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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이야기 하다

카메라와 함께 한 반세기, 정범태사진집

by 淸風明月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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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태 사진집은 1950년대 이후 한국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기록한 시각적 보고서이다. 1950년대 후반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이후 40여 년 동안 줄곧 사진기자로 사건현장을 누비며 수많은 특종을 건져낸 그는 무엇보다도 우선 뛰어난 저널리스트이다. 그가 각종 사건, 사고의 현장에서 놓치지 않고 잡아낸 다수의 특종들은 단지 운좋게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리한 눈과 기민한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아가 사진기자로서 그가 일궈낸 세계는 요행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기록에 대한 소명의식과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사건의 보고자를 천직으로 생각해 왔던 그에게는 성실한 저널리스트라는 위상과 더불어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을 개척한 초기 사진가라는 지위가 항상 따라다닌다.

 

정범태 사진집, 카메라와 함께 한 반세기(1950-2000) / 2006년 / 눈빛 펴냄

 

글 박평종(명지대 한국사진사연구소 연구원)<월간사진 2007년 1월호>

 

리얼리즘 사진과 신선회(新線會)

 

1960년 1월 26일의 서울역 귀성객 압사사고 현장 특종에서부터 1960년 4월18일 천일백화점 앞 정치깡패들의 대학생 습격사건 특종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역사적 순간’을 포착한 정범태(1928~) 사진들은 부지기수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사진기자로서 수많은 신문사진들을 생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의 정수를 이룬다고 평가받는 사진의 대다수는 ‘현재성’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뉴스사진이 아니라 수십년 후에 오히려 역사적 의미가 부풀어 오르는 기록이다. 하지만 정작 정범태의 사진관(寫眞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던 1950년대의 리얼리즘 사진은 중립적인 기록의 개념보다 사진이 시대의 생활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예술의 범주로서의 리얼리즘에 더 가까웠다. 리얼리즘을 50년대 이후 한국사진의 새로운 흐름으로 제시했던 이들은 그것을 일제시대의 예술사진에서부터 이어져 온 탐미주의적 경향의 사진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리얼리즘 사진은 기록이나 현대적 의미에서의 다큐멘터리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시각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리얼리즘에 더 관심을 두고 출발했다. 이는 50년대 리얼리즘 사진의 옹호자들이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는 사진의 예술적 지위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사실은 정범태가 창립회원으로 참여했으며, 50년대 리얼리즘 사진의 전형을 보여주는 신선회의 사진경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대개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그러하듯 정범태 역시 개인적인 관심에서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다. 1955년 ‘한국미술가협회전’ 사진부문에서 ‘고물상 노인’으로 입선한 후, 1956년 8월에 창립된 ‘신선회’에 연구회원으로 가입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사진활동을 펼쳐나갔다. ‘신선회’는 이형록, 손규문, 조규, 이안순을 정회원으로, 정범태를 포함해 이해문, 한영수, 안종칠, 조용훈 등 17명을 연구회원으로 창립된 리얼리즘 사진 연구회였다. 리얼리즘 사진의 추구가 목적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면서 출발한 이 단체는 1957년 4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첫 단체전을 개최했다. 창립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형록의 ‘건설’과 ‘비 오는 가두’를 비롯한 회원 개인들의 단사진 38점과, ‘시장의 생태(生態)’라는 공동주제를 선택해 작업한 사진들을 모은 이 전시회는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한국사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정범태는 이 전시회에 ‘두 어린이’, ‘경매’, ‘벽돌작업’ 3 점을 출품했다. ‘신선회’ 창립전은 여러 측면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한국사단의 평가는 찬사와 비난으로 엇갈렸다. 공모전이나 회원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던 기존의 사진전 형태에 비추어 보면 리얼리즘이라는 기치를 공식적으로 내걸었던 이 전시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았다. 이들은 리얼리즘이 일제시대 이후 공모전을 중심으로 정형화되어 있던 ‘살롱사진’을 극복한 새로운 시대의 사진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향의 사진은 이미 사협전을 통해 간간이 소개되어 왔고, 생활주의 이론을 주창하면서 리얼리즘 사진을 옹호했던 임응식으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사실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은 6.25전쟁 이전에도 존재했었고, 임응식 또한 40년대 말에 그러한 유형의 사진을 실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얼리즘이 한국사진의 중요한 흐름으로 등장하는 것은 50년대 중후반부터이며, 신선회는 그러한 흐름을 가속화하는데 기폭제가 되었다. 비록 임응식이 개념화시킨 ‘생활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리얼리즘을 기치로 내걸었던 신선회의 사진경향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일반인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다.


