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 중간보고서, 1992. 7
목 차
제1부 : 정신대문제의 현황
1. 그간의 경위
2. 우리 정부의 진상규명 노력
3. 일본정부의 진상규명 노력
4. 금후 대책
제2부 :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결과
1. 군대위안소의 설치
2. 위안부 모집
3. 수송방법
4. 배 치
5. 위안소의 관리
6. 이 동
7. 전쟁말기의 상황
8. 연합군에 의한 현지점령이후 상환
9. 결어
제3부 : 군대위안부 증언사례
제4부 : 일본정부 발견문서
제5부 : 참고자료
1. 그간의 경위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 여성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89년말부터 정신대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와 관계하여 90.6.6. 일본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모또오까 쇼지 사회당의원이 군대위안부 조사를 일본정부측에 요청했으나, 일본정부는 “군대위안부는 군국각 관계가 없고 민간업자가 한 일”이라고 답변했다.
91.11.21 전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 요시다 세이지는 북해도신문에 자신의 위안부징용관여사실을 술회했으며, 91.11.28. NHK TV의 위안부문제 특보 방영시 와타나베 일본 외무성 보도관은 “군의 관여문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조사의 실마리가 되는 법적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공적인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
91.12.6에는 전 군부대위안부 김학순씨 등 3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가도 일본 관방장관은 91.12.6의 기자회견에서 “정부관계기관이 관여했다는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 않아 대처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당시 미야자와 일분총리의 방한이 92년 1월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한․일 양국 언론에서는 정신대문제가 연일 크게 보도되어 일본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우리 국민의 감정적 문제로 비화하였다.
우리 정부는 정신대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2.7. 동경에서 개최되었던 한․일아주국장회의시 일본정부에 대해 정신대문제에 관한 철저한 진상규명 및 이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촉구한 이래 외교경로를 통하여 이 문제의 심각성과 우리의 국민 감정을 조화시키면서, 일본정부가 이 문제를 회피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직시하여 이를 바탕으로 밝은 미래의 한․일관계를 구축해 간다는 차원에서 우선 철저한 진상규명에 임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일본정부는 91.12.12. 우리 정부의 요청에 따라 내각관방주재관계부처회의에서 정부관여여부 등 관련사항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우리 국회에서도 91.12.13. 정신대문제에 대한 청원심사가 다루어져,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대표의 참고인 진술 및 전 군대위안부의 증언이 있었으며, 이와 관련한 질의 및 답변이 행해졌다.
이무렵 우리 정부는 미군, 일본, 영국, 네델란드 등 10개국 해외주재공관에 관련자료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와 관련, 주미한국대사관은 미국 국립 문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수송․관리 등에 개입한 사실을 입증하는 문서를 발견하였다. 동 문서는 인도-버마 전선의 미전시정보국 심리전팀이 버마의 미트키나에서 일본군 패주시 붙잡힌 한국인 위안부 20명과 위안소 관리자 2명을 심문하여 작성한 조서이다. 외무부는 동 문서사본을 일본측에 전달하여 조사에 참고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 중앙대 요시미 요시아끼교수(일본현대사 전공)는 자신이 과거에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에서 본 기억이 있던 위안부관련 일본군의 통달․전보․지시 전문 등을 다시 찾아냈고, 92.1.11. 동 문서의 내용 일부가 아사히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문서는 일본군이 위안소설치 위안부모집을 감독․통제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상기와 같은 증거자료가 나타남에 따라 92.1.13. 가또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하고, 일본군의 관여를 최초로 공식 인정하면서 향후 관계성청의 자료조사를 철저히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는 그간 일본정부가 정신대문제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또는 민간업자가 한 일이라고 하면서 정부의 관여를 부인 해왔던 점에 비추어, 정신대 문제의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가또 관방장관 담화
소위 종군위안부 문제에 구일본군이 관여했다고 생각됨을 나타내는 자료가 방위청에서 발견되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이 사실을 엄숙히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소위 종군위안부의 모집 및 위안소의 경영등에 구일본군이 어떠한 형태로든 관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일본정부는 종군위안부로서 필설로는 다 할수 없는 고통을 겪으신 분들에 대하여 충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기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본정부로서는 이러한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깊은 반성과 결의에 입각하여 평화국가로서의 입장을 견지함과 동시에 미래를 향해 새로운 한․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노력해 가고자 합니다.
미야자와총리 방한시 총리로부터 본건관련 표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보상문제는 재판소송이 제기되어 있으므로 사법부의 판단을 보고 대처해 나가고자 합니다.
