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인간·사회·체제·참여행동
강사 : 조희연(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학과 교수)
1. 인공의 위협과 인간의 두가지 응전
'인간'의 역사는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고투(苦鬪)의 역사였다. 인간이 원시적 수준에 있었을 때 자연은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인간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없는 물질적 결핍환경으로 존재하였다. 이렇게 위협적인 자연을 개발하고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인류문명의 기술적 발전과 집단으로 조직화되어 사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의 역사가 기술문명을 발전시키고 개인에서 사회로 전환되면서 인간의 삶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동시에 인공적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삶 속에서 인간이 만든(人工的) 위협이 인간다운 삶을 저해하는 새로운 요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예컨대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살게 되면서 편입하게 되는 정치공동체, 즉 국가는 개인 위에 군림하는, '사회로부터 발생하지만 그 위에 군림하고 더욱더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권력'이 되어 현대사회에서 억압의 실체로 떠오른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자급자족상태에서 벗어나 형성하게 된 집단적 경제체제 역시 개인 간의 불평등과 착취로 특징지워진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정치경제적 현실체제 자체가 만들어내는 인공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바로 이러한 현실 체제의 문제점과 결함에 대한 응전적 행위를 만들어낸다. 경제체제, 정치행정체제 등 현실의 체제가 갖는 구조적 불완전과 결함에 대한 인간의 '응전적' 노력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불완전과 결함을 개선하기 위한 '저항적' 행위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불완전과 결함의 결과로 발생하는 피해자와 소외자를 돕고 지원하는 '자조적'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전자에는 항의, 신원(伸寃), 반란, 보다 근대적인 형태로는 혁명, 감시, 파업 등 다양한 집단행동을, 후자에는 구휼, 적선, 시혜, 품앗이, 기부, 보다 근대적인 형태로는 복지와 자원봉사 등 다양한 서비스 제공적 행위를 포함할 수 있다. 전자가 운동적 활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복지제공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체제의 인간화를 지향하는 개인들의 참여행동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엔지오(NGO. 비정부기구)라는 것을 현실의 체제에 대한 응전적 행위를 하는 개인들의 자발적 조직이라고 한다면, 전자를 '사회행동적' NGO, 후자를 '사회서비스적' NGO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가기 위한 인간들의 자발적인 노력은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된다.
2. 근대민주주의, 저항적 참여행위의 제도화와 확장
현실 체제는 언제나 현존하는 각종 차별(discrimination)과 불평등에 기반해서 유지, 재생산된다. 계급, 성, 인종, 종교 등 다양한 차원의 차별, 불평등과 결합하여 현실의 체제는 작동해왔고, 그 체제의 수혜자들은 체제유지를 위해 노력한 반면 사회적 약자들, 민중들, 혹은 소수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을 조직화해왔다. 이러한 저항적 행위는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쫓겨난 이후부터 혹은 인류가 '가족과 사유재산과 국가'를 이룬 이후부터 인류역사 전체를 관통하여 전개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류의 저항적 행위의 역사에서 볼 때 근대시민혁명과 근대민주주의확립은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근대시민혁명은 인간다운 체제를 향한 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 첫째는 현실체제에 대한 민초들의 저항이 합법화된 제도적 공간 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전 사회성원들이 제도화된 공간, 즉 '정치'의 공간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핵심은 민주주의가 현실체제의 결함과 불완전에 응전하기 위한 제도화된 참여공간을 부여하였을 뿐 그것이 개인의 권리나 반(反)차별적 평등을 기계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시민혁명은 근대적 권리를 시민권의 형태로 정식화하고 법제화하였지 그러한 권리의 실질적 보장이나 보편적 적용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는 이 법제화된 시민권을 보장하고 확대하기 위한 다층적인 사회적·계급적 투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주어진 제도 혹은 어느 날부터 시행되는 제도가 아니라, 참여와 행동을 통해서 획득되고 실현되는 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현대 한국민주주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계기가 된 87년 6월 민주항쟁마저도 민주주의로 가는 출발점, 즉 시민·민중·국민·소수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고 실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공간'을 갖게 되는 계기일 뿐이지 민주주의의 완성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오히려 87년 이후의 무수한 저항행동과 참여를 통해서 진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근대시민혁명인 불란서 혁명 때의 한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국회의원이라 할 수 있는 '5백인 회의'나 '원로원'의원이 되는 피선거권소지자는 당시 성인남자 7백만명 중에서도 겨우 3만명에 불과했다. 