&lsquo;말과 마부&rsquo;, 서울 중구 만리동, 1956

신선회 사진의 형식적 특징

신선회 회원을 비롯한 리얼리즘 사진가들은 공모전 중심의 살롱사진이나 탐미적 경향의 예술사진을 경원시하면서 사진가의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을 강조했지만, 기존의 공모전을 비롯한 예술제도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리얼리즘 사진의 형식을 발전시켜 나가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꾸준히 사협전을 비롯한 각종 공모전을 통해 자신의 사진을 ‘작품’으로 인정받고자 했으며, 그 결과 리얼리즘은 동시대의 현실을 냉엄하게 반영함으로써 시대의식을 각성시켜주는 정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모전에서 사진의 가치를 재단하는 또 하나의 기준으로 퇴화하고 말았다. 리얼리즘 사진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고 평가받았던 사진들은 대개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로 하나의 주제를 심도 깊게 파헤친 연작이 아니라 심사기준에 부합하는 구도와 조형성을 갖추고, 스냅이 지향하는 순간포착에 충실한 낱장의 걸작주의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정범태의 초기 사진 역시 신선회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범태는 1957년 신선회 창립전과 더불어 그 해 11월의 ‘한국사진작가협회전’에 ‘포도’를 출품한 것을 비롯하여, 신선회 제2회전이 열린 1958년에는 해외 사진 공모전에 출품해 ‘아사히신문’이 주최하는 국제사진살롱에서 ‘말과 마부’라는 작품이 입선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US 카메라’지의 제1회 국제사진공모전에서도 ‘피리 부는 소년’이 이형록의 ‘강변’과 함께 입선했다. 이형록의 ‘강변’은 아이를 업고 머리에 광주리를 인 여인이 걸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비록 서민의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리얼리즘 사진의 원칙에 충실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사진의 삼분의 이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소형 선박의 조형미가 두드러져 보이는 작품이다. 


&lsquo;피리 부는 소년&rsquo;, 마포구 신수동, 1957

‘피리 부는 소년’ 또한 피리를 입에 문 소년을 옆에 서 있는 두 마리의 염소와 대비시켜 시선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동심을 표현하기 위해 순간포착의 묘를 잘 살린 전형적인 공모전 계열의 작품이다. 1959년에 이형록, 손규문, 안종칠 등과 함께 예술종합전의 사진부문에 출품한 ‘콤포지션’이나, 신선회 제3회 회원전에 출품한 ‘눈 오는 날’ 역시 이러한 유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 말부터 국제사진전 출품이 활발해지면서 그는 59년 일본 ‘아사히신문’ 국제살롱에 ‘열쇠장수’를 출품해 입선하는 등 다수의 국제사진전에서 입상하는 경력을 남기기도 했다. 


열쇠장수, 서울 남대문시장, 1956

신선회를 비롯한 50년대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은 인간의 생활상과 사회현상을 꾸밈없이 보여준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합당한 기록의 형식을 갖추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가난한 도시근로자나 궁핍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동시대의 전형적인 사회상으로 한정시키는 시각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리얼리즘 사진가들은 사람들의 생활상을 폭넓은 사회, 문화적 환경이나 역사적 정황 속에서 보여주지 못하고 단편적인 모습만을 추출해냄으로써 그들의 공간으로부터 유리시켰다. 이는 그들이 피사체를 대하는 시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피사체로서의 인물들은 사회 현실을 보여주는 주체라기보다는 완성된 화면을 만들어 내는 데에 필요한 구성 요소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조형 언어와 기록 언어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두 3회의 단체전을 끝으로 신선회가 해체되고 살롱 아루스(Salon Ars)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1960년 10월 신선회의 중심 회원이었던 이형록과 정범태, 이상규, 김행오, 신석한, 김열수 등이 모여 창립한 살롱 아루스는 신선회의 발전적 해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리얼리즘 사진의 정신은 그대로 유지하되 조형성에 기초해 사진의 형식을 가꾸고자 했다. 이는 사회현실을 반영한다는 원칙에만 집착했던 기존의 리얼리즘 사진이 시각언어로서 갖추어야 할 조형성에 무관심하다는 자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신선회의 사진은 비록 사진가가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조형적이었으며, 구도와 앵글의 효과를 비롯하여 순간 포착을 통해 현실을 재현하는 극적인 구성 요소들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3회에 걸쳐 열렸던 신선회 회원전의 사진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신선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형록은 비록 사회 현실과 인간을 주제로 리얼리즘 사진을 추구했지만 이미 일제시대 공모전 형식의 사진에 익숙해 있었던 까닭에 그러한 관습을 쉽게 떨쳐내기 어려웠다. 한편 신선회의 주요 회원이었던 20~30대의 젊은 사진가들 또한 비록 오랫동안 공모전과 살롱사진의 형식을 익히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행처럼 유지되어 오던 구도와 공간 배치,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려는 동시대의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살롱 아루스는 신선회를 극복, 해체했다기보다는 계승, 발전시켰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요컨대 리얼리즘의 원칙에 묶여있었던 신선회 사진의 실제 경향과 형식에는 살롱 아루스가 공식적으로 천명했던 조형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살롱 아루스가 신선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서 두 모임의 사진 경향을 동일시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살롱 아루스는 조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애초에 리얼리즘 사진이 내걸었던 원칙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살롱 아루스의 사진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는 이상규와 김행오의 경우는 현실 속에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조형미에 탐닉함으로써 본래의 리얼리즘 사진과는 상이한 길을 걸어갔다.