한편, 92.1.17. 미야자와 일본총리의 방한시 개최되었던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정신대 문제 등 과거사문제에 대하여 일본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진상을 규명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응분의 조치를 성실히 취하도록 요청했으며, 이에 대해 미야자와 총리는 과거 일본의 행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반성과 사과를 한다는 뜻을 표명하고, 하루 빨리 진상을 규명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미야자와총리는 동일 오후 국회에서의 연설에서 군대위안부문제에 대하여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하였다.
※ 미야자와총리 국회연설
… 이러한 중요한 파트너쉽의 일환으로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양국간의 신뢰 관계를 확고히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나라와 귀국과의 관계에서 잊어서는 안될 것은 수천년에 걸친 교류속에서 역사상 한 시기에 우리나라가 가해자이고 귀국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은 그간 한반도의 여러분들이 우리나라의 행위에 의해 참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체험했다는 것에 대하여 여기에 다시 한번 마음으로부터 반성의 뜻과 사과의 기분을 표명합니다. 최근 소위 종군위안부문제가 거론되고 있는바, 본인은 이러한 것은 정말로 마음아픈 일로서 참으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본인은 지난 2차대전시 살았던 사람의 한 사람으로 우리 세대의 잘못이 두 번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21세기를 담당하는 다음 세대에 역사를 바르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인을 포함한 우리 세대의 책임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이런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보급하는데 노력해 왔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노력을 계속해 나갈생각입니다. 본인은 과거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리고 두 번다시 이러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경계심을 국민 특히 청소년들에게 배양시켜 나갈 결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우리 정부의 진상규명 노력
우리 정부는 금년 1.24부터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외무부 아주국장을 반장으로 하여,17개 부처 관계과장으로 구성)을 설치 그간 연 1회 정기회의 및 수시 회의를 개최하여 정신대문제에 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관련대책 등을 협의하여왔다.
우리 정부는 정신대실무대책반을 잠정적으로 금년말까지 연장 운영하여 동 문제와 관련된 저반사항을 계속 협의하기로 하고, 6월말까지의 추진현황을 7.3. 발표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우선 철저한 진상규명에 역점을 두고 일본정부에 자료조사를 요청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도 각부처내의 문서자료를 조사하였다.
외무부는 주로 2차대전시 연합군측 국가에 주재하는 해외공관과 동남아 각국 주재 해외공관에 주재국의 문서자료를 조사하도록 지시하고, 각 부처는 각각 보관하고 있는 관련 문서자료를 조사하였다.
한편, 교육부는 일제시 초․중․고등학교의 학적부를 조사하였는바, 교육부가 현재 보관되어 있는 학적부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소학교 근로정신대가 244명, 고등학교 근로정신대가 1명으로 도합 245명이었다.
또한 정부는 정신대문제사무대책반 회의에서 마련된 지침을 토대로 내무부와 대한적십자사를 통하여 92.2.25-6.25간 정신대 피해자 신고를 접수한 결과는 총 390건으로써, 이중 근로정신대는 235명, 군대위안부는 155명인데, 현재 생존하고 있는 경우는 구근로정신대가 139명, 구 위안부가 74명이었다.
이는 사안의 성격상 피해당사자들이 대부분 사망했거나 생존해 있더라도 신고를 기피하였기 때문에 신고숫자가 적게 나타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정부는 신고된 내용에 대해서는 개인의 비밀을 철저히 보호토록 할 것이며, 앞으로 정신대문제 대책마련에 참고할 예정이다.
우리 국내에서는 근로정신대와 군대위안부가 혼용되어 일반적으로 정신대로 통침되고 있으나, 근로정신대와 군대위안부는 개념을 구분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근로정신대는 일본이 태평양전쟁 수행에 따라 극심한 노동력 부족을 겪게되어 여성인력까지도 한국내 혹은 일본의 군수공장 등에 동원한 것으로써, 이와 같은 노동정신대 동원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군대위안부 조달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만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사람중 일부가 군대위안부 전환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일본정부의 진상규명 노력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정부는 정신대와 관련한 증거자료들이 나오고 양국내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하자, 91.12.12. 내각 관방 주재로 관계부처회의를 같고 이 문제와 관계한 자료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미야자와총리의 방한전 가또관방장관이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구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한데 이어 미야자와총리의 방한시 정상회담 및 국회연설에서 동힐한 취지의 입장표명이 있은후, 일본정부는 총리부 외정심의실 주관하에 외무성, 방위청, 노동성, 경찰청, 후생성, 문부성 등 6개 관계부처가 정부보관 관련문서의 발출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일본정부는 92.7.6. 가또관방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하여 담화를 발표하고, 그간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 가또 관방장관 담화요지
국적․출신지의 여부를 불문하고 종군위안부로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모든 분들에게 다시금 충심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뜻을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잘못은 결코 되풀이하지 않도록 깊은 반성과 결의에 서서 평화국가의 입장을 견지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일․한관계, 기타 아시아제국, 지역과의 관계구축을 하도록 노력해 가고자 한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서 참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괴로움과 쓰라림을 겪은 분들에 대한 기분을 어떤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각방면의 모든 의견을 들어가면서 성의를 갖고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
일본정부가 발견한 관련문서는 총 127건으로 내용은 주로 위안소 설치, 위안부 모집관계자 단속, 위안시설의 설치 및 증축, 위안소의 경영 및 감독, 위안소 위안부의 위생관리, 위안소 관계자의 신분증명서 발급 등으로 군대위안부문제에 일본정부의 관여가 있었다는 점을 공식 인정하고 있다.
