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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이야기 하다

격동기의 현장 - 이경모사진집 -

by 淸風明月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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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1948.10,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이 여수순천반란사건으로 희생된 경찰관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다.




전남 광양, 1948.06, 대동청년단 광양지부 결단식. 죽창을 든 소녀들이 사열을 받고 있다.




전남 광양, 1948.10, 경찰은 반란군에 쫓겨 후퇴하면서 가둬두고 있던 좌익 사상범 용의자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갔다. 서울대 법대에 다니다 고향에 내려와 은신하고 있던 김영배(당시 21세)도 그 희생자 중 한명이었다. 그의 가족들이 광양과 순천의 경계에 있는 덕내리 골짜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 거두고 있다.

 



전남 여수, 1948.10,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온 여수여고 학생들



전남 담양, 1951.02, 부역 혐의자들이 면사무소 창고에 수용되어 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없었다.


상징으로 자리잡은 사진기록

글 박평종(명지대 한국사진사연구소 연구원) <월간사진 2007년 4월호>

8.15해방에서부터 여수, 순천 반란사건, 6.25전쟁까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기록한 이경모(1926~2000)의 사진집은 극심한 이념대립과 사회혼란으로 점철된 이 시기에 대한 귀중한 시각적 보고서로, 이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1946년부터 광주 호남신문사의 사진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각종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서 촬영된 이 사진들은 역사의 증거자료라는 사진의 고전적인 법칙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신문, 잡지를 매체로 하는 뉴스사진이 범하기 쉬운 과장의 효과를 조심스럽게 비껴가고 있으며, 사건의 이면을 섬세한 시각으로 포착하고 있어 기록의 미덕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대개의 기록사진이 그러하듯 이경모의 사진 역시 기록의 대상이나 사건 자체의 의미에 따라 가치가 규정된다는 한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하지만 이 사진들은 최소한의 역사자료라는 기능적 가치를 넘어 해방과 6.25전쟁을 사이에 두고 펼쳐졌던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현실을 섬세한 시각으로 상징화함으로써 기록의 가치를 확장시키고 있다.

분단과 이념대립의 시대

해방은 일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외세의 의지에 따라 국토가 분할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민족사적 비극을 잉태하기도 했다. 해방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해방의 성격이 그랬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라 외세의 힘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어진 해방이었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우리의 의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형국으로 흘러왔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심각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국토의 분단은 외세의 이권다툼으로 강요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극심한 이념대립은 해방 이후 국토 전역을 피로 물들인 수많은 분쟁과 충돌, 정치적 대립을 낳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해방 이후의 이념대립은 일제식민통치의 극복이라는 당위가 공통의 과제로 주어져 있던 해방 이전과는 그 성격이나 양상이 크게 달라서 다른 이념의 지지자들을 용인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다.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펼쳐진 정치, 사회적 혼란과 이념대결의 구도 속에서 해방이 가져온 환희와 기대는 실종되고 이념과 아무 관계없는 민중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특정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때문에 희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4.3사건을 비롯하여 여수, 순천 일대의 반란 사건 등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이념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의 와중에서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 그 예이다. 이후 38선 부근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국지전까지 포함한다면 해방 이후 6.25전쟁 이전까지는 그야말로 남북한의 이념대립이 동족간의 유혈 충돌로 번져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의 모순과 비극을 총체적으로 압축하고 있는 6.25전쟁은 이러한 갈등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빚어낸 결과물이다.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가 위태롭게 걸어온 과정 속에서 동족간의 살육전으로 귀결된 이 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해방 이후의 혼란에서부터 6.25전쟁까지 민족사적 비극을 꼼꼼하게 기록한 이경모의 사진들은 이처럼 한국의 현대사가 걸어 온 위태로운 과정과 희생의 양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문기자 신분이었던 덕분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사건의 현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은 촬영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사진이 지니는 힘은 단지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현장을 기자의 신분으로 포착해 냈다는 진귀함에만 있지는 않다. 그는 오히려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현장에서 민족 구성원 개인의 자격으로, 혹은 희생자와 동등한 한 인간의 눈으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상징화시켜냈다. 실제로 그가 남겨놓은 사진들에는 신문사에 넘겨줄 사진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관점에서 촬영한 사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사진들에서는 뉴스가치를 중요시하는 신문사진의 관점보다 비극적 사건을 바라보는 애잔함과 희생을 낳게 된 민족사적 갈등을 냉철한 관찰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진가 고유의 시각이 묻어나고 있다.

사진기자 활동

1926년 전남 광양에서 출생한 이경모는 원래 화가 지망생으로 1944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에서 정물화를 출품해 입선한 경력이 있다. 어려서부터 사진에 흥미를 느꼈던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46년 전남 광주의 호남신문사 사진부장을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는 노산 이은상과의 어렸을 적부터의 인연 때문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광양에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던 이은상은 광양의 유지였던 이경모의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고, 해방 이후에는 전남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경모가 호남신문사에 입사하게 된 것은 바로 이은상의 추천 덕분이었다. 그는 해방 직후 광양에서 벌어졌던 각종 행사를 촬영하던 이경모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호남신문사의 사장은 전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준규로 이경모의 부친과 절친한 사이였다.

