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고향, 4월 혁명
1. 4월혁명의 배경 : 경제위기와 보안법 파동
1950년대 한국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고 자생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정부 총예산의 절반을 원조물자를 팔아 채울 정도였다. 그러다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이 무상원조를 차츰 유상원조 또는 상업차관으로 바꾸어 나가자 그 영향은 곧바로 나타났다. 이미 자립경제를 건설하는 데 실패했던 우리 경제가 불황에 휩싸인 것이다. 원조물자의 불공정한 분배 때문에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넘어진 탓에 경제가 불황에 휩싸이자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농촌의 사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원조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보냈던 것은 대부분 식량원조였다. 이처럼 값싼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농산물 가격이 뚝 떨어지게 되었고 농민들은 일년 농사의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게다가 이승만 정권이 정치자금을 챙기려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농산물을 수입해 농촌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민심은 이미 자유당과 이승만을 떠난지 오래였다. 곳곳에서 이승만과 자유당에 반발하는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영구집권을 노리고 있는 이승만에게 국민들의 불만은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특히 이승만은 언론보도에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언론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1958년 11월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공산당의 흉계를 분쇄하기 위해' 1948년 여순사건 직후 제정되었던 국가보안법을 강화해야 한다며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개정안에 '언론 제한과 헌법기관의 명예 보호'라는 조항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 법안에 따르면 이승만에 반대하는 것은 모조리 금지되었다. '국가기밀폭로죄'와 '불경죄'는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이 조항들에 따르면 자유당과 이승만에 대한 비판은 물론, 뇌물수수, 테러행위, 부정부패 등도 모두 국가 기밀에 해당되었다. 또한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을 비방한 자는 불경죄를 저지른 것이 되어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
야당이 국회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법에 동의해 줄 리 없었다. 위기에 몰린 이승만과 자유당은 1958년 12월 24일 무장 경찰까지 동원하여 국회를 포위하고 야당 의원들을 국회 지하실에 감금한 채 여당인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이 법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이 일을 2․4정치파동이라고 한다.
또 이승만은 폭력단을 중심으로 '반공청년단'(1959년1.22)을 만들어 정치에 이용하기까지 하였다. 1959년 4월 30일에는 야당계 신문으로 이승만과 자유당을 자주 비판해왔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켜 버렸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국민들의 고통을 조금도 헤아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국민이야 어떻게 되든 오래도록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1960년 선거를 대비하는 자유당의 태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1960년 5월중으로 예정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이 선거에는 이승만 정권 아래 치러진 어느 선거보다도 엄청난 부정이 준비되었다.
2. 4․19혁명의 시작 : 3.15 부정선거
1960년 봄이 오고 있었다. 국민들의 눈과 귀는 5월로 예정된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 모아져 있었다.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여전히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이었다. 그는 정부수립 이래 12년 동안 세 번에 걸쳐 대통령을 지냈기에 국민들은 이제 그만 물러나 주기를 원했다. 거듭된 실정과 독재로 민심은 이미 이승만과 자유당을 떠나 있었다. '못 살겠으니 갈아보자'는 야당의 낯익은 선거구호는 국민들의 속마음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자유당의 부정은 극에 달했다. 59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5부 장관을 경질, 내무 최인규, 재무 송인상, 부흥 신현확, 농림 이근직, 교통 김일환을 임명하고, 도지사와 일선 경찰서장을 선거팀으로 교체했다. 최인규는 취임사를 통해 "공무원과 공무원 가족은 대통령과 정부의 업적을 국민에게 선전해야 하며 이 같은 일이 싫은 공무원은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공무원을 공공연하게 선거에 동원했다.
