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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

Minor Martin White (마이너 화이트, 1908~1976)

by 淸風明月 2024.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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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tude is wonderful, too much is stagnating.
Gregariousness is healthy, too much scatters the forces.
( 고독이란 멋있지만 지나치면 사람이 발전이 없고,
어울려 사는 것은 건강에 좋지만 지나치면 힘이 분산되어 버린다. )

사진가에게는 어느 정도의 고독이 필요한가? 인간에게는 빵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예술가에게는 빵보다도 고독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마이너 화이트의 말처럼 창작에 도움이 될 정도의 알맞은 고독을 누릴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특히 예술가에게 있어 고독은 창작의 연료나 마찬가지지만 마이너 화이트는 유달리 고독했던 사진가였다. 그것은 그의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신의 고독을 외부로 드러내 소리치며 요란하게 작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욱더 웅크리고 내부로 침잠하면서 낮은 울림으로 강한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마이너 화이트는 후자로서 그의 작품은 한 고독한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찍은 보잘 것 없는 들풀, 평원에 홀로선 집, 고요한 문, 성에 낀 신비한 유리, 등등.

그는 1908년 미네소타 미네아폴리스에서 7월 9일 태어났다. 사진을 취미로 했던 할아버지를 통해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되다. 어린나이 인 7-8세에 카메라를 소유하면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고, 12살 되던 해 할아버지가 캘리포니아로 이사가면서 사진 장비 일체를 그에게 남겨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사진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의 사진이 남다른 점은 그가 미네소타 대학에 들어가서 식물학을 전공하다 중도에 포기하고 야간학교에서 영어와 식물학을 복수로 전공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 당시 그의 목표는 100편의 시를 쓰는 것이었다.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던 그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사물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글로 남기는 시인이나, 그것을 이미지로 남기는 사진가는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위대한 시나 사진 역시 그 작품의 시작은 감정이 절제되어 빈공간을 뭔가로 채워야 하는 고독한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도 비슷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하게 된 것은 1945 제대 후 뉴욕으로 가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에서 일하고 있는 뷰먼트 뉴홀과 낸시 뉴홀Beaumont and Nancy Newhall 을 만나면서 부터다. 뉴홀 부부는 이후에도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간 마이너 화이트는 1946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Steichen, 해리 캘러한 Harry Callahan, 폴 스트랜드 Paul Strand, 브렛 웨스턴 Brett Weston등과 교류하면서 사진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특히 안셀 아담스가 맞고 있는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의에 사진과에서 일할 때 안셀 아담스 옆집에 살면서 개인적으로 친해졌다. 1951 콜로라도의 아스펜에서 열린 “Camera and Reality“에 참가하면서 Aperture잡지의 아이디어를 얻어 1952 도로씨어 랭Dorothea Lange, 낸시 뉴홀Nancy Newhall, 안셀 아담스 Ansel Adams, 뷰먼트 뉴홀Beaumont Newhall, 바바라 모건 Barbara Morgan,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계간으로 애퍼추어 사진전문 잡지를 창간했다. 편집장 및 생산책임자로 선출되어 그 해 4월에 첫 호가 발간되었다. 애퍼추어 창간은 마이너 화이트가 그 동안 사진에 대해 느낀점을 글로 발표하는 장이 되었음과 동시에 순수사진의 한 계보를 형성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7번째 잡지를 발간하고는 심각한 경제난에 부딪혀 잡지 발행의 중단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셜리 버든 Shirley Burden 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발행할 수 있게 되는 우여 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후 1964년 마이클 호프만 Michael Hoffman에게 그 책임을 넘겨주고, 1974년 편집진에서 완전히 은퇴하기 까지 20여년간 이 잡지는 마이너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이너 화이트를 이야기 할 때 사진가로서의 모습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 이다. 1956 이스트만 하우스의 큐레이터 직을 사임한 뒤 로체스터공과 대학에서 강사로 사진을 가르칠 때, 낸시 뉴홀로부터 동양 사상과 신비주의에 대한 책을 선물 받고 나서 그는 사고방식은 물론 생활전반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에게 사진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사진이라는 한 장의 결과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그래서 사진과에서 명상을 가르친다거나 동양사상을 가르치다 보니 반발도 많이 있었다. 사진을 배우러 온 것이지 명상을 하기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학생들의 비난을 듣기고 했다.

하지만 사진을 배우다 보면 누구나 사진기술의 한계를 느끼기 된다. 사진기술을 아무리 완벽하게 습득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비싸고 성능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뻔한 논리일지라도 사진은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지 그 사람의 기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이너 화이트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노쓰 유니언 72번지(72 North Union)집을 구입하면서 부터 동양식 도제 수업처럼 학생들이 그의 집에 머물면서 사진을 배우는 입주학생제도를 시작했다. 마이너 화이트는 학생들과 숫가락을 이용하여 동양식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기도 하면서 사진작업을 같이 했다.
로체스터 공과대학에서 1965 매샤츄세츠MIT 공과대학 교수로 이직하고 알링턴 파크 에비뉴 203번지의 집을 새로 사들이면서 그의 입주 워크샵은 더욱더 각광을 받게 된다. 1976년 6월 24일 매사츄세츠 종합병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알링턴에 살면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다.


<약력>

1937년 사진 시작, 미국노동진흥국(WPA) 근무
1945년 에드워드 웨스턴,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와 함께 공부
194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사진작가 앤슬 애덤스와 교분
1952년 사진잡지 [애퍼처 Aperture] 창간, 편집인
1953년 잡지 [이미지 Image] 편집
1965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창작사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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