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강 의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
<해설>
이 장은 하나의 상품이었던 금이 이제 일반적 등가(물)의 자리를 독차지함으로써 화폐가 되었다는 것을 전제한 뒤에, 화폐의 기능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화폐의 기능을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주의 경제는 물물교환 경제가 아니라 화폐경제라는 사실 때문이고, 둘째 상품--화폐--자본으로 상향하는 자본론의 서술과정 때문이며, 셋째 표층의 화폐적 현상(예: 상품의 가격)과 심층의 인간노동(예: 상품의 가치)을 연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현재는 금이라는 화폐상품 대신에 정부의 불환지폐가 화폐 또는 법화로서 기능하고 있으므로, 맑스의 화폐론은 일정한 수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1. 화폐는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는 재료다.
1) 모든 상품들은 자기의 가치를 화폐의 일정한 양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화폐가 ‘가치의 척도’(measure of value)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a량의 상품 A, 또는 b량의 상품 B, 또는 c량의 상품 C, 또는 d량의 상품D = x량 의 금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금은 상품들의 가치를 측정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등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상품들과 화폐가 모두 가치로서 동질적인 인간노동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상품의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표현한 것을 상품의 가격이라고 말하는데, 화폐의 양은 각종의 도량단위(예: 그램, 온스)에 의해 표현할 수 있다. 만약 정부가 화폐의 도량표준(standard of measurement of money)을 그램, 킬로그램, 톤으로 결정하고, 금 1그램의 화폐명칭을 1원이라고 부른다면, a량의 상품 A = 1 그램의 금 = 1원, 1,000 b량의 상품 B = 1 킬로그램의 금 = 1,000원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금은 ‘가격의 도량표준’(standard of price)으로 기능하면서 계산화폐(money of account)로서 기능한다.
3) 상품의 가치를 금량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가치량과 금의 가치량을 알기만 하면 되므로, 금이 현장에 나타날 필요가 없다. 따라서 “화폐는 가치척도의 기능에서는 다만 상상적인 또는 관념적인 화폐로서만 역할한다”(120-1쪽).
4) 상품의 가격은, 상품의 가치가 변동하거나 화폐의 가치가 변동하거나 또는 상품과 화폐의 가치가 상이한 비율로 변동하면, 변동하게 된다.
표층 상품 + 화폐 ---> 가격
심층 가치
가) 상품의 가격이 일반적으로 오르는 이유는, 첫째 화폐의 가치가 불변이라면, 상품의 가치가 오르기 때문이다. (즉 화폐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은 불변이면서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둘째 상품의 가치가 불변이라면,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즉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은 불변이면서 화폐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셋째 상품 가치의 상승폭이 화폐 가치의 상승폭보다 일반적으로 높기 때문이거나, 상품 가치의 하락폭이 화폐 가치의 하락폭보다 일반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나) 상품가격이 일반적으로 내리는 이유는, 첫째 화폐의 가치가 불변이라면,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고, 둘째 상품의 가치가 불변이라면, 화폐의 가치가 오르기 때문이며, 셋째 상품 가치의 하락폭이 화폐 가치의 하락폭보다 일반적으로 높기 때문이거나, 상품 가치의 상승폭이 화폐 가치의 상승폭보다 일반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5) 상품의 가격은 심층의 생산조건 또는 노동생산성이 변하지 않더라도 표층의 여러 가지 사정(예: 수요와 공급 사이의 불일치)에 의해 변동할 수 있다. 그러나 상품 가격이 어떤 일정한 수준을 중심으로 변동하거나 어떤 일정한 수준으로 수렴한다는 사실은 상품 가격이 심층의 가치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치가 가격의 ‘중력의 중심’(centre of gravity)으로 작용한다는 말이 이것을 가리킨다. 상품의 가격 변동을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에 의해 설명하면서 가격이 어떤 ‘균형가격’으로 수렴한다고 근대경제학이 이야기할 때, 이 균형가격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6) 노동생산물이 아니면서도 가격을 가지는 사물들이 있다. 예를 들면 토지가 가격을 가지며 주식이 가격을 가진다(128쪽). 토지의 가격이나 주식의 가격은 토지나 주식의 소유로부터 얻게 될 장래의 모든 수익(이것은 궁극적으로 가치를 대표한다)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한 것이다. 매년 말에 얻게 될 예상 수익을 Ea, Eb, Ec,...En 이라 하고, 매년 말의 (예상) 연간이자율을 Ra, Rb, Rc,...Rn이라고 한다면, 장래의 모든 수익의 현재 가격은 Ea/(1+Ra) + Eb/(1+Ra)(1+Rb) + Ec/(1+Ra)(1+Rb)(1+ Rc) + En/(1+Ra)(1+Rb)(1+Rc)...(1 + Rn) 이 된다. 이 경우 만약 매년 말의 예상 수익이 동등하다고, 그리고 매년 말의 연간이자율이 동등하다고 가정한다면, 즉 Ei=E, Ri=R이라면, 토지나 주식의 가격은 E/R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 화폐는 상품들을 유통시키는 역할을 한다.
