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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강의노트] 정치학원론: 한국의 국가운동과 정치지형

by 淸風明月 2022.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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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원론>

 

7강의: 한국의 국가운동과 정치지형: 개관

 

한국의 국가체제는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미군정을 거쳐 남북한을 아울리는 통일국가가 아니라 남한만의 분단국가체제로 출범했다. 이는 한국의 국가체제가 단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근대적 과제의 달성을 미완의 과제로 남겨둔 채 출범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체제는 해방 초기의 좌우갈등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강고한 반북-반공체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 정권 하에서 한국의 국가체제는 형식적으로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채용했지만, 사회과정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경찰국가적 통제-감시체제를 구축하고 반공이라는 잣대를 통해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전반적으로 억압하는 동시에 기층민중의 초보적인 권리쟁취운동조차 불온시 했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비민주적 국가체제로 기능했다.

 

1950년의 4월 혁명은 이승만 독재체제를 무너뜨렸다. 이를 통해 일시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의 공간이 열렸지만, 1951년의 5.16 군사쿠데타는 국가체제를 일거에 군부지배체제로 변모시켰다. 군부지배체제는 이후 많은 저항 속에서도 갈수록 강화되는 과정을 밟았는데, 1973년의 유신체제 수립은 그 과정의 완성판이었다. 군부정권 하에서 한국은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의 산업화는 차관도입과 장시간-저임금 노동 및 민중 희생에 기초한 수출제일주의 정책을 강행하는 것에 통해 이루어졌으며, 애초에는 경공업의 육성에서 출발해서 유신체제 하에서 중화학공업화의 성공적인 추진으로까지 진전할 수 있었다.

 

한국의 군부정권은 제3세계의 다른 어떤 군부정권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한 개발독재체제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희생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성장-발전시켰고, 노동자-민중의 희생 위에 추진된 산업화는 노동운동과 타 기층 민중운동을 출현시켰다. 1979년에 이르러 한국경제가 불황국면에 빠져들고 군부정권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급속도로 확산되는데, 이를 배경으로 같은 해에 김재규 중앙정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10.26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유신체제는 붕괴되기에 이른다.

 

유신체제의 붕괴로 군부독재체제 하에서 억압되어온 자유로운 정치활동의 공간이 재창출되었다. 그러나 1980년의 5.17. 비상계엄령 선포를 계기로 전두환 중심의 강경 군부세력에 의해 군부지배체제가 재차 수립되었다. 전두환 체제는 기업의 대대적인 통-폐합과 같은 본격적인 산업구조조정에 착수하고 노동자-민중에 대한 억압을 한층 더 강화하는 것을 통해 중화학공업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물질적 기반으로 가지게 된 한국경제가 처음으로 맞이한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기여했다. 다른 한편, 전두환 체제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민중학살을 자행한 것을 통해 수립된 것은 무엇보다 청년-학생층의 급진화를 급속하게 촉진시켰다. 이를 통해 청년-학생층이 중심이 된 급진세력이 크게 성장했으며, 이들 급진세력과 노동자-민중운동과의 결합 및 변혁지향적인 노동운동의 진출 등도 크게 진척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대기업노동자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런데 전두환체제 하에서 이른바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가 모든 사회적 대립구도를 압도적으로 규정했는데, 이런 조건 속에서 이들 급진세력과 자유주의적 개혁세력과의 결합 역시 진척되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체제가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강화하는 과정은 동시에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사회적 힘을 증대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19876월의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과 이를 이은 6.29선언은 그간 몇 차례의 위기 속에서도 재차 강화되어온 군부독재체제가 이제는 역사적으로 퇴장하지 않으면 안 됨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 점에서 19876월의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은 한국 민주화 과정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6월 투쟁에 이어 있었던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본격적인 진출의 출발점을 이룬다. 민주화과정의 도입은 반독재투쟁의 국민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을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상승시켰다. 이와 관련, 1993년에 수립된 김영삼 정부가 3당 통합에 힘입어 출범할 수 있었지만 5.16 군사쿠데타 이후 수립된 최초의 문민정부로서 의의를 지닌다면, 1998년에 수립된 김대중 정부는 김종필 세력과의 연합에 힘입어 출범했지만 5.16 군사쿠데타 이후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수립된 정권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 더 나아가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이른바 개혁세력의 온전한 승리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개혁세력의 정치적 주도세력으로의 상승은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무엇보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민주화과정의 도입과 더불어 노동운동 등 기층 민중운동 역시 크게 성장했다. 이와 더불어 민주개혁의 추진을 주요과제로 삼는 시민운동 역시 대정부투쟁을 우선시한 기존의 재야민주화운동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사회운동으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들 시민운동세력은 특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하에서 국정의 파트너수준으로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들에 대한 반동으로 오늘날에는 개혁 정치 및 개혁적 시민운동 등을 친북 좌파운동으로 보는, 이른바 뉴라이트운동으로 불리는 보수적 사회운동 역시 자신의 세를 급속하게 신장시키고 있다. 그런데 개혁 정부들 하에서 이뤄진 사회양극화의 심화와 민생경제의 파탄 등은 그간 국정을 주도해온 개혁세력 전체에 대한 국민적 실망을 증대시키고 있는데, 이런 사태 진전은 오늘날 그간의 민주화과정에서 계속 자신의 입지가 축소되고 있었던 보수세력이 다시 국민적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고 있다.

