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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

Eugene Richards (유진 리차드)

by 淸風明月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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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리차드는 1944년 메사추세스에서 태어났다. 노스이스트대학과 메사추세스공대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특히 그는 마이너 화이트 아래에서 수업을 받았다. 73년 [조그만 위안 또는 놀라움-알칸사스의 삼각주]를 출판했다. 74년 이후, 그는 프리랜서 사진가로서 [라이프], [뉴욕타임스 매거진], [게오] 등의 잡지사를 통해 사진을 발표했다. 79년부터 최근까지 매그넘 멤버로 활동했다. 지금까지 9권의 책을 냈고, 구겐하임상과 코닥상, 올해의 매거진 사진상, 캐논 포토그래퍼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사진 인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며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다.

그는 최근 비디오저널리트로 활동 중이며, 그의 작품 [그날은 왔다](USA /2000 /26min/Beta/Color/Documentary)가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는 9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77년 Family of children, 78년 Dorchester Days, 83년 50Hours(Ridge Press), 86년에 Exploding into Life(Aperture), Below the Line Living Poor in America(1987), The Knife and Gun club(1989), Cocaine True Cocaine Blue(1994, Aperture), Eugene Richards Americans We(1994 Aperture Foundation). 아파쳐에서 86년에 출판한 책은 그해의 니콘 BOOK상을 받았습니다.

1987년 미국의 빈곤에 관한 그의 다큐멘타리 작업은 I.C.P.에서 그해의 최고의 포토저널리스트로 선정됐다. 1989년에 Atlantic Monthly Press에서 출판한 응급실에 관한 사진들인 The knife& gun club이란 책은 미국대학응급 의사들로 부터 최고의 상을 받았다. 프리랜서 사진가인 유진리차드의 사진작업들은 Stern(슈테른),Life, GEO, Smithsonian, The NewYork Times Magazine등과 같은 유명한 잡지에 실렸다. 그는 미국에서 예술가들에게 주는 기부금인 National Endowment를 74년과 83년에 걸쳐 두번이나 받았으며, 1980년 구겐하임재단 장학금(Guggenheim Foundation Fellowship)과 82년에 I.C.P.에서 수상하는 유진스미상(W. Eugene Smith Memorial Award)을 수상했고, 88년 91년 두번이나 최우수 라이카상을 수상했다. 전세계 포토저널리즘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상이며 포토저널리스트로서 가장 영예로운 상인 코닥상(Kodak crystal Eagle Award)을 1992년에 수상했다. 이 상은 사진가 자신이 신청하는 것이 아니라 추천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로 이점이 그의 진짜 작품의 실체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NPPA(미국보도사진가협회)에서 매년 개최되는 시상식의 잡지부문에서 그해의 최고의 Picture story를 만든이에게 주는 상인 케논포토에세이상도 여러번 받았다. 그는 다큐멘타리 사진가이며 예술가이며 사진인류학자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포토저널리스트란 점이다.

유진 리차드에 대해...

그는 25년간 사진작가로 일해왔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베트남반전데모가 극심하던 때 였다. 그 역시 이 시위에 참여했고 체포됐다. 그는 시위대의 주요 인물로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는 데모를 주도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정부는 그에게 형을 삭감하는 대신 빈민들을 위한 사회봉사명령을 내렸다. 그가 처음 사진가로서 일을 시작했던 곳은 알칸사스의 작은 도시였다. 그는 이곳의 작은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가난한 흑인 농부들을 찍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사진의 실무를 배웠다고 한다. 취재원들에게 접근하고 그들과 친숙해지는 과정이었다. 중산층의 백인이었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흑인들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당시에 찍었던 [묘지를 파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죽음과 유머가 섞여 있는 삶의 복잡성을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알칸사스를 떠나야 했다. 그의 몸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흑인들을 우호적으로 다룬 그의 기사 때문에 KKK단이 신문사로 몰려와 폭력을 휘둘렀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주변을 찍기 시작했다. 이웃을 방문해 지금까지 모르던 사람들을 차분히 촬영했다.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 사진의 앵글이 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질문에 그는 양로원의 할머니를 촬영한 사진을 예로 든다. 할머니의 얼굴은 우측의 구석에 극단적으로 위치하고 있고 딸의 편지가 왼쪽에 걸려있다. "딸의 사진과 편지에는 '사랑해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 딸은 2년 전에 그 곳에 왔었다. 할머니의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는 젊은 시절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도로시라는 여성 저널리스트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함께 살았다. 도로시는 유방암에 걸려 있었다. 둘은 유방암에 대한 사진스토리를 제작했다. 도로시는 그에게 협력을 했다. 몇 년 후 그 둘의 생활은 정리되었다. 도로시는 결국 암으로 죽었다. 그에게는 유방암에 대한 완성된 사진스토리만이 남았다.

그는 [뉴욕타임스매거진]의 요청을 받고 아프리카의 모기로 인해 눈이 먼 사람들을 취재하기도 했고, 중국 청도의 농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는 또 미국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매거진에 실리기 힘든 사진들이었다. 그는 "미국에서는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사진들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너무 뚱뚱한 사람이 나와도 실릴 수 없고, 흑인이 등장하면 잡지가 안 팔린다"고 한다. "동성애 부부와 아이가 등장해도 안 된다. 미국인들은 세계를 보는 눈이 그리 넓지 않은 듯 하다"고 한다. 그는 한 잡지사로부터 호스피스(죽어 가는 사람들을 간호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 받았다. 유진 리차드는 그 제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잡지사는 그에게 작업이 끝나면 사진집으로 출판을 해주겠다고 다시 제의했다. 그는 호스피스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가족들에게 "이 기록은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의 심정을 공감하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결국 출판사는 이 사진이야기의 출판을 거절했다. 현실의 고통은 독자들이 선호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다. 결국 취재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말았다. 유진 리차드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작가인 동시에 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까지는 그의 사진집 [코카인 트루, 코카인 블루]의 영향이 크다. 그가 코카인 문제를 시작한 것은 "많은 흑인들이 잡지에 눈이 가린 채 나오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이 모두 범죄자처럼 보였다"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이 어떻게 마약중독자가 되어 가는지 보여 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최근에 나이지리아를 취재했다. 내전도 없고 기아도 없는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 관한 것이다. 또한 네브라스카의 작은 도시에 관한 사진 취재를 마쳤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마무리짓기 위해 조용히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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