1) 밀 소유자가 밀을 원하는 화폐소유자에게 밀을 팔아 화폐를 얻고, 이 화폐로 자기가 원하는 아마포를 구매한다. 아마포의 판매자는 그 대금으로 성경책을 사며, 성경책의 판매자는 그 대금으로 위스키를 산다. 이처럼 밀, 아마포, 성경책, 위스키를 유통시키는 데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상품 유통은 직접적인 생산물 교환 (즉 물물교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물교환에서는 밀 소유자와 아마포 소유자가 서로 만나 밀과 아마포를 교환하지만, 상품교환에서는 밀 소유자는 아마포를 얻었지만 아마포 소유자는 성경책을 얻었기 때문이다.
물물교환: 밀--아마포, 또는 아마포--성경책, 또는 성경책--위스키
상품교환: 밀--화폐--아마포
아마포--화폐--성경책
성경책--화폐--위스키
2) 물물교환에서는 자기 생산물의 양도와 타인 생산물의 취득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개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판매와 구매는 필연적으로 균형을 이룬다(142쪽). 그러나 상품 유통에서는 판매와 구매가 전혀 상이한 행위이며, 상품을 팔아 화폐를 소유한 사람이 즉시 다른 상품을 구매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판매와 구매가 불일치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 따라서 화폐가 상품 유통을 매개하는 화폐경제에서는 과잉생산 공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리카도나 세이 등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에서는 과잉생산이 발생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물물교환경제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다.
3) 상품 소유자가 자기의 상품을 시장에 가져갈 때, 그 상품을 팔아 화폐를 얻고 그 화폐로 자기가 원하는 상품을 구입해 소비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상품의 변태(metamorphosis)를 나타내는 공식은 C1--M--C2 이다. 다시 말해 상품의 변태는 판매와 구매라는 대립적이고 상호보완적인 두 개의 교환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4) 구매는 화폐로서 다른 상품을 구입하는 것인데,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이기 때문에, 원하는 상품이 알맞은 가격에 원하는 양만큼 있다면 언제든지 그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상품의 결사적인 도약(salto mortale)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상품 소유자는 자기의 상품을 팔아야만 자기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타의 상품들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상품을 화폐 즉 일반적 등가(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상품들을 구매할 수 없게 된다.
둘째 상품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어야 판매될 수 있는데, 이것은 그 상품의 생산에 지출된 사적 노동이 사회적 분업의 일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적 분업은 생산자들의 합의나 계획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기 때문에, 개별 생산자들은 사회적 분업의 끊임없는 재편성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의 사적 노동은 오직 사후적으로만 (즉 상품이 화폐로 전환된 뒤에만) 사회적 노동의 일부로 인정될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
가) 자기의 상품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전혀 없을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사적 노동은 완전히 낭비된 것이다. 나) 아마포 생산자 A가 10미터의 아마포 생산에 10시간의 사적 노동을 지출하고 있지만, 사회평균적으로는 6시간의 사회적 노동만이 지출된다면, A의 생산물도 6시간으로 평가될 것이고, 따라서 A의 4시간 노동은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다) 아마포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현재의 가격에서는 200미터인데도 불구하고, 아마포 생산자들이 500미터를 생산한 경우, 현재의 가격에서는 300미터가 팔리지 않든지, 아니면 현재보다 낮은 가격으로 500미터가 모두 팔릴 것이다. 따라서 500미터를 생산한 사적 노동은 200미터에 포함된 사회적 노동으로 평가될 뿐이다(134쪽).
