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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강의노트][참고자료] 발췌 개헌 (1952년)

by 淸風明月 2024.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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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개헌 (1952)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대통령 선출은 국회가 선출하는 간접 선거의 방식을 택했다. 이승만은 한민당의 도움을 크게 얻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민당은 내각제로 힘없는 대통령을 만들고 자신들은 강력한 내각의 실세로 발돋음하려 했으나 이승만의 반발로 좌절됐다. 이 때문에 이승만과 한민당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고, 그 뒤 한민당은 우리 나라 야당의 뿌리가 되었다. 야당으로 소외된 한민당 지주 세력은 이승만의 토지개혁 때문에 그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 마저 잃고 만다.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 것은 전쟁 전인 1950530일이었다. 이 선거에서 국회의원 2/3128명이 무소속 출신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무소속 의원 거의 대부분이 이승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였다가는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가 어려웠다. 당시의 정세는 한국 전쟁, 그리고 전쟁 중에 터져나온 행정상의 무능력, 부정부패, 특히 국민 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으로 이대통령의 권위는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2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한 것이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더 합당할 수도 있었다.

 

이승만은 국회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개헌안은 1952128일에 열린 국회에서 단지 19명의 찬성을 얻었을 뿐 국회 의원의 대다수인 143명이 반대를 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신당운동을 추진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이승만은 국회에 1월에 부결되었던 개헌안을 약간 손질한 이른바 '발췌 개헌안'이라는 것을 또다시 내놓았다 (1952.5.14). 이와 함께 19521월말부터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라를 뿌리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들은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 의원들을 쫒아다니며 협박하였다. 거리에는 이들이 내붙인 '국민의 뜻을 모르는 국회를 해산하라'는 벽보가 수없이 붙었다. 이들은 서로 몰려다니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까지 하였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대통령은 52525일 정국혼란을 이유로 부산시를 포함한 경남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물리력을 동원하였다. 계엄사령부는 언론 검열을 실시하는 한편 직선제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체포에 나섰다. 그 다음 날인 526일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에 오던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몰고가 일부 의원에게 국제 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워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 사태를 부산정치파동이라 한다.

 

발췌 개헌안은 5274일 심야에 경찰과 헌병대가 국회의사당을 에워싼 가운데 기립표결 방식에 의해, 출석 166명 의원 중 163, 기권 3명으로 강압적으로 가결되었고, 77일 공포·시행되었다. 발췌 개헌안의 강행 통과는 이승만의 권력 연장을 위한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였다. 이 발췌 개헌에 따라 19528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제 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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