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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

Bruce Davidson (브루스 데이비슨, 1933~)

by 淸風明月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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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아버지는 미국으로 이민해 온 유태계 폴란드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다섯 살 때 이혼했고, 그래서 어머니와 나와 내 동생은 조부모님 댁에서 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재혼한 할아버지는 시카고로 가서 살림을 차렸다. 한편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했다. 그래서 나와 동생은 종종 외톨이가 되기 일쑤였고 우리끼리만 버려져 있곤 했다. 부모님의 이혼, 할머니의 죽음, 내가 거의 보지 못했던 이 아버지라는 작자와 거의 집에 없었던 어머니, 이런 것들이 어쩌면 학창시절에 내가 저질렀던 문제들, 외로움에 대한 나의 선호(選好),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일종의 초연함 같은 것들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인생은 사진을 발견하게 된 날부터 변했다. 그것은 자기가 직접 하던 사진현상작업에 나를 데리고 간 한 친구의 덕택이었다. 요술같은 작업과정, 화공약품들의 냄새, 암실 속에서 흘러내리던 물, 이런 모든 것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금새 나는 같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신문배달을 하며 번 돈을 저축하여 팔콘(Fulcon) 127과 현상용 기재들을 구입했다. 어머니는 통조림을 넣어두곤 하던 골방에다 암실을 차려 주었다. 이리하여 열 살에 나는 사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2년 후 삼촌들 중에 하나가 나의 할례식에 즈음하여 아거스(Argus) 2를 내게 주었다. 나는 한시도 그것을 곁에서 떼어놓지 않고 눈에 듸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담았다. 토요일이면 나는 사진기재를 파는 가게에서 창고관리인으로 일하곤 했다. 그는 내게 확대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또 자기의 롤라이플렉스(Rolleiflex)로 플래시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가 작업실에서 하는 일들을 거들어 주었다. 어머니가 재혼하게 되어 우리는 좀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양부는 나를 위해 암실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내게 확대기를 사주었고 자기가 갖고 있던 아주 비싼 인화지인 코닥 메달리스트(Kodak Medalist)를 내게 주었다. 이 모든 배려와 친절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이 가정생활에 잘 적응해 가지 못했다. 학교성적은 신통치 못했고 나는 점점 자폐되어 외톨이가 되었다. 반대로 나는 밤에 외출하여 사진기를 들고 시카고의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나는 물 위에 어리는 불빛들과 그 불빛이 발하는 집들의 사진을 찍기위해 다리 밑으로 내려가 강을 따라 가는 모험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넝마주이, 거지, 무허가 행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대학에 가게 되리라는 나의 행운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고, 오히려 약간 거추장스럽기까지 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코닥사가 주체한 사진 콘테스트에서 내가 일등상을 획득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부엉이를 찍은 사진이었다. 양부는 지체없이 내 입학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사진 대학교인 로체스터 이공대학(R.I.T.)에 편지를 썼다. 그들은 시험적으로 6개월간 나를 받아들이기로 수락했다. 거기서 나는 너무도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랄프 해터슬리(Ralph Hattersley)라는 훌륭한 교수가 있었다. 그는 아주 개성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유진 스미드(Eugene Smith), 까르띠에-쁘레쏭(Cartier-Bresson)의 사진들을 깨닫게 해 주었다. 특히 까르띠에-쁘레쏭에 관한 얘긴데, 우리 반에는 그의 사진집 『결정적인 순간 (The decisive moment)』을 가진 아주 아름다운 여학생이 이었다.