5) 일정한 기간에 유통한 상품들과 화폐량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항등식이 성립한다. PT = MV (P: 상품들의 가격벡터, T: 상품들의 거래량벡터, M: 각종의 화폐단위의 수량벡터, V: 각종의 화폐단위의 회전회수벡터). 이 항등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첫째의 해석(맑스의 해석)은, 상품들을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양의 화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M = PT/ V. 위의 1)의 예에서 밀, 아마포, 성경책, 위스키가 각각 2원이면서 하루 동안에 모두 팔렸다면, 상품들의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M)은 8/4 = 2원이다. 2원짜리 화폐는 그 소유자를 5번 바꾸면서 4번 회전했던 것이다 (즉 처음의 화폐소유자-->밀 생산자-->아마포 생산자-->성경책 생산자-->위스키 생산자).
둘째의 해석은, 상품들의 가격은 유통하는 화폐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P = MV/ T.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 해석에 의하면, 상품들은 가격을 가지지 않고 시장에 들어가고, 또 화폐도 가치를 가지지 않고 시장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상품총체 = x 킬로그램의 금, 상품 A = 상품총체의 일정 부분 = x 킬로그램의 금의 일정부분이라는 등식에 의해 상품의 가격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154-5쪽). 그러나 이 둘째의 해석은 좀 더 치밀하게 되어, 상품들은 가격을 가지고 시장에 들어오지만, 그 가격들은 유통하는 화폐량의 증감에 따라 등락하게 된다는 ‘화폐수량설’이 나오게 되었다.
화폐수량설은 16-7세기의 유럽의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멕시코와 페루로부터 값싼 은이 대량으로 유럽에 유입함으로써 은화의 유통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유럽의 상품 가격이 2-3배 상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가) 은 생산지에서 은의 가치가 하락함으로써 상품의 (은)가격이 등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유럽 상품의 (은)가격도 등귀하게 되었다. 나) 유럽에 유입된 대량의 은이 모두 은화로 유통된 것이 아니라, 일부는 은 제품에 사용되고, 그리고 또 일부는 퇴장되었으므로, 은 유입량이 그대로 은화 유통량을 증가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 은화 유통량의 증가는 생산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상품 가격을 비례적으로 증가시키지는 못한다.
6) 금 1그램으로 만든 1원짜리 금화는 유통하는 동안 마멸되어 금 1그램을 함유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1원으로 유통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유통수단으로서의 금화를 다른 재료로 만든 주화(예: 동전) 또는 지폐(태환지폐)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한다. 왜냐하면 유통수단은 오직 상품들의 유통만을 매개하면서 항상 유통영역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동전이나 지폐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금의 가치를 대표하는 것이다.
3. 화폐는 부의 저장수단으로서 기능한다.
1) 화폐는 모든 상품들을 구매할 수 있는 사회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부를 대표한다. 그러나 화폐액은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폐를 축적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이 경우 사람들은 화폐상품인 금을 유통시키지 않고 금고에 퇴장(hoard)해 두었다가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다시 유통에 투입한다. 또한 금은 장식품의 형태로도 퇴장되며, 금화가 부족한 경우에는 이러한 장식품을 녹여 금화를 만든다.
한 나라의 금 보유량은 크게 보아 유통화폐와 퇴장화폐의 형태로 존재하며, 유통수단으로 필요하지 않는 화폐는 퇴장되었다가 필요한 때에 다시 유통에 흘러들어 온다. 금 보유량 전부가 화폐로서 유통하지는 않는다.