 

개혁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상승한 시기는 동시에 한국경제의 개방과 한국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한다. 전두환 정부 하에서 시작된 민간경제 중심체제로의 개편이 개방과 신자유주의 개편의 전제조건을 창출했다면, 김영삼 정부는 한국자본의 세계진출을 뒷받침하기 위해 세계화를 내세우며 한국경제의 개방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재벌의 과잉투자와 과도한 개방 등은 1997년 말 미증유의 외환-금융위기를 초래, 한국은 IMF관리체제 하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IMF처방을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한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삼을 것을 제창하면서 개방과 한국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 개편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 역시 개방적 통상국가등을 제창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의 적극적인 동참을 한국사회의 기본적인 발전전략으로 채택해 왔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의 대외통상정책은 2006년 초 한미FTA 체결을 최우선적 과제로 내세우면서부터 미국에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아시아 경제협력공동체 형성에 기초한 세계진출정책에서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 강화에 기초한 세계진출정책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개방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경제의 불안정성을 높이고, 한국경제에 대한 미국계 중심의 초국적 금융자본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노동유연화, 시장화 등으로 대변되는 경제 전반의 신자유주의 개편은 공공영역의 축소와 비정규직의 양산을 가져오고, 사회의 불평등구조를 심화시켜 다수 서민들의 삶을 갈수록 어렵게 만드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경제의 미국경제로의 통합을 촉진시킬 미국과의 FTA체결은 이런 과정을 더욱 촉진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과거 30년 동안 연평균 8.6%의 고도성장을 이룩한 압축적 경제성장을 거쳐 민주화를 이룩함으로써 현재는 총생산 세계11위의 경제 강국이자 적어도 형식적-절차적 측면에서는 민주화가 크게 진척된 국가가 되었고, 또 이를 통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한국이 이전과 같은 고도성장을 앞으로도 계속 이룩해 나가는 것은 이제는 여러 이유들로 인해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그간 힘을 크게 강화시킨 재벌그룹들이 미국계 초국적 금융자본과 더불어 경제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편으로는 이들 국내외 거대자본의 운동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규제해 민주주의의 실질적 진전을 이뤄낼 것인가의 문제가,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고, 고용 창출 등을 위해 어떻게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발전 역시 도모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되고 있다. 나아가 날로 심화되는 고용불안정과 사회양극화 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한국사회의 미래와 관련해 관건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 1994년 한반도전쟁을 가져올 지도 모르는 긴박한 정세를 만들어 낸 제1차 북핵 위기가 평화적으로 해결된 후 2000615일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통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상봉한 남북정상들이 공식발표한 ‘6.15공동선언은 남북한 대결구조에 일정한 파열을 내고, 남북한의 화해-협력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정책은 노무현정부에 의해서도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부시정부가 출범한 후 6자회담을 통한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모색되고 있는 와중에서도 미국의 대북경책은 강경일변도로 일관해 왔고, 이에 반발해 북한은 20067월 미사일 발사시험을 강행한데에 이어 최근 핵실험을 단행했다. 그러나 2007년 북한과 미국 간에 ‘2.13. 합의가 도출됨으로써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이 싹터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이런 사태 진전과 관련하여, 오늘날에는 어떤 대북정책을 강구해야 하는 가의 문제를 중심으로 대북강경책 내지 엄걱한 상호주의를 주장하는 보수세력 대 일관된 대북화해정책 추구를 내세우는 개혁세력 및 진보세력 간의 대립구도 역시 지속되고 있다. 다른 한편, 한미동맹 정책은 한국의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만, 전시 작전지휘권의 환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인정, 평택 주한미군기지 확장 추진 등은 한미FTA의 추진과 더불어 한미동맹관계의 성격 등을 변화시키는 주요한 계기로서 작용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동북아국가들 간의 협력증진의 필요성이 동아시아 단일경제권 형성의 필요성이 논의될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크게 주창되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의 관계개선 이후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과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한-중 간의 경제관계는 긴밀해 지고 있고, 한국의 일본과의 경제관계가 한국경제의 대외적 경제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매우 높다. 그러나 한-중 경제관계의 더 한 층의 진전을 미국이 견제하고 있는데다가 중국이 동북공정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것은 한-중관계의 더 한 층의 진전을 방해하고 있고, -일 군사동맹관계의 강화, 일본의 군사대국화 추진 및 일본사회의 급속한 우경화 등은 동북아국가들 간의 협력 증진 등을 방해하는 중대한 요인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사회가 오늘날에 이르러 지속가능한 발전 동력의 확보 및 발전 진로의 모색 등에서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개혁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와는 달리 한국사회의 보수화가 크게 진척되고 있는 데에 힘입어 보수세력의 영향이 증대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개혁세력, 특히 진보세력의 거부감은 매우 크다. 