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한국어로 출판된 것은 1998년이지만, 원서가 출판된 것은 1995년, 바로 아일랜드 대기근이 일어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책은 7장에 걸쳐 대기근 이전의 아일랜드, 대기근이 진행됐던 10여년에 대한 구체적 서술, 대기근이 아일랜드에 남긴 유산을 서술하고 부록으로는 여러 기록과 증언을 담고 있다.
과연 천재(天災)라는 게 있을까?
과연 세상에 천재(天災)라는 게 있을까? 인재(人災)를 자연의 탓으로 돌리고 우리의 책임을 묻지 않고자 우리는 어떤 비극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천재(天災)라는 이름표를 불쑥불쑥 달아주고 있지 않나 싶다.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일어났을 때도 사람들은 그랬다. 감자마름병으로 감자수확량이 줄어 생긴 기근이니 천재(天災)라 이름 붙였다. 그런 다음에야 사람들은 감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산업구조, 식량정책, 농민과 지주의 관계, 영국의 잘못된 지배 정책을 나열했다. 이는 진실이 아니다. 아일랜드의 기근은 후에 나열된 이유들이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이고, 불평등한 구조와 정치력의 부재가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 아닌 다른 이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너무 판단도 빠르고 단정도 빠르다. 전문가라는 이들의 말을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 아니, 쉽게 믿어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너의 책임이나 하늘의 책임으로 책임의 문제는 멀리 밀어버리고, 나는 아름답게 애도만 하고, 안타까워만 하겠다는 속셈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내 마음을 가장 뜨끔하게 했던 건, 이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 실린 전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로빈슨의 연설이었다. 메리 로빈슨은 아일랜드 대통령 자격으로 1994년 캐나다 그로스아일을 방문했다. 그로스아일이라는 작은 섬에는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를 출발한 퀘백행 이민선이 캐나다 본토로 들어가기 전에 들러야 하는 검역소가 있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당시 아일랜드인들이 탄 이민선의 시설과 위생은 형편없었고, 가뜩이나 기아로 제대로 먹지 못한 많은 이들이 이민선에서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선주와 투기꾼들은 이민자들을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로 부지런히 과밀하게 실어 나르며 한 몫 두둑이 챙겼다고 한다. 도대체 이주의 패턴이란 예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언제나 이런 식이다.
고통에 참여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상기하자.
다시 메리 로빈슨의 연설로 돌아가서, 검역소가 있었던 작은 섬 그로스아일에 모인 아일랜드 대통령과 캐나다인이 된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은 어떤 소회를 느꼈을까. 나는 감히 어떤 장면도 상상할 수 없는데, 마음만은 짠해온다. 메리 로빈슨은 1847년 그 섬에서 죽은 첫 번째 사망자 엘렌 베기의 이름을 언급한다. 그녀는 당시 네 살배기 어린아이였다고 한다. 메리 로빈슨은 우리가 단지 과거에 고통 받은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르완다나 소말리아와 같이 기근과 퇴거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어린이들이 첫 번째 희생자가 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로스아일을 방문한 것 역시 그로스아일을 회환의 장소로 가두어두지 않고, 오늘의 고통에 참여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상기하기 위함이지 않았을까. 그녀는 연설 내내 역사에 필연적인 희생자란 없으며, 오늘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현장 앞에 열정과 헌신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독려한다. 나 아닌 누군가의 고통이 어쩔 수 없는 것,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하며 거리를 두려는 유혹을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아일랜드는 현재 기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소위 ‘제3세계’와 거리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아일랜드와 이들 국가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이들 국가를 지원하고, 이런 비극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와 싸워가고 있다고 한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끔찍한 기억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현장의 고통과 연대하는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역사적 아픔과 저항의 경험을 고유명사로 박제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 있는 연대의 실천으로 이어갈지 제법 묵직한 고민을 갖게 된다. 진정한 기억과 기념을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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