※ 일본정부 조사결과 발표요지
가. 총괄
○ 정부로서는 작년 12월부터 한반도 출신의 소위 종군위안부 문제에 정부가 관여했는지 여부에 대해 관계자료가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성․청에서 관련자료의 조사를 행하였는 바, 현재까지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발표하는 바임.또한 정부로서는 금후에도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는 경우에는 이를 공표해 나갈 것임.
나. 조사 기간 : 91.12-92.6
다. 조사 기관 및 방법
○ 경찰청
― 경찰청 소관자료 조사
― 각 도․도․부․현의 본부장에 대해 조사 의뢰
○ 방위청
― 방위연구소를 비롯, 육상, 해상, 자위대, 방위대학교 등 방위청 관계 각기관에서 전쟁사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
○ 외무성
― 외교사료관 등에서 외교사료를 중심으로 조사
○ 문부성
― 각 국․공․사립대학부속도서관에 대해 조사 의뢰
― 각 도․도․부․현 교육위원회 및 사립도서관에 대해 조사 의뢰
○ 후생성
― 복원(동원체제) 관계자료 및 군인, 군속 명부를 중심으로 조사
○ 노동성
― 본성 관계부․국 및 관계기관과 지방직업안정기관에서 조사
라. 조사결과
1)각 성․청별 발견자료 건수(총127건)
○ 경찰청 : 0건
○ 방위청 : 70건
○ 외무성 : 52건
○ 문부성 : 1건
○ 후생성 : 4건
○ 노동성 : 0건
2) 분야별 발견자료 건수
○ 위안소 설치 관련자료 : 4건
○ 위안소 모집관계자 단속 관련 자료 : 4건
○ 위안시설의 설치․증축 관련자료 : 9건
○ 위안소의 경영․감독 관련자료 : 35건
○ 위안소, 위안부의 위생관리 관련자료 : 24건
○ 위안소 관계자의 신분증명서등 발급 관련자료 : 28건
○ 기타(위안소, 위안부에 관한 기술등) 34건
3) 발견자료의 주요기술내용
가) 위안소 설치
○ 당시 전선에 있어서 군점령지역내 일본군에 의한 강간등 불법 행위에 의해 반일감정이 조장되고 치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군인 개인의 행위를 엄중단속함과 동시에 신속히 위안설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통첩의 배포가 있었음.
○ 위안시설은 사기진작, 군기강유지, 범죄 및 성병예방 등에 대한 영향이 컸으므로 위안에 관한 제시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교육지도 참고자료의 송부가 군부 내부에서 이루어졌음.
나) 위안부 모집 관계자 단속
○ 군의 위신을 지키고 사회문제를 야기시키지 않도록 위안부 모집 관계자의 인선을 적절히 행하도록 하는 내용의 통첩의 배포가 군내부에서 이루어졌음.
다) 위안시설의 설치, 증축
○ 위안시설의 설치, 증축을 위해 병력을 차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명령의 통달이 있었음.
라) 위안소의 경영, 감독
○ 각부대 위안소의 이용일시 지정, 이용요금, 이용에 있어서의 주의사항을 규정한 ‘위안소규정’이 작성되었음
마) 위안소, 위안부의 위생관리
○ ‘위안소규정’에 위안소 이용시 피임기구를 사용할 것을 규정하고 위안부의 성병검사를 군의관등이 정기적으로 행하여 불건전한 위안부는 취업을 금지시키는 조치가 있었음.
바) 위안소 관계자의 신분증명서 발급
○ 위안소 개설을 위해 도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군의 증명서에 의해 도항시킬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문서의 배포가 있었음.
사) 기타
○ 업자가 내륙에서 조달한 여자가 선박으로 이송될 예정임을 통지하는 전보의 발송이 있었음.
