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standing international conflicts; An Introduction to Theory and History
By Joseph S. Nye
Chapter 6
Intervention, Institutions, and Regional Conflicts
냉전 후 세계대전의 가능성은 줄어들었지만 국지전의 발발은 오히려 증가했고 계속될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한 강대국과 국제기구가 개입하려는 압력은 지속될 것이다. 개입을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주권국가에 국내적인 문제에 개입을 해도 좋은가? 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주권과 비개입은 무정부적 국제체제에서 질서를 보장하는 2가지 원칙이기 때문이다.
개입의 광의의 개념을 살펴보면, 다른 주권국가의 국내적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 행위를 의미한다. 연설, 방송, 경제적 원조, 군사 자문가 파견, 지원반대, 봉쇄 등 폭 넓은 행위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협의의 개념은 낮은 강제에서 높은 강제까지의 영향력 스펙트럼에서 단지 한쪽 끝을 나타낸다. 즉, 제한된 군사적 행동, 군사적 침략 등을 의미한다.
주권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결정적인 개념이었으며, 국제연맹과 유엔헌장에 의해 더 공고히 되었다. 주권은 비록 법적 의미에서는 영토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의미하지만, 현실적으로 영토 내의 정부 지배는 종종 차이가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 등은 주권의 개념을 약화시킬 수 있다. 반대로, 개입은 때로는 자치권을 증가시킬 수 있다. 빈곤한 국가의 원조나 경제적 또는 군사적으로 비자립적인 국가를 독립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입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학파들마다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현실주의자는 국제정치에서 중요한 가치는 질서와 평화이고 중요한 제도는 세력균형이다. 따라서 현실주의자에게 개입은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경우 정당화될 수도 있다.
세계주의자에게 중요한 가치는 정의이며, 중요한 국제제도는 개인들의 사회이다. 따라서 개입이 만약 정의를 진전시킨다면 정당화될 수도 있다. 선한 편으로 개입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국가 도덕주의자들에게 국제정치의 주요 가치는 국가와 국민의 자치권이다. 주요 제도는 일정한 규칙과 국제법을 가진 국가들의 사회이다. 이와 같은 법칙 중 가장 중요한 법칙은 다른 국가의 영토 주권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4가지 예외일 경우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첫 번째 예외는 1967년 이스라엘의 공격에서 나타난 선제개입이다. 적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예외는 균형을 맞추기 위한 개입이 필요할 때를 인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 예외는 대량학살의 위협을 받는 국민들을 탈출시킬 필요가 있을 경우이다.
네 번째 예외는 분리운동가들이 대표성을 증명했을 때 분리운동을 지원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러나 민족 자결의 원칙에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인종, 종교, 언어가 똑같다는 이유로 히틀러 같은 경우, 개입을 한 사례가 역사적으로 있기 때문에 민족 자결의 원칙을 가지고 개입을 논할 수 없다. 오히려 민족자결 원칙 때문에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동기, 방법, 결과로 개입을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좋은 동기만으로도 개입이 정당화되지 않는 이유는 미국이 개입한 베트남전에서 나타났다. 미국이 선한 의도로 베트남에 개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주권과 비개입은 국제법과 기구에 의해 신성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국제기구는 국내정부와 다르고 국제법은 국내법과 다르다. 국제기구는 2가지 이유에서 세계정부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없다. 첫째, 회원국의 주권은 대부분의 국제기구의 헌장에 의해 보호된다. 둘째, 국제기구의 약체성 때문에 세계정부가 될 수 없다.
유엔이 의결했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상당히 모호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구속력과 강제력이 없는 권력은 유명무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기구는 약한 공동체 의식과 의무감 또는 권위의 수용에서 기인한 자제심이나 복종의식이 약하다. 그래도 국제법과 기구는 정치현실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예측가능성과 정통성에 있다. 예측가능성에 있어서는 사적충돌이 있을 경우, 거래가 번성하고 거래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분쟁을 질서있게 처리하기 위해 필요하다. 정통성에 있어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정치적 사실이고, 따라서 정통성은 권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 사건으로 국제법과 기구의 문제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이 사건에서 이익에 관한 주요 분쟁에서 국제법이 국가들을 제재하지는 못할지라도, 정책의 흐름이 형성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스라엘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엔의 결의안이 중동전쟁 기간 동안 점령한 영토를 지배하는 정통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낳았다. 국가의 이익을 바탕으로 한 전쟁이나 분쟁에 해당된다.
