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standing international conflicts; An Introduction to Theory and History
By Joseph S. Nye
Chapter 4
The Failure of Collective Security and World WarⅡ
제 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경험한 서구는 전쟁의 원인을 세력균형 정책이라 보았다. 세력균형 정책이 민주주의나 평화를 우선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윌슨은 국내정치처럼 유사한 법, 제도를 지니게 된다면 무력을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제적 제도를 발전시켜 국제적 차원의 민주적 절차를 가능케 하는 국제연맹을 주창했다. 특히 국제연맹은 도덕적인 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군사적 힘을 부수적으로 다루고 있다.
집단안보제도는 3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침략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공격적 전쟁도 불법화한다.
둘째, 모든 비침략국의 연합을 형성함으로써 침략을 억제한다.
셋째, 만약 그 억지가 실패하고 침략이 발생하면 모든 국가들이 침략국을 응징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집단안보가 세력균형과 유사한 점은 국가들이 강력한 연합을 형성하여 침략을 막고자 한다는 점과 억지가 실패할 경우, 힘을 사용할 용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다른 점은 3가지가 있다.
첫째, 집단안보의 초점은 국가의 능력이 초점이 아니라 국가의 호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 어느 국가가 침략국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동맹이 미리 형성되지 않는다.
셋째, 중립국이나 무임승차하는 국가가 없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체제로 고안되었다.
그러나 집단안보의 개념에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 회원국의 만장일치의 동의를 구하는 것과 모든 국가들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윌슨의 사상이자 국제연맹규약에 내재된 사상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국제법은 국내법에 우선하며 나아가 일정한 상황에서는 주권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이다.
윌슨이 집단안보를 바탕으로 한 국제연맹을 주창했지만 정작 미국은 상원이 인준을 거부함으로서 국제연맹에 가입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워싱턴부터 내려오는 미국 외교정책에서 있어서 보수적 전통인 ‘고립주의’와 관계가 깊다. 더불어 미국은 미국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쟁을 치르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이 존재한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초창기 국제연맹은 독일에게 높은 배상금을 책정함으로서 제 2차 세계대전의 씨앗을 잉태하게 만들었다. 그 후 로카르노 조약과 켈로그-브리앙 조약으로 전쟁을 불법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의 만주 침략과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은 이러한 집단안보에 도전하는 첫 신호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3가지 차원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국제관계의 구조와 체제 분석이 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가혹하게 배상금을 책정했고, 독일이 전쟁을 하게끔 유도했다. 즉 제 1차 세계대전의 뒷마무리가 완전하게 되지 않았다는 점에 문제점이 있다.
둘째, 국내적 차원의 분석이 3가지가 있다. 우선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분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음으로 경제적 붕괴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미국이 외교정책에 있어 고립주의가 참화를 불렀다.
셋째, 개인적인 차원이 있다. 히틀러의 개인적인 성향이 문제를 낳았다. 히틀러의 자만과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가 낳은 산물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역시 불가피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을 달래고 응징의 수준을 낮추었다면,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과 동맹을 맺었다면,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했다면 전쟁이 불가피한 선택만을 아니었을 것이다. 서유럽이 이렇게 전쟁을 했다면, 아시아의 다른 전쟁인 태평양 전쟁을 살펴보자. 1930년대 군부와 극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고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은 인기가 있었으며 공황으로 더욱 더 제국주의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일본이 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는가? 라는 부분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정책으로 동남아시아의 천연자원을 획득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봉쇄로 인한 고립이 두려워 전쟁을 하든, 않하든 죽는 것은 피차일반이라는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고 미국이 승리했다.
이상의 제 2차 세계대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도한 유화정책은 전쟁을 쉽게 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영국의 체임벌린이 시기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독일에게 과도한 유화정책을 썼던 것이 독일이 전쟁을 쉽게 벌일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STUDY QUESTION>
1.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정책결정자들은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 그 교훈은 양 대전 사이의 시기에 그들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무분별한 세력균형으로 파괴된 유럽에 새로운 방법의 평화정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드로 윌슨 주창한 국제연맹으로 대표되는 집단안보체제의 구 축이다. 국제법과 국제관습으로 국제평화가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집단안보의 개념은 세력균형의 정치와 어떻게 다른가? 집단안보 개념은 이상주의적인가? 그렇지 않다면, 양 대전 사이의 시기에 집단안보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작동될 수 있었겠는가?
☞ 집단안보와 세력균형의 중요한 차이점은 3가지가 있다.