4) 이상과 같이 종군위안부 문제에 정부의 관여가 있었다는 것이 인정되었음.
우리 정부는 일본정부의 조사결과 발표 관련하여 92.7.6.외무부 대변인 논평으로 우리 정부의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 논평에서 우리 정부는 일본정부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노력을 평가하면서 일본정부의 조사결과가 정신대문제의 전모를 밝히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바, 앞으로도 일본정부의 철저한 진상규명 노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힘과 아울러, 일본정부의 구체적이고 성의있는 조치를 촉구하였다.
※ 일본정부의 정신대문제 조사결과 발표에 즈음한 외무부 대변인 논평
일본정부는 7.6. 정신대문제와 관련한 그간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는 바, 우리는 일본정부가 정신대문제의 진상규명을 위하여 그간 총리부 주관하에 관계부처들이 성의를 갖고 관련문서를 발굴하여 조사를 해 온 노력에 대하여 이를 평가한다.
일본정부조사결과에 대해서는 앞으로 관련문서를 전달받는대로 면밀히 검토할 것이나 우선 일측의 발표내용을 검토한 바에 의하면, 일본정부의 조사결과가 정신대문제의 전모를 밝히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바, 앞으로도 일본정부의 철저한 진상규명 노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일본정부는 이번의 조사결과 발표에 즈음하여 군대위안부문제와 관련한 일본정부의 관여를 재삼 확인하면서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하고 있는 바, 우리는 이러한 취지에 비추어 앞으로 일본정부의 구체적이고 성의있는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우리 정부는 일본정부로부터 통보받게 될 자료와 우리 정부가 그간 자체적으로 조사해 온 자료를 종합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 발표할 예정이다.
4. 금후 대책
정신대문제는 크게 진상규명 및 후속조치로 대별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를 올바르게 조명한다는 차원에서 진상규명이 철저히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철저한 진상규명에 계속 중점을 두고 일본의 성의있는 조사를 계속 촉구해 갈 것이다. 특히, 이번의 일본정부 조사결과로는 정신대 문제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일본군의 위안소설치 경위, 위안소소재지숫자, 위안부 모집방법, 모집대상, 위안부의 생활여건, 위안부에 대한 보수 및 기불여부 등을 추가 조사하도록 일본정부에 요청하고 있다.
다음으로 후속조치에 대하여, 우리 정부는 앞으로 일본이 사죄의 뜻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는 성의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촉구할 것이다. 정신대 문제는 과거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가장 어두웠던 부분이라는 점에 비추어, 일본이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반성의 토대위에서, 그에 상응하는 응보의 조치를 주도적으로 취하는 것이야말로 건설적인 한.일관계의 구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정부로서도 자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함과 아울러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가면서 철저히 대처해갈 것이다.
또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어두웠던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고 밝은 미래의 양국관계를 가꾸어갈 수 있도록 일본 역사교과서에 올바르게 기술되어 각급 학교 현장에서 교육하도록 노력해 갈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진상규명 및 후속조치의 문제를 계속 협의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지난 1.24. 설치되어 당초 6월말까지 운영하기로 되어있던 정신대실무대책반을 잠정적으로 금년말까지 연장 운영하기로 하였다.
제3부 군대위안부 증언사례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우리 정부가 92. 2. 25-6. 25간 접수받은 전 군대위안부의 신고서에 증언한 내용 중 대표적인 사례만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1. 1938년 8월 왜경의 놋그릇 상납요구 거절 및 창씨개명 반대 이유로 가족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이장의 권유로 애국봉사대에 지원하면 아버지가 석방될 수 있다기에 스스로 지원하였으나 그길로 종군위안부로 끌려 갔으며, 위안장소(자카르타)로 연행되어가는 도중 광동에서 불임수술을 받았다. 1946년 3월경 미군들의 도움으로 자카르타에서 배를 타고 귀환하였다.
2. 1943년 1월 혼자 집을 보던중 낯모르는 신체건강한 남자 2명이 찾아와 볼일이 있으니 무조건 나오라며 강제로 끌고가 최초로 하차한 곳이 만주 하르빈이며 그곳에서 이동하여 용광현에서 계속 생활하였다. 도착한 첫날부터 방 1칸(약2평) 당 여자 1명씩 배치되어 1일평균 20명정도의 군인을 상대하며 평소 한국말을 하거나, 남자 받기를 거부하면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주일마다 성병검사를 실시하여 감염자는 완치시까지 치료하여 치료후 다시 같은 생활을 계속하였다.
3. 1943년 9월경 부산진역앞에서 일본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부산진역 경찰서에 대ㅎ기후 배편으로 일본 오사까로 이송되었다. 위안부생활이 곤욕스러워 탈출을 하다가 붙잡혀서 모진매를 맞았으며, 상처를 치료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하였다.