생존이라는 결정적인 문제가 걸렸을 때, 국가는 가장 효과적인 형태의 권력인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다.
현재의 유엔은 국제연맹의 단점을 수정해서 만든 국제기구이다. 자기방어 또는 집단안보를 위한 경우를 제외한 위협이나 무력 사용은 불법화되었다. 무력은 그 어떤 사용도 자기방어, 집단안보, 또는 집단자기 안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냉전시기 동안 유엔의 집단안보는 작동하지 않았다.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분열 속에서 무엇이 정당한 무력의 사용인지에 대한 동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침략을 정의하는 것부터 커다란 문제들을 도출시켰다. 유엔의 입장에서는 침략행위가 발생한 시기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를 선언하는 때이다.
집단안보는 어려운 점이 있다. 유엔 예방외교라는 개념이다. 유엔은 집단안보의 핵심인 침략자를 밝히고 처벌하는 일보다 독자적 군대를 소집하여 전쟁중인 국가들간에 투입시켰다. 집단안보에서 만약 한 국가가 선을 넘으면 모든 다른 국가들이 그 국가를 상대로 연합해야 하고 그 국가를 물리쳐야 한다. 탈냉전 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유엔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유엔이 부활했다는 점이다. 3가지 살펴보면, 첫째, 이라크는 너무나 명백한 침략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둘째, 만약 유엔의 집단안보가 명밷한 경우조차 실패한다면 집단안보는 탈냉전 세계에서 질서를 위한 원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유엔의 작은 국가들은 대부분 약소국이었고 식민지 통치 이후 논란의 여지가 많은 국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이 원활하게 작동되게 하는 3가지 중요한 조건들이 있다. 첫째, 유엔체제는 명백한 침략이 있을 경우 제일 잘 작동한다. 둘째, 집단안보는 거부권이 없는 경우에는 작동하겠지만, 미국과 러시아 또는 미국과 중국의 목적이 다시 엇갈리면 집단안보 또한 다시 무력화될 것이다. 셋째, 집단안보는 회원국이 자원을 제공할 경우에는 작동하지만, 만약 군사적 강국이 자원을 제공하지 않을 경우 집단안보가 작동하리라고 상상하기가 힘들다.
중동 분쟁들은 현실주의적 시각이 잘 맞아 떨어지고 국제법과 기구가 지대한 역할을 한 곳이다. 민족주의, 종교, 세력균형 등 다양한 요건이 전쟁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동에서 민족주의는 수단적으로 사용되는 정치적 용어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정반대의 2가지 개념을 정당화해왔다. 근대 중동에서는 범아랍주의가 등장했다. 외부 세력의 지배에 반대하는 초창기의 지도자들은 모든 식민지화된 사회의 시민들이 외부의 식민통치자들로부터 똑같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범아랍 민족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 중동분쟁에서 중요한 것은 아랍-이스라엘 분쟁이다. 사건의 발단은 영토문제에 있다. 원래 이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은 유태인의 공을 인정해서 영국에서 발포어 선언을 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을 지원할 수 있었다. 전후 이 문제가 난국으로 치닫자 영국은 이를 유엔에 넘겼다. 유엔은 분할을 선택했고 이를 아랍과 이스라엘에게 통보했다. 이스라엘은 이 제안에 대해 수용을 했지만 아랍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팔레스타인 지방을 둘러싼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기원이다. 더불어 수에즈 운하 사건까지 겹쳐 몇 차에 이르는 중동전쟁을 경험해야 했다. 그 뒤 최근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분쟁의 새로운 양상을 맞게 되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원인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황폐해진 경제에 있다. 쿠웨이트를 차지함으로써 이라크의 경제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두 번째 원인은 이라크의 안보에 있었다. 후세인 미국이 이라크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엔의 개입으로 이 전쟁은 종결을 보았지만 앞으로도 중동에서의 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미연적인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STUDY QUESTION>
1. 개입은 언제 정당화되는가? 민족자결은 항상 정당화되는가?