2) 화폐수량설에서는 금의 유입-->국내의 유통화폐량 증가-->상품 가격들의 상승-->수입 증가와 수출 감소-->금의 유출-->국내의 유통화폐량 감소-->상품 가격들의 하락-->수입 감소와 수출 증가라는 방식으로 국제수지와 환율의 변동을 설명하면서, 정부의 화폐발행액을 금 보유량에 의해 엄격히 규제함으로써 경제를 위와 같은 자동조절메카니즘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화주의(currency school)가 바로 이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학파는 은행주의(banking school)인데, 금의 보유량이 그대로 유통화폐량을 결정하지 않으며 또한 유통화폐량의 증가가 그대로 상품들의 가격을 상승시키는 것은 아니므로, 화폐가 부족한 화폐핍박기에는 정부가 금 보유량을 초과해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 기능한다.
1) 외상거래 또는 신용거래에서는 상품판매자는 상품구매자에게 상품을 지금 양도하지만 상품구매자는 대금을 나중에 지불한다. 상품판매자와 상품구매자가 채권자와 채무자로 바뀐다. 채무를 갚기로 약속한 만기일에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화폐를 지불하면 채권-채무관계는 사라진다. 이 경우 화폐는 지불수단으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2) 외상거래에서는 채무자 A가 채권자 B에게 만기일을 가진 약속어음(또는 환어음)을 발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채권자 B는 이 어음을 다른 사람 C에게 주고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이 경우 B는 A가 발행한 어음에 이서(裏書)함으로써 C에 대한 채무자가 된다. 이리하여 만기일 이전에는 그 어음이 계속 유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음을 ‘신용화폐’(credit money)라고 부른다. 이 어음을 소유한 C가 만기일에 발행인 A로부터 화폐로 지불을 받는다면 그 어음은 유통계로부터 사라진다.
3) 최초에는 모든 은행들이 은행권(bank note)을 발행했다. 예금자가 금화 100원(또는 금 100그램)을 예금하면, 은행 A는 예금자에게 자기의 은행권(A은행권이라고 부르자) 100원(예컨대 1원짜리 100장)을 발행했으며, 예금자는 이 A은행권으로 상품을 구입하고 채무를 지불했다. 그런데 이 A은행권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지 A은행에 가서 금화 즉 화폐를 요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행권은 ‘일람불 어음’이었고 신용화폐였다.
4) 어음이나 은행권이 화폐로서 유통할 수 있는 것은 어음이나 은행권이 화폐즉 금화로 전환될 수 있다는 믿음(신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사라지는 경우에는 신용화폐는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음이나 은행권을 받고 상품을 팔려고 하지 않는다.
5) 위의 2)의 경우, 어음의 만기일이 닥아오면 A는 화폐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A가 어음을 화폐로 결제하지 못하면 파산(도산)하기 때문이다. 만약 C가 A로부터 화폐를 받지 못한다면, C는 B에게 화폐를 요구할 것이므로 B도 화폐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채권-채무관계가광범하게 전개되어 있을수록, 어느 고리에서든 채무가 청산되지 않는 경우(또는 신용화폐가 화폐로 전환하지 않는 경우), 사회 전체적으로 화폐에 대한 수요가 대폭 증가하면서 화폐가 부족하다는 불평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화폐를 얻기 위해 상품들을 값싸게 팔아 치우려는 투매현상이 나타나며, 상품의 가격은 폭락하고, 다수의 생산자들이 도산하며, 경제는 큰 혼란에 빠진다. 이것을 화폐공황(monetary crisis)이라고 부른다.
6) 위의 3)의 경우, 은행들은 예금으로 받은 금화보다도 더 많은 금액의 은행권을 발행하기 쉽다. 금화 100그램을 토대로 100원의 은행권을 발행했지만 은행권 소유자들이 매일 10원(발행액의 10%)만큼의 금화만을 청구한다는 것을 은행이 발견할 때, 그리고 은행이 매일 금화 100그램의 예금을 받을 수 있다고 예상할 때, 은행은 매일 1,000원의 은행권을 발행하더라도 태환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금화지불준비금은 은행권 발행액의 10%이면 충분하다고 은행은 생각할 수 있다. 이리하여 은행의 은행권 발행액과 금화 보유액 사이에는 큰 차이가 나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은행권 소유자들이 한꺼번에 은행에 몰려 금화를 요구한다면 은행은 태환할 수 없어 파산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를 은행공황(bank crisis)이라고 부른다. 은행공황에 의해 다수의 발권은행들이 도산함으로써 경제 전체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에, 국가는 은행권의 발행을 하나의 은행에 독점시켜 중앙은행을 탄생시키고 중앙은행권을 법화로 지정하게 되었으며, 금 태환요구로 중앙은행이 곤란에 빠지면 국가가 금 태환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킨 것이다.
