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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이야기 하다

사진의 메시지

by 淸風明月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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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사진은 하나의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의 총체는 송신원, 전달경로, 그리고 수신처로 구성되어 있다. 송신원은 신문의 편집으로, 전문가 집단의 일부가 사진을 찍고, 일부는 사진을 선별하며, 구성하고, 처리하며, 또 다른 일부는 인화, 설명, 논평한다. 수신처는 신문을 읽는 독자들이다. 그리고 전달경로는 신문 그 자체로,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 주변은 원고, 제목, 설명문, 조판형태로 구성되는 경쟁 메시지들의 복합체이며, 보다 추상적인, 그러나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 아닌 것으로 신문의 제명 자체이다(제명은 메시지 해독 자체를 전환시키기도 한다. 하나의 사진은 오로르[1]에서 위마니테[2]로 옮겨 가면서 그 의미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메시지의 전통적 세부분[3]을 연구하는 것은 사회학의 한 영역으로서, 인간 집단을 연구하고, 동기, 태도를 정의하며, 이 집단의 행동을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 전체에 연결시키는 것이나, 메시지 그 자체에 있어서는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메시지의 출처와 용도가 어떤 것이든, 사진은 단순히 하나의 산물이거나 수단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대상으로서 자율성을 부여받고 있다. 이 대상을 용도로부터 분리시켜 사회학적인 분석에 앞서, 사진이라는 독창적인 구조의 내재적 분석일 수밖에 없는 특수한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4] 물론 순전히 내재적 분석에 비추어보아도 사진의 구조는 고립된 구조는 아니다. 적어도 서로 경쟁적이긴 하지만 모든 보도 사진에 동반되는 텍스트(제목, 설면문 혹은 기사)인 또 하나의 구조와 소통하고 있다. 따라서 정보의 총체는 상이한 두 개의 구조에 의해 지탱된다(이미지와 텍스트). 이 두 구조는 경쟁적이며, 그들의 단위가 이질적인 까닭에 혼합될 수 없다. 텍스트 속에서는 메시지의 실체가 말로 구성되어 있고, 사진 속에서는 선이나, 표면 혹은 점으로 구성된다.


사진의 역설


사진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사진은 무엇을 송신하는가? 정의상으로 장면 그 자체,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다. 대상에서 이미지까지에는 분명히 비율, 원근, 색채의 변화가 있다. 이런 변화는 어떤 경우에도 변형이 아니다. 현실에서 사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이 현실을 단위체들로 절단할 필요도, 이 단위체들을 다른 기호로 구성할 필요도 전혀 없다. 이 대상과 그 이미지 사이에는, 중계, 즉 코드[5]를 배치하는 일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분명히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지는 적어도 유사물analogon이며, 상식적으로 사진을 정의하는 것도 현실과의 유사성에 기인한다. 결국 사진은 코드없는 메시지이다.

사진이외에 코드없는 메시지가 존재하는가? 언뜻 보기에는 그렇다. 소묘, 회화, 영화, 연극과 같은 것도 현실의 유사적 재생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각각의 메시지들은 장면, 대상, 풍경과 같은 유사한 내용 이외에 즉각적이고 분명한 방식으로 보충적 메시지(흔히 재생의 스타일이라고 부른다)를 발전시킨다. 거기에는 이차적인 의미가 문제가 되는데, 그것에 있어서 시니피앙은 제작자의 영향으로 인한 이미지의 어떠한 처리이며 시니피에는 미적이든, 이데올로기적이든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어떠한 문화를 가리킨다[6]. 여기에는 두가지 메시지가 포함되어있다. 유사물 그 자체인 denotation 메시지와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가 생각하는 것을 읽게 해주는 connotation 메시지이다.[7] 메시지의 이러한 이중성은 사진을 제외한 모든 유사적 재생들 사이에서는 명백하다. 예를 들어 소묘의 경우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그 시대의 양식을 따르게 되고, 영화에 있어서도 객관적인 묘사가 객관성이라는 기호 자체로 읽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사물에 있어서 connotation체계의 코드가 보편적 상징체계나 시대의 수사학에 의해서, 혹은 스테레오 타입의 저장소(도식, 색채, 필적, 몸짓, 표현 요소들의 집합)에 의해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사진에 있어서  예술적 사진이 아닌 보도사진의 경우- 다르다. 사진은 자신을 현실의 기계적 유사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차적인 메시지 자체에 현실의 실체를 가득 채워버려 이차적 메시지가 전개될 여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다. 요컨데 모든 정보 구조들[8] 중에서 사진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고갈시키는 denotation 메시지에 의해서만 독점적으로 구성되고 점유되는 유일할 것일 수 있다. 사진 앞에서는 denotation의 느낌, 다시 말해 유사성의 충적이 매우 강해서 어떤 사진에 대해 문자 그대로의 기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술은 바로 denotation 메시지의 중계 혹은 이차적인 메시지를 부가하게 되며, 이는 언어라는 코드속에 끌려나와 불가피하게 connotation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은 단지 부정확하다거나 불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것이며, 보여진 것과는 또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의 이 같은 순수한 denotation 법규, 유사성의 완벽함과 충실함, 객관성 등 이 모든 것들은 신화적이 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9] 사진 이미지는 정말로 완벽한 유사성, 즉 객관성을 가지는가? 그것은 신화이다. 왜? 모든 사진에는 그 맥락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사진(보도사진)은 메시지의 생산과 수신의 층위에서 코노테이션의 요인들인 전문적, 미적, 이데올로기적 기준들에 의해 작업되고, 선별되고, 구성되고, 제작되고, 처리된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또한 ‘읽혀지는’ 것이며 독자들의 기호의 전통적인 저장소에 연결된다. 즉 독자들이 선호하는 것들은 모두 다 다르다는 의미이다. 모든 기호는 코드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진의 역설이 나온다. 즉 코드 없는 메시지(사진과 대상의 유사성)와 코드 있는 메시지(사진에 덧붙어 지는 수사학, 처리방식 등)의 공존이다. 역설은 코노테이션 메시지가 코드 없는 메시지로부터 전개된다는 점이다. 이는 윤리적인 역설이기도 하다. 어떻게 사진이 객관적인 동시에 충당적(보충적)이며 자연적인 동시에 문화적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디노테이션과 코노테이션의 중복양상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사진에서 디노테이션 메시지는 완전히 유사적이기 때문에(코드에의 의지를 잃었다) 연구할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은 반면 코노테이션의 메시지는 표현의 영역과 내용의 영역,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해석이 필요하다.