신문사 사진기자의 신분으로 그는 해방 정국에서 벌어진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반목과 대립을 사진에 담아낼 수 있었다. 조선민족청년단과 대동청년단 등 각종 좌우익단체의 결성식을 비롯해 미군정이 들어서는 과정, 소작료 갈등 문제, 혼란한 정치상황 속에 내던져진 민중들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해방이후의 한국사회를 차분하게 기록해 나갔다. 취재 기자로서의 그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1948년 10월 여수, 순천의 반란사건을 취재하면서부터이다. 이 사건은 제주도 4.3사태 진압을 위해 출동 대기 중이던 여수 신월리 주둔 제14연대의 1개 대대병력이 반란을 일으켜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를 비롯해 순천, 광양, 곡성, 보성 등을 장악해 나가면서 비롯되었다. 반란군은 10월19일부터 10월27일까지 여수, 순천을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점령지구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해 우익 인사들을 비롯해 경찰, 관료, 지주 등 수많은 인사들을 처형하였다. 반란의 주동자는 남로당 조직의 하사관인 상사 지창수로 그의 선동에 따라 대대병력의 대부분이 반란에 참여했다. 이들에 의해 자행된 살육은 다시 정부군의 토벌 작전 이후 보복으로 이어져 그 와중에 수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당하는 사태를 낳았다. 초기의 반란군 진압작전은 실패로 돌아가 토벌군이 반란군에 투항하는 등 계엄령이 내려진 이 지역 일대는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치안부재 상태였고, 관민 1,200여명, 반란군 800여명 사망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낳았다. 하지만 반란군은 강력한 정부군의 진압작전에 따라 패퇴할 수밖에 없어 결국 김지회, 홍순석 소위의 지휘 아래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입산해 게릴라전을 계속 진행하게 된다.

이경모가 반란의 현장인 순천에 도착한 것은 10월21일 저녁으로 이튿날인 22일부터 본격적인 취재활동을 시작했다. 반란군 진압을 위해 출동하는 진압군의 모습을 비롯해 반란군과 진압군 사이의 충돌 과정에서 희생당한 경찰관 및 반군의 시신, 희생자들 앞에서 오열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그는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여수 탈환작전이 시작된 10월24일 이후 반란군은 진압군에 쫓겨 투항과 도주를 되풀이해가며 패퇴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진압군은 반란군에 동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해 보복 처형을 감행했다. 이경모는 부역자들 색출 현장과 토벌작전의 모습 또한 생생하게 기록해 이 사건의 진행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해나갔다. 나아가 반란군이 진압군에게 패퇴해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입산해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기간 동안에도 꾸준하게 보성, 벌교, 담양, 화순 일대를 촬영하면서 이 사건의 추이에 관심을 가졌다. 6.25전쟁이 발발하는 1950년 초까지 입산한 반란군들과 이들을 소탕하려는 진압군 사이의 충돌은 계속되어 무고한 양민들은 반란군과 토벌군 사이에서 부역자로 처단되거나 보복 처형을 당하는 등 악순환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경모는 1949년까지 이 지역 일대를 주시하면서 해방 정국의 이념대립이 야기한 극심한 혼란과 모순을 극명하게 시각화시켜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이경모는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에 문관으로 특채되어 종군 사진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8월부터 1951년 3월까지 그는 한미 연합군을 따라 전쟁 관련 기록을 남겼다. 비록 여수, 순천 반란사건의 경우처럼 생생한 전투 현장이나 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극적인 장면은 없지만 인민군 포로나 부역 혐의자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사진에 담아냄으로써 이 전쟁의 희생자는 우리 모두임을 묵묵히 알려주고 있다.

뉴스가치를 넘어선 기록

이경모는 비록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까지의 제한된 기간 동안만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현장을 신문기자의 신분으로 기록했지만 그의 사진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는 단편적인 뉴스사진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우선 그는 사건의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해 대중들에게 알린다는 르포르타주의 원칙을 충실하게 구현하는데 성공한 드문 한국사진가들 중의 한 명이다. 해방 이전에도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간혹 있었지만 일제 치하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뉴스가치를 결정하는 관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해방 이후에도 특정한 사건과 주제를 다룬 본격적인 르포르타주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경모의 사진은 이 분야의 선구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각종 신문이나 화보잡지가 해방 정국의 시대상황을 다루는 경우는 있었지만 주로 뉴스가치와 정보전달을 위주로 한 취재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특정 사건에 대한 심도 있는 르포르타주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편 이경모의 사진은 해방 이후의 극심한 사회 혼란과 이념대립, 그로부터 야기된 여순반란사건, 6.25전쟁까지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연속성을 가지는 일련의 사태로 다루고 있다. 수년 동안 지속된 그의 작업은 일관되게 한국 현대사의 격렬한 현장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값지다.