우리는 둘이 함께 자주 그 책을 들춰보곤 했다. 우리는 그의 생동감과 천재적인 창조성을 좋아했으며, 그의 사진을 좋아했었다. 브레쏭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 소녀와 까르띠에-브레쏭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 나는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하기는 바랬다.그래서 나는 까르띠에-브레쏭의 사진들만큼이나 훌륭한 사진을 만들기 위해 콘탁스(Contax)35밀리를 구입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었을 때는 이미 늦은 때였다. 그녀는 이미 영어선생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까르띠에-브레쏭하고만 외롭게 남게 되었다. 4학년 말, 나는 뉴욕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일할 사람을 물색중이던 이스트먼-코닥 회사에 채용되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수업기간중에 만든 사진들을 높이 평가해 준 것이다. 나는 광고사진에 열중하여서 맞물린 톱니바퀴가 측면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커다란 사진이나 역광을 받으며 향수병을 들어 있는 모델 사진, 종이 바탕에 놓인 콘 플레이크 사진 같은 것을 만들었다. 요컨대 나는 로체스터 대학에서 배운 것을 원칙으로 삼아 일을 수행해 나갔던 것이지만, 그러나 이런 작업은 너무 판에 박힌 것이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예일의 디자인 학교에 입학허가서를 신청했다. 1954년 예일의 디자인 학교에 입학한 나는 거기서 조셉 앨버스(Joseph Albers)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나는 어떤 형태의 아카데미즘도 견뎌낼 수 없었다. 나는 길거리가 더 좋았고 거기서 내가 직접 찾아내는 것들이 더 좋았다. 나는 차라리 ‘라이프’지의 사진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라이카(Leica) M3를 구입하여 예일대학 축구 팀이 사진을 찍었다. 어떻게 찍느냐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할 바가 없었다. 나는 선수대기실과 탈의실을 소재로 사진을 만들었다. 테이블 위에 나자빠져 있는 선수들,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팔, 꾸겨진 수건 등의 사진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이미지들이야말로 경기에 임한 축구팀 내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긴장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들이었다. 예일에서 1학기를 마치고 나는 군에 입대했다.

시골구경이 하고 싶었고, 또 대학생활이 지겨웠던 참이었기에 나는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입대하기 전에 나는 축구팀의 기록사진들을 ‘라이프’지에 보냈었다. 조지아주의 고든 캠프에서도 나는 예일대학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식으로 입영자의 생활상을 사진에 담아서는 모두 다 ‘라이프’지에 보내곤 했다. 나는 남부 아리조나로 전속되었다. 사진 원판들은 세탁물 건조장에서 말려야 했고 중대장 사무실 청소를 애야만 했다. 그 일들은 어느날 중대장이 ‘라이프’지를 흔들어대며 오던 날까지 계속되었다. 거기에는 ‘위험한 정적’이라는 제목 아래 축구팀에 관한 다섯 페이지짜리 기록사진이 브루스 데이비드슨의 이름으로 실려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스피드 그래픽(Speed Graphic)을 지니고는 지프를 타고 장군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이어서 나는 유럽 주둔 연합군 사령부로 전속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나는 파리에 들렀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것도 파리에서였다. 아버지는 쉰네 살이었다. 나는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벌썬 심년 전부터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만들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아버지의 죽음은 풀리지 않은 의문들을 남겨 놓았다. 파리에서 나는 한 늙은 부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에게 나는 많은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녀는 고갱과 함께 그림을 그렸고 또 전람회도 같이 열었던 인상파 화가인 레옹 포쉐(Leon Fauchet)의 미망인이었다. 나는 주말마다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내게 로트랙(Lautrec), 르노아르(Renoir) 등 당대의 위대한 인상파 시대의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녀의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파리와 파리의 과거를 보다 더 잘 깨닫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또 까르띠에-브레쏭의 사진이 내게 감명을 주었던, 즉 충만감까지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포쉐 부인의 사진을 ‘라이프’지에 보내고, 또 까르띠에-브레쏭에게 이 사진들을 보이기 위해 그가 속해 있던 매그넘(Magnum)으로 갔다. 그는 내 사진에 감성이 충만해 있으며 계속 정진해야 할 것 이라고 말해 주었다.

1957년 나는 뉴욕으로 돌아와 ‘라이프’지를 위해 일했다. 나는 기술을 터득해 나가지 시작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광선상태에 익숙하게 되어 아주 나쁜 조건 속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연말까지로 약정된 계약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사진에 큰 실망을 느꼈다.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나는 확신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서 무엇인가가 닐어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또 내가 사진에 담는 것과 정서적인 유대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유진 스미드의 사진들은 내가 택하고자 했던 방도를 일깨워 주었다. 스페인의 마을이나 조산원, 혹은 슈바이처 박사에 대한 그의 사진들은 사진을 통해 정서를 일깨워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뉴욕의 길거리, 그 중에서도 특히 이민해 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던 로어 사이드(Lower Side)가로 돌아왔다.

