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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o ergo sum

용산을 외면한 당신 "지금 행복하십니까?"

by 淸風明月 2010.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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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2009년 12월 10일 발매된 '루시드폴' 4집 '평범한 사람' 중 한 대목이다. 발매 3일 만에 1만 장이 팔렸고 각종 가요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진 게 없는 사람들, 죽어간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고 밝혔다. '평범한 사람'은 용산 참사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탈도많고 말도 많던 2009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그중 2009년 한해 한국사회를 관통한 가장 큰 문제는 용산참사이다. 참사가 발생한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핼결되지 않고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관심을 가졌던 대중들 조차 용산은 잊은지 오래다. 

용산참사는 크게 세가지 시각으로 바로볼 수 있다.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처거민이 죽었다." 는 철거민을 피해자로 보는 시각과 "철거민이 질서를 지키지 않아 생긴 불가항력적인 사고였다"는 철거민을 가해자로 보는 시각, 그리고 '경찰이 과잉 진압을 한 건 문제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거민의 요구는 무리하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이렇게 용산을 두고 여러 시각이 엇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초기 자유주의 시절, 재산권을 규정하는 방식은 절대적이었다. 생명은 빼앗아 가도 재산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합의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이러한 초기 자유주의에서 나타난 재산권이나 소유권이 인권의 절대적인 부분으로 작용, 지금까지 소유권을 신성하게 보는 게 현실이다. 

물론 현대로 넘어오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국제인권법에 따르면 소유권은 더 이상 개인이 절대적으로 향유하는 권리가 아닌 일시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변화됐다. 또한 국가 일반 이익이나 공공복리를 위해서는 재산의 통제도 가할 수 있게 됐다. 소유권이 과거 절대적 권리였다면 지금은 조건부 권리로 변화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소유권이 절대 권리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용산 참사'다. 

용산참사는 국가가 소극적 의무와 적극적 의무를 모두 져버린 대표적인 사례이다. 용산참사에서 국가는 개입을 자제해야하는 부분에서는 적극 개입했고, 개입해야하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든 국가의 행동은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이 생기는데, 이걸 어느 정도로 자제하고 개입할 것인가는 늘 고민해야 한다. 용산 참사는 이 경우가 뒤바뀐 경우이다. 손대지 말아야 할 부분에는 개입해 사람을 죽이고, 갈등 분쟁을 줄여야 할 때는 중재를 포기했다. 반면 미리 개입해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으로 분쟁의 갈등을 제거했어야 했는데 이 부분마저도 자기 임무를 방기했다. 국가의 임무를 정반대로 실행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용산 참사는 국가의 반인권적, 극단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산을 바라보는 일반대중의  시선이 무관심한 것은 어디에 원인이 있을까? 아마 재산 소유권에 대한 확고한 맹신때문이 아닐가 조슴스레 추측해본다. 그로 인해 용산참사를 인권적으로 접근하지 않는것이다. 그러니까 용산참사를 바라보는 시민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조리에 절규하는 것은 안타가운 일이지만 그들의 희생은 질서를 짘미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용산 참사가 발생한 것을 두고 시민들이 안타까워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애도하기 어려운 이유다. 도시개발에 너무나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있는 우리이기에 용산참사가 잘못된것이지만 잘못됐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용산참사로 인해 뉴타운이 문제라는 것은 인식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뉴타운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인식에서 용산을 애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을 부정한다는 것 밖에 되지 않기에 차마 용산을 애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용산을 몰라서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의도된 무의식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용산참사 문제는 다들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애써 무시하는 것은 율법 때문이다. 집이 없거나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남의 재산을 건드리면 안된다는 율법말이다. 재산이 없는 사람들도 재산만이 나를 보호해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이다. 한국 사회가 개발을 통해, 부를 증식시키는 방식으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제되고 탈락되는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에 대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이해이다. 이런것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용산을 보면서도 안 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회피한다. 

자본주의, 즉 재산 소유권을 일반 대중은 어쩔 수없는 질서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노력을 통해 자신 역시 재산 소유권을 가지려는 욕망이 현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용산을 대면한다는 것은 이제껏 살아온 우리 삶의 방식 자체를 외면하는 것인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용산을 외면했던 당신 그래서 지금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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