7) 물론 은행공황이 발생하기 이전에 은행들은 은행권의 발행을 자제할 뿐 아니라 은행권을 회수하기 시작하며 (다시 말해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하며), 따라서 생산자들은 은행으로부터 대출받기가 매우 어렵게 되는데, 이것을 신용핍박 또는 신용공황(credit crisis)이라고 부른다.
공황의 진행과정을 개괄적으로 말하면, 상공업공황의 개시-->신용공황-->화폐공황-->은행공황-->상공업공황의 심화·확대가 될 것이다.
5. 금화는 세계화폐로 기능한다.
1) 국제적인 상거래에서 사용되는 화폐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부(富) 일반의 대표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금 덩어리 형태가 화폐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금 덩어리의 수송에는 운송비와 보험료가 들기 때문에, 각국의 태환은행권이나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나라의 태환은행권이 세계화폐로 사용되었 으며, 국제적인 결제에는 외국환어음(foreign bill of exchange)을 사용했다.
2) 각국에는 외환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외국에 송금해야 할 사람들이 외국환을 소유한 사람들로부터 외국환을 구매했다. 외국환 시세 또는 환율은 각국의 태환은행권이 보유한 금량 사이의 비율 뿐 아니라 그때그때의 외국환 수급상황에 의해 결정되었다. 물론 A국 화폐로 채무를 갚아야 할 때, A국 화폐의 환율이 두 화폐 사이의 금 보유 비율보다 높을 뿐 아니라 금 덩어리를 현송하는 데 드는 운송비와 보험료를 합한 것보다 높은 경우에는, 채무자는 금 덩어리를 A국으로 유출할 것이다.
6. 현재에는 내재적 가치를 가진 화폐상품 대신에 중앙은행권의 형태를 띠고 있는 국가의 불환지폐(inconvertible money)가 화폐로서 기능한다.
1) 국가가 발행하는 불환지폐가 화폐의 지위를 독점하게 된 것은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을 겪는 과정에서, 각국이 국내산업과 고용 문제에 탄력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금 본위제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2) 중앙은행권은 국가가 지정한 법화로서 강제통용력을 가지므로 상품들을 유통시키는 유통수단으로서 기능한다.
3) 중앙은행권은 일반적 등가로서 모든 상품들을 언제나 구매할 수 있으며, 따라서 부(富)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부의 저장수단으로서 중앙은행권을 퇴장시키며, 지출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퇴장화폐를 끌어내어 사용한다. 중앙은행권의 퇴장형태는 요구불예금이나 저축성예금이나 양도성 예금증서(Certificate of Deposit: CD)를 취하므로, 통화량을 나타내는 지표가 다양하다.
M1 = 현금통화 + 요구불예금(예금통화)
M2 = M1 + 저축성예금
M3 = M2 + 양도성 예금증서
(현금통화 = 중앙은행권 발행액-은행보유현금)
4) 중앙은행권은 지불수단으로서 기능한다. 개인들은 외상거래에서 어음과 수표등 신용화폐를 발행하지만 만기일에는 중앙은행권으로 채무를 결제해야 하며, 은행들은 자기 앞 수표를 발행하지만 자기 앞 수표의 소유자가 중앙은행권을 청구하면 언제나 중앙은행권을 내어 주어야 한다. 어음과 수표로서 채권-채무관계가 광범하게 얽혀 있을 때, 어느 고리에서 부도가 난다면 신용 사슬 전체는 혼란에 빠지고 모든 당사자들은 중앙은행권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 정부가 중앙은행권의 발행을 자제한다면, 산업은 신용공황과 화폐공황을 겪으며 은행은 은행공황을 겪게 된다.