코노테이션의 방식들

코노테이션, 즉 엄밀한 의미에서 사진 메시지에서의 이차적 의미의 부가는 사진 제작의 여러 다른 단계(선택, 기술적 처리, 지면 배치, 페이지 조판)에서 완성된다. 결국 사진적 유사물의 코드화를 의미한다. 이 방식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사진의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코노테이션을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트릭, 포즈, 피사체, 포토제니, 유미주의, 통사론의 여섯 요인이나 앞의 세 요인, 트릭, 포즈, 피사체는 현실 그 자체, 즉 디노테이션 메시지의 변형에 의해서 생산된다는 점에서 뒤의 세 요인과는 다르다. 트릭은 조작효과로, 50년대 미국 보도사진[10]을 예로 들 수 있고, 포즈pose는 케네디의 포즈[11]를 예로 들 수 있다. 피사체는 대상 자체의 상징성, 의미로서 의미있는 피사체와 의미없는 피사체로 구분된다. 사진 자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포토제닉Photogenic은 빛, 조명, 인화기술에 의해 미화되는 것이다. 유미주의는 예술의 코드를 닮는 것이며, 통사론Syntagm은 통합체로 사진이 계속 연결될 때 생기는 효과이다.


텍스트와 이미지

보도사진에 있어서 텍스트와 이미지가 결합하게 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지적할 사항이 있다. 우선 텍스트는 이미지에 덧붙여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이차적인 시니피에를 불러일으키는 기생적인 메시지를 구성한다. 이미지는 더 이상 파롤을 삽화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이미지에 기생하는 것이 파롤인 것이다. 예전에는 이미지가 텍스트를 삽화로 보여주었으나(텍스트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해 주었으나) 오늘날에는 텍스트가 이미지를 무겁게 만들며, 이미지에 문화, 도덕, 상상력들을 덧씌운다. 예전에는 텍스트에서 이미지로의 축소가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이미지에서 텍스트로의 확대가 있다.

두 번째의 지적은 코노테이션의 효과가 아마도 파롤의 소개 양식에 따라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파롤이 이미지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미지는 파롤의 코노테이션의 효과를 감소시킨다. 말하자면 이미지의 메시지에 집착해 언어적인 메시지는 사진의 유사성 혹은 객관성을 표현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 언어체의 코노테이션은 사진의 디노테이션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이 두 구조의 실체가 합병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혼합되는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세 번째의 지적은 파롤이 이미지를 추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구조(이미지)에서 다른 구조(텍스트)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이차적인 시니피에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코노테이션의 시니피에와 이미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주로 설명적인 관계이나 간혹 과장적인 어투, 혹은 이미지를 소급하여 투영된 시니피에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상호 보상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결국 코노테이션은 조절기능을 갖고 있으며 투영projection-동일화identification의 비합리적 작용을 예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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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Aurore 보수 계열의 신문