반면 정범태는 조형성의 원칙을 밀고나가기보다는 오히려 리얼리즘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해 그것을 기록의 언어로 발전시켜나가고자 했다. 이는 그가 신선회 창립 초기부터 줄곧 신문사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사회현실의 한복판에 서있었던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신선회를 계승한 살롱 아루스가 조형성을 사진의 주요 원리로 삼았다면 리얼리즘 사진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했던 정범태는 현실을 집약적으로 함축하여 보여주는 순간 포착을 방법론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그는 실험적인 사진이나 조형성을 추구하는 사진을 폄하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조형성과 기록성은 살롱 아루스가 취할 수 있었던 두 가지의 다른 길이었으며, 사진가들에게 그것은 선택의 문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lsquo;결정적 순간&rsquo;, 서울 경기고등군법재판소, 1961

1960년 ‘아사히신문’ 국제살롱에서 10걸상을 수상한 ‘결정적 순간’은 정범태의 사진이 신선회와 살롱 아루스를 거치면서 도달한 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서울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여인과 엄마의 손을 붙잡고 서있는 어린 딸의 모습을 애처롭게 보여주는 이 사진에 그는 까르띠에-브레송의 용어를 빌려 ‘결정적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기록의 방법론은 현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에 이르면 무척 다양해지지만 한국적 기록의 모범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50~60년대의 사진가들은 서양 사진에서 자양분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양 사진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가들은 포토저널리즘과 미국의 모더니즘적 형식주의, 르포르타주와 같은 상이한 유형의 사진을 모두 리얼리즘의 범주로 받아들였다. 그중에서도 현실의 정황을 집약적으로 농축한 순간을 고정시킨다는 스냅의 원칙은 매혹적인 방법론이었고, 순간포착을 효과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사건 사냥꾼이 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사진기자의 길을 걸어온 정범태는 수많은 사건, 사고의 현장에서 줄곧 역사의 목격자를 자처했다. 그중에서도 1960년 4월18일 밤 자유당 정부가 동원한 정치깡패들에게 고려대 학생 시위대가 피습당한 현장을 포착한 특종 사진은 다음날 조선일보 조간에 게재되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를 비롯해 월남 파병 등 수많은 사건과 각종 행사를 취재했다.

시각자료로서의 기록

그러나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기자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범태 사진의 정수가 여전히 50~60년대 한국의 생활상을 ‘리얼리즘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에 있음은 명백하다. 서울 곳곳의 거리와 시장풍경, 그곳에서 살아가는 상인과 도시 근로자들, 남루한 옷차림의 행인들, 가난과 빈곤 속에서도 활기차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은 전후 한국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시각자료이다. 그밖에도 전국 각지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포획한 이미지들은 그 시대의 사회, 경제사를 이해하는 데에 요긴하게 쓰일 터이다. 거기에는 한 시대의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 삶의 양태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노동과 놀이, 복식, 의례, 생활풍습, 주거에서 식문화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사라지고 없거나 사라져 가는 근대 한국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역사는 정치사나 사건사 중심으로 구성됨으로써 관념적인 추상이 되는 모습에서 벗어나 비로소 살아있는 인간의 역사가 된다. 


서울 홍제동 화장터, 1977


그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신선회 회원들을 비롯한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가들은 사회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준다는 원칙은 갖고 있었지만 그에 부합하는 형식을 충분히 발전시켜 나가지는 못했다. 한편에서는 단지 현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추출해내거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조형적으로 구성하는 데에 정성을 쏟은 나머지 리얼리즘 사진을 기록의 언어로 완성시키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범태의 사진에도 역시 이와 같은 다양한 모습이 공존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몇 점은 50~60년대 리얼리즘 사진을 구성하는 기준에 충실히 부합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오히려 객관적인 기록의 언어보다는 주관적인 조형 언어에 가깝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지만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다수의 사진은 조형성에서 멀어져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그의 사진세계의 중심축을 이루는 리얼리즘의 정신에 더 근접해 있다.

50년대의 리얼리즘 사진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다큐멘터리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으나 한국 사진에서 기록의 가치를 추상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사회현실의 모습을 기록하고자 했던 최초의 흐름이었다. 비록 그에 적합한 형식을 온전히 담보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이를 통해 한국사진은 사진과 사회현실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었다. 또한 기록을 사진의 철학으로 삼아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50~60년대의 리얼리즘 사진을 딛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진세계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정범태의 리얼리즘 사진은 70년대의 한국사진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새로운 기록의 언어가 전개되기 위해 필요한 디딤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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