58년 초 나는 매그넘의 일원이 되었다. 나는 레오나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센트럴 파크, 자유의 여신상에 대한 연작사진을 만들었다. 나는 뉴저지에 천막을 가설한 조그만 서커스단을 쫓아가서 지미라는 한 나장이에게 집중적으로 매달렸다. 59년 이 연작을 끝마치고는 나는 주문 제작 방식으로만 일을 했다. 이때 만든 사진들이 뉴욕에서의 야생마 다루기 경기 사진, 촬영중에 에바 가드너(Ava Gardner), 케이프 캐나베랄에서 발사된 미국 최초의 우주선 사진 같은 것들이다. 이어서 나는 당시 뉴욕에 우글거리던 부랑배들 집단 가운데 하나인 조커(Joker) 패거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순순히 맞아들였고, 그래서 나는 그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닐 수 있었다. 특히 밤에는 코니 아일랜드까지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일곱 살이었고 나는 스물 네 살이었다. 그들과 함께 만든 연작사진들을 나는 몽땅 ‘라이프’지로 보냈는데, ‘라이프’지는 그것들을 내게로 되돌려 보냈다. 그 사진들은 ‘에스콰이어’지 59년 6월호에 실렸다.

1960년 나는 주로 매그넘사를 위해 일했다. 이 회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나는 도처를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보그(Vogue)'지의 편집장에게로 불려갔다. 그는 내가 그 잡지를 위해 일해주기를 바랬다. 조커 패거리들을 찍을 때와 같은 에스프리로 의상사진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제안에 마음이 끌렸다. 그때 나는 내가 성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유행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첫 번재로 찍은 사진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푸른색 모슬린 원피스를 입고 원자력 전람회장의 선전판 속에 그려진 원자핵 궤도 가운데를 걷고 있는 모델 사진이었다. 나는 이 성공에 도취되었다. 나는 마치 길에서 그랬던 것처럼 라이카 카메라를 휘둘러댔다. 그러나 이 패션 세계가 내게는 어색하기만 했다. 나는 난장이나 부랑배들과 어울려 만들었던 사진들에 향수를 느꼈다. 나는 구겐하임 재단의 지원금을 신청했다. 61년 5월 나는 앨라배마로 떠났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 그곳에서는 흑인들을 탄압하는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잭슨에서는 일제 검거가 있기도 했다. 나는 이 폭력과 증오의 광경을 목격했다. 나는 다시 의상사진을 찍고 또 결혼도 하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62년 구겐하임 지원금을 받아들고 다시 남부로 떠났다. 나는 사우드 캐롤라이나의 한 노동자 합숙소를 사진에 담았다. 조지아에서는 면화 수확을 찍었고. 미시시피에서는 장례식 장면을 사진에 담기도 했다. 테네시주의 브라운스빌에서는 심지어 체포되어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 고발되기도 했다. 의상사진과 내가 직접 목격한 사건들 사이의 수렁은 점점 깊이 패여갔다. 오랫동안 나는 깊은 실의에 바져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결혼생활의 실패 탓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베라자노 해협의 다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당시 건설중이던 그 다리를 나는 여러 각도에서 사진 찍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아냈다. 거기서 나는 공사가 끝날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나 역시 그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 이와 동시에 나는 내 생애의 한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다. ‘보그’지와의 일은 64년 말로 끝났고, 그 후 몇 장의 세속적인 르포르타쥬를 만들고는 나는 ‘샤(Shah)'의 사진을 찍기 위해 이란 여행길로 올랐다. 그 후 나는 사진 스튜디오를 열어 약 십여명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가정부, 은퇴한 사업가, 신문기자, 학교를 중퇴한 수년 등으로, 그 출신환경은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앗제(Atget), 에반스(Evans), 까르띠에-브레쏭, 스미드, 프랭크와 그 외의 여러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소개했다. 또 나는 케르테츠(Kertesz), 아베든(Avedon), 아버스(Arbus) 같은 작가들에게 직접 와서 그들의 사진을 보여주기를 부탁하기도 했다. 이 예술가들의 강한 개성,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서 받은 충격은 나의 감수성을 변모시켰다.

