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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and Society Archive

한국식 군사쿠데타의 두 모델

by 淸風明月 202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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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군사쿠데타의 두 모델

 

우리 나라에서 61년에 군사쿠데타라는 제도가 수입되었으니 다른 나라에 비해 그렇게 늦은 편은 아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대략 50년대 중반부터 군사쿠데타가 시작되었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군사쿠데타의 원조는 육사 2기의 박정희와 육사 8기의 김종필이다. 이 쿠데타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것은 육사 11기의 전두환과 노태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네 사람은 한국현대정치사의 군사쿠데타 부문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쿠데타를 실행한 방식은 매우 다르다.

 

박정희와 김종필 등 일단의 은인자중하던군인들은 61516일 새벽에 장교 250 여명, 사병 3,500 여명의 병력으로 한강을 넘어 서울로 전격 진군하여 중앙청, 육군본부, 중앙방송국 등 주요 거점을 장악한 다음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이들이 발표한 혁명공약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하며 실질적인 반공태세를 강화시킴.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함.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민족정기를 진작시킴. 절망과 기아선상의 민생고 해결과 국가자주경제를 재건시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함. 조속한 시일내에 민정이양 후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함등이었다.

 

이때 반도호텔에 머물고 있던 장면 총리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혜화동의 깔멜수녀원으로 피신해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고, 내각제 하에서 실권없는 윤보선 대통령은 공관으로 들이닥친 쿠데타군 앞에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말을 해 한국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이런저런 의혹을 샀다. 민주당이 신구파로 나뉘어 갈등하다가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분당된 상황에서 신파 출신의 총리에게서 소외되어 있던 구파 출신의 대통령이 쿠데타군과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다. 실제로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후에도 장면 총리와 국무위원들이 국무회의를 열어 군사쿠데타를 승인하도록 하는 등 쿠데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쿠데타 주역들은 먼저 국회를 폐쇄하는 등 헌정을 중단시켰다. 이어 국회를 대체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비상기구를 설치하고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하여 15개 정당과 238개 사회단체를 해산하고 4,400명에 달하는 기존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물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리에는 박정희가 앉았다. 따라서 외형상 쿠데타가 조기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는 제1군사령부의 이한림 장군이 쿠데타에 반대하면서 버티고 있는데다가, 또 하나는, 합법적인 장면 정권을 무너뜨린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미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 문제는 이미 쿠데타가 실질적으로 성공한데다 한국 현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등이 본국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군 내부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다. 이한림 사령관은 군 통수권자인 장면 총리의 지휘를 받아 쿠데타군을 진압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녀원으로 숨어버린 총리가 연락을 차단했기 때문에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고, 이 지휘권 공백을 쿠데타군들이 놓치지 않았다. 결국 이한림 장군 역시 쿠데타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군 내부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군이 일사불란하게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박정희가 군부권력을 장악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군사정권을 수립한 직후에 일어난 장도영의 반혁명사건부터 시작해서 민정이양 직전에 일어난 김동하의 반혁명사건까지 연이어 일어난 11차례의 반혁명사건이 일어났다. 장도영의 반혁명사건은 장도영을 중심으로 육사 5기와 9기가 개입된 사건으로 박정희와 장도영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김동하를 비롯해서 박임항, 이규광 등이 연루된 김동하의 반혁명사건은 중앙정보부 창설과 민주공화당 사전 창당 등에서 김종필의 독주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1년의 516쿠데타는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한 다음 군부권력을 장악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소수의 군인들이 군 지휘체계를 전체를 무력화시켰다는 것, 군 통수권자인 장면 총리의 피신이 군부의 효과적인 작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병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휘체계의 와해로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의 반대가 실질적이지 않았다는 것 등도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박정희 사후에 발생한 신군부의 쿠데타는 박정희 쿠데타와 성격을 달리한다. 박정희 사망으로 발생한 정치적 진공상태는 즉시 보이지 않는 권력투쟁을 동반했다. 이 권력투쟁은 군부와 군부 바깥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작동하면서도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관계였다. 그러나 성격상 군부 바깥의 민간인들의 권력투쟁은 공개적인 반면 군 내부의 권력투쟁은 민간 정치인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 군부의 권력투쟁은 제도군부를 대표하는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하나회를 대표하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정승화가 여러 측면에서 유리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을 지방으로 전출시키려는 계획을 미리 파악한 전두환이 선제공격을 했다. 전두환은 하극상 사건인 1212쿠데타를 일으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함으로써 군부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전두환은 정승화의 체포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최규하 대통령에게 체포에 대한 재가를 받으려고 했지만, 결재절차를 요구하는 대통령의 완강한 태도로 어려움에 빠졌다.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문제이니 국방부장관의 결재를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국방부장관을 찾을 수 없었다. 한편 1212쿠데타 당시에도 쿠데타군은 경복궁 30단에 지휘부를 설치한 다음 한강을 넘어 군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쿠데타에 동원된 군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경비사령관이 본격적으로 진압에 나섰고 서울 북방의 수도기계화사단도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었다. 문제는 참모총장의 행방이 묘연한 만큼 국방부장관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쿠데타군의 입장에서 보나 진압군의 입장에서 보나 국방부장관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가족을 승용차에 태우고 한강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국방부장관 관사 부근에 있는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들리자 수상하게 여긴 국방부장관이 가족을 승용차에 태운 채 연락을 끊고 한강변을 배회한 것이다. 그 결과 진압군은 군 지휘체계가 작동하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고 쿠데타군 역시 장관의 결재를 받지 못해 계엄사령관의 체포를 합법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치상황에서도 군 지휘체계를 벗어난 쿠데타군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진압군의 지휘체계를 교란했고, 결국에는 군 내부를 장악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냈다. 대통령의 올바른 판단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장관의 그릇된 처신 때문에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이다.

 

군부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쿠데타 주역들은 짧은 서울의 봄을 거치면서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작업을 준비한 다음 517 계엄확대조치, 517쿠데타를 계기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정치인과 학생 및 재야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였다. 특히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김대중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구속했으며, 광주항쟁을 유발한 다음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다. 결국 광주항쟁을 계기로 김대중을 구속하고, 김영삼을 상도동에 연금하고, 김종필을 부패정치인으로 구속하는 등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한 신군부는 마지막으로 광주항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켰다. 그 다음 신군부는 박정희와 같은 방식으로 정치풍토쇄신특별법을 제정하여 567명에 달하는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시킨 다음 전두환을 대통령 자리에 앉힘으로써 쿠데타를 마무리했다.

 

결국 신군부의 쿠데타는 791212쿠데타에서 80517쿠데타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긴 쿠데타로 기록되고 있으며, 박정희 쿠데타와는 달리 먼저 군부권력을 장악한 다음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역순으로 진행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61년 당시에는 군부가 정치권력의 변방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던 상황인 반면 유신체제 하에서는 군부가 내부적으로 정치세력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61년에 비해서 군부가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원으로 간주되던 시기였다. 61516쿠데타 직전에는 문민통제가 실시되었던 상황인 반면 791212쿠데타 직전에는 박정희의 사망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민간에 대한 군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머지 상황은 516쿠데타 당시와 거의 동일하다. 소수의 반란군이 군 지휘체계를 무력화시켰고, 국방부장관의 업무태만이 반란 진압을 불가능하게 했으며, 반란을 진입할 수 있는 병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휘체계의 와해로 실패했으며, 마찬가지로 미국의 반대는 그다지 실질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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