4. 1940년 9월 일본순사들이 와서 출동하지 않으면 가족 모두 찔러 죽인다고 협박하여 오사까 근방으로 연행된 후, 3일후부터 하루 평균 5~7명 군인을 접대하였다. (월 1일 신체검사일 제외)
5. 1942년 3월 처녀공출이란 명목으로 영장을 받고 일본순사한테 강제로 연행되어 끌려갔다. 여러명 창고에 가두어 두고 1명씩 불러내어 조그마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말안들으면 죽여버리겠다며 1일 3회 정도 성폭행을 강요당하였다.
6. 1938년 4월 산에서 동생과 나물을 캐던중 일본군 2명과 한국사람 1명에 의해 강제연행되었으며, 부산으로 끌려간 후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오사까에 내려서 3일경과 후 흣까이도에서 1년 살았으며 그후 다시 오사까에서 살았다. 일본 수용생활중 심한 구타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생활로 정신분열 병세가 심하여 일본군인들이 산으로 내다 버린 기억이 있다.
7. 1937년 4월 일본인한테 설탕공장이라고 해서 속아서 현지에 도착한 후 일본군 위안소임을 알았다. 남양군도 빠 우라섬에서 계속 위안부로 있었고 거기 서도 여러군데 섬으로 끌려다니기도 하였다. 포로(미군포로수용소)로 있다가 해방후 귀환하였다.
8. 1941년 2월경 일본인 여자 1명과 한국인 남자 1명의 부산공장에서 취직권유로 본인이외 약 50여명정도의 여자가 이송된 후, 일본에 강제징발되어 현지주둔 일본군부대에 체류하였다. 일본군부대에서 1일 1215명의 일본군을 상대(단 계급별 출입시간과 요금에 차등) 위안부생활 후 군부대 이동에 따라 싱가포르에 이송된 후 중국 목단강과 빈강성, 남경, 도문 만주등 부대에 배속 되어 일본에서와 같은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하였으며 일체의 영외출입은 불허 되었다. 현지에서 연령층이 높은 사람들은 반이상 사망하기도 하였다.
9. 1942년 3월 약 14세대 부산서 식모살이하던중 놀러나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임시구치소(민간인 집)에서 약 10일 정도 구치후 기차로 부산서 만주 간또성까지 온후 군부대밖에 있는(군인만 상대하는) 위안소에 넘겨져 해방시까지 생활하였다. 위안소에 약 20명정도 위안부가 있었으며, 하루 약 1520명 정도 군인을 상대하며 생활하였다.
10. 1939년 12월 집에서 군인 20여명이 총검을 들고 위협, 강제로 군용 트럭에 실려 영상포소재 창고에 있는 15명의 여자와 나주에서 15명의 여자들과 합세되어 또 다시 열차로 신의주, 만주를 거쳐 천진주둔 일본군 히노마루부대에 도착하였다. 15명씩 한조를 이루어 임시로 지은 가건물의 여러개에 나누어졌고, 가건물속에는 가마니로 칸을 만들어 한사람씩 넣어 치욕적인 생활속에서 고통을 참다못해 목을 메거나 도망을 치다 총을 맞아 죽는 여자들도 있었다.
11. 동네어귀에서 언니와 쑥을 뜯던중 일본경찰이 강제로 차에 태워서 끌려갔으며, 경찰이 군인들의 숙식 및 뒷바라지 하는 일을 하는데로 간다며, 기차로 부산에 도착하였다. 히로시마근처 군부대에서 1일 일본군인 1015명 정도를 상대로 위안부생활을 하였으며, 언니와는 잠깐 같이 위안부생활을 하기도 하였다.(연행년도 미상)
12. 1942년 11월 16세때 만주 봉천 기차여행중에 옆자리의 군인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갔다. 군병영내의 막사에 중국여성들을 포함하여 약 20명내외가 수용 되어 위안부생활을 하였다.
13. 1944년 9월 방직공장에서 야간조업중 일본군인 15명정도가 무장으로 들어와 여러분은 앞으로 일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게 될것이라고 하자 미리 눈치를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고 나머지 49명만 연행되었다. 요꼬하마와 히로시마에서 군부대 위안부로 10여년간 있으면서 1개소대 50명으로 편성하여 10개소대 500여명이 생활하였다. 하루일과생활이 군부대 생활과 똑같으며 개인의 자유가 전혀 없었다. 49명 중 혼자만이 살아남았고 일부는 병사하고 일부는 자살도 하였으며 시체를 본인이 매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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