65년 봄, 나는 셀마에서 시작하여 앨라배마주 수도인 몽고메리까지 이르는 시위행진에 합세하기 위해 남부로 떠났다. 남부지방의 폭력은 내 개인적인 번민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에스콰이어’지는 나를 샌프란시스코에 파견하여 ‘토플리스’ 식당(이곳의 여자 종업원들은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이었다.)에 대한 르포르타쥬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나의 진정한 주제는 여인들의 벌거벗은 모습이 아니라 그녀들의 외로움이었다. 65년 ‘할러데이’지는 웨일즈 지방의 성(城)을 사진에 담는 임무를 내게 부과했다. 이 기회에 나는 탄광지대를 답사해 볼 수 있었고, 또 여기서 사진을 찍을 때 약간의 연출을 가미해 보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었다. 66년 말 뉴욕에서 장차 내 아내가 될 에밀리(Emily)를 만났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장 못 살 동네인 동부 100번가에 특히 흥미가 끌렸다. 나는 그 곳의 주민들이며 허물어져 가는 집과 건물, 황량한 공터, 지붕 등 모든 것을 사진에 담았다. 그 동네가 에밀리와 나를 고용한 것 같았다. 67년 에밀리와 결혼한 이후에도 나는 동부 100번가에서의 사진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사람들 및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는 그들의 삶을 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간혹 나는 파렴치해야만 했고, 또 그들의 비참의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는 괴로움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접촉이 이루어지자 나는 다시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치 텔레비전 수선공처럼 이 동네에 소속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세입주자 권익보호위원회에 서류를 보내기위해 나더러 와서 수도관의 누수, 고장난 보일러, 갈라진 벽 등의 사진을 찍어 주기를 청했다. 나는 밤마다 사진을 만들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필름 현상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 증거자료용 사진들을 뽑아내곤 했다. 2년 간 이런 일을 하고 나니 할 만큼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약 2천 여장의 사진을 찍은 셈이었다. 그 사진들은 책으로 묶여져 나왔고, 1970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동부 100번가 주민들 모두가 자신들의 모습을 보러 전시장에 왔었다.

68년 늦여름, 나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16밀리 카메라 한대를 들고 나는 동부 100번가로 촬영을 하러 갔다. 그 후 당시 할리우드와 데드벨리에서 ‘자브리스키 곶(Zabriskie Point)'을 촬영하고 있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와 함께 일했다. 그 촬영은 6개월이 걸릴 예정이어서 에밀리도 함께 갔다. 이리하여 69년 7월에 제니가 태어나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아버지가 되었다. 1970년 나는 미국 영화연구소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기록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나는 뉴저지로 가서 쓰레기더미를 뒤져 생계를 이어 나가는 로이카(Royka)씨 가족을 영화화했다. 그 들의 생활은 자유스럽게 남아있기 위한 한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땅에서 살다(Living off the land)'는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2년 후 나는 또 다시 지원금을 받아 한 미국작가의 기록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나는 65년에 만난 적이 있는 유태계 작가인 아이작 베쉬비스 싱거(Isaac Bashevis Singer)를 대상작가로 택했다. 나는 그의 단편소설 한 편을 영화에 실었다. 촬영은 아흐레가 걸렸고, 그 후 편집작업을 거쳐 몇 주만에 영화가 완성되었다. 이 영화는 1973년 미국 영화 페스티발에서 일등상을 수상했고, 74년에는 신진 영화예술인들의 작품에 할애된 소개행사의 일환으로 휘트니 미술관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아이작 싱거의 악몽과 펍코 부인의 수염'이었다. 나는 싱거의 소설에서 착상된 또 한 편의 영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요한 자금을 구하지 못해 후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74년 가을에는 둘째딸 안나가 태어났다. 이 무렵 나는 애당초 내가 애정을 쏟았던 사진으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나는 최근 몇 년간 내가 모아 두었던 모든 사진들의 목록을 작성했고, 몇 달 동안을 암실에서 사진을 확대하느라 보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내 주제 가운데 몇 가지를 되찾아보고자 했다. 나는 난장이 지미를 다시 만났다. 그는 결혼해 있었다. 또 나는 동부 100번가 시절에 나를 돕던 조수들 가운데 한 사람과도 재회를 했다. 그는 해군에 입대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목사가 되어 있었다. 브루클린에서 나는 조커 패거리 중의 한 소녀와도 다시 만났다. 그녀는 그 패거리의 두목과 결혼해 있었다. 그들의 딸은 열다섯 살이었는데, 이 나이는 바로 내가 그 엄마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그녀의 나이였다. 그녀는 내가 자기네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가를 이야기 해 주었다. 그들 모두는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몇몇은 전과자나 마약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내가 그녀의 사진이 전세계에 공개되었노라는 얘기를 들려주자 그녀는 사진을 딸에게 보여주며 “어쨌든 그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는데...”라고 중얼거렸다.

