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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강의노트][참고자료] 대통령 3선 고지는 몰락의 고지

by 淸風明月 2024.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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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3선 고지는 몰락의 고지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의 가장 큰 차이는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대통령에게는 임기가 보장된다는 것과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는 회수가 제한된다는 것이다. 반면 내각책임제의 총리에게는 임기의 보장도 없고 임기의 제한도 없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막강한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재선으로제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류 최초의 여성 판도라가 제우스에게서 받은 상자를 열자마자 인류를 재앙에 빠뜨린 모든 죄악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처럼 욕망으로 가득찬 권력자가 헌법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재선의 굴레를 벗어나는 순간 권력의 재앙이 시작되는 것이다. 장기집권의 욕망이 비극을 배태한다는 말이다.

 

이승만은 정권을 수립하면서 지주계급과 타협하여 지주계급의 대표들이 장악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도록 대통령간선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지주계급으로 구성된 한민당과 결별한 후 국회에서 대통령에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한국전쟁이 진행중인 난리통에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었다. 52년에 이루어진 이 개헌을 발췌개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로 재선에 성공한 다음 다시 헌법개정 작업에 착수하여 54년에는 현직 대통령에 한해서는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였다.

 

사사오입 개헌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 재적의원 2/3의 찬성을 얻은 다음 국민투표를 통과해야 한다. 문제는 국회의원의 찬성을 받는 것이다. 당시 국회 재적의원이 203명이었으니 개헌선인 재적의원의 2/3136명이었다. 203명의 2/3135.3333의 무한소수로 나오므로 136명이 되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에 맞추어 개헌작업을 추진했고 136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국회표결에 들어갔다. 그러나 투표결과가 찬성 135, 반대 60, 기관 7명으로 나와 개헌안이 부결되었다. 1명이 투표에 불참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장은 개헌안의 부결을 선언하고 폐회를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경무대 대책회의에서 이승만은 서울대 수학과에 재직중인 최모 교수의 조언을 받아 135명의 찬성으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203명의 2/3135.3333의 무한소수인데 사람을 소수로 나누는 것은 비인간적이니 “4 이하는 내리고(四捨) 5 이상은 올리는(五入)”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를 동원하여 135명이 찬성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자유당은 그 다음날 국회를 소집하여 전날 부결되었다고 선언한 개헌안을 번복하여 가결된 것으로 처리하였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정치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풍경이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없어지면서 이승만의 무한질주가 보장되었다. 그나마 대통령직선제라는 선거가 남아 있었으니 유일한 방법은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뿐이었다. 민주당은 56년 대통령선거에서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야당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신익희, 조병옥의 갑작스런 사망은 야당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고 화무십일홍이라고 부패한 권력이 십년을 넘기는 것은 어려웠다. 계속된 야당의 불운과 이승만 정권의 독주로 정권의 오만함과 부정부패가 극심한 지경에 이르자 결국 국민이 나서서 부패정권을 심판하였다. 노애국자이자 국부를 자처했던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경무대에서 사저인 이화장으로 옮겨 한 달간 칩거하다가 전세기를 타고 홀로 하와이로 향했다. 그리고 5년 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다. 3선고지를 넘어선 비타협적 독재자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한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로 장면 정권이 붕괴되고 2년간의 군정기간을 거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이른바 민정이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최고권력자인 박정희가 군인의 신분에서 민간인으로 전환한 것이니 군사정권을 민간에게 넘겨주었다는 뜻의 민정이양이 아니라 군인이 민간인으로 신분을 변경했다는 뜻의 민정전환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어떻든 민정이양을 위해 그 전 해인 621226일에 헌법을 개정해서 4년 중임의 대통령제 권력구조를 만들었다. 이것을 제3공화국 헌법이라고 하는데 이때만 해도 군인 박정희는 이승만의 노욕에 대해서 교훈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헌법의 내용도 심하게 훼손되지 않았다. 그 정신으로 63년 대통령선거와 67년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다음에는 물러날 차례였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곧 개헌논쟁이 불거졌다. 헌법에 있는 대통령 중임제한 규정을 고쳐 박대통령이 한 번 더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당인 신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인 민주공화당 의원들조차도 강하게 반대했다. 신민당 유진오 총재는 박정희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 했다. 국회 사정으로만 보면 개헌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군사독재 아래서 국회의 위상이 서푼도 안된다는 사실을 잊었던 모양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실시된 공작은 즉시 효과를 내는 법이다. 개헌안은 공화당 108, 정우회 11, 야당인 신민당 3명 등 122명의 이름으로 발의되었다. 30일의 공고기간이 끝나자 공화당은 신민당 의원들을 따돌리고 국회 제3별관에서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고 명시한 헌법 693항을 6분만에 변칙 처리했다. 52년 부산정치파동, 54년 사사오입 개헌파동에 이어 세 번째의 정치파동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6910173선개헌안은 국민투표에 회부되었다. 개헌한에 대한 국민투표는 77.1%의 투표율에 67.5%의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이 개헌안에 따라 박정희는 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과 싸워 이김으로써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심이 천심이라더니 693선개헌과 717대 대통령선거에서 소문처럼 나돌았던 박정희 총통제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3선 대통령이 되자마자 박정희는 종신대통령을 준비했고, 7274남북공동성명을 유신체제를 위한 상황으로 활용했다. 간단하게 줄여 말하면 남북통일을 위해 강력한 독재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10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상태에서 헌법개정을 추진해서 두 달 후인 1227일의 국민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유신헌법을 만들어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고 중임은 무제한이었다. 대통령은 국민들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통대라 불린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성격불명의 기구에서 대의원들의 간선제로 선출하도록 되었다. 게다가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도 가졌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일괄 임명할 수 있다는 기상천외한 독재적 발상이 유신체제인 것이다.

 

그후 유신체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강요했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가장 가혹하게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박정희 그 자신이었다. 유신체제는 채 2년도 안 지난 74815일 박정희의 부인을 비명횡사시켰다. 아직도 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이른바 문세광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지난 791026, 이른바 1026사태로 유신체제는 그 체제의 권력자의 가슴에도 총구를 겨누었다. 게다가 마약복용과 투옥을 반복하는 아들 박지만의 좌절이 결코 지만이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인 수양대군 세조의 업보가 자신은 물론 덕종과 예종 두 아들에게까지 미쳐 모두 20세 되는 해에 요절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혀 무관한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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