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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정치사상] 공자 (孔子)

by 淸風明月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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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孔子)  
 

1. 공자의 생애와 시대

 

孔子의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다. 공자의 조상은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서 빈천(貧賤)했다. 그러나 힘써서 군자의 학(君子의 學)을 이루었다. 孔子의 일생의 사적(事績)은 정치에 종사하고, 학문을 가르치고, 책을 편술한 세 가지 밖에 없었다. 벼슬길은 그리 좋지 않았다. 孔子는 스스로 30세가 되어서 학문의 기초를 확립하였다.(三十而立)그 후 제자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신분의 귀천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배우는 사람은 비천한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공자는 봉건천하(封建天下)에서 전제천하(專制天下)로 변하는 과도기 시대의 초기였다. 주(周)는 이미 쇠퇴했지만 아주 없어지지는 아니했고, 사회계급은 붕괴되고 있었지만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구사회(舊社會)의 훈도(薰陶)를 받아으나, 구제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구질서(舊秩序)를 발견하는 도구로 삼음
▶학문을 평민에게 전수해 그들이 공경(公卿)의 벼슬로 진출해 함
▶그래서 이들이 귀족(貴族)되기를 원함

 

그러나 이 당시에 계급이 쇠약해졌다 하나 아직도 계급의 개념이 남아 있었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君子)는 지위와 품성을 나타냄. 공자는 그 도(道)의 성공적인 실현을 위한 필요조건→封建政治,宗法社會를 인정


 

2. 종주(從周)와 정명(正名)

 

종주(從周):‘周나라를 따르겠다’라는 의미
                周문화에 대한 숭상
∴공자 政治思想의 기점(起點)

정명(正名):군신(君臣) 上下의 권리 위무를 조정하는 것
‘임금은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臣下)는 신하 노릇을 하고, 아비는 아비 노릇을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하는 것이다.’
∴정명은 종주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주장이다

 

※ 이런 종주와 정명이 나온 배경에는 공자의 사상이 봉건천하(封建天下)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로 공자의     사상은 수구적(守舊的)이다

 


3. 인(仁)

 

공자가 지칭하는 인은 의미가 복잡하다.
인(仁):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愛人)을 의미
중궁(仲弓)이 인을 물었을 때 공자왈,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아라(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하였다.
결국 ‘널리 은혜를 베풀어 여러 사람을 환난(患難)에서 구하는 것(博施濟衆)’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야 가정이 가지런해지고, 가정이 가지런해진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야 天下가 평화롭게 된다.(修身而後家濟,家濟而後國治,國治而後天下平)


 

4. 덕,예,정,형(德,禮,政,刑)

 

공자의 치술(治術) 3가지
  (1) 양(養):돌보아 주는 것
  (2) 교(敎):가르치는 것
  (3) 치(治):다스리는 것
∴ 돌보아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도구는 ‘德’ 과 ‘禮’
   다스리는 것의 도구는 ‘政’ 과 ‘刑’
   덕(德)과 예(禮)가 근본이 되고, 정(政)과 형(刑)은 보조적인 것

 

그리고 공자가 가장 중시한 정책은 교육을 하여 감화시키는 것 교화(敎化)
공자가 백성을 돌보아 주는 방법에 관하여 ‘대체로 민생(民生)을 유족하게 한다’

1) 부세(賦稅)을 가볍게 하고
2) 부역(賦役)을 제한하고
3) 재물을 절약한다.
∴공자가 백성을 돌보아야 한다고 논한 것은 민생(民生)이 유족(裕足)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백성을 돌보아 주는 것 양민(養民)은 국가의 필요한 정책이지만 최고의 정책은 아니었다.

논어에 보면 子貢이 정치에 관하여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식량을 마련하게 하고, 무기를 충분하게 마련하고, 백성들이 위정자(爲政者)을 믿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반드시 한 가지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면, 세 가지 가운데에서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라고 말씀드렸는데 ‘무기를 버려라’ 라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반드시 한 가지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면 남은 두 가지 가운데에서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라고 말씀드렸더니‘식량을 버려라’옛날부터 죽음이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어 왔다. 백성들이 爲政者를 믿지 않으면 정치를 해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가르침을 통하여 감화(敎化)시킨다는 것이 중요하다.

 

교화(敎化)의 방법 2가지
하나는 자신으로써 본보기를 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道로써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바로 잡는 것(政者正也)이기 때문에....

‘군자(君子)의 덕(德)은 바람이고 소인(小人)의 덕은 풀입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습니다.’(君子之德風,小人之德草,草上之風必?)

‘하늘은 아래의 백성을 돕기 위하여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게 하였다. (天佑下民,作之君,作之師)

공자 치술(治術)의 세째 요소는 政刑이다.

교화의 힘이 아무일도 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다스려지는 효과(無爲之效)을 거둘 수 있는데 정형의 실행을 인정한 것은 교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람의 능력을 3가지로 구분했다.
 1) 나면서부터 그것을 아는 사람(生而知之)
 2) 곤란해져도 배우지 않는 사람(困而不學)
 3) 중등이상에 도달한 사람(中人以上)

 


5. 군자(君子)

 

‘인치(仁治)’는 공자가 주장한 周의 정치개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
‘인치(人治)’는 둘째의 원칙이다.

군자: 사회적 지위를 가르키는 말, 개인의 품성을 말하지 않는다. 품성을 지칭할 때도 그 지위를 아울러 말하고 있다.
 1) 군자는 사대부(士大夫)을 지칭, 소인은 일반 백성을 위미한다.
 2) 군자는 宗法世卿 제도의 쇠퇴를 구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周나라 정치가 가졌던  尙文의 폐단을 보완      하자는 것이다.

 3) 나라에 正道가 행해지면 벼슬살이를 하고, 나라의 正道가 행하여지지 않으면 거두어 감추어 둔다.
    (邦有道則任,邦無道則可卷而?之)
 4) 그것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에 조급히 나가는 것은 ‘벼슬자리를 구하기(干祿)’위함이거나 ‘俸祿에 야심을 두는 것(志於구)
 5) 文王과 武王의 政事가 典籍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道는 정치에 민감하고, 땅의 道는 나무에 敏速하니, 무릇 정치란 것은 창포와 갈대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취하는 데는 몸으로서 할 것이요,몸을 닦음에는 道로서 할 것이요,道를 닦음에는 仁으로 할 것이다. (哀公問政.子曰,文武之政,布在方策.其人存則政擧,其人亡則其政息.人道敏政,地道敏樹,夫政者也,浦蘆也.故爲政在人,取政以身,修身以道,修道以人)

 

 

6. 대동, 소강과 삼세(大同, 小康과 三世)

 

대동: 크게 같다라는 위미이다.
‘사람들이 홀로 그 어버이만을 친애하지 아니하고, 그 자식만을 慈愛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논리적인 오류가 있다.(개인적인 가치를 보편적인 가치와 동일시)
공자에게 있어 오랑캐의 기준은 종족(種族)이 아니라 문화개념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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