1980년 봄, 나는 뉴욕의 지하철에 각별히 흥미를 갖게 되었다. 헤브라이 풍의 식당을 경영하는 늙은 유태 율법학자의 집에 정해진 시간에 들르곤 하면서 나는 지하철이 가축을 실어나르는 기차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굳어져 있고 상심한 표정들, 흉측하고 무표정한 인상들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지하철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너무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민첩하게 행동해야 했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지하철에 관한 사진책을 내고자 한다고 설명하면서 미리 허락을 구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추근거리지 않았다. 어던 때는 아무런 사전양해 없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플래시는 번번히 나를 곤경에 빠뜨렸고, 그러면 소매치기들은 나를 노려보며 내 사진기를 잡아 뺏으려 하기도 했다. 나는 자주 객차를 옮겨 다녔다. 처음에는 지하철을 사람들을 흑백사진으로 찍었다. 이내 나는 지하철이 천연색사진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승객들의 얼굴에는 객차의 금속으로 된 부분에서 반사되는 빛이 어리곤 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얼굴에 묘한 아름다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에 가급적 보다 충실하기 위해 감도가 낮고 느린 코닥크롬(Kodak chrome) 64를 이용했다. 나는 모든 방향의 지하철에 대한 탐험에 나섰다. 하루는 브루클린에서 험상궃게 생긴 흑인청년 하나가 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이 패인 흉터자국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기 사진을 찍지 말라고 미리 경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카메라를 부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항상 미리 향해를 구하고 찍은 사진은 반드시 보내준다고 대답하고는, 사진을 모아둔 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진을 찍도록 가만히 있어 주었다. 81년 2월부터 나는 전적으로 지하철 사진에만 몰두하기 위해 모든 계약을 취소해 버렸다. 밤마다 나는 외출을 했고 어떤 때는 이른 새벽에 나가기도 했다. 또 한번은 미리 양해도 구하지 않고 아주 재빨리 한 청년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꾸깃꾸깃한 주머니를 바라보는 듯 했지만 정작 눈꺼풀은 닫혀 있었다. 플래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에게 사과를 했는데, 그는 자기가 장님이라고 대답했다. 7월의 어느 일요일 차운시(Chauncey) 가에서 아주 젊은 한 마약중독자가 나를 덮치더니 칼로 위협하여 카메라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다음날 나는 경찰서로 가서 이천사백 장에 달하는 우범자들 사진에서 그 녀석을 찾아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가장 최근에 간행된 내 책을 감사의 표시로 놓고 경찰서를 나왔다. 그것은 59년도 브루클린에서의 조커 패거리들에 대한 사진에서부터 20년이 지난 후 싱거와 함께 자주 들르곤 하던 카페테리아 사진에 이르기까지 내가 찍은 사진들 모두를 수록한 책이었다. 다음날 나는 그 책에서 자기 모습을 알아 본 한 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책의 표지에 실린 소년이 바로 그였다. 그는 조커 패거리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카메라를 빼앗긴 이후로 일을 다시 시작하기까지는 어느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나는 자신을 되찾았고, 그래서 나는 지하철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나는 삶과 생존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내가 목표했던 바의 끝에서 나는 비참과 명예, 아름다운 사람들과 심술궂은 사람들, 관용과 증오 등등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눈에 보이는 이상의 것, 즉 나와 타인들의 삶의 심장부에까지 갔었던 것이라 믿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해낸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 약 력 >
1933년 브루스 데이비드슨은 9월 5일 시카고 교외 오크 파크(Oak Park)의 폴란드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7년 부모의 이혼
1943년 신문배달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팔콘(Fulcon)27 카메라와 현상기재들을 구입했다.
1946년 그의 최초의 35밀리 사진기인 아거스(Argus)2를 선물로 받다. 학교수업과 병행하여 그 마을의 직업사진사인 알 콕스(Al Cox)의 사진점에서 일했다.
1947-1952년 어머니의 재혼. 양부는 그에게 코달 메달리스트를 주고 작업실을 차려주었다. 시카고의 거리 사진들을 찍기 시작한다. 코닥 사진콘테스트의 동물사진 부문에서 일등상 수상. 고등학교 수업과정을 마친 그는 사진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로체스터 공과대학에 입학. 여기서 그는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유진 스미드(Eugene Smith), 그리고 무엇보다도 앙리 까르띠에-브레쏭(Henri Cartier Bresson)의 사진과 접하게 된다.