[2] l’Humanite 공산당 계열의 신문
[3] 기호학의 의미소통의 기본구조senderamessageareceiver / senderßfeed backßreceiver 이 과정에는 code 가 필요하다
[4] 기호학(Semiotics, Semiology). 기호란 의미를 가진 모든 대상물(문자, 표지판, 음식, 건물..)을 칭한다. 1965년 Roland Barthe가 이미지의 수사학이라는 글을 통해 기호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바르트에 이어 영국에서 버밍햄그룹(C.C.C.S : Center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이문화연구란 분야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대중문화를 읽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 기호학과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해석하고 비판하는 방법으로 마르크스 주의를 도입하여 양자를 합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5] Code. 일반적으로 기호가 약속에 의해 그 결합규칙을 이루는 단위 그리고 그 규칙의 종체를 가리킴.
[6] 구조주의 언어학Structuralist Linguistics의 중심개념. 기표signifiant와 기의 signifie 기표란 기호의 감각적 인상을 말하는 것으로 소리(청각)나 모양(시각)등을 가리키며 기의는 기호의 추상적인 뜻, 뜻하는 바를 나타낸다. 둘 사이의 관계는 Benveniste에 의하면 ‘임의적’이다. 즉 기표와 기의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 간의 관계는 임의적이다. 그러므로 기의와 기표는 아무 상관없으며, 절대로 자연적이거나 운명적 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둘 간의 관계는 임의적이지만 한 언어 공동체 혹은 한 국가 내에서는 기표와 기의도 연관이 있으며 지켜야할 규칙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기표와 기의의 임의적인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바로 기표들 사이의 차이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양복의 ‘예의바름’이란 기의는 찢어진 티셔츠와 양복 사이의 차이에서 온다. 각각의 기표가 가진 차이는 곧 양복에게 ‘예의’라는 기의를 덧씌우게 되는 것이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랑그는 문법과 같이 추상적인 체계로서의 언어이며, 파롤은 구체적으로 말해지는 언어를 가리킨다. 소쉬르Saussure는 언어학의 대상으로 랑그를 말하고 있다. 파롤은 지역마다 개인마다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파롤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하나의 체계로서 랑그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지시물referent과 지시체reference 지시물은 기호가 지칭하고 있는 실제의 대상이며 지시체는 대상과는 분리되어있는 기호 그 자체를 말한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기호는 지시체이고 지시물은 사과라는 실제의 물체이다. 통합체Syntagm와 계열체Paradigm 통합체는 수평적 배열이며 계열체는 수직적 선택의 차원
[7] 롤랑 바르트는 1964년 ‘기호학의 요소들’의 출간으로 비언어학적 기호학, 즉 이미지에 대한 기호학을 탄생시켰다. 이 책에서 그는 소쉬르의 개념들과 예름슬레우Hjelmslev의 외시의미denotation와 함축의미connontation를 결합하였다. 외시의미란 밖으로 드러난다는 것으로 상식 수준에서 이해가능한 의미를 가리키며, 함축의미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이 하는 배후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의 기호는 기표와 기의를 가지며 각각은 외시의미를 갖고있다. 이런 기호는 다시 더 큰 기호의 체계속에 들어가 더 큰 기호의 또 다른 기표가 되고 그것은 또 다른 함축의미를 품게된다.
[8] 조작적 구조가 아니라 문화적, 혹은 문화화된 구조를 말한다. 이를테면 수학은 그 어떤 코노테이션 없이도 외시된 구조를 구성한다. 그러나 만일 아인슈타인에 헌정된 기사 속에서 대수 공식을 배치한다면 원래 순전히 수학적이었던 이 메시지는 매우 막중한 코노테이션을 떠맡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9] 기호의 상징적 메시지란 결국 신화이다. 기호는 기의, 기표에서 조금 더 발달된 단계 즉 상징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데 이 상징적인 의미가 좀더 추상화된 것이 신화이다. 신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의 등장으로, 신의 능력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 인간들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꿈에 대한 대리만족을 주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신화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 영화, 스포츠 등이며 이는 객관성을 가장하는 보도사진에서도 나타난다. 보도사진은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금지되어 있는 것을 배제하며, 기괴한 것을 상대화하여, 매체내의 처리과정 속에서 가공한다. 그러므로 신문사진에 나타나 있는 진실도 복잡하고 다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가공된 진실이다.
[10] 1951년 상원의원이 공산주의 지도자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고 있는 사진. 실상은 두 얼굴의 인위적 접근에 의해 구성된, 조작된 사진이었다.
[11] 눈은 하늘을 향해 있고 두 손은 모아져 있는 케네디의 측면사진. 여기에서 젊음, 경건함, 순수함이라는 코노테이션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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