☞ 전쟁 또는 군사적 개입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4가지 상황이 있다.
첫째, 1967년 이스라엘의 공격에서 나타난 선제개입이다.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상대가 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균형을 맞추기 위한 개입이 있다.
셋째, 대량학살의 위협을 받는 국민들을 탈출시킬 필요가 있을 경우이다.
넷째, 분리운동가들이 대표성을 증명했을 때 분리운동을 지원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 네 가지 경우에만 개입이 효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민족자결은 항상 정당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족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민족 을 인종, 종교, 영토에 따라 나누었을 경우, 이 때문에 개입한다면, 세계질서는 난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국제법과 도덕에는 차이가 있는가? 국제법은 얼마나 중요한가?
☞ 도덕은 ‘what ought to be'이다. 그러나 행위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율적이다. 이에 반해 국제법은 나라마다 해석이 다르고 각 국가간에 이익 을 표출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에 어렵다. 국내법처럼 강력한 구속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종의식이 약하다. 이런 면에서는 도덕과 국제법은 동질성이 있다. 그러나 국제법이 지니는 국가의 예측가능성과 정통성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중요하다. 사적충돌이 발생할 경우, 예측가능성은 거래가 번성 하고 거래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분쟁을 질서있게 처리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정치적 사실이고 따라서 정통성은 권력의 원천이기 때문에 국제법은 중요하다.
3. 유엔은 국제연맹과 어떻게 다른가?
☞ 국제연맹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침략자를 억지하고 처벌하기 위한 국가들의 연합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유엔은 자기방어 또는 집단안보를 위 한 경우를 제외한 위협이나 무력 사용은 불법화되었다. 19세기의 세력균형체제와는 달리 유엔헌장에 서명한 국가들에게는 공격용 무력의 사용은 불벌이 되 었다. 무력의 그 어떤 사용도 자기방어, 집단자기안보, 또는 집단안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4. 이스라엘이 현재 가지고 있는 영토에 대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주장 내용은 무엇인가? 어느 그룹이 더 설득력 있는가 아니면 둘다 똑같이 설득력 있는가?
☞ 이스라엘이 현재 가지고 있는 영토에 대한 이스라엘의 생각은 성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2000년 전에 이스라엘의 땅이기 때문에 전후 처리과 정에서 이스라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빼앗기 전까지 팔레스타인의 영토임을 주장해서 이스라엘이 현재 가 지고 있는 영토가 팔레스타인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 2개의 주장 중에 팔레스타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성서적 지식을 바탕으로 2000년 전의 내용을 근거로 영토임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불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이스라엘이 초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이 포기한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엔의 관리 소홀과 이스라엘의 주장이 결합되 오늘날과 같은 분쟁의 요소를 항상 포함하고 있다.
5.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계획은 무엇이었는가? 아랍은 왜 이 계획을 거부했는가?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게 팔레스타인 지방을 분할해서 나눠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계획안에 찬성했지만, 아랍은 반대를 표시했다. 그 이 유는 회교를 중심으로 한 아랍에 기독교의 유태인이 들어오는 종교적인 문제와 원래 아랍의 땅이었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넘겨줄 수 있으냐는 영토적 문 제가 결합된 것이다.
6. 1956년, 1967년, 1973년, 1982년에 있었던 중동전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그 전쟁들은 필연적이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언제 그리고 왜 필연적인 것으로 되었 는가?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또 다른 전쟁은 필연적인가?
☞ 4번 전쟁의 원인은 영토문제였다. 수에즈 운하에 관련된 전쟁이었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시킨 것과 운하를 교통하지 못하 게 한 정책이 발단이 되었다. 전쟁의 필연적이었다. 무역을 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했는데 나세르가 이를 금지하자 결국은 전쟁의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랍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계속 진행되어 나갈 것이 다.