1952-1954년 뉴욕에 있는 이스트먼 코닥사가 그의 일련의 사진들에 주목하여 그를 채용함. 몇 주일 후, 항상 같은 것만을 반복하는 작업에 싫증을 느낀 그는 화가 조셉 앨버스(Josept Albers)가 강의하고 있는 예일 디자인학교에서 다시 공부를 계속하리라고 결심했다. 예일 대학 축구팀을 소재로 한 그의 기록사진들 『위험한 정적(A Dangerous Silence)』이라는 제목으로 ‘라이프’지에 실림.
1955년 조지아주의 고든 캠프에서 군복무 시작. 이어 그는 파리 근처의 유럽 주둔 연합군 사령부로 배속된다. 주말마다 파리에 들러 인상파 화가 레옹 포셰의 미망인인 포셰 부인과 친분을 맺게되어 『몽마르뜨르의 미망인(Window of Montmartre)』이라는 연작사진을 만듦. 매그넘 사에서 까르띠에-브레쏭을 만나다.
1957년 병역 의무를 마친 후 뉴욕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주어진 ‘프리랜서’의 자격으로 ‘라이프’지를 위해 일한다. ‘라이프’지에 실린 유진 스미드의 사진이 담고 있는 서정과 인류애는 그의 사진작업의 지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58년 매그넘-포토사에 입사한 그는 유랑 서커스단을 소재로 한 사진들을 만든다.
1959년 6월 ‘에스콰이어’지는 ‘라이프’지가 게재를 거절한, 광대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과 뉴욕의 부랑배들(브루클린의 갱) 사진을 게재했다. 또 그는 『아메리카인들』이라는 사진책자를 갓 출간해낸 로버트 프랭크를 주목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대한 기록사진 제작. ‘퀸(Queen)'지를 위한 영국, 스코틀랜드 여행.
1961년 ‘보그(Vogue)'지에 고용되어 정기적으로 유행의상에 관한 사진을 만들기 시작. 오래지 않은 그는 이 작업이 자신의 사회참여적 성향과 위배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1962년 구겐하임 재단으로부터 지원금 수령. 시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파 학생들의 ‘자유의 행진’에 대한 기록사진 제작에 착수.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그는 버지니아, 미시시피, 남 캐롤라이나, 앨라바마 등의 여러 주를 돌아다니며 『미국의 흑인들(Black Americans)』이라는 기록사진을 제작. 교량 건설작업현장을 대상으로 한 연작사진 제작. 첫 결혼
1964년 그리니치 빌리지에 마련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열 명의 학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며 앙드레 케르테츠, 리차드 아베든, 아이안 아버스 등의 사진작가들에게 협조를 요청. 뉴욕 부근 늪지대에서 사향쥐 사냥꾼들에 대한 기록사진 제작.
1965년 봄, 다시 앨라배마로 가서 셀마(Selma)시까지의 흑인들의 행진을 추적. 웨일즈 지방의 광부들, 뉴저지 지역, 토플리스 식당 등에 대한 기록사진 제작.
1966년 그의 기록사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인, 뉴욕 할렘 지구의 흑인들에 관한 기록사진들을 4×5인치 규격의 암상자로 된 카메라로 제작하여 『동부 100번가(East 100th Street)』라는 제목으로 발표.
1967년 에밀리 하스(Emily Haas)와 결혼
1968년 여름동안 할렘 지역에서 16밀리 카메라로 천연색 사진을 찍다. 미켈라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의 영화 『자브리스키곶(Zabriskie Point)』을 위한 세트 사진들을 제작.
1969년 미국 영화연구소의 자금 지원을 받아 『땅에서 살다.』를 제작.
1970년 봄에 그는 C.B.S.방송을 위해 『동물원 의사(Zoo Doctor)』라는 단편영화를 제작.
1972년 영화 연구소의 지원금을 받아 텔레비전용 영화인 『아이작 싱거의 악몽과 펍코 부인의 수염』을 제작.
1972-1976년 아이작 싱거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영화 시나리오 『적과의 러브스토리(Enemies, a love story)』를 집필. 경제적 이유로 말미암아 삽화사진들을 찍기에까지 이른다.
1976년 뉴욕의 한 카페테리아를 소재로 기록사진 제작.
1980년 봄, 『뉴욕 지하철의 승객들』이라는 작품에 착수. 이 사진들은 1983년에 이르러 국제사진센터에서 전시되었다.
1995년 이후 4 년 동안 그는 뉴욕 ' 센트럴 파크' 를 촬영했다 . 그곳에서 그는 도시의 공원 속에서 보여지는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을 찾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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