첫째, 집단안보에서는 초점이 한 국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아니라 그 국가의 정책이 호전적인지에 맞추어져 있다.
둘째, 집단안보체제에서는 어느 국가가 침략국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동맹이 미리 형성되지 않는다.
셋째, 집단안보는 중립국이나 무임승차하는 국가가 없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체제로 고안되었다는 점이다.
이상주의적이다. 집단안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회원국들의 만장일치 동의가 있어야 하고 모든 나라들이 거부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비효율적 이고 늦게 진행될 소지가 있다. 덧붙여 국제법은 국내법에 우선하며 나아가 일정한 상화에서는 주권보다도 우선한다는 국제연맹규약에 내재된 사상은 각 국 가가 자국의 주권을 일부분 양도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기 때문에 모순된 개념을 갖고 있다.
3. 제 2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언제 불가피해졌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언제, 어떻게 제 2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는가?
☞ 제 2차 세계대전 역시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1920년대에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독일에 대한 응징의 강도를 줄였거나 미국이 베르사유 조약을 인준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했다면 애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상대하고 1930년대 초반에는 소련과 동맹을 맺었다고 가정한다면 독일이 쉽 게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4.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을 어느 정도까지 관련 지도자들의 성향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 국제관계의 체제와 구조에 있어서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한 뒷처리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한 요인가 가장 크고 국내적 차원으로 서구 민주주의국가들의 계 급적 대립과 이데올로기적 분쟁으로 인한 분열, 경제의 붕괴, 미국의 고립주의가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성향에서 히틀러의 개인적 특성 이 제 2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5. 오늘날의 정책결정자들이 전쟁을 피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양 대전 사이 시기의 교훈이란 어떤 것일까?
☞ 영국의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시대와 상황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무조건적 달래기는 나중에 큰 참화를 부른다는 점에서 교훈을 주고 있다.
6.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 것은 비이성적이었는가?
☞ 합리적이다. 일본은 전쟁을 하지 않으면,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고립된다는 점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천연자원에 대한 권리도 포기해 야 했기 때문에 전쟁은 합리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연대기 : 양 대전 사이의 시기
1919년 | 베르사유 평화희의 개최; 바이마르 헌법의 제정 |
1920년 | 국제연맹의 탄생 |
1921 ~ 1922년 | 해군 군비감축에 관한 워싱턴 회의 |
1922년 |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설립; 독일과 소련 간의 라팔로 조약 체결;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정권 장악 |
1923년 | 독일의 석탄 공급 불이행에 대한 대응으로 프랑스와 벨기에가 루르 지방을 점령 |
1924년 | 배상에 대한 도즈안의 채택;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제네바 조약의 체결 |
1925년 | 로카르노 회의와 조약 |
1926년 |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 |
1928년 |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체결 |
1930년 | 런던 군축 회의 |
1931년 | 일본의 만주 침공; 오스트리아의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 파산; 영국은행의 금본위체제 탈퇴 |
1932년 | 군축회의; 독일의 배상에 대한 로잔 회의 |
1933년 |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수상 취임; 독일 국회의사당의 화재; 나치 독재를 허용하는 권한부여법령 통과; 독일의 군축회의 및 국제연맹 탈퇴 |
1934년 |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 |
1935년 |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의 무장해제 조항 부인;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동맹 형성; 영국과 독일의 해군 군비에 대한 합의 성사;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호어-라발 조약 |
1936년 | 독일이 로카르노 조약을 부인하고 라인란트를 재점령; 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이탈리아의 승리; 정치적 도구로서 국제연맹의 신뢰상실; 로마-베를린 추축의 형성; 반코민테른 조약의 형성 |
1936 ~ 1939년 | 스페인 내전 |
1937년 | 일본의 난징 및 기타 중국 도시에 대한 공격 |
1938년 | 독일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격과 합병; 독일-체코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베르흐테스가덴 및 고데스베르크, 뮌헨에서 만남 |
1939년 | 체코슬로바키아의 위기;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전체 점령;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에게 보호를 약속하고 그리스와 루마니아에게도 보장함;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공격; 독-러조약; 독일의 폴란드 침공;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
1940년 | 히틀러의 프랑스 공격; 영국의 전투;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 |
1941년 | 히틀러의 소련 침공; 일본의 진주만 공습 |
죠셉 나이의 Understanding international conflicts의 Chapter 4의 마지막 장 ‘연대기 : 양 대전 사이의 시기’에서 발췌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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