7. 1967년 전쟁은 아랍-이스라엘 간 분쟁의 현 양상을 초래했다. 그 전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유명한 안전보장이사회의 제 242호 결의안이란 무엇인가?
☞ 이 전쟁에 그후 영토문제의 골격을 결정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다. 나세르는 유엔의 평화유지군을 철수시키라고 주장하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이 스라엘이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 시점에 2 강대국들이 정전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개입을 했다. 그리고 유엔은 이스라엘에 평화와 안정을 주 는 대신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내용의 제 242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제 242호가 모호하게 작성되어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 어는 범위인지에 대 한 부분에 모호함을 남겼다.
8. 전후에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1973년에 전쟁을 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평가하라. 1956년 나세르의 성공과 1973년 사다트의 성공에서 어떤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 굳이 1973년에 전쟁을 치러 이겨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납득할 수 없다. 특히 이스라엘을 상대로 이길 수 없었음을 알고 전쟁을 했다는 점은 내부동요나 범 아랍와 관계가 있는 것이지 전쟁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이 납득할 수 없다. 나세르의 성공과 사다트의 성공사이에는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슈퍼 파워들은 전쟁을 확대하기 보다는 전쟁에 개입을 하지 않음으로써 확대를 막았다는 점이 나세르와 사다트의 성공을 가져왔다라고 볼 수 있다.
9. 중동 지역에서 유엔평화유지군의 작전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평화유지군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 다소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전쟁의 확대를 이끌지 않았다는 점은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평화유지군의 활동이 제한적일지라도 유용하기 때문이 다. 유엔은 나미비아의 탈식민지화, 엘살바도르에서의 인권감시, 니카라와 선거, 캄보디아에서의 행정 등 무수히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10. 강대국과 유엔은 미래의 국지적 분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 개입의 상황과 동기, 과정, 방법들을 면밀하게 조사한 다음, 개입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국제분쟁에 해결사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11. 중동분쟁의 이해에 현실주의, 자유주의, 구성주의는 각각 어떤 도움을 주는가?
☞ 현실주의적인 시각이 중동 분쟁에서는 잘 적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중동지역의 세력균형과 안보, 권력을 추구한다는 점이 현실주의적인 시각을 잘 적용시 킬 수 있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연대기 : 아랍-이스라엘 분쟁
1897년 | 허즐의‘유태국가’출판; 최초의 세계 시오니스트 회의 개최 |
1915년 | 영국이 독립 아랍 국가를 인정하는 대신 아랍 국가들이 터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맥마흔-샤리프 후세인 합의 |
1916년 | 중동에서 영국-프랑스의 영향권을 비밀리에 합의한 사이키즈-피콧 합의 |
1917년 | 영국정부가 ‘팔레스타인에 현재 거주하는 비유태공동체들의 인권과 종교에 관한 권리에 피해를 끼치는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을 것을 명백히 이해한다는 전제에서.... 유태민족의 조국을 팔레스타인에 창설하는 것’을 찬성한다는 발포어 선언 |
1922년 | 국제연맹이 영국에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권 부여 |
1936년 | 유태인의 주장에 반대하며 모든 아랍인들을 통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랍고등위원회 창설 |
1937년 | 영국에 통치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반란; 필 위원회 보고서가 팔레스타인을 아랍, 이스라엘, 영국 통치지역의 세 국가로 분할할 것을 제안함; 세계 시오니스트 회의는 이 제안을 수용하고 범아랍 회의는 거부함 |
1939년 | 영국백서는 10년 안에 팔레스타인을 독립시킬 것을 요구함 |
1945년 | 이집트,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이 아랍연맹을 창설함 |