게다가 노동자-민중운동을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삼고 있는 진보세력이 헤게모니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매우 낮다. 이와 관련, 한국사회의 발전 방향의 모색 등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쟁점이 무엇이며, 이런 쟁점들에 대해 개혁세력, 보수세력, 진보세력들이 각각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 가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민주화가 진척되었다고 하지만, 국가보안법의 존속 등 정치적-시민적 민주주의의 신장을 제약하는 법적-제도적 장애물은 여전히 남아 있고, 사회민주화 및 경제 민주화 수준 역시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민주개혁의 문제와 관련해, 진보세력이 더 많은 민주주의’, ‘민주화의 민주화’, ‘민주주의의 민주화등을 주장하는 있는 하면, 보수세력은 국가안보와 효율성 제고 등을 들어 더 많은 민주개혁에 반대하고 있고, 현재의 민주화 수준이 오히려 과도하다고 판단한다. 개혁세력은 기본적으로 더 많은 민주화에 찬성하지만, 소극적이고 절충적이며, 실질적 민주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둘째, 오늘날 사회의 지배층과 진보세력 간에 가장 첨예한 대립각이 형성되고 있는 문제는 개방과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 문제이다. 개혁세력은 그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의 적극적인 동참의 필요성, 한국기업의 국제경쟁력의 강화와 세계시장으로의 진출 확대, 한국경제의 선진화 추구 등을 들어 개방과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주도해 왔고, 보수세력 역시 이를 지지하고 반면, 기층 민중운동 및 진보세력은 그것이 사회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민중의 삶을 파탄시킨다는 이유 등을 들어 노동유연화 및 과도한 개방 반대, 사회적 공공성의 확장,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는 구분되는 대안적 세계화의 모색 등을 내세우며 신자유주의 공세에 저항하고 있다. 한미FTA 문제와 관련해서도 지배층은 그것이 한미동맹관계를 한층 공고히 하고 한국경제의 경쟁력 강화와 선진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한미FTA의 우선적 체결을 찬성하고 있는 반면, 진보세력은 그것이 한국경제를 미국경제에 실질적으로 편입시키고, 민중배제적인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를 한국에 이식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개혁세력과 보수세력이 공히 기업 활동의 자유보장과 대기업 중심의 경제발전을 우선시한다면, 진보세력은 무엇보다 민중의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확대와 민중생존권의 보장을 우선시하는 체제로의 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셋째, 대미와 대북문제와 관련해서는 개혁세력, 보수세력 및 진보세력 간에 매우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개혁세력과 보수세력이 기본적으로 한미군사동맹의 강화를 지지하고 있지만, 보수세력이 대북강경책을 지지하고 있고 대북관계에서 엄격한 상호주의의 적용을 주장하고 있다면 개혁세력은 대북화해정책과 신축성 있는 상호주의의 적용을 지지하고 있다. 전시 작전지휘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개혁세력이 미국의 전시 작전지휘권 반환 정책에 호응하고 있다면, 보수세력은 전시 작전지휘권 환수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진보세력은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수용 및 평택 주한미군기지 확장 등을 반대하면서 탈미와 미국의존도의 축소, 주한미군의 축소와 최종적인 철수, 민족공조 체제의 확대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이 보수세력과는 달리 공통적으로 북한에 대한 지원 확대에 기초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 대북화해-협력관계의 확대에 찬성하고 있지만, 개혁세력이 크게 보면 북한의 남한으로의 흡수통합을 추구하고 있다면 진보세력은 남북한체제를 인정하는 연방제 통일이나 북한체제가 지닌 장점을 적극 흡수하는 새로운 사회체제로의 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 신흥 공업국가에 수립된 군부독재체제가 퇴장한 데에다가 소련 중심의 세계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한 이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및 세계 각국 간의 협력 증대 등이 세계사 발전의 기본적인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본의 자유를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고, 9.11테러사건 이후에는 미국의 전쟁 수행 등이 더욱 빈발해지고 있으며, 반미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대응책이 강경해 짐에 따라 세계 전체가 이전보다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이런 정세의 전개는 다른 한편으로 전 세계적 수준에서 반세계화 운동 및 평화운동을 고양시키고 있고, 중동에서는 반미 이슬람 운동의 확산을, 남미에서는 반미 좌파정권의 등장 등을 가져오고 있다. 세계사의 이런 모순적인 흐름들은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에도 그대로 투영, 사회발전의 진로를 둘러싼 제 세력들 간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어떤 사회발전전략도 헤게모니적 발전전략이 되기 어려운 정치지형을 만들어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우리 사회가 처한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사회의 진보와 발전만이 아니라 세계사의 진보와 발전에도 기여하는 한국사회의 발전전략이 무엇이며, 또 이 전략을 어떻게 헤게모니적 국가프로젝트로 만들어 나갈 것인가의 문제는 오늘날 한국정치가 풀어야 할 최대의 난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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