한편 자유당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 차 미국에 건너간 틈을 타 1960년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있는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병옥은 "이것은 페어 플레이 정신을 망각하고 등 뒤에서 총을 쏘는 격"이라는 비난성명을 발표했지만 선거일이 조정되지는 않았다.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한 조병옥은 2월 6일 개복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경과는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 것은 2월 15일 아침이었다. 선거를 꼭 한달 남겨 놓고 조병옥은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에서 사망한 것이다. 이제 이승만이 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은 부통령 선거로 모아졌다.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자유당의 부정 선거 음모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선거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개표를 하니 무더기 투표, 사전투표 등으로 자유당 표가 전체 유권자 수보다 더 많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선관위는 당황하여 개표를 중단했고, 이승만과 이기붕에 대한 지지율을 낮춰서 발표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92% ▶ 88.7%, 95%▶ 79%). 3․15선거가 부정과 폭력으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많은 국민이 분노에 떨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용기있게 떨쳐 일어선 것은 마산의 시민·학생들이었다. 마산의 시민·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이를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내게 되자 격분하여 남성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 이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시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는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16살의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신포동 앞 바다에 떠오르자 마침내 온 시민이 궐기하여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4월혁명의 불길을 당겼다.
3. 민주주의의 꽃 : 4․19혁명
김주열의 시체 인양으로 마산의 2차 시위가 4월 11일에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특히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후 귀교 길에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반공청년단 등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자유당 정부의 무모한 행위는 오히려 의분에 찬 학생들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4․19일 화요일 오전이었다. 국회의사당 앞에 10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정오 무렵 완전 무장을 한 경찰이 저지선을 펴고 있는 중앙청으로 돌진하였다. 그러자 경찰이 학생 시위대에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확대되어 갔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총을 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중앙청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피의 화요일'). 시위 학생들은 피가 끓어올랐다. 분노한 학생들은 서울 시내 곳곳에서 총을 쏘는 경찰에 맞서 싸웠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했다.
정부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서울 등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참모총장이던 송요찬 중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파괴방지에 전념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한편 이승만대통령은 4월 21일 내각 교체, 22일 자유당 총재직 사퇴, 이기붕의 모든 공직 사퇴로 국민들의 반발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면서도 이승만과 자유당은 여전히 학생들의 시위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선전하여 국민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연일 이승만의 하야를 주장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대학 교수들도 더 이상 학생들의 희생을 두고 볼 수 없었다.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의 4백여 명의 교수들은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깃발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 행진을 하였다. 이 4․25교수단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 밤부터 다시 시민·학생들이 궐기했으며, 26일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이승만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3만여 명의 시위대가 '이승만 하야'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시위에는 서울 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 '언니 오빠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라고 씌여진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오전 9시 무렵 학생과 시민들은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기붕의 집을 부수고 가구와 장식품들을 불태웠다. 또 9시 45분 무렵에는 파고다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려 목에다 줄을 걸고 끌고 다녔다.
이승만은 이날 오전 시민대표 5명과의 면담, 그리고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의 설득으로 결국 하야를 결정한다. 이승만은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마침내 오후 1시 하야 성명을 통해,
①국민들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②3․15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했다.
③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④선거로 인한 불만스러운 점을 없애기 위하여 이기붕 의장을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조치했다고 발표했다.
방송을 들은 국민들은 서로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드디어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의 승리 뒤에는 잊을 수 없는 희생이 있었다. 모두 186명의 젊은이들이 꽃다운 목숨을 바쳤고, 부상을 당한 사람이 6천여 명에 달하는 등 값비싼 희생을 치렀다. 4월 혁명의 승리는 민주주의의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민주주의의 시작일 뿐이었다.
※ ① 이승만은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겼다가 5월 29일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승만이 공항으로 갈 때 많은 국민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으며, 만수 무강을 빌었다.
② 이기붕은 4월 28일 가족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4. 에필로그
4․19가 일어나는 동안 전 세계의 이목은 한국으로 집중되었고, 마침내 피의 탄압을 물리치고 독재자 이승만을 거꾸러뜨리자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터키의 청년 학생은 4․19혁명을 숨죽이며 지켜보다 4월 28일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부심이 한국민들보다 어찌 못하랴!" 라고 외치면서 독재자 멘텔레스를 축출하기 위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이스탄불 거리에 나타난 계엄군 탱크 앞에 연좌한 채 한국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 프랑스의 마치지 극동 지국장 스무라씨는 "4.19로 인해 일본인은 처음으로 한국인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재일 한국인에게 혜택을 줄 것이다" 라고 기고하였다.