1947년 |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분쟁을 유엔에 위탁함; 유엔 총회는 예루살렘을 유엔의 신탁통치하에 두고 팔레스타인을 유태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안을 투표에 붙임; 유태인들은 유엔의 분할계획에 찬성한 반면 아랍은 거부함 |
1948년 | 팔레스타인에서 아랍과 유태인들의 분쟁; 영국의 위임통치 종결; 데이비드 벤-구리온 휘하의 유태임시정부가 이스라엘 국가를 선언함; 미국과 소련은 이스라엘을 인정함 |
1948~1949년 | 이스라엘과 아랍연맹 간의 전쟁 |
1952년 | 이집트에서 가말 압둘 나세르 주도하의 자유장교 혁명 발발 |
1955년 | 소련과 이집트의 무기협상 타결; 영국,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을 회원으로 한 바그다드 조약기구 창설 |
1956년 | 수에즈 위기; 이스라엘 군대의 시나이 반도 침공; 영국과 프랑스 폭격과 함께 낙하산 부대를 수에즈 운하 지역에 상륙시킴 |
1957년 | 아이젠하워 독트린; 중동에서 공산주의의 침략이 있을 경우 미국이 개입하는 데 대한 의회의 수권 |
1958년 | 이라크에서의 반군주제 반란; 레바논과 요르단위 위기; 미국 해병대의 베이루트 상륙 |
1964년 |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창설 |
1967년 | 6일 전쟁;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 가자 기구, 웨스트 뱅크, 골란 고원을 점령; 협상에 의한 영구적인 국경 내의 평화보장 대신 이스라엘이 점령중인 아랍 영토에서 철수를 요구한, 유엔의 제 242호 결의안 채택; 팔레스타인인들의 요구는‘난민’문제로만 간주됨 |
1969년 | 소모전 |
1970년 | 요르단의‘검은 9월’;요르단 군대가 팔레스타인 특공대를 요르단으로부터 축출함; 나세르의 사망; 사다트가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 |
1973년 | 1973년 10월/욤 키퍼 전쟁;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기습공격을 감행 |
1973~74년 | 이스라엘과 이집트/시리아 간의 휴전조약 |
1975년 | 수에즈 운하의 재개방을 허용하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시나이 협약 |
1977년 | 이집트의 사다트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아랍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 |
1978년 | 카터, 베긴, 사다트 간의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
1979년 | 이란 혁명의 절정; 샤의 망명과 새로운 이란의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귀국; 워싱턴에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의 체결; 이란인들의 미국대사관 점령과 미대사관 직원들의 억류;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
1980년 | 카터 독드린; 미국이 페르시아 만에서 소련의 침략에 대항하여 무력을 사용할 것임을 천명; 이라크군이 이란 영토를 침공; 이란-이라크 전쟁의 시작; 이라크의 이란 침공 |
1981년 | 카이로에서 사다트의 피살 |
1982년 |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 |
1983년 |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베이루트 도착; 미국 대사관과 해병대 병영에 대한 공격 |
1987년 | 가자 지구와 웨스트 뱅크에서 팔레스타인 반란 시작 |
1988년 |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웨스트 뱅크에 대한 요르단의 주권을 포기; PLO가 웨스트 뱅크와 가자에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선언 |
1990년 |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 |
1991년 | 쿠웨이트의 이라크의 축출 |
1991~1992년 | 마드리드와 워싱턴에서의 아랍-이스라엘 평화회담 |
1993년 | 이스라엘과 PLO 의 오슬로 회담과 ‘원칙선언’ |
1994년 | 워싱턴에서 요르단-이스라엘의 평화조약의 체결; 팔레스타인의 가자와 제리고 지배에 대한 PLO-이스라엘 합의 |
1995년 | 텔아비브에서 라빈의 피살 |
1996년 | 이스라엘 도시에 대한 폭탄테러로 라빈의 노동당 후계자인 페레즈 지지가 떨어지자 리쿠드당 지도자인 네탄야후가 총리에 당선됨 |
1997년 | 이스라엘이 웨스트 뱅크의 도시인 헤브론의 80%를 팔레스타인에게 양도함 |
1998년 | 웨스트 뱅크의 13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가자에 있는 팔레스타인 국회에서 연설 |
1999년 | 요르단 후세인 국왕 사망; 노동당 당수인 바라크가 이스라엘의 총리로 당선됨 |
죠셉 나이의 Understanding international conflicts의 Chapter 6의 마지막 장 ‘연대기: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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