5) 국제간의 무역과 자본거래를 주도하는 나라들의 중앙은행권이 세계에 널리 유통하게 됨에 따라, 경제대국들의 중앙은행권이 세계화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각국 정부는 경제대국들의 중앙은행권이 세계화폐로서 기능하도록 상호 협력한다. 예컨대 미국의 달러,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 프랑스의 프랑, 스위스의 프랑, 독일의 마르크, 일본의 엔 등등은 세계화폐로서 기능하고 있다. 물론 각국의 경제사정과 이자율의 변동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권에 대한 신뢰도가 달라지며, 구매력과 환율이 변동함으로써 국제통화제도는 혼란을 피할 수가 없지만, 이러한 혼란은 금의 생산량이 국제거래의 성장에 비례해 증가할 수 없음으로써 발생하는 혼란에 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상품들은 이제 중앙은행권으로 자기의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에, 불환지폐는 분명히 가치의 척도로서 그리고 계산화폐로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내재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 불환지폐가 어떻게 상품들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점이 생긴다. 다시 말해 불환지폐의 객관적인 사회적인 가치를 확정해야만 그 가치와 상품들의 가치를 비교함으로써 상품들의 가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구두 1켤레, 또는 면포 10미터, 또는 소주 10병 = 한국은행권 1만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은행권 1만원의 ‘가치’가 확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한국은행권 1만원의 가치를 한국은행권이라는 종이조각의 생산에 드는 사회적 노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가)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상품을 기타의 상품들의 양이나 화폐의 양과 등치시켜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폐(금화든 불환지폐든)의 가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밖에 없다.
구두 1켤레
한국은행권 1만원 = 면포 10미터
소주 10병
이것은 화폐의 구매력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한국은행권 1만원의 구매력이 확정되면, 그것의 가치가 확정되고, 따라서 한국은행권 1만원은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은행권 1만원의 가치는 1만원짜리 지폐의 생산에 드는 사회적 노동량이 아니라 1만원 짜리 지폐가 구매하는 상품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는 않지만 해의 빛을 반영하듯이, 불환지폐는 사회적 생산물의 가치를 반영함으로써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한국은행권 1만원이 왜 구두 2켤레의 가치를 가지지 않고 1켤레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경제와 사회 30-3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여기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금 본위제 하에서도 불환지폐가 유통수단으로서 금화를 대신하면서 금화와 동일한 가치를 가졌다는 사실과, 그 다음으로 금 본위제가 순수불환지폐제도로 전환될 때 불환지폐는 금화의 가치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이다.
위의 2의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금화가 유통수단으로 기능할 때는 금화의 대리물로서 동전이나 태환지폐가 유통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이 경우를 더욱 진전시키면, 유통수단으로서 항상 유통영역에 남아 있는 금화액에 상당하는 금액만큼의 불환지폐를 금화 대신에 유통에 투입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불환지폐는 금화의 가치를 반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금화를 폐지하고 불환지폐만을 화폐로 인정하게 되면, 불환지폐는 처음에는 금화의 가치를 이어 받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불환지폐의 가치(즉 구매력)는 상품들의 가치 변동에 따라, 그리고 유통하는 불환지폐액과 유통하는 상품가격의 총액과 불환지폐의 유통속도의 변동에 따라 변동하게 될 것이다.
다) 불환지폐제도 아래에서 유통화폐량과 물가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맑스는 화폐수량설과 매우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158-9쪽 참조). 그러나 이 관점은 불환지폐가 오직 유통수단으로서만 기능하기 때문에 퇴장되지 않고 항상 유통영역에 머무르고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불환지폐도 금화와 같이 화폐의 모든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유통에 필요하지 않는 화폐는 퇴장된다. 퇴장의 형태는 6의 3)에서 본 것과 같다. 따라서 화폐발행액이 화폐유통액과 동일하고 화폐유통액의 변동에 따라 물가가 변동한다는 화폐수량설은 타당하지 않다. 물론 상품들의 가치는 불변이고(다시 말해 노동생산성은 불변이고) 상품들의 생산 증대가 애로에 봉착하고 있는 상황 아래에서, 정부가 불환지폐를 발행해서 상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한다면, 상품들의 가격은 등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생산 증대의 애로로 말미암아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 노동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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