠테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보수파로 지칭되는 반정부 세력의 힘은 절대적으로 커지며 그들이 정부를 뒤엎을 때 민주화가 도래한다. 개인 독재자들은 자발적으로 퇴진하지 않으며 그들의 사적인 권력과 공적인 권력의 구분을 모호 하게 구분지어 놓은 특성 때문에 반세력의 저항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는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민주화의 과정은 공포와 쿠테타 등의 과격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대표적인 경우로 루마니아의 지도자 차우세스쿠의 경우 공개 처형, 그리고 처형의 전 세계적인 공개라는 비참한 종말을 들 수 있다.

 

권위주의 체제라는 것은 정부가 반정부세력보다 강함을 의미하는데, 쿠테타나 혁명이 일어나 이 정부를 뒤엎기 위해서는 반정부 세력의 강화와 동시에 정부 세력의 약화가 나타난다. 반정부 세력은 국제적인 흐름이나 국민들의 요구가 높아지는 불만의 시기를 이용, 세력을 자신들 쪽으로 유리하게 끌어가는데, 여기에는 늘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가 나타나며 동시에 정부의 중심 세력은 거의 한순간이라고 볼만큼 짧은 시간에 그 세력을 빼앗긴다. 실제로 필리핀, 포르투갈, 루마니아, 그리스 등의 체제의 붕괴는 급속하게 진행되어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권력을 잡고 있던 권위주의 정부가 그 다음날에는 권력을 상실하였다.

 

Myron Weiner라는 학자는, 그의 저서에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의 성립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 다. "민주화를 추구하는 자들을 위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대규모적인 비폭력 반체제운동을 조직 하라. 중심세력, 필요하다면 보수우익으로부터 지지를 끌어내라. 좌익이 운동의 의제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라. 군부 내의 지지세력을 구하고 서방언론으로부터 동정적인 지지를 얻도록 하라. 그 럼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지원하도록 압력을 넣어라."

 

이는 귄위주의 체제의 전복과 그 틈을 탄 민주화를 노리는 반 정부진영의 민주적 온건파에 해당 되는 지침이다. 여기에는 군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어느 쪽의 편을 들어주는가와 해외의 힘, 국제 여론의 힘을 빌려 타 강대국에게 간섭의 명분과 압력을 넣는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공포와 혼란 속에서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정부의 체제가 붕괴되고 나타나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민주주의 지도자로써 좋은 인상을 주는 인기 있는 인물이 나타나야 하고, 이 때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선거가 수반되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어 국제적 정통성을 갖게 된다. 과연 이 과정이 참다운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약삭빠른 집단이 권위주의 정부의 붕 괴를 초래하면서 미끈한 이미지의 허수아비 지도자를 한 사람 내세웠다면, 그에게 투표하고 지도자로 신봉하는 국민들은 민주화라는 가면으로 치장한 또 다른 귄위주의 정부를 갖게 되는 것이 다. 이는 충분히 가능하며, 만일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을 경우 정치적 무지 와 더불어 더욱 크나큰 소집단의 통치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3]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이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정부가 수용하여 지속적으로 민주개혁을 추진하는 경우로써 민중 주도형 타협 모델을 말한다. 한국의 경우 밑으로부터 시작된 항쟁을 정부가 6.29 선언을 통해 수용함으로써 극적인 타협을 이끌어 내었으며 하향식의 점진적 민주화를 추구하고 있다. 특히 문민정부 하에서의 개혁시도는 최고 정치 지도자의 각성과 자기 부정에서 비롯된 민주화 과정으로 이 해해볼 수도 있다.

 

타협이란 정부 진영과 반정부진영의 협의하에 이루어지는 민주화로써 남아프리카공화국, 몽고, 네팔이나 칠레, 그리고 대표적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들 수 있다. 타협을 통해 성공한 민주화에서 는 정부와 반정부진영의 지배적 그룹들이 일방적으로는 그들 사회의 장래의 정치체제의 성격을 결정지을 수 없다.

 

1980년대 남아공의 정치를 보면, 1970년대 말 지도자 보타에 의한 자유화 개혁으로 흑인들의 기대가 고조되었다가 1983년 헌법으로 흑인들의 정치적 위치가 하락함으로써 1984년과 85년 흑인들 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대한 강압적 탄압이 있기는 했으나 국제적 여론에 힘을 얻은 덕분에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87년 노태우가 전두환에 의해 지목되긴 했으나 전두환에 의해 탄압받던 반정부 세력에 손을 뻗어 전두환을 소외시키고 야당 지도자들과 협상을 시 작했다. 이 때의 6.29선언으로 말미암아 민주화가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학계에서도 한국에서의 민주화는 87년 대선부터라고 공인하고 있다.

 

타협에 있어서 반정부 인사들과의 협의는 이전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이들에 의해 주도되기도 한다. 투옥은 도덕적 권위를 높여주고 일종의 명분을 만들어주며 이 경험으로 인해 최소한 일시 적으로라도 반정부그룹들을 단결시킬 수 있도록 한다. 이는 그들이 도달한 합의 사항이 무엇이든 간에 추종자들을 묵살시킬 수 있다는 전망을 정부에 보여주며 과격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협상에 의한 민주화의 방향에서 나오는 정책들에 대해 정부진영과 반정부진영은 필연적인 신경전을 치루게 된다. 서로의 편으로 좀 더 유리하게, 기회를 잡기 위한 치열한 물밑다툼이 있게 되고 각각의 세력에 존재하는 보수파와 급진파의 비난도 아울러 감수해야 한다. 외부 뿐 아니라 내부에도 갈등이 다분히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타협과 위로부터의 민주화는 구분이 상당히 모호한데, 타협에 있어서 어느 쪽의 세력이 더 강한가의 문제에 있어서 전체적인 주도권과 정책의 틀을 갖고 있는 정부쪽으로 조금이나마 더 기 울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 반정부진영의 온건파 인사들은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은 대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제외한 다른 면에서는 퍽 많은 정도의 양보를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 의 강도와 정도를 조절하는 것이 궁극적인 타협이겠지만, 반정부진영은 반정부진영대로, 정부 진영은 정부진영대로 또 그들 내부의 세력과의 타협과 논의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신경전과 논의를 벌여가야 하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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