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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Siseon"

분단의 향기

by 淸風明月 2022.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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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열 네 살이었다.


지난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에서 주한미군 2사단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압사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54톤에 달하는 부교운반용 장갑차의 육중한 무게에 여학생들의 온 몸은 으깨어졌고, 내장과 뇌수가 터져 나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이날 참변을 당한 신효순, 심미선 두 여학생은 친구의 열네 번째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한 동네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단짝이었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열네 살이라는 꽃보다 여린 나이에 함께 고통스런 죽음을 맞았다.

사고는 주한미군 측의 잘못이 명백했다. 하지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한국경찰은 조사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미군 측은 자체조사 결과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발뺌했다. 당시 한국은 월드컵의 열기에 폭 빠져 있었고,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은 여론화되지 못한 채 잊혀질 뻔했다. 그러나 미군의, 미군에 의한, 미군을 위한 조사와 재판과정에서 사고가해자들이 모두 무죄평결을 받으면서 한국인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조사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던 한국정부는 재판과정에도 아무런 참여를 하지 못했다. 불평등한 SOFA협정 때문이었다.

시민단체와 언론의 집요한 추적과 조사로 미군 지휘관과 운전병의 과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군법정은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에 대해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심지어 지휘관 메이슨 대위는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한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시민의 양심과 분노가 폭발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미대사관을 에워싸고 미국의 사과와 SOFA 개정을 요구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자주권 회복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진은 그 뜨거웠던 현장의 기록이다.

<노순택 사진집 ‘분단의 향기’(도서출판 당대) 두 번째 장에서>

 

빗방울 맺힌 故신효순 님의 영정. 두 소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단짝친구였다. - 2002. 8. 7 서울 광화문 미대사관 앞 -

 

故심미선 님의 영정. - 2002. 8. 7 서울 광화문 미대사관 앞 -

 

두 소녀가 비명 속에 압사당한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 사건현장. 아이들은 친구의 열네 번째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54톤에 달하는 부교운반용 장갑차의 궤도는 차선을 넘어 아이들의 몸을 덮쳤다.

 

주한미군의 발뺌과 정부의 미온한 대처로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시민단체와 일부 언론의 끈질긴 탐사취재는 미군 지휘관과 운전병의 과실을 명백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 사건현장에 나붙은 목격자를 찾는 현수막. - 2002. 8. 4 -

 

비를 맞으며 사건현장에서부터 두 소녀의 집까지 추모행진을 하는 시민단체 회원들. -&nbsp; 2002. 8. 4 -

 

주한미군과 한국정부에 대한 규탄의 메시지를 담은 인간띠잇기가 용산 미8군기지 앞에서 열리자 한국경찰이 막아서고 있다. - 2002. 8. 15 -

 

미군의, 미군에 의한, 미군을 위한 군사법정은 가해 미군 모두에게 무죄평결을 내렸다. 지휘관 메이슨 대위는 기소되지도 않았다. 무죄평결을 받은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은 곧바로 미국으로 도주했다. 군사재판이 열린 경기도 동두천 캠프 케이시 앞에서 문정현 신부(오른쪽)와 한상렬 목사가 삭발로 항의하고 있다. - 2002. 11. 21 -

 

군사법정이 열린 동두천 캠프 케이시 앞에서는 무죄평결에 항의하는 혈서가 줄을 이었다. - 2002. 11. 21 -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미국의 사과와 재판권 이양을 요구하며 대학생 7명은 미대사관 담을 넘고 들어가 건물 외벽에 나부낀 성조기에 불을 붙이려 시도했으나 모두 경찰에 연행됐다. 삼엄한 경찰의 경비망을 뚫고 미대사관 담을 넘어가 성조기를 태우려 한 사건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경비책임을 진 종로경찰서장이 물러나는 등 파장이 일었다. - 2002. 10. 1 -

 

항의의 물결엔 청소년도 빠지지 않았다. 살인미군에 대한 무죄평결 무효를 외치며 &lsquo;2차 청소년 행동의 날&rsquo; 시위에 나선 여중생들.

 

항의물결은 서울 경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북변동 롯데리아 네거리 앞에서 촛불시위에 나선 중고등학생들.

 

항의집회를 마치고 미8군기지 앞으로 행진하려는 시위대와 이를 막아선 경찰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종교계는 한 목소리로 두 소녀의 죽음을 추모하고, 오만한 미국과 무력한 한국정부를 질타했다. 미대사관 옆 시민공원에서는 천주교와 불교, 개신교, 원불교 등 종교인사들의 연이은 삭발항의와 단식투쟁이 벌어졌다. 두 소녀의 극락왕생 천도제가 열린 조계사.

 

어이없게 딸 효순이를 잃은 신현수 씨가 주한미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하려 했지만, 대사관은 이를 거부했다. 대사관 앞을 지키는 한국경찰의 완강한 제지 앞에 신현수 씨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어린 소녀들을 깔아죽이고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발뺌했던 미국은 지탄의 대상이 됐다. 시민의 분노는 미국에 대한 이유 없는 반대와 증오가 아니었다. 불평등을 평등으로 바꾸고, 폭력보다는 평화를 염원하는 이유 있는 저항이었다. 시민들의 손에 찢겨지는 대형 성조기.

 

2002년 6월 &lsquo;붉은 악마&rsquo;의 함성이 울려퍼졌던 서울시청 앞 광장은 6개월 뒤 자주권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촛불로 가득찼다. 여중생범대위는 12월 14일을 &lsquo;주권회복의 날&rsquo;로 정하고, 가장 큰 규모의 시민집회를 열었다. 시민들이 촛불집회 도중 대형 태극기를 손에서 손으로 건네고 있다.

 

여중생 추모 1주기 촛불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바닥에 모아놓은 촛불.

 

촛불시위는 해를 넘기고도 끝나지 않았다. 광화문 교보문고 앞 작은 공원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크고 작은 촛불집회가 열렸다.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가 양손에 촛불을 들고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2002년 열네 살 고운 소녀였던 아이들은 이듬해도, 그 다음해도 여전히 열네 살이었다. 2004. 6. 12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작은 공원에서 열린 2주기 추모식에서...

 

철원 이평리의 김준권 할아버지가 죽었다던 지뢰밭을 찾아갔을 때 들꽃 한 송이가 지뢰에 기대 피어 있었습니다. - 이시우 -


이 사진은 이시우 작가의 비무장지대 미확인 대인지뢰 사진으로 '군사시설 보호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말처럼 이 사진이 군사기밀을 누출 한 것인지는 이 사진을 보는 분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물은 싸우고 있었다. 모든 난폭함과 무질서를 동원하여 지뢰를 옮겨놓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지뢰지대 이외에는 지뢰가 없다는 미국과 한국정부의 공식발표와 싸우고 있었다. 언제든지 당신의 생활에서 전쟁을 밟을 수 있다고 아우성치며 물은 싸우고 있었다.
- 이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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