또 여성들에게 '평등한' 정치적 참정권이 보장된 것은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를 내건 시민혁명으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1944년이었다. '흑인들을 시민이 아니라 재산으로 간주하는' 노예제가 미국헌법에서 폐지된 때는 1865년이었지만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1955년에 버스에서 흑인과 백인이 분리되어 앉지 않을 귄리를 실현하기 위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점에서 권리의 법적 선언과 그것의 실질적 보장 사이에 지난하고 방대한 귄리실현투쟁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는 참여행동의 과정'이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민주주의 이래 저항적 행위는 제도화된 영역에서 다양하게 표출하게 되어왔다. 저항적 행위의 제도화, 갈등의 제도화라고 부르는 이러한 현상은 참여행동이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구성원리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참여적 행위들은 현실체제의 핵심적 측면, 즉 정치행정체제와 경제체제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는 현실체제 자체의 '타협적', '협의적' 변화를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파업권 등 노동3권의 보장, 사회보장제도의 발전, 헌법소원 등의 발전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공간을 보장하게 되면서 인간의 저항적 행위가 이전에는 문제화되거나 쟁점화되지(problematize)되지 않았던 다양한 이슈와 영역들로 확장되어갔다는 것이다. 이전의 쟁점들이 주로 체제와 구조의 문제들로 집중되었다고 하면, 생활세계의 미시적인 억압의 문제들, 인간과 인간관의 관계 속에 내재화되어 있는 억압들,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의 문제 등 문제시되지 않던 문제들이 문제화되었으며, '제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voices of the voiceless)가 들려지고 사회적으로 부각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체제의 불완전과 결함에 대항하는 저항적 인간행동의 역사에서 볼 때, '근대'의 의미는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3. 다층적 정체성의 개인과 다층적 주체화
민주주의 하에서 사회 전체적으로 전개되는 현실체제의 불완전과 차별,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행동들을 '개인'이라는 스펙트럼으로 보면 개인들의 다층적인 주체화(empowerment)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학적 의미에서 개인은 다양한 정체성(identity)을 갖고 있다. 정체성이란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주어지는 지위와 역할을 개인이 수용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 속의 개인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위치지워지며 이는 개인에게 다양한 정체성을 부여하게 된다. 예컨대 자본가와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가 동시에 학부모로서의 정체성, 환경피해자로서의 정체성, 세금납부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현실체제는 개인 삶의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며 불가피한 것'이므로 순응해야 한다는 논리로 내면화되어 있다. 현실체제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지위와 역할,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채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아무런 응전적 행위를 하지 않을 때 그 현실체제는 별 변화없이 유지된다. 그러나 현실이 부여하는 정체성과 질서에 개인이 응전하고 변화를 도모하게 될 때, 한 개인은 그러한 정체성을 둘러싸고 주체화된다. 한 개인이 어느 하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대단히 주체화되어 있지만 다른 정체성에서는 순응적이고 종속적 태도를 갖는 경우도 많다. 대단히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자가 가부장제적인 사회적 관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도 하고 생산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착취적 성격에 대해서는 비판적 인식이 있는 경우라도, 다른 사회적 관계를 둘러싼 불평등에 대해서는 주체적인 비판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엔지오라는 것이 현실체제의 불완전과 결함에 대응하여 전개되는 다양한 응전적 행위라고 할 때,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공간 속에서 이러한 응전적 행위가 다양한 영역과 이슈들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개인들이 인종적 차별, 성적 차별, 동성애 등 각종 생활세계의 차별, 그 차별 하에서 숙명적으로 주어졌던 수동적 정체성들을 능동적으로 주체화하여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보장한 제도화된 참여공간 속에서, 인간은 현실체제를 인간화하기 위한 다양하고 다층적인 응전적 행위는 오늘도 진행하고 있다. '인간만이 희망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알랭 필킬크라우트, 이자경 옮김, 1997, {잃어버린 인간성-20세기에 관한 에세이}, 당대
조희연 편, 2001, {한국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의 동학}, 나눔의 집.
캐서린 아이작, 조희연 옮김, 2002, {우리는 참여와 행동을 통해 민주주의로 간다}, 아르케.
울리히 벡, 홍성태 옮김, 1996, {위험사회: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새물결.
조지 카피아피카스, 윤수종 옮김, 2000, {정치의 전복 - 1968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이후.
<토론주제>
1. 인간의 삶을 위해서 만든 '체제'가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경우들이 있는가 토론해보자. 체제의 인간화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 까 토
론해보자.
2. 민주주의가 인간의 권리 확대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토론해보자.
3. 인간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들의 상호관계는 무엇인가. 계급적 정체성과 기타의 정체성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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