다른 한편에서 그의 사진은 시대현실과 무관하게 형식미만을 추구해 왔던 일제시대의 자연관조적인 경향 일색의 한국사진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진귀한 사례에 속한다. 신문기자라는 특수한 지위가 그에게 사회 현실을 적극적으로 바라보도록 강요한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해방 시기까지 한국 사진가들이 걸어 온 일반적인 모습에 비추어 보면 이경모의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실제로 6.25전쟁 이전까지의 사진가들은 현실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이나 치열한 역사의식 없이 탐미적인 태도만을 고수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1948년 열린 임석제의 개인전을 제외한다면 한국사진은 현실에 대해 방관적인 자세로 일관해왔다. 6.25전쟁 이후 리얼리즘의 기치를 내걸고 현실 인식을 강조한 사진이 등장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해방 이후 줄곧 격동의 현장에서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현실을 치열하게 기록한 이경모 사진의 가치는 남다르다고 하겠다. 또한 여순반란 사건은 첨예한 이념대립의 산물로 해방정국의 혼란과 갈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특수성과 긴박하게 흘러갔던 사건의 정황 때문에 생생한 현장의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하다. 삭제할 수 없는 역사의 한 순간을 망각으로부터 건져낸 그의 사진이 더욱 값진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이경모 사진의 다수는 사건의 발생과 진행과정을 정보전달이라는 관점에서 시각화시켜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시각은 취재기자라는 규정된 신분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경모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각종 사건의 결과로 주어진 참혹한 현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대의 비애를 적절하게 형상화시켜냈다. 냉혹한 시선으로 죽창을 들고 나열해 있는 소녀들의 모습은 이념의 정체도 모르는 채 이념의 포로가 되어 동족을 적으로 몰고 갔던 시대의 맹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목제 소총을 들고 총검술 훈련을 받는 청년들은 조직적인 병사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몸짓만을 흉내 내는 소박한 농부들이다. 뚜렷한 정치의식이나 이념과는 무관하게 극단적인 대립의 구도 속으로 편입되어 가는 선량한 양민들의 모습을 이러한 사진들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아이를 업은 채 여순반란사건의 와중에 희생된 경찰관 남편을 찾는 여인이나, 좌익 사상범 용의자로 처형된 무고한 양민들의 모습, 희생자의 시신 앞에서 목 놓아 우는 여인, 통곡하는 유가족은 수많은 희생자들과 유족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동족 모두가 희생자일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말해주는 암시이기도 하다. 특정 이념의 극렬한 신봉자가 아니더라도 아군, 혹은 적이 되어버리는 해괴한 역사 속에 모두가 팽개쳐져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진들은 이외에도 많다.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무고한 양민들, 무슨 이유로 붙잡혀왔는지도 모른 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사진기자를 응시하고 있는 부역 혐의자들은 이념에 눈먼 역사에 대한 눈물겨운 항변이다. 양민과 반군 혹은 부역자들을 가려내기 위해 학교운동장을 좌우로 갈라 주민 모두를 두 부류로만 구분해버리는 난폭함에서 우리는 그 시대의 맹목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6.25전쟁 기간 동안 촬영한 인민군 포로와 창고에 수용된 부역혐의자들의 모습 역시 그러한 맹목의 연장으로 읽힌다. 부역 혐의로 감금된 이들의 대다수가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로 구성된 사진은 폭력의 희생자는 비단 다른 이념의 신봉자 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역사의 수렁에 얽혀 들어가는 모두가 될 수 있음을 암울하게 말해준다.

이경모의 사진은 지금에 와서 귀중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그 사진들이 단순한 시각자료 이상의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이처럼 그가 역사적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수동적인 방관자의 시각을 넘어 사건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고유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화가가 되고자 했던 그는 예술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고, 신문사 재직 시절에도 꾸준히 각종 사진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하는 경력을 쌓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여순반란사건을 취재하던 해인 1948년 조선사진예술연구회가 주최한 공모전에서 ‘잔설’과 같은 작품을 출품해 특선하는 등 예술사진 분야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사진가로서의 그가 거둔 가장 중요한 성과는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바로 그 현장의 중심에서 생생하게 기록해 냄으로써 시대의 증인으로 우뚝 섰다는 점이다. 더욱이 그가 거둔 결실은 한 시대의 현실을 일관된 시선으로 기록한 선행 작업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사진의 역사에서 그 가치가 더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의 작업은 사진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탐미적 예술사진에서 벗어나 현실을 냉엄하게 살피고자 했던 대개의 사진가들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지만, 현실의 삶을 주제로 다룬 그들의 사진은 조형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기존 예술사진의 형식이 물려준 유산을 상당부분 간직하고 있었다. 한편 이경모의 사진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기록이 지녀야 할 일반적인 덕목을 비교적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다. 구도나 앵글, 공간구성에 대해 예술사진의 형식이 세워놓은 정형성에 구애받지 않고 사건을 자신의 시각을 통해 형상화시켜내는 태도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진형식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경모의 사진은 기록의 언어가 갖추어야 할 보편적인 형식을 보여주었던 초기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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