영국의 런던 타임스는 4월 27일 "마치 이 나라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과 같았다. 스스로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역사적인 지난 한 주일은 외국의 비평가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한국인이 자유 정부를 향유할 자격을 가지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보도하였다. 드 프레 파리 시의회 의장은 5월 10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나는 최근 한국 학생들이 보여 준 바와 같은 그 고귀한 정신과 그들의 용기, 그리고 애국심에 크나큰 존경심을 품고 있다. 이에 나는 프랑스 국민의 축의를 한국 국민에게 전하고 싶다."
한 달이 지난 5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는 '4․19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서울특별시 남자 중·고등학교 대표 김석준은 추도사를 통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을 이렇게 밝혔다.
“이제 원한도 슬픔도 다 가고 시간은 역사의 단계를 밟아갑니다. 고귀한 피로 말미암아 잃었던 국민 주권도 도로 찾고야 말았으니, 얼마나 장절 쾌절한 역사의 행진입니까? 민주주의의 새벽은 도래하였습니다. 이 땅에 비로소 희망과 건설이 태양이 자애로운 미소를 던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악몽에서 깨어나 제2공화국의 위대한 탄생이 힘차게 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열의 영전에 굳게 맹세합니다. 선열의 뿌린 씨에서 돋는 새싹을 수호하고 육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새싹이 자라나서 꽃이 필 날을 믿고 열매가 맺어질 날을 믿으며 그날을 위하여 선열들이 남긴 뜻을 이어서 투쟁하겠습니다. 조국의 앞날에 어떠한 폭풍이 오고 암야가 뒤덮더라도 선열들이 남긴 뜻을 계승하여 삼천리 강토에 세계 만방에서 제일 가는 민주낙원을 건설하고야 말 것을 맹세하면서, 여기 모든 학우들이 깊이 영전에 고개 숙이고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며, 아울러 무궁한 명복을 누리시기를 비옵니다.”
5. 참고자료(당시의 시와 편지)
<푸른 하늘을> 김수영 시인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아 사 녀> 신동엽 시인
모질게도 높은 성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 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에서 읍
학원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들은
그혀 도망쳐 갔구나.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
자 속에 총알을 박아보았나?--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사월 십구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 오른 아사달 아사녀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
쥐구멍을 찾으며
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
흘러 가버리렴아, 너는.
오욕된 권세 저주받을 이름 함께.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개나리, 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해 바닷가의 촌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 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처럼 일어난 이 새피 뿜는 불기둥의 항거 ---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 --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을 두고 젊음 쳐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서울대 4월혁명 선언문>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악의 현상을 규탄 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천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체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이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도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어설픈 것임을 교시한다.
한국이 일천한 대학사(大學史)가 적색 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의 구획을 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 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줄기는 자유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헤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쟁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박탈하기 위한 자유의 싸움은 바야흐로 풍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주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으로 발벗고 나섰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락되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사를 보라! 그것은 가식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 것도 모른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협박과 폭력으로써 우리를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생의 양심을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원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추 하에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우리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 한성여중 2학년생, 진영숙
- 총에 맞아 죽기 4시간 전에 어머니에게 쓴 유서같은 편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 지금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가하시겠지마는 온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숩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 서울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의 글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면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그리고 25일고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올해 겨울> 신 경 림
올해 겨울은 춥구나 / 따스한 겨울이라서 더욱 춥구나
무학여고 가까운 소줏집에 앉아
죽산 조봉암의 죽음 / 거리를 메운 노래를
텔레비전을 보면서 / 혼자서 술을 마시는 저녁은
아카시아 꽃 냄새가 날리던
삼십 년 전의 그 봄보다 더욱 춥구나
한강 백사장으로 가는 대신 / 학교 운동장에 앉아
의로운 사람의 목쉰 얘기를 듣던 / 그 봄보다 더욱 춥구나
의로운 사람, / 아, 의로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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